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 연구 발제문.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의 제3장 '중세의 철학적 신학' 요약.>

 

  철학적 신학으로서의 중세철학


  서양의 중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듯이 기독교가 유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기독교적인 신 개념의 지위 또한 기독교의 확산과 일반화에 따라 이전과 달라졌다. 기독교적 신의 핵심은 다름 아닌 신의 말씀, 곧 진리가 성서를 통해 계시라는 형태로 선포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교부시대 이래로 성서-계시-신앙으로 이어지는 신에 대한 접근법은 여전히 경험-지식-이해로 이어지는, 인간에게 고유하다고 여겨지는 진리에 대한 접근법, 즉 이성과 충돌을 일으켰다. 기독교적인 철학, 기독교적인 의미의 철학적 신학은 바로 이 두 영역을 어떻게 하나의 체계 속에서 양립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 의문은 중세철학에서도 여전히 문제적이었다. 특히 문제는 신앙이라기보다는 이성이었다. 기독교 철학자들에게 신앙은 거부할 수 없는 전제,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로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절대적인 진리였다. 반면, 이성은 분명히 인간의 내부에 국한된 능력이고, 따라서 이성을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중세의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였다. 그렇다면 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졌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범위, 대상,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중세의 기독교 철학자들은 여기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했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신앙와 이성의 영역에 동시에 걸쳐진 과제로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적 증명’이 중세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의 존재는 신앙과 직결된 문제이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절차는 인간의 이성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논증의 형태가 된다.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완결된 형태로 제시될 수 있다면, 이성을 소유한 모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모든 인간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증명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는가, 그리고 이 증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서 철학자의 특징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철학적 신학의 고유한 과제, ‘이성을 사용하여 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가?’ 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중세 시대까지 내려온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철학은 철학적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학과 신앙에서 이성의 지위와 역할


  이 두 가지 논점에 대해 인상적인 의견을 제시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이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이성은 언제나 신앙에 기초해 그 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능력은 개념적으로는 서로 대립,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이 두 가지 능력을 모두 잘 갖추고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의 말씀으로서 거부할 수 없이 주어진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인간의 이성은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인간의 이성이 이런 기반 위에서 발휘된다면 이성을 통해서도 계시된 진리에 필연적으로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입장에서 그는 신의 개념에 대한 전제적인 믿음을 배제한 채, 이성적 능력 즉 논증을 통해서 신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능력, 즉 이성만으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발상일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식으로 인간에서부터 출발하는 신 존재 논증을 구사한다. 첫째, 인간은 이 세상에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선하게 만들어주는 근거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하다’는 단일한 것, 단 하나의 선한 것, 따라서 최고의 선이 모든 선한 것을 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최고의 선이 바로 신이다. 둘째, 인간은 여러 대상들의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차이들은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본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이다. 셋째, 인간 외부의 대상들을 바라보지 않고 좀 더 내적으로 성찰해보았을 때, 인간은 자신에게 ‘최고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인간의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개념이다. 만약 이성에만 의존한다면, 어떤 존재라도 그것보다 더 높은 존재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개념이 있다는 것은 진짜로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최고의 존재’가 바로 신이다.

  보나벤투라(1218~1274)와 로저 베이컨(1214~1294)은 ‘이성은 신앙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한다’는 안셀무스의 주장을 더욱 강한 형태로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성과 철학에만 기대어서는 결코 계시적 진리, 참된 지식에 이를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기반 위에 있는 철학은 얼마든지 허용되며, 신앙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탐구한 주제들은 결코 신학에서 설명해야하는 과제들과 다르지 않다. 보나벤투라는 이것을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고, 베이컨은 철학의 전통에서 거론된 모든 진리를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지식은 성서에 담겨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아벨라르(1079~1142)와 헤일스의 알렉산더(1185~1245)는 신앙에서 이성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였다. 아벨라르의 경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사용되는 철학적 방법인 변증술을 신앙의 방법으로 이용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계속 질문하고 토론함으로써,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철학적 방법과 그 방법을 통해 획득한 지식으로 진리의 어렴풋한 모습을 파악할 수도 있다. 이것을 명증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신앙이다. 헤일스의 알렉산더는 아예 신앙과 이성의 영역을 나눈다. 신앙을 정교하게 구축한 학문은 신학이며, 이성을 사용한 정교한 학문은 형이상학인데, 그가 보기에 이 두 학문은 모두 신에 대한 지식, 진리를 추구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도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후대의 입장들


