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 광안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홀에서 수상자의 아내가 대신 상을 받으러 무대에 올라왔다. 민소매조끼를 걸치고 있는 모습에 입을 삐죽거리는 어르신들이 좀 있었는데(여성분) 나는 시원해 보여 좋기만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제 11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을 받은 시인 이윤길이다.

 그는 19살, 주문진 수산고등학교를 졸업도 못한 채 원양현장 실습이라며 그해 10월 라틴아메리카의 수리남으로 갔다. 그렇게 시작된 원양어선의 승선이 근 3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자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딸아이 둘을 낳았고, 실습항해사에서 3등, 2등, 1등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되었다. 그의 시집 속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동안 난 삼각파도를 뚫는 괭이갈매기처럼 씩씩하게 한 끼의 밥값을 위하여 이 바다 저 바다를 해파리처럼 부유하며 외로움과 고독을 삭혀왔다.”고 했다. “소금물에 절인 마음과 달빛에 부서진 마음, 태양 볕에 달구어진 마음들, 태풍 속에서 오금저린 마음도 있었다. 그런 마음들을 모아 놓은 것이 오늘의 영광이 되었다. 존재는 말 그대로 환상인 것이다.”라고도 했다. 책날개에 있는 그의 사진을 다시 넘겨보았다. 희끗한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풍채 좋은 59년생 남자였다.

 아내 차미선은 지금 러시아 해역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헌책 냄새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냄새라고 말하는 두 딸 자랑도 했다. 단칸방 가득 책을 쌓아두고 읽어대고 배움의 갈증을 못 이겨 시인을 찾아가 스승으로 삼고, 수많은 날들을 습작하고, 그런 세월을 오래도록 지켜본 아내는 경남 통영 사람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억양으로 적어온 걸 읽어갔다. ... 새벽에 만취해 들어오는 남편은 아파트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자기존재를 확인하려했다고...

 

 

 난 그 대목에 가슴이 아렸다. 술 취해 객기와 난동을 부리는 남편, 아버지, 시아버지...  이 시인이 스스로를 칭한 말처럼 ‘황금빛 찬란한 유산이 없어 흔들리는’ 우리의 그들을 봐주는 눈이 조금은 유연해지고 있다면 나도 정말 중년의 여인인가. 뱃놈이 무슨 시를 쓰냐고 주위에서 말했다고 겸양을 떨어놓았지만, 화기애애한 시상식장에 앉아 그의 시들을 죽 읽어보니 망망대해의 생명력이 꿈틀대며 달려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대양의 품에조차 안겨보지 못한 나이지만... 

 

 

 바다에 몸을 담고 부딪히며 쓴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시들, 그 중 표제시 하나를 옮겨본다. 다른 시들보다 여성적인 감성이 느껴진다. 떨어져있는 시간이 더 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늘 사랑하는 일에 서툴고 어리석게 마련인가. 그래도 실러갠스의 새로운 비늘 하나를 꿈꾸며..



진화하지 못한 물고기 한 마리

-이윤길




눈 뜰 때 포프라기 되어 매달리는
세월 갑옷을 걸친 마흔 여자의
스물아홉 의식으로 사랑은
심연에서 화석이 되었고
백만 년 동안이나 변화하지 않고
화석으로 살아있는 물고기 한 마리
비늘에다 그리움을 빗금으로 남기다
뻐끔하고 세상 밖에 숨 뱉어놓은 날
기포에 쌓여진 지난, 사랑 하나가
수묵처럼 번지는 파문 만든다
계절이 바뀌면 꽃들도 달라지는데
바닷물에 절여진 마음이라
백만 년 전의 사랑이나
현재의 사랑이나 변하지 못한다
말들의 통로를 따라 연비 되어진
아줌마가 간직한 눈물에 슬픔들이
아저씨 가슴에 비 되어 흐른다
진화하지 못한 지느러미로
앞 보며 앞으로만 뒷걸음 걸었는데
어찌하여, 여인 만나게 된 걸까
창 너머 바다에 달빛이 부서진다
실러갠스* 새로운 비늘이 생긴다.

