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먼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7
에벌린 워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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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가 선정한 현대 100대 영문 소설작품 중 하나이기도 한 <<한줌의 먼지>>는 영국의 작가 '에벌린 워'의 경험이 반영된 책이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희극 무대에 등장하는 유쾌한 배우들 처럼 보이나 사실은 비극적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이다. 도덕적 가치가 상실되며 무엇이 우선인지를 잊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세상과 단절된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삐뚤어 지고 망가진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품 속 주인공들을 등장시키고 바라보는 가운데서 등장하는 작가의 해학과 풍자는 <<한 줌의 먼지>>가 왜 현대 100대 영문 소설 작품인지를 보여준다.

 

<<한 줌의 먼지>>는 '토니'와 '브렌다 라스타' 부부의 파경을 중심을 통해 영국 상류사회의 허식과 속물 근성을 보여준다. 작품의 성격은 유쾌한 희극을 보여주지만 그 결말은 충격적이며 비극적이다. 그렇기에 작품 서두에 등장하는 "다친 사람은 없었지요?"라는 문장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문장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비극으로 가는데 일조하는 인물들이다. 반면 주인공 부부의 파경과 비극적 결말에 대하여서는 책임 지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 또한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듯 싶다. 이러한 모순을 비집고 들어가서 파헤치는 작가의 필력은 가식적인 인물들에 대한 경고이자 지적의 힘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풍자를 넘어선 그 무언가가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글을 썻다. 그렇기에 작품 속 인물들의 모순을 더욱 잘 이해하였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들의 삶에 대하여 비록 날카로운 펀치를 날리지만 그들을 책망하기 보다는 그들 자체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한것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읽는 동안 작품 속 인물들의 삐뚤어지고 망가져 버린 도덕관념과 가치관들은 독자로 하여금 허탈과 어이없음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상류사회에 속한 이들의 망가진 모습은 이미 웃음과 기쁨을 주는 대상을 넘어서 상실감을 안겨준다. 책의 제목대로 <<한 줌의 먼지>>처럼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은 공허하며 허황되고 위선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반면 작품 속 주인공들을 책망하기 보다는 동정심이 가며 애정이 가는 것은 '망가져 버린 현실'사회로 이야기 되는 인물들을 대변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나도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인물들의 설정과 그들의 몰락을 통해 독자로서 그리고 사회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로서 슬픔과 연민을 함께 느끼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내면적 망가짐을 가지고 살아가는 '비정상적인 삶'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한편의 드라마는 곧 우리 자신의 자화상의 또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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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셀라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6
새뮤얼 존슨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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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라셀라스>>의 원 제목은<<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 이야기>>이다.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방의 작은 나라 아비시나의 '라셀라스'왕자가 겪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질문 그리고 대답들을 통해서 얻게된 해답을 철학적 사고로서 옮겨 놓은 내용이다. 저자인 새뮤얼 존슨은 18세기 유행한 계몽주의(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사고개념)을 통하여 인간의 삶의 의미와 본질을 성찰하는 가운데서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본질과 의미에 대한 성찰의 질문은 비록 작품이 18세기 무렵 쓰여졌더라도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즉 18세기의 독자와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 모두에게 '새뮤얼 존슨'은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라셀라스'왕자를 통해 질문을 성찰하며 이야기 한다.

 

주인공 '라셀라스'왕자는 오늘날 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인 아비시니아의 왕자로 소개되는 인물이다. 대왕의 넷째 아드린 그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며 뭇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축복과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왕자였다. 작가는 '라셀라스'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를 묘사하는 과정 가운데서 독자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행복의 골짜기를 살아가며 불만족스러워하는 '라셀라스'왕자를 소개한다. 무엇이든지 흡족한 왕자의 주변 상황은 결코 왕자의 불만을 없앨수가 없었다. 왕자가 가진 불만은 '부족함이 없다는데 기인'한다. 그렇기에 그의 불만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공감하기 어려운 가운데 놓여져 있는듯 싶다. 하지만 작가는 '유토피아'로 보여지는 골짜기로부터 '라셀라스'를 현실 세계로 이끌어 내고 현실과 마주보는 동기로서 행복의 골짜기에 살고 있는 '라셀라스'왕자의 불만을 이야기 한다.

