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사는 나라 못사는 나라 - 석혜원 선생님의 지구촌 경제 이야기
석혜원 지음, 고상미 그림 / 다섯수레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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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린이용 경제관련책은 늘 아쉬움이 남았다. 한동안 부자아빠를 강요하는 일련의 실용서들이 부자이지 못한 대개의 아빠들 기를 죽인 적도 있다. 어린이 책에서도 돈을 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내용을 보이는 책들이 있다. 목적이 옳으면 과정이 모두 옳은 것일까. 물론 돈의 소중함과 가치를 어릴 때부터 알게 하는 것은 나쁘지 않으나, 심부름이나 집안일 도우기 같은 소소한 일로도 돈으로 대가를 받아 그걸 저축하는 모습을 최고인양 선보이는 책들은 늘 마뜩치 않다. 아니면 동화형식을 빌어 별 내용 없는 이야기를 몇 명의 등장인물이 엮어가게 하면서 설명글이나 만화로 빈자리 메꾸듯 지식정보 면을 채워주는 책도 있다. 그런 책은 조금 더 쉽고 친근하게 읽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동화부분은 뛰어넘고 지식정보란만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용돈 좀 올려주세요’를 쓴 석혜원님의 이 책은 그런 아쉬운 부분을 넘어서 있다. 알토란  같은 내용들을 조목조목 명확하게 짚어주며 알쏭달쏭한 경제관련 용어들까지, 차근차근 읽는 이의 이해를 돕는다. 모두 11장, 46꼭지로 Q&A가 하나의 물결을 타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그 출발은 ‘잘산다는 게 무슨 뜻인가’라는,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물음이다. 쉽고도 어려운 질문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우리의 경제와 세계의 경제로 나아가, 세계화와 지구촌으로 모인다. 목차를 쓰윽 훑어보면 책은 지금 세계경제의 흐름을 읽고 변화에 적응하기를 적극 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4월 초판인 이 책은 미래를 짊어질 어린이 경제인들에게 진취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려고 군데군데 중심을 잘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97년 시작된 IMF 외환위기와 극복에 대한 대략의 내용과  FTA에 대한 현실적인 시각은 그런 면에서 좋은 정보가 될 듯하다. 여러 가지 경제관련용어가 생소하여 좀 어려울 수 있지만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의 더 깊이 있는 독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초등 6학년 정도가 읽으면 좋은 눈높이에서 풀어놓았다. 뒤에는 ‘찾아보기’와 좀 더 기억하기 어려운 ‘경제용어풀이’를 묶어놓았다. 전체적으로 내용을 풀어감에 전혀 딱딱하지 않고 친근한 어투를 쓰며 필요한 도표와 삽화, 사진도 적절히 배치해 두었다. 아이와 선생님이 간단히 묻고 길게 대답하는 형식인데 내용상의 군더더기가 없고, 간지러운 곳을 잘 긁어준다.

 잘산다는 건 가치관에 따라 주관적인 기준이 생기는 것이므로 모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여기서 다룰 ‘잘 살기’는 그 범위를 좁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겠다는 것이다. 경제적 의미로 잘산다는 기준은 ‘국민소득’이라는 지표로 가늠할 수 있다고 슬슬 경제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연한 순서로 국내총생산과 국민총소득, 그에 따른 경제성장률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1962년에서 1981년 동안 약 30배의 성장률을 보였고 수출은 약400배의 신장을 보였다. 여기서 급성장의 폐해(황금만능, 환경파괴, 근로자들의 희생, 도시인구과열 등)를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요즘 우리아이들 중에 돈이면 다 좋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경제성장이 곧 경제발전은 아니다’는 개념에서 올바른 경제발전으로 이야기가 나아간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경제적인 면뿐 아니라 정치적인 면이나 국제경쟁력 등도 따진다는 점, 그리고 경제적인 면으로의 선진국은 1인당 국민소득 수준과 공업화의 정도를 본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선진국이라면 여기에 환경평가도 첨가되어야하는 게 아닐까 여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국민총생산에 비해 1인당 국민소득은 스위스 같은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니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13꼭지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요?’의 답변은 감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이라 믿음이 간다. 1998년 런던의 한 대학교수가 조사한 각 나라별 행복지수의 결과를 언급하는데, 알고 있듯이 1위는 방글라데시다. 2위는 아제르바이잔, 5위는 인도, 미국은 46위, 프랑스가 37위, 그리고 우리나라는 23위로 나왔다. 즉,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생활수준의 차이가 크거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연 지금의 우리가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행복을 정말 부러워할까? '자발적 가난'이 정신적인 면을 넘어 새로운 미덕이 되고 있는 건 풍족함에 싫증나고 경쟁에 지친 자들의 어쩌면 배부른 노래가 아닌가. 인도인들도 가난은 모든 죄악의 근본이라 하고 부 없는 덕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어쩌니 해도 경제적 생활수준이 더 나빠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경제성장으로 이룬 자본의 혜택을 모든 국민이 골고루 누릴 수 있는 나라, ‘다시 말해 국민의 행복 지수가 한 단계 높아지는 나라’를 물려주고 싶은 게 어른들의 바람'이라고 저자는 조심스레 말한다.