* 실러갠스 : 화석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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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8-2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문진 수산고등학교...저희 동네에 있던 학교인데...
뱃내음, 바다내음이 비릿한 그의 시가 어떨런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프레이야 2007-08-20 12:54   좋아요 0 | URL
어머, 잉크님 주문진이 고향이세요?
전 주문진까진 못가봤지만 그 부근 속초까지 가봤지요.
왠지 오늘은 잉크냄새 대신 바다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

twinpix 2007-08-2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닷물에 절여진 마음이라, ^^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8-20 23:21   좋아요 0 | URL
트윈픽스님, 네^^ 화석이 되어버린 변하지 않는 마음,
부패되지 않는 마음이요..^^ '진화하지 못한 지느러미로 앞보며 앞으로만
뒷걸음 걸었는데' 이 구절도 좋지요.^^
 

전에는 한 권을 들면 끝을 내고 다른 책으로 넘어갔는데 언제부터인가 동시다발로 펼치고 있다.

수업하는 아이들 책에, 선물 받은 책에, 구입한 책까지 다 하면.. 집안 곳곳에 두고 찔끔찔끔..

이거 언제 끝나냐.. 집중도 안 되고.. 일단 책갈피 꽂아둔 것들만 우선..

날씨 탓으로 돌릴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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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7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지금 한꺼번에 읽고 계신가요?

스킨이 바뀌었어요.
마룻바닥이 나오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님의 분위기와 어울려요.마음이 잔잔해지는 느낌입니다.

프레이야 2007-08-17 10:59   좋아요 0 | URL
책갈피와 연필을 꽂아두고 그러고 있네요. 찔끔거리며..
스킨이 좀 시원해 보이나요, 민서님! 잔잔해지셨어요? ^^
오늘도 더위와 함께...

백년고독 2007-08-1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스킨이 시원스럽게 바뀌었네요.
저도 요즘 이 책 저 책 한꺼번에 쌓아놓고 읽고 있답니다. 이거보다 저거보다 ㅎㅎㅎ
제가 좋아하는 '가재미'와 '반고흐, 영혼의 편지'가 보이네요 ^^

프레이야 2007-08-17 11:00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잖아도 님의 서재에서 그 페이퍼 봤어요.
두개 공통, 반가워요^^

가시장미 2007-08-1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그래요.. 왜이리 독서가 안 될까요. 집중이 안되고.. 리뷰도 안서지고. ㅠ_ㅠ
혜경님.. 좋은 책 많이 주문하셨네요? 멋진 리뷰를 보고, 저도 지르겠습니다. ㅋㅋ

프레이야 2007-08-17 11:00   좋아요 0 | URL
그죠? 가시장미님, 다 날씨 탓으로 우리 몰자구요.ㅎㅎ

네꼬 2007-08-1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리뷰 기대되어요!!

프레이야 2007-08-17 11:01   좋아요 0 | URL
네꼬님, 에고.. 시집리뷰는 정말 어려워요 홍홍..
사실 전 시집은 한번에 다 안 읽고 생각나면 한 편씩 뒤져 읽는 버릇이^^

Jade 2007-08-1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선우의 사물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책이예요 ㅎㅎ 생활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혜경님과도 잘 맞을 것 같아요 ㅎㅎ

프레이야 2007-08-17 15:03   좋아요 0 | URL
네 제이드님, 좋은분에게 선물 받은 책이에요. 아마 그분도 저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보내주셨겠지요 ㅎㅎ
한 장씩 읽는 게 더 좋은 책 같아요. 님도 좋아하시는군요.^^

다가섬 2007-08-18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러느라 여기저기, 여러 형태로 두었더니
아들녀석이 친구에게 ...
'이방은 들어오지마, 좀 너저분하거든...'이러네요.^^

프레이야 2007-08-18 10:42   좋아요 0 | URL
ㅎㅎ 아들이요? 아직 어릴텐데요, 깜찍!

twinpix 2007-08-1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마구잡이로 독서 중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정작 끝내는 책이 없는 것 같아서 한 권을 진득하게 잡아야하겠다고 결심 중이에요.^^

프레이야 2007-08-19 21:53   좋아요 0 | URL
트윈픽스님도 그래요? ㅎㅎ
읽고 싶은 책들이 산재해있는 까닭이기도 하겠죠.
같이 아자아자.. 결심합시다!
 
