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황현진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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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제 무속인의 집에 짝퉁 가방을 숨겨 놓고 팔았다는 뉴스를 들었다. 때마침 나는 짝퉁, 이태원, 삐끼... 와 같은, 그 뉴스와 딱 맞는 책을 읽었다. 일단 뉴스를 옮겨보자면, 

"이들이 지난해 4월부터 올 7월까지 만든 가방은 2만점, 시가로 환산하면 420억원 어치다. 특히 이 짝퉁 가방은 진품과 구별이 어려운 특A급 제품으로 개당 20만원동대문과 이태원 등지에서 거래됐다." _서울경제 

특A급, 진품과 구별이 거의 없단다. 그 이야기가 등장하는 소설, 바로 2011년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은 황현진 작가의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이다.  

성장소설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성장소설이라기보다는 미성년도 성년도 아닌 그 기로에 서 있는 '태만생'이라는 용화공고 삼학년 소년의 일주일 남짓 간의 일상이다. 

고3인 아들을 홀로 두고 갑자기 아메리카로 이민을 가겠다는 부모,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학을 핑계로 홀로 남은 태만생은 부모가 떠나자 부모가 마련해주고 간 옥탑방으로 이사를 온다. 그리고 공고생의 잇점을 활용하여 친구 태화 아버지의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고 태화가 삐끼로 일하는 이태원 짝퉁 가방 가게에서 알바를 시작한다. 이태원은 어떤 곳이던가? 온갖 짝퉁이 판을 치는 곳. 유명 브랜드의 짝퉁이 즐비하고, 진정한(!)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짝퉁 여자가 돌아다니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일을 하는 며칠 동안 태만생이 보고 경험한 것들은 과연 진짜였을까? 어쩌면 "진품일 리 없는 삶?!"일지도.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느 책답게 태만생 역시 씩씩하다. 크지 않은 키에 잘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선 개성 강한 캐릭터이다. 황현진 작가는 그걸 제대로 간파하고 공고생의 자격으로 위장 취업을 하고 짝퉁 알바를 하는 고 3학년의 삶을 흥미롭게 그려냈다.  

톡톡 튀는 문체, 삶의 이면에서 보여지는 소년다운 재치와 위트. 과장도 거짓도 없이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른인 척, 살아가는 소년. 하지만 그는 아직 어른이기엔 서투른 존재이다. 그럼에도 경험하지 않았던 혼란스러웠던 일주일 남짓의 생활은 태만생을 미성년인 소년에서 성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다만 그 짧은 삶이 과연, 진짜일지, 가짜일지 알 수 없을 뿐. 

다소 급작스런 결말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독자에게 던진 열린 결말이 많은 상상을 일으키게 해준다. 재치 있는 문체가 읽는 내내 유쾌했고 날것에 가까운 단어가 허걱, 괜스리 참한(!) 독자 얼굴 빨개지게 만들기도 했지만 즐거웠다(!).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우리 인생이 다 진품처럼 살고자 하지만 결국은 짝퉁처럼 살아가고 있는 삶이 아닌가 싶었다. '나'라는 개성을 가진 인물로서의 성장보다는 나보다 나은 누군가를 닮으려고 하는 삶, 그 누군가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죽어라 일을 하며 사는, 비슷하지만 다른 삶. 진품이 되고자 악을 쓰며 살아가는, 잘하면 A급 짝퉁, 모자라면 겨우 B급 짝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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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검색을 하다가 탑에 떠 있는 글을 읽었다. 30대의 여자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단다. 우울증에 걸리면 스스로 빠져 나오지 않으면 누구도 도와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무심히 클릭을 했는데,  그녀는, 20여년 전 큰 언니가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언니 세 명이 연이어 자살로 생을 마감해 심한 우울증을 앓아왔단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책이 있었다. 《처녀들, 자살하다》 

2007년 출간한 이 책은 《미들 섹스》로 2003년 퓰리처 상을 받은 미국 작가 제프리 유제니다스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1993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 도서관협회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단다. 또 동명의 이름으로 1999년 소피아 코풀라(대부의 감독 프란시스 코풀라의 딸이란다)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근데, 이 소설이 저 사건과 무슨 관계냐고?  

《처녀들, 자살하다》라는 꽤나 선정적인(!) 제목처럼 한 집안의 자매들이 줄줄이 자살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집안의 막내딸 서실리아가 목욕을 하다가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면서 시작한다. 그 시도는 그 집 자매들이 목욕하는 광경을 훔쳐보러 왔던 소년에게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면서 실패로 끝나는 듯 했으나 서실리아는 다시 한 번 자기 방 창문에서 몸을 던져 결국 세상을 떠난다.  

