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풍의상(古風衣裳)

조지훈



하늘을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 저고리
호장 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도라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추운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춰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를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이냥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어다.

 

[문장 3호 1939.4]

 

----------

 

'부연'과 관련한 이야기를 찾다가 오랜만에 읽게 된 시. 그 안에 '부연'이 있다.

며느리서까래, 부연에서 생각을 건지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07-10-1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이 시 우리 국어책에 나왔었지요? 아닌가...

바람결 2007-10-1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아름다울 수 가요. 몇 번이나 소리내어 읽다보면 이 밤에 두견이 소리 들리는 듯 하고, 눈 앞에 '기인 치마' 물결치듯 아른거려요. 참 좋으네요.

혜경님, 행복한 주일 보내셨어요?^^

프레이야 2007-10-14 22:14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저녁에 잠시 나갔다 왔는데 바람이 차고 날이 많이 쌀쌀해졌어요. 느긋하게 보냈습니다.^^

hnine 2007-10-14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비슷한 제목의 다른 시가 국어 책에 나왔었는데, 이 시 제목을 국어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면서 비교해보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이 시가 더 수작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이젠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 생각이 안 나네요. 이거 생각나야 잠이 올텐데...ㅋㅋ

프레이야 2007-10-14 22:12   좋아요 0 | URL
님, 저도 오락가락하지만 '승무'가 아닌가 싶어요.
님의 편안한 잠을 위해 혹시나 드려요^^

승 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 보선이여 !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2007-10-14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10-15 08:54   좋아요 0 | URL
신석초의 고풍, 찾아봐야겠어요. 저도 반가워요^^
시를 좋아하시는 님, 어젯밤 결국 생각해 내셨군요^^

2007-10-15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요.

프레이야 2007-10-15 17:11   좋아요 0 | URL
뉘신지요? 모습 보여주시면 더 좋을텐데요^^

소나무집 2007-10-1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신경숙의 <리진>이 생각나네요.
신경숙도 이 시를 읽고는 리진이 춘앵무를 추는 장면을 묘사한 건 아닐까 싶은데요.

홍수맘 2007-10-1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학교 다닐적 배웠던 시들을 찾아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는 ^^;;;
"조지훈 = 청록파" 하면서 외워던 기억도 새삼 떠오르네요.

향기로운 2007-10-1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보네요^^*

비로그인 2007-10-1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통춤을 추는 여인의 치마 끝의 버선 발은
매력적입니다. 하하


프레이야 2007-10-15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 리진 사두고 아직 안 읽었네요. 리진이 춘앵무를 추는 장면에서
천천히 씹어 읽어볼게요.

홍수맘님/ 그러게요.ㅎㅎ 전, 학교 다닐 적엔 시를 그저 도구로 읽었던 것 같아 아쉬워요.

향기로운님/ 백조로 완전 거듭나면 자주 놀기에요.^^

한사님/ 살짝 치켜든 하얀 버선발, 매력적이에요.^^
언젠가 살풀이춤을 봤는데 참 좋더군요.
댓글저장
 
사진, 영화를 캐스팅하다
진동선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5월
품절


전후 유럽 최고의지성인이자 세계적인 극작가인 브레히트도 '사진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브레히트 옆에는 늘 가위와 풀이 있었다. 나치를 피해 도망다니던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거짓 사진을 오려 사행시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보게 형제들, 지금 무얼 만들고 있나? - 장갑차"
"그럼 겹겹이 쌓여있는 이 철판으론?"
"철갑을 뚫는 탄환을 만들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왜 만들지? - 먹고 살려고."
-<장갑차와 강철탈환 사진 앞에서>

나의 마지막 바람은 그가 뒈지는 것.
너희도 들었겠지. 그가 철천지원수라는 걸. 그건 사실이야.
난 그런 말을 해도 돼. 내가 지금 있는 곳을
아는 건 오직 르와르 강 한마리 귀뚜라미뿐이거든.
- <무명용사의 묘비 사진 앞에서>

이렇게 브레히트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문과 잡지의 거짓 사진을 오려 그 옆에 진실한 사행시를 썼다. 그 사진시가 유명한 <포토 에피그람 Fotoepigram>, 사진의 또 다른 진실을 밝힌 브레히트의 사진시다. 영화 <스토커>에도 역시 브레히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진은 과연 행복의 증거인가? -53-55쪽

