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그라피티'는 '길거리그림'으로 다듬어 쓰세요

국립국어원(원장 이상규)은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www.malteo.net)’ 사이트를 개설, 일반 국민을 참여시켜 함부로 쓰이고 있는 외래어, 외국어를 대신할 우리말을 매주 하나씩 공모하여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일반적인 벽화와 달리, 벽이나 화면에 낙서처럼 긁어서 그리거나 페인트를 분무기로 내뿜어서 그리는 그림을 가리켜 이르는 외래어 ‘그라피티(graffiti)’의 다듬은 말로 ‘길거리그림’을 최종 선정하였습니다.

 

  ‘그라피티’가 길거리 여기저기에 그린 그림을 가리키므로 ‘길거리그림’으로 바꿔 써도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회원님께서도 ‘길거리그림’이 ‘그라피티’를 대신하는 우리말로 완전히 정착될 수 있도록 널리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 2월 7일부터 2월 12일까지 주로 ‘아이템’과 결합하여 필수로 가져야 할 물건이나 제품을 가리켜 이르는 말로 쓰이는 외래어 ‘머스트 해브(must have)’를 대신할 우리말을 공모했는데 그 결과 총 560건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국립국어원은 이 가운데 ‘머스트 해브’가 반드시 갖추거나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을 가리켜 이른다는 점과 주로 물건이나 제품을 가리켜 이른다는 점을 중시하여 다음 다섯을 투표 후보로 선정하였습니다. 회원님께서는 ‘머스트 해브’의 다듬은 말로 다음 다섯 가운데 어느 것이 좋으십니까?


  1. 갖출거리(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가리키므로)

  2. 챙길거리(미리 갖추어 놓아야 할 것을 가리키므로)

  3. 당연품(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물건을 가리키므로)

  4. 필수품(반드시 필요한 물건을 가리키므로)

  5. 필수구비품(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물건을 가리키므로)


 

  또한 이번 주 2월 14일(수)부터 다다음 주 2월 26일(월)까지는 ‘한결같이 꾸준히 팔리는 물건’을 가리켜 이르는 외래어  ‘스테디셀러(steady seller)’를 대신할 우리말을 공모합니다.

 

  부디 회원님께서도 이번 주 중 저희 사이트를 찾아 주셔서 ‘머스트 해브(must have)’와 ‘스테디셀러(steady seller)’의 다듬은 말을 결정하는 데에 직접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말 다듬기 사이트’를 방문하실 분은 여기를 눌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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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이 2007-02-15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
좋은 일이네요.^^ 우리말로 순화해서 쓰는 것!!

2007-02-15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Indian Road - The Best Of Native American Flute Music Vol.1
Various Artists 연주 / 알레스2뮤직 / 200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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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푹 빠져 듣고 있는 음반이다. 모 서재지인의 소개글로 알게 되었는데 이전부터도 인디언의 노랫소리는 나와는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저 먼 곳으로부터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귓밥을 끌어당기는 ‘무엇’이었다. 인디언들은 사라져간 쓸쓸한 것들의 상징인 양, 애잔한 감성으로 현대의 뭇사람들에게 원초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니, 'Indian'이 아니라 'Native American'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처참한 박탈과 살육의 역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노래가 특별히 심금을 울리는 까닭은 슬픈 역사의 뒤안길에 돌아서서 홀로 삼나무 플루트를 불고 있는 어느 인디언 청년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작년에, 뜻밖에도 한강유람선을 탄 적이 있다. 잉크빛 어둠이 내리고 있던 봄날 저녁의 강, 저 멀리 사람둥지의 불빛만이 별빛처럼 떠 있고 뭐든 삼켜버릴 듯한 짙은 강물이 우리가 탄 배를 밀고 나아갔다. 음산한 다리 밑에서 무언가 기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강물을 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나무피리 소리에 흠칫 고개를 돌렸다. 선실의 보잘 것 없는 작은 무대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인디언 복장을 하고 커다란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쓴 남자 세 명이 무대에서 부르고 있는 가락과 알 수 없는 나무 악기가 시선을 끌었다. 아, 저 소리! 소리가 만약 보이는 것이라면 이런 건 기시감일 테지. 깊이 공명하며, 소박해 보이는 나무통을 쓸고 나오는 바람의 소리가 나를 머나먼 곳 어느 평원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천 년 아니 수백 년만이라도 거슬러 언젠가 그곳에 내가 있었을까. 그저 눈을 감고 근거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가장 오른쪽에 서서 진지한 얼굴로 두 가지의 악기를 다루던 청년의 새까만 눈은 탄탄해 보이는 몸과 함께 생명력이 느껴졌다. 나머지 두 사람은 배가 조금 나오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시종일관 낙천적인 표정으로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길지 않은 공연이었지만 경쾌함과 처연함이 교차했던 시간, 이국의 청년이 불던 나무악기의 소리로 남았다. 그 여운을 못 잊은 나는 여러 개의, 길이가 다른 나무관이 나란히 달린, 그와 비슷한 악기를 어느 타국에서 사기도 했다. 조야해 보이긴 해도 한 번씩 꺼내 아랫입술에 살짝 대고 날숨을 쉬면 예의 그 휘파람소리가 난다.