당신이 외우는 시 한 편

요사이 어떻게 지내시나요 近來安否問如何


사창에 달빛이 비치니 첩의 한은 깊습니다. 月到紗窓妾恨多

 
몽혼에게 흔적을 남기게 한다면 若使夢魂行有跡


당신 앞 돌길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을. 門前石路半成沙

 

                                              - 이옥봉 '몽혼'

 

묻노니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달이 사창에 이를 때면 저의 한은 깊어지곤 한답니다.
만약 꿈길의 걸음에 자취가 생긴다면
문 앞의 돌길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


(검색을 해보니 이렇게 번역한 시도 있네요. 전 위의 것이 더 마음에 듭니다)

--------------

 

어느 날, 남편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옥봉의 몽혼이란 신데 들어봐."  그러곤 위의 시를 들려주었습니다.  

"여보, 난 이 시가 요즘 참 좋아."

이옥봉은 조선시대 여류시인인데 연도가 불확실하지만 선조때 양반 '봉'의 서녀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생을 마감한 조한의 소실이기도 했습니다. 32편의 시를 담은 <옥봉집>이 후손에 의해 전합니다. 평생 멀리 떠나있는 남편을 그리워 했다고도 합니다. 읊을수록 입에 착착 감기는 운율에 애잔한 정서가 첩으로서의 스산한 그리움을 잔뜩 배어 나오게 하는 싯구. 그믐달의 맵시마냥 처연합니다.

옆지기는 홈페이지에 한옥의 나무문을 찍어두고 이 싯구를 실어놓았더군요. 사십 고개를 고되게 넘어가는 남자. 일에 지치고 가족의 무게에 버거워하면서도 거뜬히 이고지는 어깨가 때때로 쓸쓸해 보입니다. 그리움은 욕망으로 생겨나는 거라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그걸 어쩌지 못해 가눌 길 없이 그리워하고, 잡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삽니다. 저는 이제 그리움을 버리기로 합니다. 사실 허울좋은 감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일까요.

대신 첩의 마음으로 살기로 합니다. 본처의 오만함과 무감각함과 텃새기질보다는 부족함에 안달하고 조바심 내면서도, 가끔은 환청에 시달릴 정도로 귀 밝히며 내게 다가오는 것들에 예민한 촉수를 세워보렵니다. 물수제비 번져가는 공명과 반향의 무늬처럼, 신경줄 같은 현의 감각처럼, 때로는 손톱 밑의 작은 떨림으로도 온몸의 감각이 작동하는 첩으로 살까합니다. 숨죽여서 낮게, 욕심없이.. 작은가슴, 새가슴으로.. 하지만 그런 까탈스러운 성정이 거추장스러울 때면 혹여, 곰처럼 아무것도 모른 척 겨울잠도 잘 겁니다.

 

요사이는 당신 어찌 지내시온지요?

달빛 살빛 비치는 창 두드릴 때면 새가슴에도 그리움 사무쳐와요

몽혼의 걸음으로도 발자욱 남길 수 있다면

돌같은 당신 마음 문전의 반은 모래가루 되었을 겝니다.

 

 (이건 제가 무례하게 재해석한 몽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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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 길(夢魂)
    from 한사의 서재 (휴식 중입니다) 2007-08-16 21:10 
                             동짓달 긴 밤 - 김원숙 作 1992 Oil on Linen 122x56cm          
 
 
조선인 2007-08-16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제가 30대에 외우게 된 시가 있다면 이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8:57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저 3번 참여했어요. 호호~
1번은 음냐음냐.. 어려워요..
꾸벅^^

글샘 2007-08-16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가 한시로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 있었거든요.
좋지 않냐고? 애들에게 한참 설명을 했더니...
시험에 나올 것만 새카맣게 적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남학생 반만 수업해서 그런 거였나 모르지만...
그 중에 이 시를 정말 좋다고 생각한 녀석들이 있었을는지도...^^

프레이야 2007-08-16 18:5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런 시를 좋아하는 옆지기는 저보다 더 감성적인 건가요?
한시로도 읊어주더군요. 이옥봉의 다른 시들도 참 맑고 고아하더이다.
그나저나 시커먼 남학생들이 과연?? ^^
걔들이 이런 맘을 알까요? ㅎㅎ

마노아 2007-08-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시도, 재해석도, 아... 너무너무 좋아요(>_<)

프레이야 2007-08-16 18:2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좋게 봐 주셔서 넘 고마워요~~~ ^^

비자림 2007-08-1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재해석이 더 좋군요. 잘 읽고 가옵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8:27   좋아요 0 | URL
아니, 시인 비자림님 와락~
재해석시를 더 좋다고 봐주시니 기분 좋아요.
전 님의 재해석시가 더 멋지게 나올 거라 믿는데요. 님의 시를 읽고파요..
넘 오래 되었다구요..ㅎㅎ

향기로운 2007-08-1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우고싶네요^^ 조선인님덕분에 좋은 시 알게되어 기뻐요^^ 혜경님의 재해석 시도 좋아요~

프레이야 2007-08-16 18:28   좋아요 0 | URL
향기로운님, 전 시 잘 못 외우는데 이건 짧으니까 ^^
조선인님 덕분에 저도 한 번 적어보고 좋았네요. 헤헤..