서실리아는 손목을 그은 후 응급처치를 받던 병원에서 아몬슨 박사가 "아가, 여기서 뭐 하는 게냐? 너는 아직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알 만한 나이도 아니잖니."라고 하는 말에 이런 말을 한다. "분명한 건요. 선생님은 열세 살짜리 소녀가 돼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라고. 이 장면을 읽고 나면 도대체 왜, 이제 겨우 열세 살인 아이가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지 궁금해지고 만다. 하지만 아무도 무엇때문이라고 단정하지 못한다. 그저 나름대로 추측할 뿐이다.  

다시 이야기는 처녀들이 자살 한지 20여 년이 지난 후다. 그 동네에 살았던 소년들이 이제는 중년이 되었고 그때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찰자의 입장으로 그녀들이 왜!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 겨우 10대의 어린 소년들이었고 제한적인 정보만을 습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당시 어른들의 속단에 비해 좀 더 진정성에 가까운 소년들의 생각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질 뿐이다. 

아무튼, 소설 속 자매들이 왜 자살을 했는지, 그녀들도 우울증이었는지는 직접 읽어보길 바라며, 우울증에 관해서는 늘 김진규 작가가 생각나는데 《달을 먹다》를 펴내고 한 작가 인터뷰에서 그녀가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게 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울증은 벗어나기 힘들긴 하지만도 노력만 하면 빠져나올 수도 있는 것.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그걸 알고 노력하면 오늘 뉴스에서의 그런 일들은 안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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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21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녀들, 자살하다] - 요 책 심히 땡기는데요? 내일 도서관 가서 당장 빌려야겠어요. 쌓인 책이 산더미 같지만 뭐... 다다익선이지요 ㅎㅎ '책이 정말 좋아요'라는 소개글이 정말 마음에 드네요. 책 좋아하는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것도 참, 좋아요.
지나가다 살짝 들렸다 갑니다 :)

readersu 2011-09-22 10:04   좋아요 0 | URL
저 아는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아니 책이 얼마나 좋으면 프로필 소개에 책이 좋다고 두 번씩이나 써놓느냐고^^;;; 아마도 책을 많이 읽는 분들은 두 번이 아니라 그 배배배는 더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겁니다.

방문도, 댓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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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마리 개미
장영권 옮김, 주잉춘 그림, 저우쭝웨이 글 / 펜타그램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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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 마리 개미》를 보고 나서 우리에게 남는 인상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인 여백일 것이다. 이 책의 여백들이 가볍지 않고 깊이 있게 살아나는 것은 사진적 이미지가 주는 사실성과의 대조를 통하여 얻어진 것임은 물론이다. 이 여백은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고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이 여백들이 배경을 지우고 나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흰 여백으로 표현되기 이전 배경들은, 사실은 우리 인간들의 세계다. 개미가 본다면 한없이 크고 넓기만 한 인간의 세상이다. 총 천연색의 세속적인 인간 세상. 그런데 그것은 표백되어 여백으로 책에 등장한다. 이 책의 여백의 의미는 이 표백 작용을 통하여 발생하고 우리에게 전해진다. 우리가 《나는 한 마리 개미》에서 느끼는 명상적 의미는 이 책의 표백된 여백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명상적 의미는 작은 것을 통하여 큰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이리라. _북디자이너 정병규  
   

놀러온 모 출판사 편집자 님께서 책더미에 쌓인 책을 이리저리 훑어 보더니 불쑥 묻는다. "이 책 읽어봤어요?" 그 더미에 있다면 당연히 안 읽어본 책이다. 내 관심 밖이라는 소리. 근데 좋은 책인 것 같다며 건네주신다. 사실 슬쩍 보긴 했다. 제목처럼 개미 한 마리를 설정으로 사진을 찍어 짧은 글을 실은 책. 우리나라에도 그런 종류의 책은 많았으니까, 아마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것이다. 근데 이렇게 한번 보라며 다시 건네주니 호기심이 동했다. 그것도 책을 아는 분이 추천을 해주시니. 

표지에 제목이 없다. 세네카(책꽃이에 책을 꼽았을때 보이는 부분:책등)에만 제목이 적혀 있고 위에 보다시피 하얗다. 그 하얀 곳에 보이는 검은 점 몇 개, 그게 개미다. 실물엔 노란색 띠지를 둘러 그럭저럭 봐줄 만 한데 저렇게 띠지도 없이 올려놓으니 도대체 뭔 책인지 알 수가 없다. 왜 이렇게 디자인을 한 걸까? 

바로 북디자이너 정병규 님이 말하는 것처럼 '여백'의 미다. 

