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 행운돼지 즐거운 책방 1
김종렬 지음, 김숙경 그림 / 다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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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정서에 ‘돼지’는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복을 주는 동물이기도 하고 동시에 태만하고 추악한 악덕을 비유하는 생명체이기도 하다. 이 책의 돼지는 행운을 주기도 하고 다시 빼앗기도 하는 이중성을 띈다. 그런 점에서 악마성이 엿보인다. 행운은 또한 모순적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행운이 참 많군요.” 라고 말한다면 중의적이고 다분히 악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소망하지만 나는 그것을 실재하는 그것을 아직 본 적이 없다. 행복의 세잎 클로버가 우리 주위엔 훨씬 많이 돋아있다는 것을 알고도 우리는 네잎 클로버에 목을 단다.

 ‘모퉁이’는 길이 가다 꺾어지는 곳, 하나의 전환점이다. 우리는 모퉁이를 돌 때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곳을 돌아 눈앞에 펼쳐질 세상은 미처 알고 있지 못하는 별세계일 수도 있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낭떠러지일 수도 있다. 모퉁이를 돌 때면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 ‘길모퉁이 행운돼지’는 이 모든 의미를 함축하여 지은 듯하다. 어딘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책표지의 붉은 색과 기괴한 느낌의 삽화가 내용과 잘 어울려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이 책에 대해 유머러스한 판타지라는 말은, 하나의 텍스트가 관점이나 보는 이의 스키마에 따라 어떻게 다른 프리즘을 그려내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4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모두들 무서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도 음침한 분위기에 긴장과 스릴이 함께 하는 이야기를 따라 다소 공포감을 느꼈다. 무서웠다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내밀한 욕망을 솔직하게 마주할 정도로 진지하기 때문일 것이고, 유쾌하게 읽었다는 독자는 내면에 이러한 욕망이 상대적으로 적은, 희망찬 사람일 확률이 높다.

 <길모퉁이 행운돼지>는 사람의 욕심을 정면으로 들고 나와 실컷 조롱하고 욕심이 과한 사람에게 죄값을 치르게 한다. 욕심은 필요악이다.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지만 지나쳐서 절제의 도를 넘어서게 되면 악을 부른다. 인간의 욕심이 낳은 악행과 악습과 악연의 고리가 얼마나 길고 질긴지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도 명백하다. 이 책은 초등 중학년 정도의 눈높이에 맞춰 사람의 헛되고 과한 욕심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돼지를 통해 형상화하여 명백하게 보여준다. 삽화가 그에 맞게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책장의 색깔까지 침침한 회색이라 불길함을 더한다. 콜라주를 이용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고, 글자의 배열을 특이하게 배치한 삽화와 조화롭게 두어, 마치 그림책 <작은집 이야기>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상하게 하는 재미가 있다. 

 주인공 ‘나’는 진달래 마을의 초등학생이다. ‘꼬치꼬치 기자’, ‘다잡아 경찰관’처럼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하나같이 기발한데 주인공 남자아이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여러 가지 해괴하고 두려운 일들을 보고 ‘나’는 진실을 말하고 싶지만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같은 반장 ‘소심해’뿐이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진실을 보지 않는 사람들,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차츰 추하게 변해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공포심을 자아낸다. 결말은 열어두었는데 희망의 빛을 조금 느낄 수 있다. 도식적인 결말을 유도하지 않은 점이 가장 돋보인다.

 아이들과 독후활동으로 뒷이야기를 써보았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문제를 유쾌하게 해결하는 ‘나’를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이름을 생각해보고 뒷이야기에서 밝혀보아도 좋겠다고 했더니, ‘똑똑해’, ‘진실해’, ‘무서워’ 같은 재미난 이름이 나왔다. 아이들은 한 번 얻은 행운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과 불운이 행운으로 전화위복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행운돼지는 진달래마을 사람들에게 어쩌면 오래오래 행운을 가져다 준 돼지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모든 건 독자의 몫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이다.

 

 아이들은 아무리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라도 그 안에서 빛을 찾고 눈을 반짝이면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아무리 무거운 이야기도 가볍고 밝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으로 담아내는 것 또한 아이들 특유의 천성이다. 아이들은 때때로 어른보다 오히려 진실을 보는 눈이 밝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마주할 때면 시시때때 두려운 것이다.