  신앙와 이성 사이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구분하고, 이성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더욱 긍정적으로 답한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이다. 물론 그 또한 신학자인 만큼 이성만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성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단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반면 신앙은 이런 존재하는 신이 정말 ‘어떤 존재인가’, 즉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해준다. 따라서 이 두 능력은 인간이 신을 인식하는 각기 다른 방법과 영역을 가지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이성은 이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는 능력이고, 반대로 신앙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도출해내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신에 대한 인식을 보장해줄 수 있는가? 아퀴나스는 이에 대해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간이 눈 앞에서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이 이러한 조건에 처해진 이유는, 다름 아닌 신 때문이다. 신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을 창조하였고, 인간 또한 그 존재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모든 존재자들의 피조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 피조성은, 존재자들의 존재로부터 도출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동시에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이것을 그는 자연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도 여전히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것을 얻는데 필요한 이성보다는, 신앙을 통해서 신을 직접 인식하고 진리 그 자체에 다가가는 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안셀무스의 증명을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혼동한 결과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고유한 신 존재 증명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어떤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은 다른 운동하는 것에 의해 유발된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운동자들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최초의 운동자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둘째, 어떤 작용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그것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역시나 원인 또한 무한히 추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최초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셋째, 이 세계의 존재자들은 존재하지 않고 소멸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오류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있어야하는데, 이것이 신이다. 넷째, 우리는 고귀한 것,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더 고귀한 것, 더 소중한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무한히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최고로 소중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다섯째, 모든 존재자들은 완벽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운동한다. 이렇게 완벽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자들의 목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 목적을 향해있도록 만드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하지 않으므로,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아퀴나스의 이 논증들은 결함이 많다고 평가받는다. 첫째, 이 논증들은 모든 존재자가 목적을 내포하며 이것을 향해 운동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정하고 있다. 둘째, 감각적인 세계와는 구별되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위계를 설정하고 있다. 셋째, 최초의 무엇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며 원인/근거와 결과/작용의 연쇄를 자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넷째, 아퀴나스가 증명한 것은 신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자이다. 즉, 그의 논증이 최초의 원인이나 최고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에서 말하는 그 신인지는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결론은, 끝내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작업에서 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둔스 스코투스(1265~1308)는 철학에서의 형이상학을 이용하여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형이상학의 대상, 이성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사유는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에 도달할 뿐이며, 그것이 신이라고 인식하는 도약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신앙이다. 윌리엄 오컴(1288~1348)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신앙은 학문적 체계로 만들어질 수조차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듯하다. 신에 대한 인식은 학문적 인식과 같은 방법이나 구조일 수 없다. 신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들처럼 명백하게 알려진다면, 그것 자체가 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렴풋한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며, 이성은 이 과정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신비주의자들


  이 맥락에서 시대를 거슬러 신비주의적 전통을 살펴보는 이유는, 신앙과 이성이 명백하게 구분된다는 오컴의 주장이 인간과 신의 단절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전통 내지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 두 전통은 중세 신학에서 신비주의 전통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 철학자들로는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15~877),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 생빅토르의 후고(1096~1141), 생빅토르의 리카르트(?~?), 보나벤투라 등이 있다.

  에리우게나의 출발점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여러 철학자들의 출발점과 유사하다.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은, 신과 인간은 개념적으로도 현실적으로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고대의 전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하나되는 체험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성은,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신적인 체험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능력으로 간주된다. 또한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된다는 것은, 이성이 신앙의 형태라는 뜻으로 바뀐다. 이후의 신비주의자들은 신앙 안에서 신과 하나되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과는 다른 직관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한다.

  신비주의적 전통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인식의 단계를 명확하게 설정한다는 점이다. 리카르트와 보나벤투라의 견해를 참고해보면, 인식은 크게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진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존재자들을 인식한다. 이 존재자들은 그 자체로 각각 신을 반영하고 있는 신의 현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고작용이 우리에게 단순한 존재자들 뿐만이 아니라 무형적인 것, 작용하는 것 등이 있다는 것 또한 일러준다. 또한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정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데, 이것이 두 번째 수준의 인식이다. 그 다음 내적 반성을 통해 이 정신이 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우리의 구조가 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을 향해 넘어가는 ‘정신의 고양’을 경험한다. 신비주의적 체험 신학은 이렇게 완성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또한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이다. 그의 독특함은 인식의 단계에 대한 정의와 신적 체험을 향해 가는 방법론에 있다. 신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 때부터 그러했듯, 신비주의자들은 대개 상승이나 도약, 고양같은, 위계성이 갖춰져있고 계속해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은유를 사용한다. 에크하르트는 반대로 아래로 향하는 은유, 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내면으로 점점 향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존재자들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격리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나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정신의 고려사항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존재자들이 추방된 정신 그 자체가 발견된다. 그런데 이 과정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신이 피조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다시 말해 신적인 영역으로 자신을 옮겨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발견된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며, 이 정신에 대한 체험이 신에 대한 인식이다.

  나의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라는 인식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바로 신이라는 인식으로 유비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존재자들의 총합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신은 오히려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존재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존재성은 마치 내가 나의 내면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신을 체험하듯이, 신이 모든 존재자들을 체험함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을 에크하르트는 ‘통찰’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은, 인간이 격리성을 통해 체험할 수는 있으나, 규정할 수는 없다. 도저히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인식은 기술될 뿐, 설명되지 않는다.

  신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번번히 좌절된다는 것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의 철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대립하는 어떤 대상을 가질 수 없는, 단 하나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자들은 신의 피조물로서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구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더욱 주목할 것은, 그 안에 비단 현재뿐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거대한 가능성의 덩어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타자가 없는 존재, 즉 비-타자로서의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가능성이 끊임없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변화하는 존재인 신은, 그래서 인간의 개념에 포착될 수 없고 따라서 가능성 그 자체라는 묘사 이외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신을 인식하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존재는 이성의 규칙인 모순율마저도 뛰어넘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립하는, 즉 모순된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은 신을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인식이라고 밝힌다. 따라서 그에게 신은 인식이 아닌 체험을 통해 다가오고, 그 체험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연모 즉 신앙이다. 그는 이 신앙을, 이성적(즉 인간적) 요소를 모두 배제한 순수한 바라봄이라는 뜻에서 ‘관조’라고 말한다. 이 관조 속에서 신은 인간에게 다가오며, 여기에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체험이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 또는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단적으로 말해 신비주의자들이 철학, 즉 철학적 신학을 한 철학자들인지 되묻는 것이다. 신에 대한 고찰이 체험이나 믿음의 영역으로 돌려지는 순간, ‘철학적’ 신학은 포기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에 대한 중세적 사유를 끝맺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 없는 사람들 - 헤겔 역사철학 비판
라나지트 구하 지음, 이광수 옮김 / 삼천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서양의 지적 전통 발제문>