추석 연휴에 박대성 화가에 관한 프로그램을 봤다. 수묵화를 그리는 그가 그린 설경은 독특하다. 칠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둔 것이다. 그게 바로 '여백'이다. 그림이라면 칠을 해야 한다는 원칙이지만 그는 하지 않았단다.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마 수묵화라는 특성상 가능했을 것 같다. 

이 책의 여백과 박대성 화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 텅 빈 공간이 주는 울림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란색 띠지에 이런 글이 '개미만한' 크기로 적혀있다. 

"여기 이 개미들을 먼지 취급하듯이 아무렇게나 훅 불어 버리지는 마세요. 그들과 우리는 똑같이 소중한 생명이랍니다. 그들에게 호기심이 생긴다면 이 책을 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이 책은 '2007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 되었다.
2008년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특별상(유네스코)'을 받았다. 

작고 보잘것없는 한 마리 개미의 좌충우돌 분투기. 인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원제가 "개미의 잠꼬대"라고 하는데, 어쩜 그 제목이 딱 맞는 것 같다. "눈부신 햇살 아래 덩그러니 놓인 한 마리 개미는 외롭고 위태롭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막막하다. 시행착오를 반복한다."는. 개미나 인간이나... '개미족'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걸까? 짧은 문장에서 공감가는 글들이 많았다. 아쉬운 것은 그 글이 너무 구석에 있고 글자가 작아 눈에 잘 띄지 않다는 점...그래서 놓쳤다는 핑계아닌 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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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잘 모르지만 좋아하는 지라, 맘에 드는 시집이 나타나면 잘 사서 읽는 편인데 그동안 고전 한시는 읽어볼 생각을 안 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매창시집』을 읽게 되고 또 지난 번에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를 읽으며 만난 이규보의 시들에 반해 시집을 샀다. 이규보에 관해선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어쨌든 그의 시를 읽게 된 것이 중요. 내가 구입한 책은『욕심을 잊으면 새들의 친구가 되네』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규보는, 

스물네 살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개성 북쪽 근방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한동안 지내게 된다. 그는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고 자유분방하게 노니는 습성 탓에, 과거에 급제한 후에도 벼슬아치들에게 밉보여 이렇다 할 자리를 얻지 못하고 신산(辛酸)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불우한 처지에 아버지까지 잃게 된 그에게 천마산의 아름다운 자연은 큰 정신적 위안을 주었던 것 같다. 이규보는 천마산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느끼는 충만함, 마음의 평온에 대해 여러 차례 읊었다.
또한 그가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를 스스로 지은 것도 이 무렵이다. 이 호는 무심히 천마산 산등성이의 구름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뭉게뭉게 피어나 한가롭게 떠다니고, 산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비를 내려 메마른 초목을 살리며, 변함없이 순수한 빛깔을 지닌' 흰 구름이 좋아 이런 호를 붙이게 되었다고 「백운거사 어록」(白雲居士語錄)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 '흰 구름'이야말로 자유롭고 거침없는 상상력과 타자(他者)에 대한 꾸밈없는 연민을 지닌 이규보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형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일흔넷이 되던 해 가을 '이제는 눈이 아파서 더는 시를 쓸 수 없다'고 고백하는 시를 남긴 후 며칠 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았기에 남긴 시가 많단다. 또한 그 세월만큼 구현하는 작품 속 세계관은 다채롭다고. 

그의 시를 읽으며 내가 왜 이규보에게 반했나 했더니 그의 호처럼 여유로운 마음과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타자를 대할 때의 따듯한 심성과 호탕함 그리고 편역한 김하라 님의 말처럼 "진리를 드러내되 대상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이며, 갈등과 분란을 낳지 않으면서 진실을 길어낼 수 있는 것" 을 나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며 훌륭한 시인"이라고 일컫는 이규보에게 쏙 빠져든 것.  

감성적인 시들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할 만한 그의 시 몇 편을 올려보면,

이규보가 술자리에서 쓴 시라고 하는 「오늘이 가면」"내 평생에 슬픈 일은/오늘이 흘러 어제가 되는 것/어제가 모이면 곧 옛날이 되어/즐거웠던 오늘을 그리워하리/훗날 오늘을 잊지 않으려거든/오늘을 한껏 즐기자꾸나" 내 삶의 모토와 어찌나 비슷한지-.-;; 