비로그인 2007-08-1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치는 마음을 일으켜주는 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8:29   좋아요 0 | URL
민서님, 덥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지치는 요즘이죠.
조금 일으켜 세워드렸다니 기쁘지요^^

비로그인 2007-08-1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께서도 이 시를 암송하시는군요..
제가 읽었던 몽혼(=꿈길)을 소개합니다.


프레이야 2007-08-16 21:29   좋아요 0 | URL
한사님, 아직 휴식중이신거에요?
너무 반갑습니다. 가서 보고 추천 누르고 왔어요.
김원숙의 그림이 서늘합니다.
저를 위한 특별한 그림과 시, 감사합니다.^^

Jade 2007-08-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봤을때는, "돌이 모래가 된다는"표현이 참 유치하게 느껴졌었어요... 좋은 경험(!)을 한 지금은, 제 마음을 투영해서 읽게 되네요 ㅎㅎ

프레이야 2007-08-17 12:06   좋아요 0 | URL
어머, 제이드님 고등학교때 배우셨군요.^^
그 좋은 경험이 뭔지 대략 알 것 같아요. 덥지만 좋은 하루 보내세요^^
 
도쿄밴드왜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4
쇼지 유키야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붐을 타고 줄줄이 번역되어 나오는 일본소설들에 나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몇 권 읽다가 그만 둔 것들이 있는데 그냥 취향의 차이이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약간의 거부감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하루키의 '상실의시대' 이후 참 오래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제목이 마음을 끌어 이 책을 신청하게 되었고 즐거운 독서의 기회를 얻어 감사한 마음이다.

 작가 쇼지 유키야는 그런 나로선 물론 처음 들어본 작가인데 작년에 이 작품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아 올해 5월 <쉬 러브스 유>라는 제목으로 속편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보편적 인간애에 바탕을 두고 전편에서 'All you need is LOVE'를 노래하는 이 소설이라면 속편에 속편이 나와도 반가우리란 생각이 들었다. 개성 강한 인물들이 엮어내는 살아가는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할 테고 에피소드마다 특별함이 있을 테니까. 게다가 가족 시트콤으로 각색해도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4대가 한 집에 어울려 살며 좌충우돌 겪게 되는 소소한 이야기들과 풋풋하게 풀어가는 갈등과 화해의 이야기들이 잔잔한 감동과 특별한 재미를 주었다. 마치 얼마 전 종영한 텔레비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처럼 상큼발랄하면서 눈가를 살짝 젖어들게 하는 알콩달콩, 새콤상큼한 이야기들이다.

  부담 없이 책장이 넘어가는 장점 외에도 이 책의 나레이션이나 구성은 독특하다. 독자에게 홋타 집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는 영원한 일흔여섯 살의 죽은 할머니이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시선은 깊고 따뜻하다. 말투는 정감 있고 할머니이지만 귀엽기까지 하다. 지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가족들을 한없이 포용하며 바라본다. 때로는 집안에 모신 불당에서 자신의 영적 존재감을 느끼는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홀로 된 남편을 애닯아 하기도 하지만 손수 보살펴 줄 수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녀가 소개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이력을 갖는다. 팔순을 바라보는 꼬장꼬장하지만 정 많은 남편 칸이치와 로커출신 노랑머리 60대 아들, 이복형제이면서 내적성향이 다른 여덟 살 터울의 두 손자와 화가인 미혼모 손녀, 그리고 스튜어디스 출신의 세련된 손자며느리와 두 명의 총명한 초등학생 증손. 이들 4대의 이야기가 또 다른 이웃들과 얽혀서 일어나는데 그 중심은 ‘도쿄밴드왜건’이라는 오래된 헌책방이다. 이층의 이 건물은 표지에도 그려져 있는데, 출입구에서 오른쪽으론 카페, 왼쪽으론 책방으로 갈라지는 구조다. 가족시트콤으로 만든다면 꽤 흥미로운 세트가 될 것 같다.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책의 끝 장에서 “그 시절 많은 눈물과 웃음을 거실에 가져다준 텔레비전 드라마에” 라는 작가의 헌사가 적혀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일 년을 돌아서 다시 '봄'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봄은 동네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선술집 이름이기도 하다. 계절의 서두마다 홋타 사치 여사는 마당의 나무들을 묘사하는데 계절마다 색다른 나무들의 풍경과 인상이 일상의 이야기들을 서정적으로 풀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우리나라의 까치밥과 비슷한 풍습이 있어 반가웠다. 겨울 편에서 마당에 세워둔 대나무 끝에 귤을 꽂아두는 장면이 나온다. 물까치, 개똥지빠귀, 참새 등등 귀여운 새들이 날아와서 쪼아 먹는다며 겨울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로 가끔 쥐가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식탁에서의 먹거리를 비롯해 일본의 풍습이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살짝살짝 나오며 흥미롭다.