몇 해 전이었던가. 우연히 기(氣)체험을 한 적이 있는데 내 기운은 보라색이었다. 영혼이 성하여 기수련 같은 체험을 하면 남다른 효과를 볼 수 있는 유형이란다. 하지만 정적인 힘이 강하여 자칫하면 에너지가 너무 가라앉을 수 있으니 동적인 활동을 반드시 겸하여 주라는 결론이었다. 그때 난 기수련을 시작하진 않았지만 이런 쪽에 관심이 자꾸 가는 게 아무래도 전생이 미심쩍다.^^  여담이 길어졌지만, 이 음반은 이런 영혼의 성향에 잘 부합한다. 정적인 본성을 배태하고 있지만 바닥으로부터 일어나는 역동적인 춤사위를 품고 동시에 새벽잠을 깬 동물의 기지개마냥 서서히 일어나는 가락을 갈구하는.


The Indian Road (최근 2,3집도 나왔다)는 내면적이며 명상적인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명상적이라고 했지만 다분히 정적이지만은 않고 너른 벌판을 나는 새의 날갯짓처럼 느린 움직임이 있는 쪽이다. 이 음반의 연주자들은 칼로스 나카이, 메리 영블러드 그리고 로버트 미라발이다. 칼로스 나카이는 북미 인디언 플루트 연주자 1세대이며 현존하는 최고의 거장이라고 한다. 메리 영블러드는 알라스카의 알류트 족과 플로리다의 세미놀레족의 피를 반씩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흑단 같은 긴 머리를 한 그녀가 연주하는 1번곡 <기도>와 2번곡 <안개>의 음량은 깊고 풍성하다. <기도>는 미국삼나무로 만든 플루트로 연주하는데 청명하고 맑은 기운이 몸속으로 퍼지는 느낌이다. <안개>의 리듬은 두꺼운 적막의 안개 속을 거니는 야생동물의 발바닥 같이, 공기처럼 가벼우면서도 낮게 깔리는 존재의 무게감이 가슴에 스미는 듯하다.