메이킹 포토의 구성,해체,재구성은 실재가 아닌 가상을 전제로 한다. 연출된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그렇다고 삶의 리얼리티까지 배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적극적,전략적으로 드러낸다.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지 않고 구성,해체,재조립하려 한 것은 사라진 실재, 사라진 리얼리티 때문이다.-72쪽

삶과 죽음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보는 까닭은, 우연적인 삶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느끼는지, 그럼에도 그때그때 존재의 자국이 어떻게 남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웃음과 미소는 그 자국 중의 하나다. 영화 속에서 웃음은 존재와 부재의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한다. 웃음의 존재는 죽음 이후를 겨냥한다. 망자의 생전에 웃는 모습은 산 자에게 그리움의 표상이다.-141쪽

그렇다면 왜 초상일까? 사진의 등장으로 만들어진 초상의 새로운 형태form가 바로 카메라를 마주보는 正面性이다. 초상의 정면성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전면을 통해 나타나는 초상의 정체성이다. 이를 우리는 '파사드facade'라고 부른다. 파사드는 건축에서 쓰는 말로 건축의 중심, '퍼스펙티브perspective'의 중심을 의미한다. 자주 하는 말로 '전면에 내세운다'고 할 때 그 전면성이 바로 파사드다.-145쪽

파사드는 전면을 통해 드러나는 대상의 특징이자 성격이다. 사진에서 파사드라는 말을 쓴다면 전면을 통해서 대상의 정체성identity을 드러내는 초상사진일 경우일 것읻. 그렇다면 사진의 정면성과 전면성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정면성이 물리적인 방향이라면 전면성은 심리적인 형상이며, 정면성이 모델과 카메라의 관계라면, 전면성은 모델과 관객과의 관계다.

사진 발명 직후에는 긴 노출과 초점 때문에 카메라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고, 단체촬영의 경우 한정된 프레임 때문에 서로 몸을 밀착해 사진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면성'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초상사진의 정체성은 정면성보다는 오히려 전면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특히 가족사진에 두드러진다.-146쪽

뒷모습은 무심한 저쪽, '한 판의 공간, 한 자락의 옷, 하나의 전체로서' 숨죽인 모습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뒷모습은 확실히 모든 것이 드러나는 앞모습과 달리, 늘 존재론적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뒷모습은 우리 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말해질 수 있음과 말해질 수 없음의 어떤 간극, 또 그 간극만큼의 거리를 알게 한다.-209쪽

디지털 시대를 맞아 사진은 재현의 위기와 마주쳤다. 더 이상 사람들은 사진을 현실을 재현하는 가장 유효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시대를 맞아 이제 진실의 대명사에서 탈각되고, 시대의 증언자, 시대의 목격자로서의 권능도 상실했다. 시뮬라크르 세계에서 '현실의 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참이라고 확신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가짜라고 해서 회의하지도 않는다.

사진의 죽음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진이 참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현실이 참이어야 하는데, 이미 우리 세계는 모조물로 채워진 가짜다. 우리 삶이, 현실이 점점 모조의 세계를 연출하는 이상 사진의 정체성을 잃고 만다. 테크놀로지의 상징인 사진이 테크놀로지에 의해 정체성을 의심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220쪽

이렇듯 사진은 기억을 넘어서 현재화된다. 사진은 그 점에서 롤랑바르크가 말했듯 어떤 '푼크툼(punctum, 찌름)'이다. 푼크툼은 말 그대로 타이어가 미세한 바늘 촉에 찔려 터지는 것처럼, 사진의 작은 세부, 아주 작은 이미지가 보는 이에게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남기는 상처다. 그러므로 사진은 존재의 자국, 흔적, 상처이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다.-222쪽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카메라도 총이나 자동차처럼 중독되고, 유희적이며, 황홀감을 유발시키는 기계fantasy-machine"라고 말하며, '사진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적 폭력은 사진을 찍는 행위가 단순한 수동적인 관찰을 뛰어넘어, 관음증 환자처럼 은밀하고 노골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각적 잔인성에서 온다.
......
이미지 사냥꾼인 카메라 그리고 세계의 수집가인 사진 앞에서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이 윤리성이라고 수전 손택은 말한다. 그녀는 "세계에 대하여 사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우리의 인식을 자극시킬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진은 주체적으로 윤리적 혹은 정치적인 지식을 공급해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238 쪽

