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확한 기법에도 불구하고 데 기리코는 불확실함과 불안으로 가득찬 정물과 풍경화들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마치 데 기리코가 1차대전 전(前) 시기에 품었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들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공허하고 우유부단하며 위협적이기까지 한 것들이었다.
- R.램버트 『20세기 마술사』
밤의 싸늘한 보름달에 비추어진 아케이드가 끝없이 작아지는 황량한 광장에는
낭만파의 몽환적 시정이 넘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묘하게 불길한 분위기이다.
- H.W.잰슨 『미술의 역사』
이탈리아 도시의 광장, 탑,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물체들은 마치 진공상태에 있는 듯이
아주 날카로운 원근법으로 그려져 있고……
-A. 야페 『시각예술에 나타난 상징성』
송대방 장편소설 『헤르메스의 기둥 1』중에서 p 90
주말,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헤르메스의 기둥, 킹왕짱 잼따 얼른 읽어봐"
이 초딩 대화 같은 문자를 보낸 친구는 『헤르메스의 기둥』을 반 정도 읽었는데 너무 재밌다는 거다. 안 그래도 주말에 읽고 있던 책을 다 읽어 어떤 책을 읽어볼까 고민하고 있던 차라 잘 됐구나! 벼루고 벼뤘던 『헤르메스의 기둥』을 읽어보자고 다짐을 했더랬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이다. 블로그 친구 분께서 이 책을 읽고 너무 재밌다며 올려주셨더랬다. 처음 보는 작가에, 처음 듣는 제목의 소설이라 그래, 재밌어? 하고 말았는데 얼마 후 그 친구분의 리뷰에 의해 이 책을 읽은 또 다른 친구가 정말, 재밌다며 리뷰를 올려주셨다. 그제야(항상 늘 그렇듯이 두어 명의 추천이 있은 후에) 이 책 이것 뭔데 다들 그러지? 관심을 가졌더란다. 그럼에도 역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읽자고 잊고 있었는데… 가까운 친구 중에 미술 이야길 좋아하는 친구 한 명이 이 책을 읽더니 또 재미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급기야 이 책을 도저히 읽지 않을 수 없겠구나! 생각하고 이 책을 손에 넣었는데, 뭐든지 손에 들어오면 관심이 꺼지는 법. 주말에 그 친구의 킹왕짱 잼따! 라는 문자가 아니었으면 언제쯤 읽을 지 모르고 있었을 책을 마침내 읽게 된 것이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파르미자니노, 이름도 외우기 힘든 이 화가의 <긴 목의 성모>가 이 책의 모티프가 되었다. 그림에 전혀 관심이 없는 편은 아님에도 처음 들어본 이 화가는 이탈리아 화가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영향을 받았으며 코레조의 후계자라고 한다. 책 속에서 화자인 승호는 파르미자니노 연구를 석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하고 며칠 후 어떤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가 된다.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에서 주인공 승호가 의문을 가진 점은 "하나이면서 여러 개인 기둥"이다. 위를 보면 하나의 기둥이지만 밑을 보면 열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 기리코의 기둥들을 보며 '불길한 열주'라고 잰슨이 말했듯이 <긴 목의 성모>의 기둥 역시 "불길한 광경"인 셈이다. 두 그림이 과연 어떤 연관을 가지는 것일까?
『헤르메스의 기둥』을 펼치면 맨 앞장엔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가 나오고 그 뒷장에 연이어 데 기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수>라는 작품이 나온다. 또 초반에는 파르미자니노의 그림과 데 기리코의 그림들이 계속 등장을 하는데 기둥의 열주 부분에 대해 승호는 의문을 갖으며 데 기리코의 형이상학적 세계가 어찌하여 몇백 년 전의 파르미자니노의 그림에 등장하는 것인지 놀랄 만한 일이라고 한다.
지오르지오 데 기리코, 그리스에서 출생한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형이상학적이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단다. 또한 그를 선구로 스콜라메타피지카(Schola Metaphysica:형이상파)가 형성되어 미래파 이후의 이탈리아 화단을 풍미했다고 한다.
『헤르메스의 기둥』을 펼치고 데 기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수>라는 그림을 보며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굴렁쇠와 원근법 그리고 그림자. 달빛일까, 낮일까 궁금해지는 그림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몇 달 전에 나온 배수아의 『북쪽거실』이란 책의 표지 그림이었다. 문득, 그 책을 읽으려던 친구가 첫 페이지를 펼쳤는데 도저히 못 읽겠다고 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신간 소개를 보며 나 역시 배수아를 좋아하지만 어쩐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펼쳐보지도 않았던 책이었다. 한데 데 기리코의 그림에 관한 약간의 해석을 읽고 『북쪽거실』의 책소개를 다시 읽으며 그림과 글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모호, 혼란, 꿈, 몽환적이라는 단어는 『북쪽거실』를 가장 잘 알려주는 단어인 듯하다. 또 데 기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수>는 불길, 불안, 긴장, 음산과 같은 단어들이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하니 다른 듯하면서 어쩐지 비슷한 분위기라는 걸 알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다가 다른 책을 상상하는 일은 흥미롭다. 또한 『헤르메스의 기둥』에서 언급한 화가와 그림들을 한번씩 찾아보기만 해도 아주 배부르게 독서를 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배수아의 『북쪽거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과연, 읽어낼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