  라나지트 구하 개관

 

  라나지트 구하(1923~현재)는 지식인과 엘리트 등 특권계층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은 인도의 역사학자이다. 그는 사회 하층부를 일컫는 개념인 ‘서발턴subaltern’에 대한 연구를 대표하는 학자이며, 잡지 『서발턴 연구』(1982~),  『서발턴과 봉기』(1983),  『헤게모니 없는 지배』(1998), 『역사 없는 사람들』(2002), 『역사의 작은 목소리The Small Voice of History』(2009)등을 썼다.


  그는 서발턴 연구를 통해 기존에 주목받지 못했던 민중운동의 흐름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기존의 학계가 설명하던 인도 역사의 흐름 – 식민지배에 맞선 민족국가의 수립이라는, 이념에 기반한 엘리트주의적인 서사를 해체하였다. 또한 역사적 운동의 주체로, 민족주의나 자본주의라는 이념, 그리고 이념을 수입-전파하는 엘리트들 대신 민중의 자발적 행동을 강조하였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반식민지 투쟁으로서의 민족주의 이념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민족주의적 서사라는 서양의 역사서술 방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하는 식민지배자와 민족주의자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일종의 공모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런 비판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연구대상인 서발턴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아주 복잡하고 다양하여, 실제로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 등으로 동일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운동의 주체로서 이러한 특징은 근대적 의미의 정치적 운동과 조직의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이 자체가 서발턴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서발턴들의 정치적 운동의 동력이기도 하다. 구하의 연구 속에서, 그들은 식민지배와 엘리트들의 지배, 물리적 폭력과 이념적 훈육 속에서도 여기에서부터 자유로운, 현실의 정치체제로부터 이른바 ‘탈주할 수 있는’ 주체들로 그려진다.

 

 

  구하의 헤겔 역사철학 비판

 

  이렇듯 역사학자인 구하가 헤겔의 역사철학을 연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가능하게 해준 많은 기술과 학문들이 있지만, 그것을 가장 추상적이고 완결된 형태로 제시해주는, “이성이라는 준거 아래 식민주의와 연계된 모든 다층적인 행위와 이데올로기를 조합하고 배치할 수 있”(p.15)는 체계가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특히 헤겔이 대상이 되는 이유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기에 ‘세계사’에 대한 철학적 개념을 수립하고 그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구하는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영어제목에서 보듯이 ‘세계사의 경계’, 즉 헤겔이 세계사로 선포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의 사이에서 헤겔의 세계사 개념을 통찰해보도록 권하고 있다.


  이 경계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계사’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서유럽-영미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 집단, 또 곧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되어야 할 집단이었다. 구하와 함께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역사가로 평가받는 월터 미뇰로 Walter Mignolo(1947~현재)는 이들을 ‘역사 없는 민족’으로 개념화한다. 여기에는 “기록이 없는 사람들은 열등한 민족이고, 역사가 없는 민족은 열등한 인간이”(p.25)라는 사고관이 깔려있다. 헤겔 또한 이런 점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인도(를 비롯한 비유럽세계)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으므로”(p.26) 결핍된 민족, 열등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헤겔은 역사와 국가(민족국가)의 상호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역사는 민족국가에 의존적이다. 역사가 진정한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민족국가에 의존해야 한다.


  구하는 이 지점에서 영국 식민지배자의 기획에 따라 쓰여진 람람 바수의 인도 역사를 언급한다. 그의 역사서술은 단순히 연대기, 전설, 신화에 준하는 그 이전의 서사와 다르다. 그 핵심은 “지속성과 완전함”(p.31)으로, 따라서 “바수에게는 분명히 근대주의적인 면이 있었다. 이런 지속성과 완전함은 제대로 된 역사 이야기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기에 전근대적 연대기와는 완전히 달랐다.”(p.31) 구하가 보기에 이 역사책은 인도가 헤겔이 말하는 ‘세계사’를 확립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반증이 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람람 바수의 인도 역사를 포함해, 헤겔이 체계를 갖춘 유럽의 근대적인 역사서술방법 그 자체다.


  헤겔의 역사서술방법론에 따르면,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두 가지, 즉 서술의 형식과 서사의 내용이다. 서사의 내용은 국가이다. 서술의 형식은 산문이다. 민족을 막론하고 인간의 모든 언어적 표현은 시로 시작된다. 산문은 그 뒤에 나온 형식이다. 헤겔에 따르면, 뒤에 오는 것은 앞에 오는 것보다 진보되고 발전된 것이다. 산문은 경험에 기반한 사건을 기술하는 데 더욱 용이하고, 사건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도록 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문은 시보다 발전된 형식이며, 그러므로 역사는 산문으로 쓰여져야 한다.