 잘사는 나라, 국민 모두의 행복지수가 한 단계 높아지는 나라, 경제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나라를 위해 책에서는 우선 경제성장을 이루는 가장 큰 요인으로 무역을 거론한다. 오늘날 세계화니 지구촌이니 하는 용어는 무역의 중요한 결과이기도 하고, 무역은 세계화 전략의 생존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무역’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2천여 년 전의 사마천(출처는 밝혀두지 않아서 갸우뚱)과 실크로드, 동북아 해상무역을 주도한 장보고 등을 언급한다. 오늘날 우리의 수출품목에서의 변화도 일목요연하게 도표화 해 두었다. 또한 수입품목과 그 변화도 도표화하며 ‘수입 먹을거리는 다른 것에 비해 값이 싸니까 국내물가를 안정시키는 역할도 한다’고 지적하고 공산품의 수출을 늘릴 수 있다고도 한다. 지금 우리 농산물이 위협을 느끼는 사태에 대한 또다른 시각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지 않고, 그것이 석유무기화처럼 식량무기화가 일어날 수도 있느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농민 단체들은 농산물 시장 개방이 식량 자급률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라고 보고, 농산물 수입이 더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처럼 식량 자급률 목표를 설정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고 귀띔해 두었다. 우리 수출 품목 중 특이한 것은, 소전(素錢)이다. 소전은 액면가와 각종 문양이 새겨진 동전을 만들기 전의, 반쯤 만들어진 상태의 동전이다. 세계 각국의 동전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수출되는 우리 기업의 소전은 세계 소비 동전의 절반이 넘는다고 하는데 나도 아이들도 새로이 알게 된 반가운 사실이다.

 내용은 잘사는 나라를 위한 세계화로 귀결된다. 정보뿐만 아니라 무역을 통해서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가는 현상을 세계화로 정의한다. 물론 경제저 의미의 세계화다. 얼마전 어느 님의 서재에서 '아픔의 세계화'라는 말에 공감한 적이 있는데 아이들의 그것을 위해서도 우선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무역과 자본의 거래가 자유로워지면서 상품, 서비스, 자본, 노동 등이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오가게 된 오늘날의 지구촌에서 경쟁력 있는 나라, 잘사는 나라가 되기 위해 정부와 기업과 국민이 해야 할 일로 생각을 모으게 한다.

 

 세계화의 시대에 더욱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빠뜨려서는 안 될, 우리전통과 문화에 대한 각별한 지킴이 역할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세계화의 이름으로 압박하는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한 현실적인 방안과 피해 보는 측에 대한 구체적 보상 방안에 대한 상기, 그리고 자본과 기술력을 갖춘 선진국의 힘이 커지면서 잘사는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소득차이가 더욱 심해지는 등의 부작용을 간과하지 않게 한 점은 바람직하다. 자본의 세계화와 그 음험한 폐해, 희생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여기 어린이책에서 깊이 언급되지는 않았다. 그러기 이전에 세계시장의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하며 경쟁력을 가진 기업을 수레에 비유하여 수레를 끄는 정부, 뒤에서 미는 개인의 조화로운 작용을 말한 것은 선의로 읽힌다. 그런데 수레를 끄는 게 정부가 맞는지, 이점은 경제에 밝지 않은 나로서는 다소 어리둥절하다. 그래도 여러가지 면에서 고학년 경제관련 책으로 마음에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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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2007-08-22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는 평을 언젠가 봤는데 여기서도 봤으니 꼭 보렵니다~

