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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ㅣ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평점 :
어릴 때부터 열심히 책을 읽은 소녀가 아니었던 이유로 당연히 세계명작문학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제목은 알고 있고 세계적인 문호들의 이름정도는 꿰고 있으며 영화나 연극, 만화 같은 다른 분야로 각색하여 발표를 하면 나름 보긴 했으니 어디서라도 아는 척(!)은 하면서 살아왔겠다. 그럼에도 모르는 세계명작은 부지기수이고 이 나이에 그것들을 다시 읽자니 시간 낭비이고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연극 공연이 아니었으면 이 책도 그저 내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책 중에 한 권의 책일 뿐일 찰나에 이 책 『리어왕』을 읽었다.
그동안 셰익스피어는 희곡이라는 이유로 내 눈길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대화체로만 되어 있는, 주변의 상황이 전혀 상상되지 않아 안 그래도 상상력 부족한 나를 더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글들을 한두 장 읽으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었다. 그런고로, 잘됐다! 누군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물어본다면 '셰익스피어는 읽고 싶었으나 희곡이라서…' 라며 엉뚱한 핑계를 대고 피하면 되겠구나 싶어 여태껏 그렇게 해왔는데, 작년에 번역가의 이름을 보고『로미오와 줄리엣』을 읽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희곡인데, 대화체뿐인데 왜, 재미가 있는 거지?
그 후로 셰익스피어를 다 찾아 읽었다. 라고 한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고 다만 희곡에 대한 선입견이 살짝 사라져서 읽을 기회가 생기면 다시 읽어봐야겠다. 라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그럼, 한번 읽어볼래? 하며 셰익스피어 전집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얼씨구나! 하고 이 책들을 읽었을까? 전혀 아니다. 처음엔 얇은 두께에 관심이 갔었다. 머리 식힐 때 읽으면 얇아서 좋겠구나! 그 뿐이었다. 며칠 지나서는 시인 김정환이 번역을 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보았다. 그래도 뭐, 다른 재미있는 책이 얼마나 많은데… 다시 제자리로! 또 며칠이 지나자 연극 볼 기회가 있는데, 책도 읽고 연극도 보고…. 어, 정말?
그리하여 그 욕심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정말 한심한 처사이지만 어쨌든 이 책을 읽겠다고 시도한 자세! 오십 프로는 성공이다. 라고 자아자찬!^^ 하! 근데, 근데 말이다. 심드렁하게 연극이나 보고 대충 읽었다고 할 요량으로 책을 펼쳤는데 흥미가 당기더란 말씀. 그동안 나의 독서 내공이 셰익스피어가 재미있다고 할 만큼 늘었구나! 혼자 대견해했더랬다.
각설하고,
시인 김정환이 번역해서일까? 별다른 지문 없이도 시처럼 읽힌다. 큰딸 고네릴이 리어를 사랑한다며 읊어대는 사탕발림,
시력보다, 움직이는 공간보다, 그리고 자유보다 더 소중하옵니다.
가치를 잴 수 있는 것, 비싸거나 희귀한 것보다 더,
목숨 바로 그것, 게다가 우아하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명예로운 목숨 못지않게,
어린아이가 사랑했던 만큼 많이, 혹은 아버지가 발견한 만큼 많이,
언어를 빈약하게 만드는, 그리고 말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랑,
온갖 비교를 능가할 만큼 폐하를 사랑합니다.
또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소화하여 리듬 있는 번역을 보여주기도 한다. 켄트가 오스왈드에게 퍼붓는 조롱 섞인 말,
악한. 악당. 고기 부스러기를 먹는 놈. 천하고, 오만하고, 얄팍하고, 거지 같고, 옷 세 벌짜리, 백 파운드짜리, 더러운, 울양말짜리 악한 겁쟁이, 툭하면 송사나 벌이는 악한. 부모 없는, 거울만 쳐다보는, 굽신굽신대는, 꾀까다로운 악당. 거시기 두 쪽밖에 없는 노예. 주인 말이면 뚜쟁이 짓도 할 놈. 그리고 기껏해야 악한. 거지, 겁쟁이, 포주, 그리고 잡종 암캐의 자식이자 상속자를 합친 놈. 실컷 두들겨 패서 깽깽깽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 놈, 만일 네가 이런 칭호의 한 음절이라도 부인한다면 말야.
이 문장은 나에게 꽤 큰 웃음을 주었다. 어디선가 읽은 듯한 문체하며 오스월드를 빗대어 퍼붓는 조롱들이 어찌나 유쾌하게(!) 여겨지던지…
그리고 세계적인 문호라고 할 만한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언어. 폭풍우가 치는 밤, 왕의 안부를 묻는 켄트에게 신사가 전하는 말,
성마른 자연의 원소들과 싸우고 계시오.
바람에게 대지를 바다 속으로 처박으라.
아니면 바닷물을 일으켜 본토를 덮쳐,
모든 것을 바꾸거나 쓸어 버리라 명하시고 있소. 백발을 쥐어 뜯고.
뜯긴 머리칼은, 맹목의 분노에 사로잡힌 격렬한 일진광풍이
노여워 움켜쥐고 허공에 흩어버리죠.
이리저리 달겨드는 바람과 비를.
이 밤, 새끼들한테 젖을 다 빨린 곰조차 동굴을 나오지 않을,
사자와 배 홀쭉한 늑대조차 털을 말리는 이 밤에,
모자도 없이 그는 내달리고 있어요.
이렇듯 그동안 셰익스피어가 숱하게 번역되어 나왔지만 이 책이 이렇게 끌리는 것은 "원작이 가진 다층의 의미와 언어의 마술적 유희를 가장 근사하게 재현해" 낸 번역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리어왕』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책도 인연이 있구나 하는 점이다. 여태껏 『리어왕』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이제야 이 책을 접하고선 공감하고 감탄하는 걸 보면 말이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나 알고 보면 변한 게 그다지 없다. 여전히 재산을 움켜쥐고 있는 부모는 대접을 받고 살며 무일푼인 부모는 하루하루 자식의 눈치를 보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언정 자식에겐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 그게 부모의 마음 아닐까? 그 아무리 리어왕의 교훈을 머릿속에 새겨 넣는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