  이 산문도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세계의 산문이다. 세계의 산문은, 단적으로 말해 이것은 시간에 따라 이 세계에 일어나는 사건 전체를 뜻한다. 헤겔에 따르면 세계의 산문은 그 자체로 역사성을 띄고 있다.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건들 가운데 일부를 자신의 역사로서 의식한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다른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사건들이며, 따라서 모든 사건은 개인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관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모든 사건이 역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모든 사건이 인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산문은 근원적으로 역사성을 띈다.


  하나는 역사의 산문이다. 세계의 산문은 역사성을 띄지만, 그 자체로 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세계의 산문은 역사의 산문이 되어야지만 역사가 된다. 하지만 헤겔은 세계의 산문들 가운데서 어떤 것이 역사의 산문이 될 수 있는지 기준을 설정하고, 역사의 산문을 조직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그 역사적 사건들이 최종적으로 ‘자유의 실현’을 향하여 나아가는 ‘정신’의 작용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세계사’, ‘보편사’, 즉 역사를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철학은 일종의 역사서술방법론이다. 역사서술방법론은 “첫째, 역사화의 수단으로서 일련의 기초적 ‘원리들’에 대한 선택을, 둘째, 자연과 역사의 변화에 대한 몇몇 일반적인 고려를, 셋째, 역사라는 것으로 인정해야 하거나 또는 인정해서는 안 되는 여러 조건들의 공식화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특정한 방법론에 따라 도출된 특정한 ‘역사’의 서사를 헤겔이 ‘보편사’의 위치로 끌어올린 것에 있다. 그 역사는 결국 역사서술의 방법론을 벗어날 수 없다. 방법에 의해, 그 방법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것들은 역사의 밖으로 밀려난다. 다시 말해, “세계는 절대정신이 진보에 대한 이야기를 실현시키는 것을 입증해주는 동시에 결국 그 자체의 서사를 위한 근거를 제공해준다.”(p.71)는 순환에 빠져든다.


  이 순환의 허점은, 헤겔의 역사적 편향에 의해 메워지는 것으로 보인다. 구하는 그 증거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비유럽 지역의 철학과 사상, 문화에 대한 헤겔의 전반적인 평가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그들의 의견을 ‘확정 내용’이 결여된 추상이라고 혹평하였다.”(p.82) 또한 인도의 서사시가 그리스-로마의 비극시처럼 발전하지 않고 인간을 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혹평한다. 다른 하나는 비유럽지역과 유럽지역의 서사에 대해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보편사’ 서술에서, 유럽지역을 중심에 놓기 위해 자신의 역사서술방법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자유’의 개념마저도 유동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반면 모든 사람은 아닐지라도 일부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유에 대한 규정이 조절되었고, 발전된 자유에 대한 규정에 의거하여 그리스와 로마는 포함되었다.”(p.89) 자신이 자유가 가장 확대된 정신사적 형태로 제시한 게르만-기독교문화에서도, 그 안에는 수도 없이 많은 ‘비게르만-기독교’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헤겔에 따르면 게르만-기독교 문화는 인간의 정신이 완전히 발현된 역사적 ‘단계’이다. 이 ‘단계’ 개념은 이러한 차별적 역사서술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이다. 단계 개념은 단계와 단계 사이가 질적으로 다르며, 그 발전의 양상이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내포한다. “끊임없이 진행하는 운동을 중단시키는 휴식처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절대정신이 이 세계 안에서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라면, 한 단계는 이전에 얼마나 멀리까지 갔는지, 아니면 얼마나 더 멀리까지 갔어야 한 건지, 또 어디에서 멈추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갔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념 아래, 비유럽적 지역은 보편사의 발전단계에서 인도-중국적 ‘단계’라는, 저발전 단계로 묶이고 말았다. 이런 보편사적 이념이 식민지배의 이념적 기초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도의 서사 전통과 대안적 역사서술

 

  이러한 유럽중심적 역사서술에 대비해, 구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역사서술 ‘이띠하사’를 거론한다. 이것은 ‘서사’라는 개념에 가까우며, 따라서 인도인들은 영어의 역사(history)를 이 말로 번역하였다. 또한 그들은 이 개념을 통해 유럽인들이 사용하는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였다. 이띠하사에 이미 유럽인들이 사용하는 의미와 비슷한 역사 개념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번역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이띠하사는 히스토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구하의 분석에 따르면, 이띠하사는 더욱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이띠하사의 특징적인 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서사의 줄거리가 고정되어있다는 점이다. 이띠하사와 비교했을 때, 유럽의 역사가들이 역사를 이야기할 때에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한 일회적인 이야기를 본 그대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서술에서 중요한 요소는 직접적 경험의 명확성, 역사적 사건의 일회성, 그리고 그것의 정확한 재현이다. 그러나 이띠하사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고려되지 않는다. 줄거리는 고정되어 있고, 따라서 그 이야기에서 나오는 사건들은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또한 실제 있었던 사건인지 아무도 증명해줄 수 없으므로, 정확한 재현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그리고 기억이 나는 대로 이야기를 수시로 재구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재구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띠하사의 두 번째 특징이다. 즉, 이띠하사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주제와 내용을 중심으로 서사가 재구성된다. 이띠하사가 시행되기 전,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반드시 물어봐야 한다. 또한 이야기 중간에 듣는 사람이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자기 의견을 말할 수도 있다. 이 자체가 이야기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띠하사는 서사의 화자조차도 단일한 인격체가 아니다.