프레이야 2007-08-23 07:59   좋아요 0 | URL
작은도서관님, 굿모닝!! 아이들에게 경제에 대한 균형있으면서도
발전적인 생각을 심어줄 수 있을 거에요. 경제관련 용어들도 이해하기
쉽게 연결고리를 엮어가며 풀어놓아 마음에 들었어요.
모의 FTA 협상도 해봤는데요 흥미로운 시간이었어요. 그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아이들 스스로 느껴보구요.^^

몽당연필 2007-08-2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교육...넘 어려워요. 저도 받아보지 못한터라..
아이가 1학년이 되면서 어떻게 해야할까...고민만 하고 있다니깐요. ㅠㅠ

프레이야 2007-08-23 14:42   좋아요 0 | URL
몽당연필님, 하기야 우리 어릴땐 뭐 이런 책이라도 있었나요.
요즘 아이들은 좋은책 읽을 게 참 많아 좋겠어요. 그래도 안 읽죠 ㅎㅎ
초등1학년이면 아직 경제개념은 좀 어려워할 것 같은데요.
(중1은 아니죠?^^) 아직 고민하지 않으셔도 될 듯해요.
어린아기랑 더위에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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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 속 그 못가에서 동무동무 끼리끼리 샘터어린이문고 7
임홍은 지음, 김종도 그림 / 샘터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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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이가 어릴 적 그러니까 10년 전인가, 동화읽는어른 모임 행사 중 빛그림 공연을 처음 보았다. 그림책 ‘똥벼락’을 보여줬는데 음성도 구수하고 익살스럽게 연출되기도 했지만 하얀 슬라이드에 표현되는 검은 그림자 뒤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 빛살창으로 비치는 그림자처럼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 이후, 모 대극장에서 한 그림자 연극에도 데려갔다. ‘피터와늑대’ 그리고 ‘오필리어의 그림자극장’이 마지막이었다. 아이는 그때 참 흥미로워했다. 나도 검은 형체와 실루엣만으로 동작하는 인물들과 배경에 묘한 자극을 느끼며 마음의 현이 훨씬 섬세해짐을 느꼈다. 얼마 전 작은 딸에게는 ‘프린스 & 프린세스’라는 그림자영화 디비디를 사줬더니 재미있어했다.

 아이들과 내가 그림자에 매혹되는 까닭은 잘 모르겠지만 보편적인 감성이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여백을 채우는 맛도 있을 테고 음성연출과 음악효과에 더 많이 감각할 수도 있을 테다. 요즘, 아이들에게 쉽게 와닿지 않는 지나친 상징이나 교조적인 말들,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색채와 화려한 장식의 그림들 속에서 이런 글과 그림은 어쩌면 너무 수수해서 눈에 띄지 않는 시골길섶 한 구석의 들꽃 같다.

 글쓴이 임홍은은 북한작가로서 이 소박한 동화의 원제는 <동무 동무>이며 1937년 10월 18일부터 2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글이다. 그래서 새로 나온 책에서도 그대로 ‘동무’라는 말을 써서 ‘친구’보다 훨씬 정겹게 들린다. 그린이 김종도의 그림은 여러 좋은 어린이책(저 중 고학년)에서 두루 볼 수 있다. '겨레아동문학선집 1'- <엄마 마중>(보리 출판사)에 그린 수수한 흑백 삽화는 김동성의 그림으로 환하게 빛나는 그림책 <엄마 마중>(소년한길)과 비교된다. 물론 김동성의 그림은 그대로 매혹적이다. 그외에도 익살스럽게 그린 '화요일의 두꺼비'나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그린 '전쟁과 소년'의 삽화도 이야기를 돋보이게 한다. 김종도는 특히 토속적인 배경과 우리 아이들의 둥글고 납작한 얼굴을 꾸밈없이 사랑스럽게 그리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동물을 주요 등장인물들로 하는데 각 동물의 특징을 잘 살려 실루엣을 그렸다. 그리고 죽죽 뻗은 나무와 하늘거리는 나뭇잎들, 여린 풀들의 살랑대는 소리까지, 작은 정령들의 숨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숲속 풍경을 검은 그림자들이 담고있다. 배경에는 수채화를 엷게 풀어 단색으로 채색한 또 다른 그림자들을 두어 검정색과 조화로운 그라데이션를 이루는데 단조로운 색감이 깔끔하다. 뭔가 이야기를 잔뜩 품고 있는 것 같은 숲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곱상한 테두리를 한 액자 안에 담겨 있는 느낌이다.