영어의 이미지image는 라틴어 이마고imago에서 온 '유령'이라는 뜻의 단어다. 또 형상이란 뜻의 영어 피규어figure도 귀신이란 라틴어 피구라figura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진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처럼 거울이미지는 유령, 귀신, 마법의 영역으로 인식된다.
-254쪽

사진 보는 법을 배웠다는 것은 거울 속의 세계를 알았다는 뜻이다. 이는 또 세상을 거울처럼 좌우대칭으로 본다는 뜻이다. ...... 거울이 진실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거울이 완벽한 반영이라는 것도 허구일 뿐이다. 거울 속의 이미지는 한 순간 거울 밖의 존재를 배반할 수 있다. 영화는 바로 이것, 거울 속에 또 하나의 독자적 세계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속지 마시길, 거울은 닮은꼴일 뿐이니까.-256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10-15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상과 앵글의 선택은 사진 작가의 의지입니다.
화가의 화필처럼.

댓글저장
 
이찬실 아줌마의 가구 찾기 돌개바람 9
박미라 지음, 김중석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이찬실 - 아줌마 - 가구 - 찾기

네 개의 단어가 낱자로 눈에 든다. 어린이가 읽는 동화지만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이들은 별로 관심 두지 않는 '가구'는 목적어격이다. ‘찾기’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활동이다. 숨은그림찾기, 보물찾기, 또 뭐가 있더라..

 이찬실,이라고 하니까 찬찬하고 진실한 사람일 거란 느낌이 든다. 수수하다못해 조금은 촌스러울 것 같은 이름이다. 뜬금없이 초등학교 때 ‘진실’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생각난다. 하기야 탤런트 이름에도 동명이 있다. 노란색의 밝은 책표지에는 아줌마가 청소기를 손에 들고 다른 손엔 걸레를 쥐고 서 있다. 북술북술한 퍼머머리에 조금 뚱뚱해 뵈는 몸, 앞치마를 걸치고 팔을 걷어부치고 서 있는 모습이 사람들이 썩 호감을 느끼지 못할 인상이다. 어디서 많이 본 생김새 같다 싶어 그린이 이름을 확인하니, <나는 백치다>의 삽화를 그린 김중석님이다. 이 책에서는 수채물감을 연하게 풀어 붓을 쓰윽쓰윽 그은 듯 자연스럽고 편한 삽화가 술술 읽히는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

 이찬실 아줌마가 가장 아끼던 가구는 장롱이었다. 나는 오래 전 결혼을 하면서 처음 장만했던 장롱이 생각났다. 아줌마의 장롱은 십장생이 양각으로 새겨진 오래된 장롱인데 나의 그것은 십장생은 아니지만 양각의 무늬를 따라 사이사이 먼지를 닦아 줘야했던, 그저그런 디자인의 둔탁한 갈색 덩치였다. 만 11년을 함께 한 그 장롱을 4년 전 이사를 하며 폐기했다. 어렵사리 신혼살림을 시작하여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그런 것들이 마치 가족인 양 쉽게 버리기가 내키지 않았다.  전혀 생각이 없을 무생물에도 애정을 품게 되는 게 사람인가 보다.