 

'라셀라스'왕자의 현실로 이야기 되는 세상체험은 왕자의 고민인 '진정한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을 위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여정이다. 이러한 여정은 인간의 순수한 욕망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행복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는 점 그리고 모두가 공감할 법한 삶을 뒤로한 채 참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라셀라스'의 여정은 출발과 동시에 이미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는 우리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을 살펴봄으로서 '라셀라스'왕자가 어떻게 될지 결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행복을 지키기 위해 행복의 '파랑새'를 쫓는 이들과 달리 왕자는 '행복이 없는 불만'가운데서 행복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결말은 어떠할까? 책을 읽는 가운데서 느끼는 것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복에 대한 해답의 다양한 형태의 답변과 사유를 통해 독자들에게 알게 되는 것은 '행복'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한 순간이나마 부질없음을 알게 해주는 메시지를 담고있다는 느끼게 된다.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이야기 할수도 있겠지만 '라셀라스'는 허무주의나 냉소적인 내용은 아니다. 작품속 '라셀라스'왕자는 순진하며 체험을 통해 얻어진 내용들을 사색하며 받아들인다. 그의 여정의 끝은 시작의 목적을 부합시키지 못하는 듯 보일지 몰라도 왕자 자신은 삶에 대한 충실함을 배우고 만족함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왕자의 삶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굴레, 덫의 삶에 빠져들어 삶을 불만족스럽게 하며 포기하는 이들과는 반대되는 실천의 삶을 제시한다. 독자는 '라셀라스'왕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된다. 그 안에서 '행복'을 배운다.

 