각기 다른 영역에서 각기 다른 성격과 재주를 갖고 살고 있는 네 친구들이 어떻게 우정을 만들고 '그 숲 속, 그 못가에서' 언제나 즐거운 노래가 그치지 않게 되었는지, 술술 읽히는 쉬운 문장과 분단 이전의 우리말을 재미나게 살려놓은 말맛에 빠지게 된다. 이야기 줄거리는 소박하다. 흔히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은 그런 귀설지 않은 이야기다. 낯선 것만 찾을 것 같은 아이들은 친숙함과 익숙함에 흥미를 더 느끼는 경향이 있다. 사슴의 뿔 위에 앉은 까마귀, 사슴 등에 앉은 생쥐 그리고 사슴 발 아래서 뒤돌아보며 목을 쭉 빼고 있는 거북이. 이들이 어떻게 나뭇꾼을 따돌리는지,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같이 통쾌함을 느낄 것이다. 동물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골탕 먹이는 네 명의 친구들이 발휘하는 기지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발랄한 빛이 난다.

 일제시대에 쓰인 점을 봐서 동물을 잡으려드는 나뭇꾼은 일제의 폭압을, 힘없지만 힘을 모으는 동물들은 우리민족을 비유한 건 아닌지. 저학년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깊이 하여 이야기의 재미와 흥겨운 감동을 반감할 필요는 없기도 하지만, 3학년 쯤이면 조금 들려주는 것도 좋겠다. 아름다운 이야기와 그림자 그림 중 내가 느끼기에 가장 강렬한 그림이 하나 있다. 강한 보색대비를 이루는 검정과 노랑 배합의 그림으로 깊이 패인 함정 위로 사슴의 한쪽 뒷다리가 끈에 묶여 함정 위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있는 장면이다. 사슴이 얼마나 놀라 울부짖고 있는지. 글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괜히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이들은 어떤 장면을 최고로 꼽는지 주거니받거니 이야기 해 보면 아이들의 정서를 감지할 수도 있다.

 꾸밈없고 고운 우리말맛이 정겹게 살아있는 글과 한편의 빛그림 연극을 선사하는 이 책은 독후에 극본으로 간단히 써서 역할극을 해보아도 좋은 활동이 될 것이다. 물론 그냥 소리 내어 읽어도 재미나다. 초등 1학년에서 3학년까지 두루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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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2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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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2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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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5 0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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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절판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87쪽

내 삶은, 마치 그것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무감각한 기계 장치인 듯, 힘 있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어린 로에 의해 움직였다. 아이들의 세계가 강건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일념으로 그녀는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183쪽

치한(the rapist)과 치유자(therapist)라는 말은 글자로는 큰 차이가 없다.... 정상적인 아이-정상적이라는 걸 명심해-는 자기 아버지이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막연한 남성을 미리 본다.('막연한'이라니 좋구나, 폴로니우스를 걸고 맹세하지)-204쪽

현명한 엄마(너의 불쌍한 엄마도 살아 있었더라면 현명했겠지)라면-진부한 표현을 용서해라-여자애가 아버지와 접촉하는 동안에 사랑과 이상적 남성형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북돋아주었을 것이다. -204쪽

나는 역사적으로 보아, 연극을 원시적이고 타락한 형식이라고 믿어 싫어했다. 개별적인 천재는 많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석기 시대 의식 같고 사회 전체의 부조리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예술양식, 예를 들면 독자가 방에 혼자 앉아 기계적으로 술술 외우는 엘리자베스 시대 시처럼 말이다.-272쪽

일어나고 있는 운명은 정말이지 잘 짜인 추리 소설 같은 게 아니다. 그런 소설 속에서 독자는 그저 단서에 잔뜩 눈독을 들이면 된다. 젊은 시절에 나는 실제로 해결의 실마리가 될 만한 곳을 이탤릭체로 강조해 놓은 프랑스 추리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맥페이트의 방식이 아니다. 아무리 그가 어떤 막연한 암시를 감지한다 해도.
(맥페이트는 운명의 여신으로 험버트를 조종한다. 우연에 의해서)-286쪽

본능적으로 나는 화장실이나 전화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내 운명을 걸고 넘어지는 대상들처럼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운명적인 물체들을 갖게 마련이다. 반복되는 경치일 수도 있고, 어떤 숫자일 수도 있다. 신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조심스레 선택한 것. 여기서 존은 늘 비틀거리고, 저기서 제인은 늘 가슴이 아플 것이다.-287쪽

