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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성이 고민입니다 - 혼자이고 싶지만 외로운 과학자의
장대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8월
평점 :
『사회성이 고민입니다』, 장대익 지음, 휴머니스트, 2019
<사회성이
고민입니다>의 저자 장대익 교수는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진화학과 과학철학이 전공이다. 2017년 <울트라소셜>을
출간하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지금이 ‘사회성이 고민인 시대’에
살고 있음으로 깨닫고, ‘관계에 대한 쿨한 과학적 상담을 제공하는 책’이
시급함을 느껴 <사회성이 고민입니다>를 집필했다고
한다.
<사회성이
고민입니다>는 사회성과 관련된 관계, 외로움, 평판, 경쟁, 영향 그리고
공감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과학적 실험과 진화적 맥락으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관계에서는 ‘우리 인간은 사회적 능력에 최대치가 있으니 모든 사람과 잘 어울리려고 하지 말고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한다.
갑자기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면
사회성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됩니다.(19쪽)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회성에 대한 고민은 이러한 수많은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즉 ‘관계의 문제’입니다.(19쪽)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최대치(…)
한계치인 150을 ‘던바의 수’라고 부릅니다.(34쪽)
우리의 사회적 능력에는 대략적인 최대치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다양한 사회적 채널을 통해
수많은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힘든 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요.(41쪽)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합시다.
반면 스쳐가는 사람들, 관계를 맺는 것이 너무나 고단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애쓰지 말아요. 다른 소중한 관계까지 망칠 수 있으니까요.(43쪽)
두 번째 주제는 ‘외로움’이다.
외로움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고립감이며, 일종의 고통이라고 한다. 우리 몸에게 피하라는 신호라는 것이다. 그리고 배제되고 소외되는 느낌도 ‘사회적 고통’으로 물리적 폭력과 같은 고통을 준다고 한다.
‘외롭다’는 것은 고립되어 있다는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고독’은 심리학적으로 외롭다는 느낌
없이 홀로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49쪽)
외로움은 누구나 경험하는 정서이지만
빨리 벗어나야만 하는 부정적 상태입니다.(…)
외로움도 일종의 고통입니다. 고통을
피하라는 신호입니다.(50쪽)
‘분노’라는 감정은 분노의 원인이나 대상을 피하게 하는 게 아니라
접근하게 만듭니다.(…)
고통이나 역겨움은 회피 동기를, 분노는
접근 동기를 주게끔
진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52쪽)
배제되는 느낌이나 무리에서 소외되는 느낌도 일종의 고통입니다.
물리적 고통은 아니지만, 때로는 물리적 고통보다 더 큰 괴로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배제감이나 소외감을 ‘사회적 고통’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뇌는 몸에서 피가 날 때와 투명인간이 된 느낌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57쪽)
뇌의 관점에서 본다면 두 고통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집단 따돌림은 명백한 범죄라 할 수 있습니다.(58쪽)
높은 수준의 외로움이 지속된다면 반드시 탈출해야 합니다.
빨리 네트워크로 돌아가라는 신호이자
누군가에게 의지하라는 뜻이니까요.(67쪽)
세 번째 주제는 ‘평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쓰다
보면 자율성이 훼손되어 되려 불행해진다고 한다.
타인의 시선에 압도되어 결국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내 삶을 결정하는 것이죠.(90쪽)
열심히 일한 덕에 회사가 돈도 많이 버는 것 같은데
왜 자신은 번아웃된다고 느낄까요?
열심히 일은 하지만 상사가 시킨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자율성이 훼손되면 행복하지 않거든요.(90쪽)
집단생활을 해온 사피엔스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동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지나치면 자율성이 훼손되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91쪽)
모두에게 칭찬받고 싶고, 누구에게나
좋은 평판을 얻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평가하는 기준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93쪽)
네 번째 주제는 진화의 동력이 된 ‘경쟁’을 다루고 있다.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쟁을 피할 수 없지만,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배려’라는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인간이 가장 잔혹하다고 미디어가 다루고 있지만 미디어가 보여주지
않는 동물의 세계는 인정사정 없는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잔혹한 사회라고 한다. 인간만이 ‘배려’를 통해 유일하게 지금의 문명을 이루었고, 이는 몇 만년이 흐른다해도 인간 외에는 문명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경쟁은 진화의 동력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경쟁의 바퀴만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협력도 필요하죠.
경쟁이나 협력은 생명체의 궁극적 가치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명체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상이한 전략인 셈입니다.(100쪽)
‘배려’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원숭이 세계에서 배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은 유인원에 속하는 침팬지의 세계에서나
배려 행위가 드물게 나타날 뿐입니다.(109쪽)
영장류학, 심리학, 뇌과학을 비롯한 인간에 대한 모든 과학은
지상에서 배려와 협력을 가장 잘하는 종이 우리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더 잔혹하고 악랄하며
이기적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이것은 그야말로 ‘가짜 뉴스’입니다.(111쪽)
우리가 지구상의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문명을 이룩한 종이라는 사실은
사피엔스에게는 경쟁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상대를 누른 승리자가 모든 것을 차지했었다면,
즉 타인이나 타 집단에 대한 배려와 협력이 없었다면,
문명이 설령 탄생했을지라도 바로 파괴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12쪽)
(북유럽) 여기에도 경쟁은 있습니다. 우리
아이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어요.