 

 

 살면서 행운이 몇 번 올지는 모르겠지만, 행운이 왔다고 자만하지 말고 불운이 왔다고 좌절하지도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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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이 2007-10-19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
이 책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발하고, 개성있는 글과 그림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지요.^^

프레이야 2007-10-19 11:11   좋아요 0 | URL
정말 기발하고 재미있었어요.
우리들 마음의 어두운 면을 아이들도 바로 볼 수 있어야겠지요.
행운을 얻었다고 자만하지도 불운이 왔다고 좌절하지도 않아야겠어요.^^

비로그인 2007-10-1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앞의 현실을 저는 직시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누추한 현실.. 일부는 두렵기도 하고요. 하하
예정보다 일찍 서재 문을 다시 열었답니다. 혜경님
이젠 더 자주 뵙지요.


프레이야 2007-10-19 19:40   좋아요 0 | URL
누추한 현실, 직시하기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겠지요. 저도 못 그러고
살지만요.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는 일은 없도록 깨어있어야겠구요.

홍수맘 2007-10-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먼저 읽어보고 싶네요.
나 역시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핑크빛 미래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봤어요.

프레이야 2007-10-19 19:42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 자라면서 함께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많아지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일 거에요.^^ 지금 노력하는 만큼의 대가만 바란다면 좋을 텐데
그 이상으로 많은 걸 바라면 판단력을 잃게 될 거라고 이 책이 말하더군요.
아이들에게도 진지한 생각을 해보게 하는 좋은 동화였어요.

봄나무 2014-03-2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음주에 이 책으로 5학년 학생들 수업합니다. 프레이야님의 서평이 도움이 되네요. 감사^^

프레이야 2014-03-2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나무님 반갑습니다 오래전에 수업한 책인데 아직 이책이 읽히는군요 좋은책은 수명이 없지요 닉이 참 싱그러워요 봄나무님^^
 

 

무릎을 잊어버리다

 



엄원태




  한동안 무릎은 시큰거리고 아파서, 내게 각별한 관심
과 사랑을 받아왔다. 아침산책 몇 달 만에 아프지 않게 되
자 쉽게 잊혀졌다.

  어머니는 모시고 사는 우리 부부에게 무관심하고 무뚝
뚝하시다. 때로는 잘 삐치시고 짜증까지 내신다. 어머니
보시기에, 우리가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삼시 세
끼를 꼭 챙겨드려야 마지못한 듯 드신다. 어쩌다 외출이
길어져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그때까지 밥을 굶으시며
아주 시위를 하신다. 어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아픈 무릎

이다.

  아우는 마흔 넘도록 홀로 대척지인 아르헨티나로 멕시
코로 떠돌아다닌다. 아우에 대한 어머니의 염려와 사랑
은 참 각별하시다. 아우는 어머니의 아픈 무릎이다.



- <물방울 무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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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10-1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오는 날은 더 생각나는 무릎이겠네요.

프레이야 2007-10-18 12:04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그래서 비오는 날 무릎이 쑤신다고들 하는 걸까요?
근데, 님이 벌써 그런 건 아니죠? ^^
저도 그렇지 않답니다.

비로그인 2007-10-18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들며 어깨, 무릎이 시큰거리면
불현듯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예전에 그러셨겠구나..


프레이야 2007-10-18 14:29   좋아요 0 | URL
한사님, 가을 잘 보내고 계시온지요.^^
나이 들어가며 늘어나는 아픈 무릎, 아픈 어깨, 아픈 허리...
그까진 아니더라도 아픈 손가락에 대한 각별함.

2007-10-1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8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10-1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좋군요. '아픈 무릎'이라.
나에게 '아픈 무릎'이란 무엇일까.

프레이야 2007-10-1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유난히 예민하게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 그중에 저도 들어가려나 모르겠어요.
그런 때도 있고 아닌 때도 있지요. 그런데 예민하게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사랑이 많은 사람 같아요. 네, 우리, 그렇게 안고 가야겠지요.
님의 리뷰 잘 읽고 있어요. 그저 추천만 누르고 나오지요^^

엘신님, 에게 아픈 무릎은 무엇일까? 다들 하나쯤 있을거에요.
가을 참 좋습니다.^^
 

지구, 지구생물, 지구환경에 대해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답해주는 책. 

공생과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생활 속의 실천을 북돋우는 어린이책을 모아봅니다

읽었던 것들 중심으로.