그리고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드러나 있는 「비 오는 날의 낮잠」도 참 좋다. 재미있다. "주룩주룩 낙숫물 소리/낮잠을 방해할 것도 같은데/어째서 빗소리 들릴 땐/유독 잠이 달콤한 걸까?/맑은 날엔 문 닫고 있으려 해도/나가고 싶은 생각 끊이지 않지/그러니 잠도 깊이 들기 어렵고/언뜻 잠이 들었다가 화들짝 깨지/그런데 지금은 장마철이라/길이 온통 물바다 됐네/아무리 친구를 찾아가려 한들/코앞도 천 리처럼 멀기만 한걸/문 두드리는 소리 들리지 않고/뜰엔 발소리도 나지 않누나/그러니 잠을 잘 수가 있어/드렁드렁 천둥 치듯 코를 곤다네/이 맛을 말로 하긴 정말 어렵지/임금인들 어찌 쉽게 알겠나?/임금이 잠 못 자는 건 아니지만/아침마다 신하들과 회의가 있으니" 불행한 상황 속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찾으려는 노력. 이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시에 드러나 있다. 좋아할 수밖에 없음. 

뒤에 실린 산문 중에 「귀찮음 병」이라고 있는데 굉장히 위트 있고 재미있다. 대략 이런 내용. 

백운거사에게는 귀찮음 병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빨리 변해 가는데 귀찮음 병은 꼼짝 않고 머물러 있고, 이리 보잘것없는 몸인데도 귀찮음 병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네. 집 하나 있는데 풀이 우거져도 베기 귀찮고, 책 일 천 권이 있는데 좀이 슬도록 펴 보기도 귀찮고, 머리가 헝크러져도 빗기 귀찮고(…)남들과 웃고 노는 일도 귀찮고(…)걷기도 귀찮고(…)세상에 무슨 일이든 귀찮지 않은 게 없는데 이런 병을 무슨 수로 고칠꼬?"
손님은 아무 대답도 없이 물러가더니 이 귀찮음 병을 고칠 방법을 찾아 열흘 뒤에 다시 찾아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오래 못 보았더니 퍽 그립더구먼. 한번 보고 싶어 왔네."
그러나 거사는 귀찮음 병이 도져 만나기를 꺼렸다. 그러자 손님은 굳이 나오라 하여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좋은 술을 빚었는데 바야흐로 잘 익어 향기가 그득하다네(…)자네 아니면 누구랑 마시겠어? 게다가 우리 집에 시종드는 계집아이가 있는데 노래도 잘하고 생황도 잘 불고 아쟁도 잘 탄다네(…)자네를 대접하고 싶은데 같이 가기 싫어할까 봐 걱정일세(…)" 

그 말에 거사는 좋아라 옷을 떨치며 일어났단다. 그에 손님은 거사를 보고 처음엔 말하기도 귀찮아하더니 지금은 서둘러 말하고, 걷기도 귀찮아하더니 지금은 걸음도 빠르다면 핀잔을 준다. 그러면서 "사람의 품성을 도끼처럼 찍어 망가뜨리기로는 예쁜 여인을 따라갈 것도 없고, 창자를 썩게 하는 약이 바로 술이라"며 그것들에 망가지는 거사의 모습을 보는 것이 왠지 귀찮을 것 같고, 그러다보니 거사와 얘기하는 것도 귀찮아지고, 앉아있기도 귀찮아지는 걸 보니 거사에게 귀찮음 병이 옮은 것 같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러자 부끄러워 얼굴이 벌개진 거사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사과하였단다. "(…)내가 이제 마음을 바꿔 어질고 의로운 일에 힘써서, 귀찮다는 생각은 버리고 부지런히 살아 보려는데 자네는 어떤가? 나를 비웃지 말고 조금 기다려 보게나" 훗, 그러니 어쨌든 술이나 마시러 가자는 말?! 아무튼 아무리 귀찮아도 남자들은 술과 여자, 흥겨운 놀이엔 약한 법인 듯-.-;; 

그리고 마지막, 이규보가 어째서 그토록 술을 사랑하였는지 나오는 글, 

"술병아, 술병아! 너에게 술 두 말을 담는다. 기울여 마시고 또 담아 두니 언제인들 취하지 못하겠는가. 너는 나의 몸을 우뚝 하게 하고 나의 마음을 확 트이게 하는구나.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노래하니 모두 네가 시킨 것이다. 내가 너를 따라다니는 것은 다만 네가 바닥나지 않기 때문이다." 

낙천적 성격, 귀찮음 병, 오늘을 즐겁게 그리고 요즘 부쩍 술 많이 마시는 내가, 이규보에게 빠진 이유 중 하나. 술! 아 멋져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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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6일에 김태정 시인이 돌아가셨단다. 오늘이 발인.  