 살아오면서 누구도 알지 못할 뼈아픈 이야기와 알콩달콩한 사소한 이야기,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 가구다. 정든 가구는 쉽게 버리지 못할, 식구 같은 것이다. 가구는 그 집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집주인의 취향과 살아가는 결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구는 눈 뜨면 늘 봐야하고 고정된 채 붙박여있는 물건이지만 손때가 묻고 먼지가 앉은 그것들이 하나하나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여 추억을 공유하는 어떤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찬실 아줌마는 가구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 이유는 구구절절하다. 그걸 다시 찾는 과정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맺기에 성공한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덤으로 얻었다. 그녀의낡고 빛바랜 기억이 선명해짐을 느끼게 되는 건 더께 같이 앉은 먼지를 털어내듯 오래된 가구를 모조리 내다 버린 후부터다. 하지만 가구를 버리고 아줌마가 기대했던, 전혀 다른 삶을 얻지 못한다. 더 좋은 집에서 새로운 가구와 조화로운 이탈리아 풍의 테이블램프보다 이전에 자신의 머리맡을 지켜주던 퇴색된 꽃무늬 갓을 쓰고 있는 작은 램프가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마치 '거위털 이불이 몸에 착 감기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는 이상한 느낌을 갖는다. 그건 뭐랄까. 자기 것이 아닌,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것 같은, 소외감, 고립감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 아주 어릴 적의 아련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그녀의 기억 속에 살아난다. 그것들을 내다버리려 했다니. 그것들은 아줌마를 살게하고 만들어준 소소한 이야기들인데. “이게 다 그놈의 가구 때문이야.”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그녀의 마음과 삶을 단정한다. 내성적이라 다른사람에게 먼저 말도 잘 못 걸고 바깥출입도 잘 안 하는 생활은 남들에게 '거만함'으로 보이고, 가구를 죄다 내다 버리고 인사도 없이 이사를 가버린 행동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된다. “좋은 집으로 이사 간 사람이 여긴 왜 왔어?"  야채가게 아줌마의 이 말이 뾰족하다. 수수한 이찬실아줌마는 이런 말에도 날을 세우지 않는다.

 그래도 결말은 안심이 되는 쪽으로 흐른다. 이찬실 아줌마가 세상의 사람들과 하나씩 관계를 맺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가구를 찾아다니며 세상의 바람을 코로 마시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기에 얻은 것이다. 동네 아이들, 야채가게 아줌마, 유모차 할아버지 그리고 화가선생님. 그녀는 이제 눈 뜨면 하릴없어 무료한 아줌마가 아니라 바지런히 할 일들을 목록으로 적어가며 하루를 바쁘게 사는 아줌마가 되었다. 작은 목소리로 나누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창밖에서 수채물감으로 번져오는 바람의 색깔처럼 예전과 달리 느껴진다.

 그래서 가구는 다 어떻게 되었냐고? 그녀에게 가구는 이제 그냥 ‘가구’일 뿐이다. 가구야 뭐, 유모차 할아버지 집에 가면 미운정고운정 든 친구를 만나듯 그걸 쓰다듬을 수 있다. 이제는 다른 것에 더 몰두할 것이다. 그녀는 잘 하는 게 많다. 집안 청소하기, 할아버지와 이야기 나누기, 가구 반들반들하게 닦기 그리고 한 가지 더, 자신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진짜 특기가 있다. ^^ 그녀는 자신이 잘 하는 것,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자신만의 ‘가구’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동시에 그것들과 오래 함께 할 것이다. 물론 그녀의 곁에는 평생을 동행할 좋은 사람도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다. 하지만 저학년동화로 나온 것인데 저학년 아이들은 그다지 흥미로워 할 주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발상은 아주 좋은데 아이들 또래의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은 점도 아이들의 호기심에서 살짝 비켜날 우려가 있다.  2~4학년 권장.

 



댓글(7)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에 2007-10-1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40대 권장일꺼 같은 느낌. 저도 단정짓기하지말고 가구찾기 해야겠어요~^^

프레이야 2007-10-13 22:52   좋아요 0 | URL
그죠? 누에님, 주제가 아이들이 끌릴 만할 것 같지 않은 게 좀 걸려요.
전 재미있었지만요. 누에님이 내다버린 오래된 가구는 뭐가 있을까요?^^

마노아 2007-12-1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공지보고서 왔어요. 리뷰대회 입상이에요. 축하합니당~

멜기세덱 2007-12-14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프레이야 2007-12-1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거덩, 무슨 입상이람요.. 싶어서 찾아보니 뭐가 있긴 있네요.
알려주셔서 고맙고 축하해주셔서 더 고마워요.
리뷰대회 공지 못 보고 쓴 건데 완전 '왠 떡'이에요.
마노아님은 몇관왕이시더군요. 많이 축하합니다~~
세덱님은 뭐 두말 할 것 없이 일등 자리에 굳건히~~ ^^

순오기 2007-12-15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혜경님 축하합니다.
리뷰대회 공지도 못보고 쓰셨군요. 역시 내공이 상당하십니다!!
전, 써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끙끙거리다가, 마감시간 20분전에 올렸거든요.