4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환경보고서 땅- 어린이를 위한 환경보고서 02
김맹수 지음, 최달수 그림 / 해와나무 / 2005년 6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2007년 10월 19일에 저장
절판

나는 둥그배미야- 김용택 선생님이 들려 주는 논 이야기
김용택 지음, 신혜원 그림 / 푸른숲 / 2002년 11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2007년 10월 19일에 저장
절판

어린이 환경사전- 개정판
이창형 지음 / 계림북스쿨 / 2005년 5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2007년 10월 19일에 저장
품절
일목요연
똥의 재발견- 환경과 생명의 꽃
서울랜드 엮음, 권현진 그림 / 문공사 / 2001년 4월
6,000원 → 5,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5% 적립)
2007년 10월 19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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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0-17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도움되는 목록이에요. 별찜!!

프레이야 2007-10-17 10:21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뽈찜!하셨어요^^

네꼬 2007-10-1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열아저씨의....와 어진이의 농장일기, 저도 아주 좋아해요. 특히 최열 아저씨 건 조목조목 아주 쉽고 재미있지요. (^^)

프레이야 2007-10-18 20:57   좋아요 0 | URL
네네 ㅎㅎ
'최열아자씨' 책 참 좋아요. 읽기에도 조목조목 쏙 들어오게 명료하고^^
이 리스트의 책들, 나이많은 것들이 많아 묶어놓고보니 좀 그렇네요.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6월
구판절판


중국이 스포츠 강국이 된 것은 국가적인 스포츠 육성책과 두터운 선수층, 포상제도와 국민의 관심 덕분이다. 무림고수는 아무 상관도 없다. '가들이 우얘든동' 우리에게는 '그렇다 카더라'가 있어 삶의 그늘이 시원해지고 우물은 깊어지며 숲이 우거진다.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낼'만하게 즐거워진다.-85쪽

주목은 생장이 몹시 느린 나무다. 칠팔십 년을 자라도 키가 10미터가 안 되고 줄기의 지름은 20센티미터 정도다. 그렇지만 주목은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기본이 천 년인 '쳔년대계'가 있다. 백 년 정도만 참고 있으면 빨리 자라서 설쳐대던 나무들이 늙어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생장이 빨라져서 마침내 주목은 산정의 제왕이 된다.-135쪽

추사는 귀양살이에서 서울로 돌아온 1852년부터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과천 청계산 자락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생애의 마지막을 보냈다. 추사의 만년작으로 대표적인 것은 봉은사의 현판인 '판전'으로 죽기 사흘 전에 쓴 글씨다. 같은 해에 쓴 글씨 '대팽두부大烹豆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자 원문 생략)
최고의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최고의 모임은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손자로다.
......(중략)
이렇듯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나 살며 호의호식에 젖어 살던 추사가 인생의 종착점에 다다라 '최고의 음식은 두부...'라니 활연대오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대팽두부'는 노대가의 간명하고 고졸한 깨달음의 꾸밈없이 표현된 불후의 명품이다.-158-159쪽

엔도르핀과 같은 화학물질들은 뇌조직의 뉴런 사이를 오가면서 고통을 완화시키다가 고통의 원인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더라도 신속하게 흡수되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 이리하여 일시적으로 아편제가 과다한 상태가 되어 쾌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중략)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미량의 화학물질에 우리이 희로애락이 좌우된다는 것이 조금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뇌의 반복적인 '엔도르핀 과잉'으로 인해 운동중독이 된다는 것이다.-192쪽

로또에서 1등에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은 1/8,145,060이라고 한다. 내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위대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내 아버지의 정자이자 나의 한 부분이 언젠가 한 번은 일등을 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평생 한 번도 일등을 못해봤다는 못난 생각은 하지 말자. 내 옆 사람이 그렇고 그 옆의 옆 사람, 옆의 옆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평생 한 번도 일등을 못해봤을 거라고 무시하지 말자. 그들은 우주의 별보다 많은 숫자의 분모를 거느린 확률을 뚫고 태어난 위대한 존재들이다.-195쪽

5월이었지만 계곡에는 지난 계절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바위 위에 앉아서 밥을 비벼서 첫술을 입에 넣었다. 그 맛은 좀 무뚝뚝하다고나 할지 간소하다고나 할지, 세속의 식당 음식처럼 혀에 착 안겨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평범한 밥 한 그릇에서도 문을 닫아걸고 치열하게 법과 자아로 가는 유위有爲만을 궁행하고 있는 절 식구들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누군가 자꾸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며 소나무 가지가 들어 올려졌다. 멀리 하얗게 빛나는 희양산의 큰 바위가 바라다 보였다. 천년만년을 용맹정진으로 버텨온 큰 뜻 품은 사내 같은 그 견결한 이마를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메어왔다. 밥 때문이겠지. 나는 숟가락으로 희양산 깊은 속살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물을 떠서 천천히 마셨다. 일평생 기억될 만큼 차고 달았다.-230-231쪽