웃으면서 하는 친선경기 여행은 패스포트와 스포트의 차이를 지운다. 왜 구태여 멀리 나가야만 우리가 행복해지리라 꿈꾸는가?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파국을 앞둔 연인들, 오염된 패들이 의지하는 관습적인 오류가 아닐까-325쪽

그 사나운 환상 속에는 나의 거친 기쁨을 완벽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그 영상은 닿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잿빛의 위대함이여.-359쪽

이제 비슷하게, 얼핏 스치던 광채, 현실의 약속-유혹적으로 그런 척할 뿐 아니라 고상하게 지키던 약속-이 모든 것을 우연은 망가뜨린다. 창백하고 사랑스런 작가의 더 왜소한 인물들로 바꾼다. 나의 환상은 프루스트적이고 프로크루스테적이다.-360쪽

잘 알려진 인물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이런저런 발전을 거친다 해도 그의 운명은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X는 그가 늘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이류교향악과 전혀 다른 불멸의 음악을 만들 수 없다. Y는 결코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Z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속으로 미리 다 정해 놓고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우리 생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며 만족해한다. 덜 만날수록 더 그렇게 된다.-361쪽

우리가 정해 준 운명에서 빗나가는 경우 반윤리적이고 변칙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은퇴한 핫도그 장사가 가장 위대한 시집을 출간해 내었다고 밝혀질 경우 우리는 차라리 그 이웃을 모르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생각한다.-362쪽

'죽는다는 것이 아주 두려운 것은 왠지 알아?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거야' 무릎은 기계적으로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그녀의 마음속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그녀의 깊은 마음속에는 정원이 있고, 황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내 비참한 몸부림과 누더지같이 더럽혀진 몸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이 금지된 곳, 희미하고 사랑스런 공간이었다.-388쪽

선의였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질적으로 성급함과 지루함으로 감추었다. 반면에 나는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인위적인 음성을 사용하면서 필사적으로 초연한 듯 얘기했기 때문에 듣고 있던 롤리타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무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나의 불쌍하고 상처받은 아이여!-~388쪽

나는 일이초쯤 현실로부터 유리되었던 것 같ㄷ. 아, 여러분의 흔한 죄인들이 그러하듯 있던 일을 모두 지워버리려는 그런 뜻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두 내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아주 잠깐, 나는 내가 부부의 침실에 있는 듯한 착각을 했고 침대 위에서 병든 샬로트를 보았던 것 같다. 퀼티는 굉장히 병든 사람이다.-415쪽

내가 들은 것은 바로 아이들이 노는 소리였다. 대기가 너무도 맑아서 이 뒤섞인 소리들의 화음 안에서, 장엄하고 미세하고, 아득하면서도 요술처럼 가깝고, 솔직하면서도 신성하게 신비스런 아련한 소리들 속에서 때때로 까르르 터지는 선명한 웃음, 탁 치는 방망이 소리, 장난감 마차가 덜그럭대는 소리들이 간간이 들려왔다, 그러나 환히 떠오르는 골목마다에서 아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기에는 나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 그리고 그때 나는 알았다. 가망없이 가슴 아픈 것은 내곁에 롤리타가 없어서가 아니라, 저 소리들의 어울림 속에 그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임을.-420쪽

그리고 클레어 큐를 동정하지 말아라. 사람은 그와 험버트 험버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또 험버트가 몇달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야 험버트가 너를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을 게 아니냐. 나는 들소와 천사들, 오래가는 그림 물감의 비밀, 예언적인 소네트,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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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8-23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선물해달래서 선물해주곤 전 아직 못 읽어본 작품이에요.
논란이 좀 되는 작품 같던데 맞나요? ^^;;

프레이야 2007-08-23 10:46   좋아요 0 | URL
무척 흥미로운 문체에요. 물론 원문해독이 안 되니 번역의 힘만 믿지만요..
당대에 논란이 많이 되었던 건 내용의 외설스러움보다 표현의 극단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나보코프의 뜻은 그걸 넘어 그 위에 있었어요.
인간본성의 외로움, 연약함. 미학적인 상징과 은유들, 빛나는 말장난들,
고전에 대한 지식과 현실적인(당시의) 법안들에 대한 상식이 바탕되어
읽히는, 좋은 책이었어요. 고전의 힘!
진달래님, 좋은 아침이에요. 바람이 좀 선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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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아저씨의 딱새 육아일기 산하어린이 145
박남정 지음, 이루다 그림 / 산하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내가 기르는 아기딱새를 잡아먹고 천연덕스럽게 퍼져서 낮잠을 자고 있는 뱀이 있다면 어떻게 할래? 아이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선 낯을 찌푸린다.