문화와 문명에 관한 이런저런 문제라면 어떠한 일이든 만사해결! 이것은 홋타 집안의 이어져오는 수많은 가훈들 중의 중심 가훈이다. 그외의 가훈들은 또 얼마나 구체적이고 사려깊은지. 이거 가훈치고는 너무 거창한 거 아냐, 하는 생각은 책을 읽다보면 서서히 지워져간다. ‘도쿄밴드왜건’은 구세대와 신세대간,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문명이 충돌하는 접점에 있다. 그것은 다시, 홋타 식구들이 끓여먹기 좋아하는 짭탕찌개에 비유될 수 있는데, 다양한 재료들이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한 냄비 안에서 끓고 식구들은 각자 좋아하는 것들을 떠서 먹는 식이다. 좋아하는 것만 떠서 먹더라도 국물엔 모든 재료의 맛이 우러나있으니. 무겁고 깊은 이야기를 가볍고 경쾌하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솜씨에 오히려 놀라게 된다. 이는 서문과도 같은 ‘건왜드밴쿄도?’에서 홋타 사치 여사의 정감 있는 소개말로 짐작된다. 메이지 18년에 연 이래 헌책을 파는 게 주업이면서도 시대의 흐름을 좇는 일에 뒤처지지 않는 이 특별한 고서점은 ‘낡은 가죽 부대에도 새 술은 담기는 법’이라는 창조적인 진리를 몸소 실천하는 홋타 칸이치 영감의 인생관을 반영하는 곳이다. 젊음의 특권을 인정하고 늙음의 미덕에 순응하는 재기발랄한 대사를 눈인사하듯 만나는 건 유쾌함이다.

 책은 시대의 반영이고 현실의 재현이며 개인의 정서를 통한 집단 정서의 음각이기도 하다. 이들이 만나는 ‘문화와 문명에 관한 이런저런 문제’는 대개 이런저런 헌책들과 관련되어 빚어진다. 책에 대한 애정은 물론 작가에 대한 소소한 애정도 필수다. 또한 서양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메이지를 거쳐 경제근대화에 힘쓴 다이쇼와 쇼와 시대를 관통하여 현대에 이르는 그들의 정서를 대략 어루만진다. 나츠메 소세키를 필두로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의 문호들이 열거되기도 하고 아키코를 좋아하는 영국인 머독씨를 등장시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끌어안는 방식을 취한다. 한 가지 눈에 뜨인 것은 ‘그리운 쇼와 시대’라는 대목이다. 1950년대 중후반쯤에 나왔다는 고사카 고요가 쓴 <알파벳 골목길>을 언급하며 사람들이 요즘 다시 그때 얘기들을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쇼와 시대(1926~1989년)의 군국주의 초기와는 달리 이 시기에는 전후의 국난을 극복하며 재건의 노력이 합해져 생활이 안정되어갔다. 사상,언론,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개인의 해방과 문화를 포함한 모든 면에 민주화를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보급된 시기다. 지금의 일본국민들은 오히려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니 되살아나는 군국주의 망령을 살짝 꼬집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튼 골치아픈 이런저런 일들을 해결하는데 늘 따라다니는 불문율은 러브다. 다들 생의 비밀을 갖고 있어 알아갈수록 신비한 사람들, 비극도 희극이 되고 남에겐 가십거리도 자신에겐 슬픔이 되는 말 못할 사연들을 품고 사는 사람들, 멋진 연기를 펼치며 쇼를 하듯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시끌벅적한 도쿄밴드왜건. 신세대답게 화통하니 러브로 모든 걸 해결해 주고, 그래도 미인이라면 누구나 환영한다고 외치고 아직 결혼도 안 한 것들이 손잡고 해외여행 하는 것은 가당찮다고 노여워하는 칸이치 영감을 어쩌지. 너무 사랑스럽지 않은가. 문화와 문명에 관한 한 어제와 오늘, 이곳과 저곳이 만나는 도쿄밴드왜건의 마당에는 계절마다 자랑삼는 나무들이 우뚝하다. 그 살가운 나무들에 바람 잘 날은 있으려나. 가업을 이어가는 젊음이 또한 미덥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만이 미덕은 아닌 듯. 헌 부대에도 새 술이 담기면 독특한 맛과 향을 낼 수 있을 테니..  올 유 니드 이스 러브! 빰바바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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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3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 서재에서 이 리뷰읽고 좋게 기억하고 있는데
님의 글은 또 다른 맛이 납니다.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07-08-13 10:56   좋아요 0 | URL
민서님, 더운 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 같아요.
언급되는 일본유명작가들이 많은데, 소세키만 알겠더군요.
그 작가들의 책을 찾아 읽어가면 또다른 확장의 재미도 있을 것 같구요^^