  위와 같은 두 가지 특징에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 특징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서사가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이띠하사에는 원본이 없으며, 따라서 복사본도 없다. 말하는 사람을 둘러싼 맥락에 따라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또한 말하는 사람은 이야기의 구체성을 높이기 위해 서사 속에 자신의 경험을 결합시키기도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실제 서사와 말하는 사람의 경험을 구분한다는 것이, 이띠하사의 특성상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이띠하사 속에 결합한다. 따라서 이띠하사는, 헤겔의 역사성 개념을 그 자체로 드러내주는 산물이며, 그러므로 더욱 본질적인 의미의 ‘역사’이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말년의 비평에서 이러한 역사의 개념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서술에서 나타나는 식민주의적 특성, 즉 역사서술방법론에서의 헤겔적 경향을 극복하고 창조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역사는 공식적인 역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분인 문학에서도 충분히 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공식적인 역사와 문학은 상호보완적 관계로, 서로가 서로에게 ‘세계의 산문’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서술된 역사는, 당연하게도 구체적인 개인들의 일상성이 창조적으로 표현된다. 타고르는 실제로 역사비평을 수행하는 데 있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읽어왔던 인도의 기념비적 신화와 전승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구하는, 이런 태도로 역사에 접근한다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좀 더 풍부하면서 동시에 단순한 재현이 아닌 역사적 체험의 표현으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겔, 아이티, 보편사 엑스쿨투라 1
수잔 벅모스 지음, 김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의 지적전통 발제문>

 

  이 책의 저자인 수전 벅-모스 위키피디아 Susan Buck-Morss는 미국의 비판이론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발터 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 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이 책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벤야민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자본주의 도시의 문화적 구조’인데, 이 프로젝트는 그 주제에 대한 연구의 결과이다. 벅-모스는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고, 이에 대한 해설서로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The Dialectics of Seeing :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1989)를 출간하였다. 그 외에도 『부정변증법의 기원』(1977), 『무릉도원과 파국 : 동서양의 대중적 유토피아 가로지르기』(2002), 『테러 이후』(2003) 등의 저서가 있다.

 

  「헤겔과 아이티」

 

  벅-모스가 「헤겔과 아이티」에서 다룰 주제의 모티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헤겔이 아직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다 정리하지 못한 시기, 즉 예나 시기에 초기 자본주의의 성장을 날것으로 지켜보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들 뿐만 아니라, 분명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은 흔적이 발견된다는 데서 증명된다. 홉스, 로크, 루소 등 헤겔 이전의 사회철학자들은 인간의 조건을 고립되고 혼자뿐인 자연상태와 다양한 개인들 간의 상호 교류로 얽혀있는 사회상태로 양분하였다. 또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진보해간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헤겔은 이와 다르다. “헤겔의 근대적 주체는 상품 교환으로 인해 이미 사회적 의존의 망 안에 존재하고 있다.”(p.24)

 

  그렇다면 이 사회적 의존의 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것이 두 번째 모티프이자 벅-모스가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하는 핵심적 주제인 주인-노예 변증법, 그리고 여기에 얽힌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아이티 혁명이다. 벅-모스가 보기에 주인-노예 변증법은 자본주의적 사회의 관계를 묘사한다. 각 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통해서, 인정하는 자인 주인과 인정받는 자인 노예로 나뉜다. 그러나 주인과 노예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며, 게다가 변화를 추동하는 진정한 원천은 노예의 노동으로부터 나오며, 오히려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한다. 이 관계가 역전되어 노예가 자신의 주체를 위한 인정투쟁을 벌임으로써, “자신의 예속 상태를 뒤엎고 법치국가를 확립하는 노예들의 혁명적 투쟁”(p.26)이 발생한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주인-노예 변증법에 대해 내놓은 해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존의 철학의 전통 안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들로 환원시키는 것이다.(p.76) 이들은 이 변증법의 기원을 찾기 위해 가깝게는 피히테, 멀게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머지는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으로, 이것을 계급투쟁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p.86) 하지만 벅-모스가 보기에 이 둘은 모두 헤겔이 놓인 역사적 조건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해석들로, 이 변증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헤겔이 살던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발견할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아이티 혁명이다. “헤겔의 분석을 무한히 팽창하는 식민경제에서 떼어내, 그가 자유의 실현으로 규정하는 세계사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이론적 중심점을 제공”(p.26)하는 그 사건은 “바로 그 순간 아이티에서 현실화되고 있었다.”(p.26) 하지만 “헤겔이라 불리는 현상과 아이티라 불리는 현상은 그 시작 지점에서는 서로에게 스며들만큼 연관되어 있었지만 전수의 역사를 거치면서 서로 분리되었다.”(p.27)

 

  이 지점에서 이야기의 주제는 노예제에 대한 당대의 시각과 담론의 변화를 보여주며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노예제는 분명히 존재했고,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상품의 상당수는 노예노동에 의해서 생산되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것을 외면하거나 철학적으로 교묘하게 정당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홉스는 이것을 ‘자연상태의 투쟁에서 발생한 산물’이라고 말하고, 로크의 경우 노예를 다루는 것은 노예의 주인과 노예 사이에 관련된 사적인 사안(다시 말해 사적 소유)이므로 국가가 법으로 관여할 분야가 아니라는 논증을 폈다.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노예제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다. 그렇기에 정치적 혁명의 시기에 모든 혁명적 팸플릿들은 자신들이 노예의 상태에 있다는 은유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은유가 아니라 실제의 상황이기도 했는데, 프랑스 식민지인 생도맹그의 흑인 노예들이 바로 그랬다. 그들은 그것을 은유가 아닌 실제로 받아들이고, 그 노예제를 ‘실제로’ 철폐하려는 봉기를 일으켰다. 투생 루베르튀르, 장-자크 데잘린 등이 주도한 봉기세력은 생도맹그에서 백인들을 쫓아냈고,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여러 식민 열강들에 맞서 긴 전쟁을 수행한 끝에 아이티라는 독립국가를 건립할 수 있었다.