처음 애저찜을 앞에 두게 된 채만식은 '애색'해서-마음이 애처롭고 안타까워서-애저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기야 영계백숙은 안 애색한가. 구워서 짝짝 찢어 먹는 명태 새끼인 노가리는? 새끼 이전 상태로 '우리가 일상 흔연히 감식하는 우유며 어란이며 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천하 잔인스러운 짓이요, 하필 애저찜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아침에 여관집 마당으로 꼴꼴거리며 돌아다니던 도야지 새끼가 눈에 밟히고, 또 간밤에 술자리에 불려온 애기 기생이 노래를 한답시고 애를 써 쌓는다 시달림을 받는다 하는 게 생각이 나 젓가락을 놓아버렸다고 적고 있다.-248쪽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왜놈'의 '왜'를 '키 작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왜소矮小'하다고 할 때의 '왜'와 倭(왜)는 분명히 다르다. 키가 작고 재빠르다는 왜인들의 인상이 우리나라 사람들 눈에는 작게 느껴졌을 수 있다. 속 좁고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정신적 왜소증이 혼동을 초래하는지도 모른다.

남의 나라 땅에 슬쩍 발을 걸치고 동정을 엿보다 그 발을 근거로 자기 것이라 우기는 데 이골이 난 조상의 피가 아직 흐르고 있는 것일까. 왜인들의 도발은 그칠 줄 모른다. 댜오위타이섬을 두고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에서는 이런 추악한 일본인을 '르번꾸이즈'라고 부른다. '일본악귀' 정도의 뜻이다.-351쪽

"네가 버린 불씨 화재 되어 돌아온다!"
흔히 보듯 '내가 버린 불씨 화재 되어 돌아온다'는 것도 아니고 '네가 버린 불씨 화재 되어 너에게 돌아간다'도 아니었다. '네가 잘못하면 내가 손해 본다'는 이 청천백일하의 간단명료한 가치관! 나는 죽 끓이는 해녀들이 깜짝 놀라도록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360쪽

사냥을 할 때면 개는 주인보다 최소한 네 배 이상의 거리를 뛰어다닌다. 주인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과 기동력을 가지고 느려터지고 둔한 주인의 능력에 맞춰서 최선을 다해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사냥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순간의 주인공은 개가 아니라 주인이다. 주인이라는 인간은 개가 그토록 힘들게 추적해서 쏘기 좋도록 공중에 날려 보내준 사냥감을 놓쳐버리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개를 탓한다. 저렇게 똑똑한 꿩을 찾아내면 어쩌라는 거냐고.

한 해의 모든 순간이, 매분 매시 하루 한 주 한 달이 개처럼 충직하고 영민한 시간일진대 주인공인 우리에게는 그 순간을, 기회를 허공에 헛총질하는 식으로 허비하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윤리가 있다. 지금 '58년 개띠'들은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개발에 땀나게 뛰고 있을 것이다. 진희 씨, 영준 형, 성겸 형, 형근 형, 봉희 형..... 그들이 보고 싶다.-388-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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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007-10-17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수다스러운 책이죠.
어찌 그리 지식과 정보를 두루두루 얘기하는지.
얼마전 읽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

프레이야 2007-10-17 10:22   좋아요 0 | URL
입담이 어찌 좋은지 재미나게 읽었어요.^^

씩씩하니 2007-10-1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목에 대한 부분에서,,,가슴이 찡해요..참 슬픈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늘..

프레이야 2007-10-17 13:39   좋아요 0 | URL
어머, 하니님, 저도 주목이 가장 찡했는데요^^
우린 너무 조급해 하고 갈급해 하는 건 아닌가 싶어요.
백년동안 때를 기다린 주목의 지혜가 저를 부끄럽게 했어요.
 