비로그인 2007-08-1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중상 이상은 하는 모양이네요 :) 전 요즘 일본소설엔 다소 물려버린 듯해서;;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8-13 10:55   좋아요 0 | URL
다소 물리셨구나. 음.. 워낙 많이 쏟아지다보니 그런가 싶기도 하구요.
성향에서 오는 것도 있을 것 같구요. 네, 잘 보셨어요. 저로선 별 넷으로
표시했어요.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2007-08-13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뽀송이 2007-08-1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다니 관심이 가는데요.^^
더러 일본소설이 주는 정서의 차이 때문에 한동안 읽다가, 또 한동안 멀리했다가 그러게 되요.^^;; 리뷰를 읽고 있으니 정말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잘~ 보고 갑니당.^.~ 추천!!

프레이야 2007-08-13 19:13   좋아요 0 | URL
뽀송이님, 고마워요 ㅎㅎ
어제 오늘 바람이 많이 불어 좀 시원하지요? 습도는 높지만요..
더우니 뭐 집중도 잘 안 되고 그렇더구만요. 근데 그 화장품은 왜
안 올까나? 혹시 받으셨어요?

뽀송이 2007-08-13 16:14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안왔어요.^^
14일까지 보낸다고 했으니까 곧 오겠지요.^^;;
가끔 몇일 늦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온답니다.^.~
즐겁게 기달~~~^.~ 님^^ 날이 후덥지근해요.ㅡㅜ

프레이야 2007-08-13 19:14   좋아요 0 | URL
14일까지였나요? 깜박했어요. 후훗~ 후텁지근해서 그런지
힘이 없어요...
 
딸은 좋다
채인선 지음, 김은정 그림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1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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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님의 생일선물로 보내드리려고 주문한 그림책이다. 다른 것과 함께 보내려고 직배하지 않고 우선 집으로 주문했다. 우선 책표지의 수수한 그림이 방긋 웃음 짓게 했다. 채인선님의 글은 전부터도 워낙 좋은 느낌을 갖고 있었고 거기에 김은정님의 그림이 마음에 쏙 들었다. 수수하고 소박한 색감과 섬세하고 나긋한 붓질이 느껴지는 그림이 추억의 사진처럼 풋풋하고 편안한 정감을 불러온다. 표지의 그림을 보면 큰딸이 5살 적에 찍었던 사진과 흡사하다. 그때 여름날, 내 선글라스를 쓰고 원피스를 입고 그렇게 사진을 찍었던 아이가 10년이 흘러 엄마의 키를 훌쩍 넘어 자랐으니...

