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숨은 아이
엄청난 속도로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는 혜원이. 항상 나와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다. 책에 대해 물어보면 작은 흐트러짐도 없이 책에 대해 줄줄 이야기를 한다. 내용은 물론이고, 머리말과 작가의 말까지 빠짐없이 외우고 있을 정도다.
(...)
첫 시간에 뮤지컬을 봤다. 노래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시간도 꽤 길었다. 혜원이는 넋을 놓고 보는데, 노래만 나온다며 자는 아이도 있었다. 꽤 긴 시간이었는데 혜원이는 맨 앞에서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뮤지컬이 끝나자마자 혜원이는 도서관 컴퓨터에서 등장 배우를 조사하고, 삽입곡 '벨(Belle)'의 동영상을 찾아 보여 줬다. 한국 배우가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까지 보여 주며 열성이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
잠시 후 혜원이가 화장실에 가자, 저래서 아이들이 혜원이를 싫어한다는 불평이 쏟아졌다. 워낙 말을 잘해 말싸움에 이길 아이가 없어서, 정말 착한 아이들이 아니면 같이 다니기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흉볼 것이 끝이 없는 듯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혜원이가 자신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 이야기를 하더라도 정보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
2학기에는 방과 후에 활동하는 독서토론반을 만들었다. 혜원이를 포함해 일곱 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주제를 정해 관련된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고, 글을 써 보기도 하는 활동이었다. 혜원이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한계도 뚜렷했다. 혜원이의 아이디어는 창의성은 느껴졌지만 글은 지루했다. 글 속에서 혜원이는 보이지 않았다.
(...)
혜원이는 학기 초에 반 아이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무슨 일이지 모르고 이유도 알고 싶지 않은데, 아이들이 뒤에서 욕을 했다. 처음에는 자신을 싫어한느 아이들은 늘 많으니 하며 그냥 쿨하게 넘기려고 했다. 자신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면 피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
혜원이의 마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 그동안 혜원이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혜원이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혜원이가 좋아하는 책으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했던 시간들. 책의 주인공들을 통해 모든 아이들이 공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소통하고 싶어 한다고 느낄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염원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이제 혜원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듯싶었다.
(...)
『교실 밖 아이들 책으로 만나다』에 나오는 책에 빠진 아이의 사례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걱정을 하지만 혜원이처럼 책에만 빠져 있는 아이들도 사실은 걱정이다. 고정원 선생님이 그런 아이들, 책 속에 숨어 자신을 감추고 사는 아이들을 위해 보여준 사례는 '상처받기 싫으니 책으로 성을 쌓은 아이'다. 그 속에 숨어서 자신에게 상처줄 만한 사람들을 선별하고 있었던 것. 혜원이는 다가온 친구에게 책이라는 벽부터 내밀었던 셈. 그러니 친구들을 바로 만날 수 없었고 왕따를 당하고 그로인해 상처를 받는다. 친구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지 책이라는 지식전달자가 아니었는데 혜원이는 그걸 몰랐던 것.
어른인 나도 가끔은 그런 것 같다. 혜원이 생각처럼 책은 내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친구도 귀찮고 삶도 지루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도 지긋지긋하기만 할 때, 책을 읽으면 모든 게 만사오케이다.-.-;;; 잊고 싶은 일이 생기면 멍청하니 고민을 하는 것보다 그냥 무작정 책을 읽는다. 물론 해결하지 않고 도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지만;;;
어쨌든, 혜원이처럼 책 속에 숨은 아이들에게 고정원 선생님은 고전을 읽어보라 권한다. 바로 아래에 있는 책들. 아하, 고전을 그 나이때 읽어보지 않은 나, 무쟈게 공감을 했다.
이런 아이의 경우 흔히 말하는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이나 토론의 여지가 있는 작품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레미제라블』과 『노틀담의 꼽추』를 함께 읽고 작가의 초기 작품과 말기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노틀담의 꼽추』는 빅토르 위고가 쓴 초기 작품인데, 사람의 감정에 대해 극단적이며 과감하다. 반면 말기 작품인 『레미제라블』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훨씬 짙게 깔려 있다. 종이에 아이와 함께 등장인물을 분석하고 비교하면 좀 더 흥미를 느낄 수 있다.


『빨간머리 앤』과 『작은 아씨들』은 특히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마음에 들어 할 고전 작품이다. 앤의 상상력과 조의 작가가 되고 싶은 바람은 문학소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 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아이의 지식욕을 점검해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몇몇 나라에 대한 작가의 편견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아시아를 무척이나 미개한 나라로 그려 놓아 아이와 흥분하며 비판했던 기억이 있다.


이광수의 작품들은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다. 특히, 『무정』을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는데, 작가의 친일과 작품과의 관련성을 이야기할 수 있어 흥미롭다. 서정주의 시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홍길동전』, 『춘향전』 등의 고전 작품들도 아이의 지식욕을 자극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던 것과 커서 소설책으로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화책과 소설책의 내용을 비교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전 작품들 속의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아이의 현실과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면 책 속에 숨어 있는 아이에게 현실과 통하는 길을 넓여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