 정말 권하고 싶은 이 책은 4학년 아이들과 수업한 했는데 의외로 별로 안 알려져 있나 보다. 어린이 책이 갖추었으면 좋겠다 싶은 점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맛있는 책이다. 따뜻하고 유쾌하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정보와 지식의 측면도 소홀히 하지 않고 쉬운 말로 넣어둔 솜씨도 만족스럽다. 글자크기나 행간의 배열도 눈이 피로하지 않게 잘 편집되었다. 삽화는 물론 실제 찍은 사진과 콜라주를 이용한 곁들이 삽화까지 초등 4학년 정도가 읽기에 지루하지 않는 독서시간이 될 것이다.

 곰이 딱새를 키웠다고? 신기하지?

우직한 곰아저씨는 실제로 이흥기라는 총각아저씨다. 이 책의 이야기는 그 아저씨가 지난 봄 실제로 겪은 일이다. 단양에서도 더 들어가는 산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일을 많이 하여 힘도 센 이 아저씨의 직업은 철근 기술자. 하지만 곰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블로그도 운영하며 실제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부분은 자연지킴이 역할이다. 미련곰탱이처럼 한 길만 밟고 온 이분은 동강에 댐을 건설하려고 했을 때 해남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며 ‘동강은 흘러야 한다!’ 라고 외치기도 했다. 지금도 초등학생 자연체험단을 이끌며 아이들에게 '함께 사는 자연에 대한 사랑'을 몸소 느끼게 해 주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 책의 글은 이분이 직접 적은 건 아니고 박남정님의 글로 신나게 풀린다. 몇년 전 4월, 곰아저씨가 지인을 만나러 단양 적성초등학교로 갔을 때에서부터 곰아저씨와 딱새의 소중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 아저씨는 폐교를 빌려 새한서점이라는 헌책방의 서고로 쓰고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간 것이다. 운동장에 세워둔 트럭에 딱새 부부가 둥지를 틀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한 아저씨는 그로부터 한 달간 트럭을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이 새끼를 낳아서 기르도록 배려한다. 딱새부부의 지혜로운 집짓기 과정과 알을 품고 있을 때 수컷이 암컷에게 베푸는 헌신적인 모습, 그리고 알을 낳고 나서의 애틋하고 조심스러운 심정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아저씨의 외모처럼 어찌나 소박하고 흥미로운지 책을 읽는 사람이 딱새육아에 공동 참여하는 느낌마저 든다. 찍어둔 사진들을 실어놓아 볼거리 때문에 더욱 그렇다. 곰아저씨의 블로그로 찾아가면 여기 실린 사진들을 고스란히 다 볼 수 있는데 새한서점을 하는 그 지인이 찍고 올려준 사진이라고 한다. 아기딱새들이 고 작은 입을 크게 벌리고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은 귀엽기보다 감동이다. 재미난 육아일기와 정보부분은 블로그에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책에서만 볼 수 있다. 육아일기는 모두 13꼭지로 나누어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데 각 꼭지의 끝에 새와 관련된 지식을 실어놓아 알차다.

 딱새는 4월 초순쯤부터 알을 낳고 5월 말경에 부화되어 날아가는 대표적인 새로 몸길이는 약 15cm, 몸무게는 17~18g이다. 번식기에는 깊은 산속에서만 볼 수 있지만 겨울에는 인가 근처나 시가지 공원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겨울도 아닌데 곰아저씨의 트럭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은 걸 보면 트럭이 무척 안전해 보였던가 보다. 아니면 절대 내치치 않을 사람의 트럭인줄 알았던지..

안타깝게도 그리 조심했는데도 뱀이 어느 날 조금만 있어면 날아갈 아기딱새들을 잡아 먹어버렸을 때 곰아저씨는 과연 그 뱀을 어떻게 했을까? 호기심을 유도하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며 책을 읽게 하면 더욱 재미있는 책읽기가 될 것이다. 곰아저씨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도 충분히 공감하며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곰아저씨가 육아에 참여한 방식도, 딱새부모의 자리를 넘보거나 넘치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눈여겨보인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원하는 식으로 지켜보고 기다려준 것 뿐이다. 우리 어른들의 육아도 그래야할텐데 너무 많이 끼어들고 보호하려드는 경우가 많다.