그녀가 부르는 3번곡 <대답 없는 사랑>은 생(生)이라는 오랜 연인에게 바치는 애가처럼 수수한 잔물결을 일으킨다. 스페인 삼나무로 만든 플루트의 선율이 심금을 퉁기는 가녀린 기타소리와 어울려 나직한 울림을 준다. 베토벤이 가장 완벽한 악기라고 칭송했다는 기타는 어느 악기와도 조화로운 장점이 있는데 인디언 플루트와도 멋진 하모니를 낸다. 넓디넓은 평원에 홀로 서서 먼 하늘을 향해 부르는 짝사랑의 노래처럼 높은 곳에 있는 생의 절대자에게 바치는 애잔한 찬가다. 4번곡 <평화와 힘>은 셰난도의 새벽공기 같은 보컬과 첼로의 나지막한 탄식이 부산한 시간을 사는 우리를 평화의 인터미션으로 이끈다. 그곳에는 누구도 막지 못할 힘이 있다. 진정한 힘은 내면의 평화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막간의 평화를 생활 속에서 부단히 실천하라는 말을 되새김하게 되는 곡이다. 기획서문에서 밝혔듯이 ‘발산’이 아니라 ‘수렴’의 음악으로 승화된 모든 곡들 중에서 가장 그 힘이 강한 것 같다. 5번곡 <내 마음 안에>는 메리 영블러드의 검은 호두나무 플루트 연주로만 울려퍼진다. 단순한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이 실감되는 단조로운 곡조의 이 노래는 ‘내 마음 안에’ 맑은 기운을 몰고 오는 것 같다.


6번 <탈주의 노래>는 칼로스 나카이의 플루트와 피아노 선율이 멋진 하모니를 이루어내는 곡이다. 미국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한 ‘How the West was Lost' 라는 다큐멘터리의 삽입곡이었다고 한다. 이 곡은 둘 곳 없는 마음을 파고 들 것처럼 황량하고 쓸쓸하다. 백인이 부르던 승리와 개척의 송가가 이들에게는 비참한 상실의 신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7번곡 <독수리가 와서 날 위해 기도하네>는 독수리 뼈로 만든 휘슬의 음률이 적막한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 같다. 감사의 기도를 담고 있는 이 노래는 지금도 어디선가 버려진 벌판에 무리지어 앉아 휘슬을 불고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을 떠올려보게 하는 것이다. 평원의 너른 하늘을 거침없이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기도소리는 주술의 음절처럼 들린다. 메리 영블러드는 9번곡 <독수리의 후예>를 흔쾌히 부르며 ’나는 추가치 알류트족, 독수리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독수리는 힘과 지도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왕의 발톱과 매서운 눈을 가진 독수리의 후예로서 자긍심을 지키면서도 절제된 창법으로 바람을 뿜어내고 빨아들인다. 그녀가 들이쉬는 바람의 숨소리가 플루트의 몸통을 거쳐 내 귓가 가까이 다가온다.


8번곡 <노란 숫양의 노래>는 드럼 소리가 플루트와 어우러져 심장박동 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북소리는 관능적인 생명의 소리로, 차분한 플루트 소리는 죽은 숫양에게 바치는 진혼곡의 소리로 죽음처럼 낮고 음울하다. 생과 사의 조화로움과 영혼의 영원함이 북소리와 함께 가슴 두근거리는 감격을 건넨다. '엘 콘드르 파사'의 진혼곡처럼 대자연 아래서 그들이 품은 생명력은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아보인다. 그녀는 이렇게, 정적인 선율만이 아니라 역동적인 선율로 흥분을 몰고 온다. 호흡량이 무척 커야할 것 같은 대담하고 격렬한 선율에 인디언들의 원초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것 같다.