작년 말에 암에 걸리고 해남에서 홀로 투병 생활하시다가...
아직 젊은데...그녀의 두 번째 시집 나오길 기다렸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난 봄에 친구들과 섬 여행을 갈 때 친구가 들고 온 시집이었다. 
그 섬에도 동백나무가 많았는데
우연히 들고온 시집을 읽겠다고 펼친 친구가 이 시집에도 동백나무 이야기가 있다며 들려주었고
우린 동백나무 아래에서 설정샷을 찍고, 시를 읽으며, 이 시집 정말 좋다며, 좋다며,...  

집으로 와서 바로 주문을 해서 읽었다.
문단 데뷔 13년 만에 겨우 낸 첫 시집이라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은
그렇게 내 앞으로 왔고 시를 잘 모르지만 시를 좋아하는 내게 이 시집은 정말 멋졌다. 
첫 시집 나온지 좀 되었으니 어디에선가 두 번째 시집을 짓고 있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
어느 생엔가 문득 세상에 홀로 던져져
월광을 듣는 밤은
미칠 수 있어서
미칠 수 있어서 아름답네
오랜만에 상처가 나를 깨우니
나는 다시 세상 속에서 살고 싶어라
(...)
_월광(月光), 월광(月狂) 

술을 마시며 베토벤의 월광을 듣다가 이 시가 생각났고, 

살면서 때로는 너도/부러 들키고픈 상처가 있었을까/이 세상 어디쯤/나를 세우기가 그리도 버거웠었네/때로는 사는 일로 눈시울도 붉히고/사는 것 내 맘 같지 않아 비틀거리다/위태로운 마음으로 허방을 짚으면/휘이청 저 산 위에 기울어진 불빛들/빗장 속의 안부를 묻고 싶었네/모두들 어디에 기대어 사는지/너는 또 무엇으로 세상을 견디는지/너에게 이르는 길은/너를 넘어가는 것보다 더욱 숨이 찼었네/상처도 삭으면 향기를 이루리라/노을에 지친 어깨는 또 그렇게 일러주지만/문득, 대궁밥만큼 비어 있는 산그림자
_북한산 

문득 산이 그리워지면 _북한산이란 시를 읽었다.  
어디 그뿐인가, 무언가에 화가 났을 때는 시인의 시를 빗대어 욕을 했다.
속이 시원했다. 

시가 안될 때/요렇게 한번 해보렷다/개새끼!/그래도 안될 때/죽어도 안될 때/쫌스럽게 하지 말고/
똑 요렇게/씹새끼!/설사가 나오지?/후련하지?//욕이라는 것은 그래서 좋은가/사람들은 그래서 사는가(…)
_시의 힘, 욕의 힘 

김태정 시인은 '민중서정시인'이다.
첫 시집내고 "시만 빼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며 해남 어느 시골마을로 내려갔단다.
그곳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TV도 없이 라디오를 벗 삼아 작은 마당에 야채를 가꾸며 살았다.
그런 그녀가 작년에 암 선고를 받았고, 병원에선 겨우 3개월의 기한을 주었단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그것은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또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어쩌면 나에겐/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가난한 연인들이/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_물푸레나무  

한동안 그녀의 시에 빠져 지냈다.
그리고 늦은 여름, 휴가를 가기 위해 고민을 하다가 그녀의 시집이 생각났다.
그래, 미황사.
봄에 읽었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의 시집 속 미황사가 생각났고,
동백나무가 떠올랐다.
그렇게 찾아갔던 미황사.
그녀의 시에 나오던 그대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새처럼 날아간 거라고/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_미황사(美黃寺) 

그리고 돌아와 내내
미황사와 김태정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시들을 생각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녀의 시,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그녀의 길지 않은 생을 생각하며. 

십년 묵이 낡은 책장을 열다가 그만/목구멍이 싸아하니 아파왔네/아침이슬 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때문이 아니라/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수염이 텁수룩한 도이치 사내를 펼쳐 보더거/그만 재채기를 했네/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쩨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묘지/때문이 아니라/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네루다 시집 속엔/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먼지 때문에/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때문이 아니라/다만 먼지 때문에//바람이 꽃가루 날려보내듯/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일으켰나//청소할 때면 으레 나오던 재채기도/재채기 뒤에 오는 피로도/피로 뒤에 오는 무기력도/무기력함으로 인한 단절과 해체도/그 쓸쓸함도, 그 황폐함도 다만/먼지 때문이라고 해두자/먼지보다 소심한 눈물 때문이라고 해두자//그 사소한 콧물과 재채기 뒤에/저토록 수상한 배후가 있었다니//꽃도 십자가도 없는/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그만 눈물이 나왔네/최루가스 마신 듯 매캐한 눈물이/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_눈물의 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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