“새는 새대로 뱀은 뱀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의 이치야.”

그나저나 트럭을 못 움직여 그해 어버이날에는 어머니를 찾아뵙지도 못했다는 이 곰탱이 아저씨는 마흔셋인데 아직 총각이다. 인연이 어디 숨어계실까. 지금은 혹시 찾으셨을까. 딱새가 트럭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들을 키웠던 한 달 남짓한 시간을 생애 최고로 행복한 순간들이라고 말하는 곰아저씨! 


(딱새는 암컷과 수컷이 다른 색인데 다른 새들처럼 이녀석도 수컷이 더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한다. 아래 사진은 암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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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2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는 새대로 뱀은 뱀대로 사는 것이...자연의 이치야"라는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누구든지 '-답게'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라는 '자연'의 말뜻도 바로 그런 의미겠지요.
그나저나 곰아저씨가 궁금하네요.ㅎㅎ

프레이야 2007-08-21 12:59   좋아요 0 | URL
네, 스스로 그러함이요.^^
곰아저씨는 실물사진을 보니 참 소박하고 우직하게 보이더군요.
텁수룩한 구레나룻에 듬직한 체구에.. 노총각이라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유쾌하게, 그랬어요^^

대한민국곰 2008-01-3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곰아저씨 딱새 육아일기 실제 주인공인 이흥기입니다 책에대해서 좋은설명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프레이야 2008-02-15 00:00   좋아요 0 | URL
이흥기 님 찾아주셔서 반갑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고 즐거운 독서시간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게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시고, 실천하며 살고 계시겠지요?
블로그에도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보고 그랬어요.
또 다른 책도 기대할게요^^

대한민국곰 2008-02-1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은 딱새를 키우던 학교에 와 있 읍니다 이곳은 인터네 헌책방이구요 약15만권을 책을 부유 하고 잇답니다

프레이야 2008-02-15 00:01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인터넷 헌책방 그곳 인터넷주소 가르쳐주시겠어요?

대한민국곰 2008-04-2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각 포털검색창에서 새한서점을치시면됩니다
댓글저장
 
내가 찾은 암행어사 우리 역사 속의 숨은 일꾼 이야기 1
정명림 지음, 김수연.박재현 그림 / 풀빛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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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까닭 없이 나를 괴롭힌다면 무척 속이 상할 거에요.

작가의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이 책은 흥미로운 소재와 내용, 알찬 정보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잘 어울려있는 책이다. 초등 4학년 아이들과 수업한 책이고 독후활동으로는 ‘암행일보’ 라는 신문을 만들어보았다.

 누군가 나 대신 괴롭히는 나쁜 사람을 혼내주는 상상을 하는 어린이들의 바람을 실제로 해낸 사람들은 없었을까?, 하는 아이다운 호기심에서 조선시대의 암행어사로 유도하여 간다. 과거의 암행어사 정신을 오늘날에 이어받아 좀 더 행복한 사회와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함께 고민하자는 작가의 의도도 건전하다.

 이야기는 새 학년이 되어 모든 게 어리둥절한 우진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펼쳐진다. 담임선생님의 제안으로 암행어사놀이가 실시되고 아이들은 아주 특별하고 흥미진진한 놀이체험을 한다. 바로바로 암행어사를 임금이 임명할 때처럼 ‘봉서’를 통해 아무도 몰래 단 한 명이 암행어사로 뽑혀 한 달 동안 선생님의 눈과 귀가 되어 활동하는 놀이다. 고자질이나 감시가 아니라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고 어려운 친구는 돕게 하고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는 없는지도 살펴야한다. 이달의 멋진 친구를 뽑아 보이지 않게 선행을 베푼 친구를 공개적으로 칭찬해야한다. 그리고 모든 활동상황을 조리 있게 써서 발표해야 한다.

 처음엔 심드렁했던 우진이가 이 활동을 하면서 따돌림 당하고 있었던 정호를 발견하게 되고 몰랐던 면을 보고 우정을 쌓게 되는 모습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식정보의 소득이 쏠쏠하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 모두에게 암행어사를 탐구주제로 하여 탐구조사보고서를 쓰게 하여 모둠을 만들어주었다. 우진이가 암행어사로 활동하는 시기와 맞물려 11모둠의 아이들이 암행어사에 대한 소주제를 스스로 정하고(모두 11가지의 소주제가 나옴) 자세히 조사하고 정리하여 발표하는 과정을 함께 엮는다. 그 내용들은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는데 삽화를 섞어 필요한 자료와 함께 쉽게 이해되도록 정리해두었다. 낯선 용어들이 두루 나오지만 암행어사와 관련된 옛 제도와 조상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용어들이니 알아두는 것이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감사원을 소개하며 암행어사 정신을 이어받은 감찰제도로, 그 정신을 오늘날과 미래로 발전하게 한 점이 돋보인다.