10번곡 <유바 Yuba>는 드럼의 활기찬 리듬이 썩 매력적이다. 적삼나무 플루트로 메리 영블러드가 불었고, 현대 창작곡이다. ‘유바는 마이두 인디언 부족의 조상들이 살던 마을이 있던 지역으로 시에라에서 흘러오는 큰 강줄기가 깃털 모양의 강과 만나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의 차가운 강물이 영혼을 새롭게 충전시킨다고 믿었다. 가볍고 리드미컬하게 타고 흐르는 선율이 강물처럼 자연스럽고 시원하여, 재즈곡처럼 분방한 리듬에 자유로운 영혼을 담았다. 그녀가 연주한 13번곡 <갈가마귀 달 아래서>는 기타의 선율과 어울려 동물과 인간의 영혼이 소통하는 것 같은 신비한 분위기를 만든다. 14번곡 <벽들이 말을 한다면>은 피아노와 신디사이저가 플푸트와 어울려 흐느끼듯 울리며 현대적인 감각으로 인디언들의 비감을 표현해 내고 있다. 마지막 곡 <퓨마와 늑대의 춤>은 격렬한 춤을 연상하게 하는 다소 웅장한 리듬이 내부로부터 솟아나온다. 광활한 대지의 한 가운데 야생의 생명이 어울려 돌아가는 춤을 보며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오래 전 보았던 영화 ‘늑대와 춤을’과 '라스트 모히칸'이 문득 과장되게 살아나고, 인디언의 전설 ‘크레이지 호스’의 위대한 심장을 경악과 분노로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장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곡은 두 개의 자장가 곡이다. 반복되는 낮은 가락이 입에서 맴을 돈다. 11번곡 <나바호족 전통 자장가>와 12번곡 <이로쿼이족 자장가>. 단순한 멜로디에 정겨운 보컬이 잠 못 들고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듯 우리의 어지러운 영혼을 토닥여 잠재운다. 내일을 위해 오늘 평안의 수면으로 이끄는 이들 자장가의 가사에는 ‘네 인생에는 너 홀로 넘어야 하는 많은 언덕들이 있단다.’와 같은 구절로, 오래도록 지혜로 이어져온 자연의 가르침이 자연스레 녹아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체로키 인디언의 현명한 교육철학이 생각난다. 북미 인디언 최고의 가수라는 셰난도의 목소리에 담긴 운율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 친근하다. ‘잘 자거라, 잘 자거라 나의 귀여운 아가야,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착한 아이, 너를 사랑한단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던 기억. 이들의 자장가는 소란스러운 마음으로 복닥거리며 사는 우리네 가슴에 조용히 침잠하는, 소박하고 고결한 영혼의 소리다.


- “너희들 도시의 길은 너무 밝다! 너희는 별이 겁나느냐?

   너희 음악 소리는 너무 크다! 너희는 바람의 속삭임이 두려우냐?“ -

곡마다 풍경이 자연스레 그려지고 귀가 열린다. 막힘 없는 풍경 속에서 자연과 일체되어 자연속에서 가르침을 얻고 살아갔던 그네들을 떠올려본다. 눈을 감고 들으면 시공을 넘는 여행을 하는 듯하다. 어쩌면 다른 시간, 머나먼 이국의 귀퉁이에 사는 한 사람이 갖는 동경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Native American'의 플루트 소리는 그들의 애절한 영혼을 훑고 빠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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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2-12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음반 제가 찾던 음반인것 같은데요. 작년엔가 남미 인디오 음악이 너무 좋아서 다른 음반들을 몇개 샀는데 실패했거든요. 근데 님의 글을 보니 제가 찾던 분위기의 음악일것 같은 느낌이 확 드네요.

프레이야 2007-02-1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 음반은 북미인디언음악을 담았습니다. 좋더군요.
2,3집도 신청해두었어요. 남미와 북미 인디언 음악에 조금 차이가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네요^^

글샘 2007-02-1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고 싶은 것이 왜 이리도 많답니까? 엄청난 뽐뿌질의 연속...ㅠㅡ

프레이야 2007-02-1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지름신보다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뽐뿌신이 강림하셨나 봐요.^^

짱꿀라 2007-02-1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 인디언 노랫소리요. 저는 생소하기만 한데요. 아마 적합지를 못해서 그런가 보네요.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2-15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그러게요 왠 인디언 노랫소리요^^ 인디언이라 부르지 않고 내이티브 아메리칸이랍니다. 근데 생소한 그 소리가 들어보면 아주 귀에 익은 느낌이 들어요. 왜일까요. 그게 참 신기해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 선율이 마음을 편안하고 맑게 합니다. ^^

달팽이 2007-03-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음반을 들었을 때
내 영혼이 갑자기 마구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느낌들이 납니다.
뭔가 나의 마음 속의 선율과 딱 맞아떨어져서
온몸을 울리던...
뭐랄까..
내 몸이 악기가 되어버린... 그런 느낌요..
몇 번을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음악입니다.