 딸은 좋다, 여기서 ‘딸은’이라는 말은 주어이기도 하고 목적어이기도 하다. 글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내용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나는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아 기르신 내 어머니의 맏딸이고, 결혼하여 지금은 두 딸을 낳아 기르고 있는 엄마이기도 하다. 가끔은 아들 하나쯤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선 딸이 둘이나 있는 내게 부족함은 없다. 이 그림책은 모든 어머니들에게 바친다는 헌사로 시작하는데 딸을 갖지 못한 어머니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하다. 나는 조분조분 이야기하는 채인선의 꾸밈없는 글에 상당 부분 공감되었다. 대부분이 내가 딸아이 둘을 기르며 구체적으로 경험하였던 보석같이 빛나는 자잘한 이야기들이고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일들이라 무척 공감되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딸이 어릴 적에 (의도적이지 않았다해도) 엄마에게 베푼 갖가지 일들도 그렇지만 특히 사춘기에 있는 딸의 행동이 지금의 큰딸과 비슷하다. 엄마와 다툰 후 엄마의 화장대에 사과의 쪽지를 올려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건 작은딸과 큰딸 모두 잘 하는 짓인데 나는 이 책의 엄마처럼 아이들이 준 편지와 카드를 다 모아두었다. 그림 속에는 추억의 장면들이 많다. 제일 인상 깊은 건 엄마의 화장대인데, 그 위에 있는 물건들이 손때 묻은 추억을 불러온다. 나드리 코티 분과 탐스핀, 미로 화장품. 이런 제품들은 내 사춘기 시절에 어머니의 자개 화장대 위에서 본 것들이다. 특히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남편이 딸을 나무 옆에 세워두고 찍어대는 셔터소리처럼 그런 상큼한 장면을 그려놓은 그림과 글에서 눈이 반짝했다. 찍히고 있는 딸의 얼굴도 사랑스럽다. 딸은 그렇게 아빠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안다. 그런데 우리집 딸들은 하도 잦은 일이라 어떨 땐 오히려 짜증스러워하는 게 다른 점이랄까. 채인선의 눈은 어쩜 이리 소소한 일상의 포착을 잘 하였나 싶다. 성장하는 나무처럼 딸의 성장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눈. 아빠가 딸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게 그윽하고 안타까운, 섬세한 감정이 실린 눈이다. 딸은 파인더 안에 포근히 담아내어 간직하고 싶은 최고의 모델이다.

 딸이 사랑하는 이성을 데려와 부모에게 소개하는 장면부터는 내 어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한다. 늑대같은 녀석, 곱게 키워놓은 내딸을 덥석 데려가겠다고? 그래도 어쩌겠어. 딸이 좋다는데. 그저 서로 잘 위해주고 보살펴주었으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과 포옹을 하는 한복 입은 어머니의 뒷모습과 가녀린 목덜미에 보이진 않지만 눈물이 서려있다. 18년 전 나는 결혼식장에서 유독 많이 울었다. 한복을 곱게 입은 어머니도 눈가가 젖어 나를 보고 계셨던 장면이 생생하다. 그때 어머니랑 포옹을 하진 않았지만 지금 나이 드신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때의 감정들을 되살려볼 수 있다. 내가 지금의 남편을 처음 집에 데려가 소개하던 날의 부모님 심정도 내가 딸을 키워가면서 서서히 느껴볼 수 있다.

 그림과 글의 충분한 미덕에도 나는 이 그림책이 조금 우려되는 면이 있다. ‘딸은 좋다’라는 말을 굳이 하는 건 딸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왠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느낌이 든다. 아직도 공공연한 남아선호사상을 지레 짐작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남편은 성역할에 있어서 다소 보수적인 사람이었는데 두딸을 기르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요즘은 부모 양 성씨를 쓰는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전에는 반감을 가졌지만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호주제 폐지도 적극 찬성이며 딸에게 자유연애를 바란다고까지 말한다. 어떤 면에서 나보다 더한 것 같아 가끔 놀랍다. 사람은 누구나 입장의 차이,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시각의 차이가 첨예하다는 걸 느낀다.

 

 

 

 또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자리할까 우려되는 점이다. 성역할을 고정하는 것 같은 내용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내 두 딸은 서로 다른 성향을 보인다. 여성 특유의 성향인 모성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어찌 보면 철저히 이기적인 큰딸이 오히려 좋아보이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읽으려하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작은딸보다 그런 것에 다소 무심하고 자기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큰딸이 굳이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그림책에서도 그런 바람이 적혀있고 자아성취를 하고 있는 장면도 들어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딸은 모두 이럴 것이라는 혹은 이래야한다는 전제로 보이는 것 같은 구절들이 많아다소 조심스럽다.