 

  계몽주의 이념의 실천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그것이 전혀 실천되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발생한 실천이었기 때문에 아이티 건국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헤겔은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있었다. 헤겔은 이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고, 그와 교류했던 주변의 많은 인물들이 아이티에 직접적인 소식통(프리메이슨)을 가지고 있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과 이 사건이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고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벅-모스는 주장한다. 헤겔은 “마치 은현 잉크처럼 자신의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역사적 현실을 텍스트 안으로 들여온다.”(pp.80-81)

 

  또한 벅-모스는 헤겔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거론한다. 주인-노예 변증법이 반영하는 (당시의 시각에서) 급진적인 평등사회를, 그들이 이미 집단적 이념의 차원에서 이미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프리메이슨은 직공들이 공동체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상업적 관계망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유럽의 상업적 범위가 대서양 전체로 넓어지면서, 상업적 관계망으로서의 프리메이슨은 문화적 교합의 공간도 제공하였다. 입회 조건에 제한을 두지 않으며, 내부적으로는 모두 평등하다는 강령이 프리메이슨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주변 인물들, 헤겔이 보던 신문을 제작, 인쇄하고 배포하는 과정들은 모두 일정부분 프리메이슨의 세계시민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이 사건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적 팽창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역사철학자로 변모한다. 벅-모스는, 여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조차도)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독립국가로 출범한 아이티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이 아이티 혁명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독립 이후 긴 전쟁과 경제정책의 실패는 독립국가 내부의 인민의 삶을 전혀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그 혁명이 자유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해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벅-모스의 표현처럼, 그는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더욱 어두워졌다.

 

 

  보편사

 

  벅-모스는「보편사」가 「헤겔과 아이티」에 대한 호응 및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서 기획된 논문이라고 말한다. 이 논문의 중심주제는 ‘과연 아이티 혁명이 보편사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그게 가능하려면 ‘보편사는 어떤 개념이어야 하는가?’ 라는 두 가지 질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벅-모스는 아이티 혁명의 주변을 둘러싼 정치, 경제적 상황와 그 속에서 아이티 혁명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그런 아이티 혁명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당시의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여 해석한다면 보편사 개념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아이티 혁명이 그 사건 이후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며, 그것이 정말 의미있는 사건이었는지에 대해 당대의 사람들이 회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벅-모스는 그 이유를 경제적인 상황에서 찾았다. 루베르튀르를 비롯한 혁명 주도세력은 정치적인 기획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경제적인 조건과 얼마나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따라서 정치적 기획의 모델을 그대로 경제에 도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른바 ‘농-군 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아이티의 산업기반은 식민지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부는 농업으로부터 창출되었다. 그러나 노동의 양식은 정치체제의 변화 때문에 이전과 같아질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아이티 혁명 세력이 고안해낸 노동의 양식은, 군에서 하는 것과 같이 강력한 규율에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일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근대 이후 한동안 노예제는 어쩔 수 없는 것, 혹은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그 존재가 긍정되어왔다. 그러나 노예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노예제가 공론화되면서, 사람들이 노예상태에 대한 언급을 부정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 노예상태는 ‘자유로운 노동’이라는 상황으로 대치될 수 있는 상태였다. 규율에 따라 ‘자발적으로’ 노동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자유로운 노동이란 무엇일까?

 

  벅-모스는 바로 여기에 아이티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노예노동과 자본주의적인 임금노동, 즉 ‘자유로운 노동’ 사이의 관계를 성립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다름아닌 독립한 아이티였다. “개혁가들이 범죄, 빈곤, 노동 규율 등의 문제와 씨름할 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노예 대농장의 이미지에 사로잡혔던 듯 하다. (...) 노예주와 산업가는 모두 자기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성품과 습성을 개조하는 데 점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p.137) 흑인 노예들의 해방공간, 즉 아이티에서 벌어지는 노동의 양식 – 자유민들이 규율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착취가 이루어지는 노동 - 은 자본주의, 산업혁명 시기 노동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므로 저자는 아이티 혁명이 정치적 혁명이었으나 경제체제에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유럽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모델로서의 의미에 대해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아이티 혁명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 아이티 혁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실제로 그들이 혁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적 임금노동 양식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유럽 자본주의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설명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분석 대상은 실제 여기에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들, 즉 잡색무리가 되어야 한다.