프레이야 2007-12-14 19: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손오기님이야 워낙 더 내공으로 똘똘 뭉치셨잖아요^^
나중에 공지 보고 리뷰도서리스트를 훑어보니 이 책이 들어가 있더군요.
완전 그저 건진 것 같은 이 느낌, 룰루랄라~
댓글저장
 

가끔 동시를 읽으면 생글생글한 말들이 입속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동시를 읽으며 깔깔깔 낄낄낄 즐거워하고, 때로는 갸우뚱하기도 해요.

어른들은 동시를 읽으면 간결하게 사는 것이 마냥 그리워져요.

그동안 읽었던 동시집을 모아봅니다. 초등저학년에서 고학년까지~


2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좋은작가 좋은동시
한국동시문학회 지음, 최영란 그림 / 예림당 / 2003년 2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2007년 10월 16일에 저장
절판

눈을 떠 잠꾸러기야
김아현 지음 / 삼성당 / 2006년 5월
6,500원 → 5,850원(10%할인) / 마일리지 320원(5% 적립)
2007년 10월 12일에 저장
품절

어린이시
먼지야, 자니?
이상교 지음 / 산하 / 2006년 5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2007년 10월 12일에 저장
구판절판
권하고 싶어요.
오리
황순원 지음, 최승호 엮음, 사석원 그림 / 비룡소 / 2002년 11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07년 10월 11일에 저장
절판



2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07-10-11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곱권 있네요~~~~ 푸른책들과 콩,너는 죽었다, 시가 말을 걸어요.
다른 것들은 기회가 되면 봐야겠어요~~~~ 감사 ^*^
'생글생글한 말들이 입속에서 굴러 다니는 것 같다' 멋지군요!

프레이야 2007-10-11 22:04   좋아요 0 | URL
님, 마음이 볶닥댈 땐 동시를 읽으면 좀 맑아지는 것 같아요.
전, 최윤정이 엮은 '가만히 들여다보면'을 권하고 싶어요.^^
그러고보니 푸른책들 동시집이 많네요.

하늘바람 2007-10-1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동시집만 모아놓으셨네요

프레이야 2007-10-12 14:24   좋아요 0 | URL
근데 품절이 많네요. 신간 동시집 중에도 좋은 게 많을거에요.
입안이 까끌할 땐 동시를 소리내어 읽어보면 좋아서요^^
태은이한테도 차츰 낭송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언어놀이^^
댓글저장
 

 

자명한 산책



황인숙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



♧ 황인숙

  1958 서울태생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자명한 산책』 등

♤ 가을이 되면 으레 떨어질 줄 아는 잎새와 잎새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일. 
    자명한 것들을 걷어차는 일!!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07-10-10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나는 자명함을 퍽!퍽! 걷어차며 걷는다" 나도 이러고 싶어요!

프레이야 2007-10-10 10:5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도 퍽퍽 걷어차고 싶어요.^^
조금 있으면 많이도 떨어질 낙엽들, 우리는 너무 당연하고 자명한 것들
앞에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걷어차서 뒤집어 봐야죠.

2007-10-10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0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7-10-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자명한 일들을 걷어차는 일이라...."
가을을 빗댄 이 시가 건네는 의미가 뭘까? 갑자기 단순한 홍수맘 멍해져 옵니다.

프레이야 2007-10-10 16:41   좋아요 0 | URL
그냥 걷어차 보는 것도 좋지요. 속 시원하니!!
홍수맘님, 그거 보냈어요.^^

소나무집 2007-10-1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오랜만에 하늘빛이 가을이네요.
파란 하늘, 가을 느낌 자명합니다.
자명해도 그렇지 못해도 다 지나가지요.

프레이야 2007-10-10 16:42   좋아요 0 | URL
소나무집님, 가을은 우리들 마음을 왜 이리 싱숭생숭하게 만드는지요.
네, 다 지나가지만 또 찾아오기를 반복하는 것들..

망상 2007-10-1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고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들었습니다. 3년 쯤 전에 읽었던 것 같은데- 어두운 장롱에 포스트잇이 달려 있네요.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ㅎ

프레이야 2007-10-11 23:25   좋아요 0 | URL
망상님, 유진과 유진, 리뷰를 읽은 후로 오랜만이죠.
오랜만에 꺼내든 시집, 참 반갑고도 애잔하셨겠어요.^^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