 

 그런 점에서 ‘딸은 좋은’ 이유의 하이라이트(마지막에 나옴)는 공감되면서도 어쩐지 모성의 미덕을 너무 강조하는 것 같아 시대착오적인 느낌이다. 딸, 아들의 성역할을 미리 규정짓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소 거부감을 불러올 수 있는 내용들이라 사실 내 딸에게 보여주기에는 조심스럽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인형을 데리고 엄마역할 하기를 좋아하는 작은딸을 보며 모성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라고 느끼면서도, 그것이 아이에게 구속 같은 것으로 작용할까 염려되는 게 또 엄마인 나의 마음이다. 딸이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좀더 진취적으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앞서가는 글과 그림을 보고 싶은 건 나 혼자만의 바람일까.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도 드리는 그림책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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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8-1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려되는 부분, 저 너무 동의해요. 아슬아슬하게 어떤 다른 편견을 주지 않을까 살짝 걱정. 언제나 그렇듯 혜경님 리뷰는 정곡을 찌르십니다.
: )

프레이야 2007-08-11 18:27   좋아요 0 | URL
네꼬님, 어린이책에서 은연중에 심어주는 편견이 많아요. 그런 부분이
때로 조심스러워요. 딸만 기르는 맘이라 지레 그러는 건지 몰라도, 그런부분이
걱정되는 건 오히려 지금 자라고 있는 남자아이들에게이지요^^
남자아이들이 간혹 성역할에 있어서 고정된 생각을 말할 때 전 깜짝 놀라며
수정해 준답니다.^^ 사랑받는 남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한다고?ㅎㅎ

보석 2007-08-1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 보입니다. 책은 읽지 않았지만 혜경님이 우려하시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도 짐작이 가고요. 어린이책을 쓰는 작가나 만드는 출판사는 다른 책보다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8-12 00:09   좋아요 0 | URL
보석님 말씀에 동감이에요. 어린이책이 더욱 신중하고 알차야하는
이유이지요.

뽀송이 2007-08-11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꼼꼼하신 혜경님의 부드럽지만, 강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잘~ 읽고 추천도장도 꾸~욱 찍고 갑니다.^^
저^^ 이뿌죠.^.~

프레이야 2007-08-12 00:10   좋아요 0 | URL
아들만 둘이신 뽀송이님, 최고!!
토요일밤 아름다이 보내세요^^

소나무집 2007-08-1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려하신 그 부분 때문에 <아들은 좋다>도 나와도 된다고 생각해요.
아마 누군가 준비중이 아닐까요?

프레이야 2007-08-13 08:45   좋아요 0 | URL
소나무집님은 둘 다 함께 사니 실감하시겠어요.^^
전 아들은 왜 좋은지를 체험하지 못하니 말이에요.ㅠㅠ

다가섬 2007-08-18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채인선의
다른 그림동화(두려움아 저리가)에서도 우려하시는 부분을 발견했던 기억이 나네요.

프레이야 2007-08-18 10:41   좋아요 0 | URL
다가섬님, 그책은 못 봤는데요.. 그렇군요.
채인선님의 시선이 좀 그런가봐요. 음..
님, 어린이책 많이 보시더군요. 리뷰들도 잘 읽었습니다..

sokdagi 2007-08-2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동화를 좀 추천받고 싶어서 올만에 왔어요^^ 역시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8-29 09:41   좋아요 0 | URL
속다기님, 더위가 한풀 꺾였어요. 지금 시원하게 빗줄기가 내립니다.
하~ 숨통이 좀 트이네요. 이 책은 위에 적은 대로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지만 단점에 대해선 딸이나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가며 읽을 필요가
있을 듯해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생각이 갇히지 않게 한다면 괜찮은
그림책이에요. 그림이 수수하니 우리 정서에 맞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저희들 취향이지 요즘 아이들 취향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겠어요.
그래도 편안하고 좋은 그림은 아이들이 먼저 알아보기도 하더군요.^^

가넷 2007-12-2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그리신 분과 글을 지으신 분이 달라서 그런지, 글의 묘사하고는 약간 다르게 보이는 그림들이 몇 있었는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나네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약간 불만스럽게 느껴지긴 했어요.^^;;

그런데 이 분이... 그 ... 가치사전인가 지으신 분이셨죠? 그건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프레이야 2007-12-27 18:02   좋아요 0 | URL
가넷님 오랜만이에요. 연말은 잘 보내고 계신지요?
채인선의 가치사전, 좋은 글이지요.
여기 그림은 참 수수하니 좋아요. ^^

비로그인 2008-07-1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인선 작가의 <시카고에 간 김파리>가 새로 출간되었습니다.

프레이야 2008-07-17 23:12   좋아요 0 | URL
신간이군요. 관심 갖고 찾아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