 

길의 길

 


함민복




길 위에 길이 가득 고여 있다
지나간 사람들이
놓고 간 길들
그 길에 젖어 또 한 사람 지나간다

길도 길을 간다
제자리걸음으로
제 몸길을 통해
더 넓고 탄탄한 길로
길이 아니었던 시절로

가다가

문득 
터널 귓바퀴 세우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의 소리 듣는다




- <말랑말랑한 힘> / 문학세계사

 

--------

 

 

가을길에 나섰드랬습니다. 겨자색 들판과 약간은 흐릿한 회청색 하늘 아래 길은 제자리걸음을 걷는 양, 우리를 태운 버스는 가는 듯 마는 듯 굴러갔습니다. 길 위에 길이 어찌나 빠르게 겹쳐오는지 미처 길을 느낄 새가 없었나 봅니다.

 

내려서 발로 길을 밟았습니다. 햇살에 눈이 부셨지만 똑바로 올려다 보았습니다. 능선처럼 누운 무덤들은 천오백년을 침묵으로 버티고 있고 우리들은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습니다. 진흥왕 척경비보다 퇴천3층석탑이 눈을 잡아 끌었고 석탑의 깨어진 귀퉁이 돌들을 보며 탑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견고해 보이는 석탑은 앞과 뒤가 다른 모양새를 띄지 않았고 3층 처마끝 부연으로 치켜올라간 맵시가 멋스러웠습니다.

 

며느리서까래, 부연을 부여잡고 나는 오래오래 전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일화를 그려봅니다. 누가 지은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서까래의 1/3 가량의 길이로 덧된 부연의 기능과 아름다움이 재치있는 이야기와 어울립니다. 며느리의 지혜로 날아갈 듯한 곡선을 완성한 늙고 완고한 시아비의 주름살을 생각해보다 그만 일행과 조금 멀어져 있었습니다.

 

길 위에 서면 시간의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이 말하길 길이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다던 길과는 달리, 시간은 시간이 아니었던 시절은 없지 싶습니다. 면면히 이어지고 겹쳐지고 빠르게 달아나고 밀어낸 시간들이 길 위에 나란히 있습니다. 가다가 터널을 만나면 내가 가고 있는 시간이란 길의 소리에 귀기울여 봐야겠습니다.

 

나도 시간도 하나의 길이란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내 안의 터널을 만나면 잠깐동안 막막하지만 감각은 다시 몇배로 살아나고 집중력은 높아지고, 오로지 나아갈 방향은 빛이 비쳐들어오는 출구밖에 없다는 절박감이 그곳을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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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10-1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가 자기가 만들 길을 가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 길을 알고 느끼면서 가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길을 가면서도 길위를 가는 지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어느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옳바른 길을 가고 있는 걸까요? 알고 싶어집니다. ^*^

실비 2007-10-1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은 맘에 와닿는 글을 잘 올려주시네요~

소나무집 2007-10-1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가을이 천천히 와서 좋아요. 늘 후다닥 짧게 지나가버려서 아쉽더니 올해는 가을이 마음에 듭니다. 천천히 왔다 천천히 가길.

바람결 2007-10-16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함민복 시인의 시를 마주할 때마다 늘 우리네 일상의 구체를 생각합니다.
'길도 길을 간다'는데 제 삶은 길가 어디쯤엔가 머츰하게, 내동댕이처럼,
그렇진 않은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빛과 어둠이 갈마드는 것이 인생이고 보면 터널은 분명 빛을 향한다는
분명한 깨침이 또 저를 깨뜨립니다. 참 날 밝은 날이로군요.^^

프레이야 2007-10-1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아주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님은요^^
누구나 그 정답을 알기는 어렵지만 소신있게 나아가는 것이겠지요.
이 가을, 좋으신지요?^^

실비님, 마음이 부대낄 때면 시집을 뒤져봅니다.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다 탁 걸려드는
싯구에 제맘이 그대로 가닿는 경우, 참 기쁩니다. 실비님에게도 그리되었다니.. ^^
가을 즐기고 계신지요.^^

소나무집님, 저도 올가을이 참 좋습니다. 지난 여름이 유난히 무더웠고 우리네 마음이
너무 지쳤기 때문일까 싶어요. 천천히 음미하며 이 가을을 보내자구요^^

바람결님, 님이 좋아하는 시인이지요? ^^
머츰하게 가는 '길'이 더 좋을 것 같아요. 둘레거리기도 하고 깨끔발 하다 넘어지기도
하고 그렇게요. 터널 끝 서치라이트처럼 밝히고 있는 불빛, 님에게도 저에게도 그런
빛 하나 분명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