하지만 경쟁 상대가 일차적으로 남은 아닙니다.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는 거니까요.(113쪽)
핀란드에서는 학생 스스로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훈련을 어릴 때부터 합니다.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 우쭐하거나 우울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에요.
학교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경쟁하는 것은 탐욕이라고 가르치죠.
스스로 선택한 것을 성취하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자
성숙임을 강조하는 게 바로 그들의 교육철학이었습니다.(114쪽)
경쟁은 어느 사회에나 있습니다.
어떤 생명체든 경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경쟁은 생명의 징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경쟁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종입니다.
나쁜 경쟁과 좋은 경쟁, 미숙한 경쟁과 성숙한 경쟁 등을 구분할 수 있기도 합니다.(116쪽)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과거와의
경쟁(자신과의 경쟁)이 그것입니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모두가 경쟁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산된 경쟁도 필요합니다.(121쪽)
그리고 <사회성이
고민입니다>는 ‘영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인간에게는 동조 심리가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다만적절한 개방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
목소리를 포함한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인간관계가 필요하다고 한다. 주변에 오답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야 오히려 정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최악의 상황은 모두 동일한 오답을
주장하는 경우라고 한다.
각종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요즈음
우리가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방식은 어떻게 변화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타인 의존적 삶을 살고 있는가(…)
‘사회적 영향’에 관한 물음(128쪽)
내 주변에서 나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어떤 다양한(또는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부러라도 오답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야
역설적으로 정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모두가 획일적으로 동일한 오답을 주장하는 경우가 최악의 상황입니다.(135쪽)
에고 네트워크의 밀도가 낮은 사람일수록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한 예측을
더 정확하게 한다는 가설이 입증된 거죠.(140쪽)
동조 심리 자체는 인류의 진화사에서
오랫동안 진화하여 장착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작금의 소셜미디어가 그 동조 심리를 활용하고 증폭시키며
심지어 갈취하기까지 한다는 것이 문제지요.(144쪽)
우리는 고립된 삶을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주변 사람에게서 직간접적으로 매 순간 크고 작은 영향을 받습니다.(148쪽)
우리에게는 적절한 개방성이 필요합니다.(…)
어린이는 어른에 비해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노인의 ‘휘둘리지 않음’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새로운 정보, 의견,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니까요.(148~149쪽)
마지막 주제는 ‘공감’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에서
인공지능이 이기는 장면을 자주 목도하게 되면서 인간 소외에 대한 걱정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또한 로봇 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의 일자리를 기계가 대체할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데, 정작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는 왜 기계에까지 공감하는지, 어떻게 공감하는지, 얼마나 공감하는지’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의인화된 기계에 우리가 공감하게 되고, 반려견 대신 반려로봇이 등장하게 되면 이러한 의인화로 인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음을 우려한다.
또한 알파고와 이세돌 구단의 바둑 대국으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합리성’과 ‘정교함’에서 앞선 것을 증명한 만큼,
이후 다른 인공지능이 ‘창의성’ 이나 ‘도덕성’ 같은 특성까지 넘어섰을 때도 우리 인간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음을 우려한다.
지금까지는 그저 보조 장치로서의 기계가 얼마나 쓸모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들뿐(…)
하지만 요즘은 AI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여겨지는
병원이나 법원에서 먼저 도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156쪽)
로봇의 기능이 아니라 그 기능에 반응하는 사람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면
로봇에 대한 관점도 달라집니다.(166쪽)
모니터에 눈망울을 크게 그려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이 뻗치게 됩니다.
인간의 진화된 사회성이 작동하는 거예요.
눈과 얼굴의 모양과 움직임을 인간과 비슷하게 하면 할수록,
로봇에 대한 의인화는 더 강해집니다.(166쪽)
공감이란 타 개체의 입장에서 상상해 볼 수 있는 인지 능력
또는 타 개체가 느끼는(느낀다고 여겨지는) 감정을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정서 능력(…)
추론을 통한 공감(역지사지)과 감정을 통한 공감(감정이입)(168쪽)
로봇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그것이 우리 일자리를 대체할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질문의 방향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왜 기계에까지 공감하는가? 어떻게 공감하는가? 얼마나
공감하는가?
우리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175쪽)
알파고는 인간 정체성 중 ‘합리성’과 ‘정교함’을 빼앗아갔지만,
만일 또 다른 AI가 등장해
인간의 ‘창의성’이나 ‘도덕성’ 같은 특성까지 이겨버리면
과연 우리 정체성 중 무엇이 남게 될까 하는 걱정입니다.(181쪽)
<사회성이
고민입니다>를 통해 사회성에 대한 고민은 결국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고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가 인간 하나가 아니라, 자연은 물론 기술의 발달로 로봇까지 확장되고 있으니, 결국 우리의 사회성에 대한 고민은 자연과 기술을 포함하여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소외에 대한 걱정보다는 사회의 구성요소로서 기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