 

  유럽의 발달한 항구도시에는 흑인, 크레올, 혼혈, 백인 극빈층 등이 섞여서 하나의 정치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업이나 반란 등을 통하여 어떤 정부에도 종속되지 않는 “다인종·다민족의 “히드라 정체”로서, 법을 집행하고 부를 나누며 전쟁을 벌이는 자치적 대항정권이 되었다.”(p.146) 이들은 유럽의 사람들에 의해 “공산주의적 수평파, 종교적인 도덕률 폐기론자, 반란을 일삼는 노예, 혁명적 급진주의자”(p.147) 등으로 묶여 히드라로 묘사되었다. 이들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제멋대로 나간 민주주의를 함축했다.”(p.147)

 

  그러나 벅-모스가 보기에 이들은 “본래 의미에서 ‘세계시민적’이었다.”(p.147)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보편주의’를 주창한 이들은 혁명의 시대에 인류라는 하나의 인종에 대해 말했으며, 당대에 이 이념은 후대의 역사적 흐름이 보여주려 한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표현되었다.”(p.149) 이것을 더욱 확대해서 해석하면, 현대로 들어오기 이전의 거의 모든 ‘단일한 정체성’에 대한 언급은 “하나의 은유다.”(p.156) 이들은 그 존재 자체로 “집단적 의미의 모든 기존 질서를 위협했다.”(p.158) 헤겔은 ‘보편사’라는 개념을 고안해냈을지는 몰라도, 이런 다중적인 정체성에 대한 통찰을 보편사 개념에 집어넣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다시 강조한다. 이런 다중적인 정체성을 당대에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집단이 바로 프리메이슨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모든 인간의 지식을 집대성하고 가장 본질적인 측면에 접근한다는 프리메이슨의 이념과, 여기에 가입되어있는 여러 종류의 흑인들의 문화적 전통이 그 단체 속에서 결합한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문화적 전통에 대해 잘 모르는 개인들은 상징과 기호를 사용하여 소통한다. 다른 하나는 여기에 가입하고 의식을 치르는 흑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존재를 박탈당하는 경험을 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습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었음을 인식한다. 이 두 요소가 뒤섞이면서, 벅-모스에 따르면 “여기서 출현하기 시작한 보편사의 규정은 이렇다. (...) [문화적] 파열 지점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출현한다. 자신의 문화가 무리한 압력을 받아 붕괴될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는 인류를 표현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불연속성 속에서다.”(p.184)

 

  물론 벅-모스도 아이티 혁명 전체가 이것을 온전히 성취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는 노예제를 그대로 이식한 노동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아이티라는 국가를 수립함과 동시에 다중적인 정체성은 사라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회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티 혁명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혁명의 순간에 세계시민주의적인 것으로서의 보편사적 성향이 드러났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이 보편사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역사를 재서술함으로써 발견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럽적인 이념으로서의 ‘보편사’로부터 보편사를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획에는 끝이 없으며 다만 무한히 고리들을 잇는 작업만이 있다. 고리들이 지배 없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종합적이기보다 측면적이고 부가적이며 혼합주의적일 것이다. 보편사의 기획은 종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p.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헤겔 법철학 강요 해설 : 서문과 서론
백훈승 지음 / 서광사 / 2016년 9월
30,000원 → 28,500원(5%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2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6년 09월 01일에 저장

과학의 가치
앙리 푸앵카레 지음, 이정훈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11월
34,800원 → 33,060원(5%할인) / 마일리지 1,74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23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6년 04월 22일에 저장

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 지음, 김광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2월
40,000원 → 36,000원(10%할인) / 마일리지 2,000원(5% 적립)
2016년 02월 25일에 저장
품절
애덤 스미스- 정의가 번영을 이끈다
김광수 지음 / 한길사 / 2015년 2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2016년 02월 25일에 저장
품절



12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2012년 2월 2면

굵은 글씨는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

-----------------------------------------

프랑스가 소말리아의 문제들을 수입한다


발상은 좋아보인다 : 체포 뒤에(after capture) 잡혀있는 곳에서 해적들을 재판에 부쳐라. 그러나 소말리아인 한 그룹에 대한 재판은 군사 투입의 결론이 정치적인 쇼였다는 점을 제기하였다.(But the trial of a group of Somails brought in at the conclusion of an army raid was a political show)


  36살 압둘라히 아흐메드 구엘레는 2011년 11월 30일 석방되었다. 그 바로 전날 자정에, 그가 몇 달 동안 갇혀있던 파리의 상테(La Sante) 교도소 교도관들은 그를 밖으로 내던졌다. 그는 내쫓겨졌으며, 그리고 내버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에 대해 매우 조금 알고, 심지어 소말리 해안으로부터 떨어져 "해적특별법(acts of piracy)" 에 연루되어, 3년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의 석방 이후로, 구엘레는 파리 교외의 (프랑스에 사는 소말리아인들을 위해 지불된(paid))싸구려 호텔에서 지내고 있으며, 그의 좁은 방에서 쫓겨날 것을 걱정하고 있다. "그는 완전하게 상실되었어요(lost). 모든 것이, 특히 언어가, 여기에선 그에게 외국적이지요." 그의 변호사 플로랑 뢰소 드 그랑메종이 말했다. 그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은(feels lost) 거의 놀라기 어려운 일이다 : 프랑스에 대한 그의 유일한 경험은 교도소 벽과 교도관, 그리고 다른 수감자들의 폭력이다. "그의 상황은 선례를 찾기가 힘들고(unprecedented)," 그의 변호사는 말했다. "그는 아무런 타국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아무런 신분증이나 증명 없이, 그가 오기를 원하지도 않고 남을 수도 없는 국가에서 그 자신을 찾는다."