‘우리 역사 속의 숨은 일꾼 이야기’ 시리즈의 첫 편으로 나온 이 책에서 추사 김정희도 충청도에서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는 건 나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암행어사는 역시 박문수였다. 수령을 한 두 번 한 과거급제자를 임명하는 원칙을 깨고, 수령경험이 전혀 없었던 박문수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가장 많이 암행어사를 보낸 왕이었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 나도 한 번 암행어사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내용면으로 보면 전체가 하나의 탐구보고서 같은 형식을 띈다. 책의 뒷부분에는 ‘탐구조사를 마치며’에서 반 아이들의 재치발랄한 후기가 적혀있고,  ‘암행어사와 함께 한 걸음 더’라는 꼭지에서는 앞에서 논의되지 않은 탐구주제와 부연설명이 실려 있어 역사와 관련하여 시대상을 좀 더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갖가지 이름을 단 일련의 부정부패감시단으로 관심을 나아가게 한다. 암행어사제도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암행어사도 힘을 잃어갔다는 걸 알 수 있다. 명종 때 이르러 조선팔도에 보냈던 암행어사 제도는 마침내 고종 35년(1898)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오늘날에 그 정신을 부활하여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성종실록> 20년 11월 7일(1489)의 기록이다.
“..... 옛사람의 말이, ‘가혹한 행정은 호랑이보다도 맹렬하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수령들의 나쁜 짓을 모조리 알아내어 우리 백성이 잔학한 행정에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겠는지 말해 보거라.”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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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7-08-2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두"가 맞는 표현 같습니다만.. ^^;
저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이 책을 보는 일이 거의 없는데, 알라딘 분들이 소개하시는 책들 보면 좋은 책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8-20 12:34   좋아요 0 | URL
좌회전님, 저도 그렇게 알고있었는데 이 책의 저자가 밝혀두기로는,
조사결과 두가지 표현을 다 써왔는데, 출도로 쓰인 경우가 더 많아서
출도로 표기하기로 한다고요.. 저도 새로이 알았답니다.
네, 요즘 어린이책은 내용이나 형식이나 너무 좋은 책들이 많아요.
우리 어릴때와는 아주 다르게요.. 그래도 별로인 경우도 있구요..^^

turnleft 2007-08-20 13:05   좋아요 0 | URL
엇.. 그렇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뽀송이 2007-08-2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재미있어 보입니다.^^
우리의 옛것과 현대의 색다른 만남??
한번 찾아서 읽어볼게요.^.~ 추천!!

프레이야 2007-08-20 20:23   좋아요 0 | URL
네, 우리가 암행어사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 수 있고 흥미로워요.^^ 줄거리를 이루는 이야기도
좋구요^^ 뽀송이님, 오늘도 무지 더웠죠??

마노아 2007-08-2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도 암행어사로 나간 적 있어요. 이 책 재밌을 것 같아요. 보관함에 쏘옥이에요~

프레이야 2007-08-20 23:30   좋아요 0 | URL
네, 마노아님 물론이에요. 정약용과 함께 목민심서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일부분이 나와요. 박규수 등 다른 암행어사 이야기도 나오구요.
전, 김정희 암행어사는 첨 알았네요.ㅎㅎ 역사샘이시라 어린이책도
역사관련이면 읽으시는군요, 역시 마노아님!

ㅇㅇㅇ 2007-08-3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
해요

프레이야 2007-08-31 21:09   좋아요 0 | URL
뉘신지요? 흠칫.^^

와우~~ 2007-10-09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와~~ 제가지금 읽고잇는 책인데
딱떨어지네요 ㅋㅋ

프레이야 2007-10-09 18:56   좋아요 0 | URL
혹시, 초등학생인가요? 4,5학년 쯤이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것 같아요.
로그인하고 오셔도 되는데요.^^

anias 2008-10-17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고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어요. 감사감사!!

프레이야 2008-10-17 19: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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