삶의 이치와 상식등을 통한 '라셀라스'왕자의 깨달음은 독자에게 주는 작가의 깨달음의 선물이다. 메마른 삶을 살아가며 잡하지 않는 행복을 위해 욕망의 채찍질을 가하는 독자들에게 작가가 주는 선물은 메마른 땅을 적시는 한줄기 우로와도 같은 시간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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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7
에드워드 올비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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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 출신인 '에드워드 올비'는 폭력적인 상황을 통해 관습적인 것들을
흔들어 놓는 것으로 유명한 극작가이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에드워드 올비'가 풀어 놓은 진실을 캐내는 과정과 삶의 부조리를 발견할 수 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역사학과 교수인 조지와 남편의 대학 총장 딸인 마사 부부가 생물학과 교수 닉과 그의 아내 허니를 초대하고 파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식계층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들의 파티는 혼란스럽과 난잡하며 질이 떨어지는 내용으로 이뤄진다. 그들은 밤새 술마시고 서로를 조롱하며 비난하며,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가운데서 음담패설과 욕설을 던진다. 얼핏 보면 이들은 거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처럼 보인다. 파티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내면적인 나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심리학자의 말대로 나약한 이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숨기고 방어하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 속성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있어서 거친 파티의 내용은 서로의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고 진실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세우는 역할을 맡고 있다. 폭력적 상황을 통한 진실 밝히기라는 작가 '에드워드 올비'의 특징이 잘 표현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극작가로서 그의 능력과 진실 마주보기라는 결과 를 통한 거짓된 모습을 밝히는 내용을 보여준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가 독자를 매료시키는 힘은 무엇일까? 만일 이 작품이 고상한 이들이 모여서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그 가운데서 나름대로의 진실을 얻어내는 구조로 이뤄진다면 어땠을까? 단언컨데 작품은 지금 말한 내용을 뒤집어 엎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인 조지와 마사부부는 오랜 기간 1막속 게임을 즐겨왔다. 이들은 게임을 통해서 상대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힐난한다. 그 가운데서 폭력적인 상황이 생기며 독자는 후련함과 흥미를 가지고 상황을 읽어 나간다. 그들의 갈등은 저급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결코 외면하지는 못하게 만든다. 그들의 저급한 상황이야 말로 독자들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외설적 욕구를 자극하며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자 매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매력을 가지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가벼운 주제를 던져 몰입하게 만든 후 진지한 질문을 던져낸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허상과 거짓이라는 주제를 맞이하게 되며 이 주제를 받아들이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대립속에서 함께 맞이하는 것이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속 인물들은 '소통'을 통한 진지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멸시', '소외', '고립', '절망', '실패'라는 다양한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독자와 현대인들에게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배설'과 '소통'을 통한 거짓을 벗겨내고 진실앞에 설것을 주문하며 오늘도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희망'으로 삶을 이끌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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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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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출신인 '치누아 아체베'는 아버지가 목사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문학과 사학을 전공하였다. '치누아 아체베'는 아프리카의 탈 식민지화를 말하며 민족의식과 문화 차이에 대하여 글을 남겼으며 아프리카 인들에게 의식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주기 위해서 노력한 작가이다.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집필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영국 제국주의가 들어오는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하여 쓰여졌으며 당시의 상황과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아프리카의 도덕과 문화를 바로 세워나가기 위하여 쓰여졌다. 젊은 나이에 작성한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잘 짜여진 한편의 영웅 서사시와 같은 느낌을 주는 글이다. 주인공 '오콩코'는 전형적인 아프리카의 영웅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호전적 영웅의 표상이기도 한 '오콩코'는 전사라는 표현이 어울릴정도로 강인한 체력과 정신 그리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 '오콩코'는 여성적인 것을 부정하며 아버지와 대립하기도 하며 다혈질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실수도 저지르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되 누구보다도 뛰어난 전사로 묘사되는 '오콩코'의 이야기는 아프리카의 힘의 원천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아프리카의 문화에 대한 묘사와 부족민들의 생활상 등은 책의 전반부에 상당히 자세히 그리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독자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보고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바라봄을 통하여 우리는 아프리카의 미개성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문화의 가치에 대한 판단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통해서 보류된다. 한편 '오콩코'의 마을로 들어온 '백인교회'로 인한 혼란과 백인들로 넘어가는 힘의 추는 독자들이 생각하는 식민주의 시대를 보여준다. '오콩고'는 아프리카 민족의 고유의 문화와 백인의 문화 충돌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며 그는 아프리카의 문화의 대표이자 의지로서 백인들과 대립한다. 문화와 문화의 충돌가운데서 벌어지는 상황의 변화와 갈등 구조는 과거 식민주의의 침탈로 고난을 받아왔던 여러 국가들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탈식민주의를 표방하며 아프리카 민족의 문화와 내면을 보여주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문화와 문화의 충돌' 가운데서 벌어지는 혼란과 가치관의 몰락과 변화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제는 아프리카의 고전으로서 인류학 보고서이자 아프리카의 문화 보고서인 이 작품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알려준 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의 작품이 아닌 세계에 알리는 '문화충돌'의 보고서이자 '아프리카의 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아프리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오콩코'의 비극적 삶의 최후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보고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넘치는 에너지에 대한 절제와 균형으로 잘 조절하여 독자들에게 펼쳐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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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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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 시카고에서 자라난 '솔 벨로'(본명 솔로몬 벨로스)의 <<오늘을 잡아
라>>는 1956년에 쓰여진 글이다. 주인공 '토미 윌헬름'이 겪는 하루동안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
작품에서 우리는 파국으로 향하여 가는 '토미 윌헬름'의 삶을 볼 수 있다. <<오늘을 잡아라>>는
주인공의 다양한 회상과 독백, 그리고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주인공의 내면을 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 소설의 독특한 특성은 주인공의 독백과 종종 서술되어 있는 시점의
변화이다. 작품의 특징인 두부분을 고려해서 읽는다면 작품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을 잡아라>>의 주인공 '토미 윌헬름'은 나약한 심성과 낮은 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오늘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소외받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고립되는 이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인공은 정서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그의 가족과
가정, 직장으로부터 지원을 얻는데 실패하며 애정을 갈구하는 '잉여인간'과도 같은 존재이다. 무리
혹은 집단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노력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주인공을 더욱 절망 가운데로 몰고 간다. 이러한 절망과 실의 가운데서 내밀어진 파멸로의 유혹자의 손길은 그의 믿음에 상처를 주고 더욱 큰 실패와 좌절을 안겨준다고 말할 수 있다. '실패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주인공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현재를 타파하기 위한 도움을 갈구하며 내밀어진 손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나약한 모습에서 독자는 연민과 슬픔을 발견한다. 물질문명의 사회에서 우리는 돈, 학력, 그리고 가치 가운데서 고민하며 신음하며 살아간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외면한채 또 다른 빛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방황하는 주인공과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잡아야 한다'는 유혹자의 한마디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이다. 그 소리는
미혹의 소리이기도 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의 단발마이다. 하지만 믿었던 확신이 무너질때 우리는 늪에
허우적 대며 그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고독'가운데로 내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삶에조차도 '희망'은 존재한다. 무너져버리는 삶일 지라도 그 앞에는 또 다른 삶이 존재
하며 오늘이 아닌 내일은 또다시 내 앞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는 오늘
내 삶의 전부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비록 '지금 이 순간'이라는 제약된 상황에 우리를 내몰고
가둬서는 안된다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오늘을
잡아라>>는 절망 속에 빠진 이들에게 던지는 작가의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죽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종말이자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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