  "이것은 당신이 사람들을 그들의 나라로부터 잡아다가 아무런 예비조사 없이 그들을 다른 데로 데려간 다음 그들을 재판하는 것을 군대에게 허락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이 사건을 맡아 일하는 다른 변호사는 말했다. 구엘레와 다섯 소말리아인들(동일국적자-compatriots)은 2008년 9월 16일 이른 시간 소말리 해역 안에서 16미터의 작은 범선(ketch)인 카레아4(Carred'As IV)호의 안(board)에서 프랑스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2주 전 프랑스인 커플인 장 입스 딜라느와 베나데트 딜라느는 해적에게 피랍당할 확률이 높은 구역(a high incidence of piracy)에서(1) 인질로 잡혔을 당시 프랑스를 향해 요트를 항해하고 있었다. 한 소말리아 인이 그 공격에서 죽임을 당했다. 다른 여섯은 1주일동안 프랑스 군대에 의해 불확실한 상황 속에 잡혔고, 곧 파리로 흘러들어와졌다.(2)


  오직 그들 가운데 둘만이 카레아4호의 공격에 참여했다. 다른이들은 그들(해적들)이 선원을 바꾸고 있을 때, 그리고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늘어선 항구(stops)에서 그들에 가입했다. 구엘레는 그 기습작전 이틀 전에(the day before the commando raid)야 겨우 도착했다 : 그는 요트 습격자들(hijackers)이, 그를 배 안에서 밤을 보내라고 설득하기 전, 그에게 그들(해적들)에게 물고기를 조금 달라고 말했을 때 그 구역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힘든 38개월의 재구속상태(on remand)와(3) 지난 11월 파리에서 있었던 15일 동안의 재판 뒤에, 구엘레는 석방되었다; 그의 다섯 공범자(co-accused)는 검찰(기소-the prosecution)이 요구했던 것보다 많이 적은, 4년 내지 8년을 판결받았다. 재구속 기간은 특별히 길었다. : 벨기에는 비슷한 사건을 판결하는 데 8개월을 쓰고 있으며(has brought), 네덜란드는 18개월, 스페인은 19개월이다.


  검찰은 이들이 위험한 테러리스트라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러나 그 재판은 그들이 정체는 있지만 절대 알려질 수 없는 강력한 지역사람의 명령에 단지 따르기만 했을 뿐이라는 것을 밝혔다. 법정에서, 숙련된 선원인 딜라느는 그들의 미숙함(amatuerism)을 강조했다 : "그들은 배멀미가 있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의 아내는 덧붙였다 : "그들은 모든 면에서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걸맞는(on them)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무기에서 떨어진]" 그들은 딜라느가 화를 냈을 때 그 요트습격자들이 얼마나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는지를 함께 묘사했다. 그는 심지어 어떻게든 엄격한 규칙들(선실에서는 금연이라거나 갑판에서는 먹지 않는다)을 강제로 하게끔 하였으며(maneged to impose), 그들에게 고기잡는 기술들을 가르쳤다. 그들이 기름(pertol)을 찾았을 때, 그는 그들이 동네 낚시꾼에게 물어볼(ask) 것을 제안하였다.


  그 재판의 끝은, 그들의 유괴자들에게 키스하고 그들이 "새롭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희생자들이라는 초현실적 상황이었다. 딜라느는 그의 고유한 평가(verdict)를 전달했다 : "나는 언제나 [구엘레는] 우리의 유괴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유죄였는데, 그가 말하길, 그러나 단지 "그들의 죄과(their depth)를 벗어난 실없는 소리"였다.


  당국(the authorities)은 그와 배심원의 관대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론 검찰(the public prosecutor)은, "그들이 국제사회, 특히 프랑스가 주목할만한 군사 자원을 이동하게끔 이끌고 있는 해적특별법의 중대함과 같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며, 판결에 대한 반대와 구엘레의 석방에 대해 의견을 드러냈다. 그들의 변호사는 이것을 허가로서 바라본다 : "이것은 더 이상 정의에 대한 것이 아니며, 이 화제를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대한 것인데," 드 그랑메종은 말했다. 소말리아 재판 동안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들은 적은 것이 말해졌다(Little was mentioned during the trial of Somalia's Social and political situations). 그러나, 그 변호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프랑스의 간섭을 찬양하는, 대통령 사르코지의 연설이 증거로서 포함되는 때에, 어떻게 그 재판이 정치적이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구엘레의 석방은, 만약 그 여론의 표현이 확증된다면, 정부의 태도에 대한 비난은, 파리의 소말리아 영사 가운데 한 사람을 빌어, "그들이 그들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역으로 보일 것이다. - 영문번역 스테파니 어빈, 한글중역 박효진



각주-

(1) 필립 레이마리(Philippe Leymarie), "펀들랜드의 해적들(Pirates of Puntland)",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2008년 12월

(2) 그 변호사들은 이것이 불법이며, 게다가 유럽인권법정(the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에 세워져야 할 사건이라고 말한다.

(3) 그들은 얼어붙을 듯 추운 프랑스에 도착해서, 각자로부터 분리되었고, 다른 수감자들에 의해 맞았으며(beaten), 그들의 변호사로부터 격리되어 아무런 방문자도 가질 수 없었고, 그들의 가족에 대한 아주 적은 뉴스만 주어졌으며, 다른 소말리아인들과 같은 방에 넣어지고 덜한 외로움을 느끼기 위해 2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