프레이야 2007-03-0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정말 그랬어요. 이 음반 님의 서재에서 알게 되었지요.^^
내 마음속 선율과 딱 맞아떨어져서 온몸을 울렸다니, 정말 님의 명상적인 마음과
잘 맞는 말이에요. 우리몸도 하나의 악기가 아닌가요! 나무로 만든 플루트의 소리가 정말 몸속에서 공명하는 것 같았어요. 마음이 부산스러울 때면 찾게 되는 음악이에요. 2,3집도 구입했는데 3집은 아직... 아끼고 있습니다.^^

풀꽃선생 2007-06-27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탈리아 뒷골목에서 거리공연 하던 인디오들 본 적 있어요. 그 음악의 신비함이 너무 낯설었는데... 들어보고 싶어요.

프레이야 2007-06-27 22:24   좋아요 0 | URL
풀꽃선생님, 이탈리아 뒷골목! 정말 그려보는 풍경이지요.
뒷골목들을 다녀보고 싶은 꿈이랍니다. 이 음반, 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3집까지 나와있더군요.^^
 
 전출처 : 푸하 > 비슷한 정서의 세 시.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추천사 /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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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7-02-12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세 분 모두 제겐 스승이었답니다.

프레이야 2007-02-1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도 문학을 공부하셨군요.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문학적 감수성은
여전하실 듯해요. ^^
 
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오르한 파묵. 그가 쓴 수상연설문을 읽고 나서 평소 '바늘로 우물을 파듯' 글을 쓴다는 터키의 한 작가에게 더욱 호감이 생겼다. 하나의 글로서도 완성미를 갖춘 긴 연설문의 제목은 ‘내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었다. 작가에게는 영감(靈感)의 보고이기도 했던 그 가방에 파묵은 자신의 수상에 대한 헌사를 드렸다. 수상한 사람의 글을 찾아 읽는 편이 아니지만 지적이며 인간적인 매력을 풍기는 이 작가의 작품을 몇 가지 골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마음 가는 제목으로 ‘새로운 인생(1994)’, ‘내 이름은 빨강(1998)’, ‘눈(2000)’ 그리고 1985년 작인 <하얀 성>을 맞이했다. 연대순으로 읽어보려고 했지만 <하얀 성>의 책표지가 먼저 마음을 끌었다. 소리를 삼켜버린, 백설로 덮인 것 같은 미지의 성 위로 침묵의 병사들이 줄을 지어 오르고 있고 탑의 꼭대기는 과연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계단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저 아래로 계단 한 자락에는 병사 한 명이 일행과 떨어져 앉아있다. 성 아래의 어떤 풍경을 보며, 무슨 상념에 빠져있는 것일까.


흔히 파묵의 작품이 다루는 주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작가는 ‘아니다’라는 말로 일축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제 언급할 때가 온 것 같다. 인간과 문화를 서로 구분하기 위해 행해졌으며, 앞으로도 행해질 분류 중 하나인 동서양 구별이 실제 얼마나 적합하냐는 것은 물론 <하얀 성>의 주제가 아니다.'라고 밝혀두었다.(p261) 하지만 하나의 작품은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 해석할 수 있고 그 활동 자체가 독자의 즐거운 권리이기도 하다. 작가가 부인하는, 그러한 주제에 대한 독자의 인식이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는 표식이 작품 전반에 나타나 있다. 터키인과 이탈리아인의 두 인물을 오랜 세월 함께 지내게 한 구도가 먼저 그런 해석을 낳게 한다.


부분적으로 혹은 전반에 걸쳐 동서양의 종교, 문화, 학문을 넘어, 동양과 서양이라는 소우주 간의 대립과 교류, 화합이 취하고 나아가는 양상들을 조합해 볼 수 있다. 호자(터키인)와 나(베네치아인)는 일별로도 서로가 닮았음을 알지만 쉽게 마음을 트지 못하고 적대시하며 서로를 탐색하고 긴장한다. 서로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심 상대를 이용하려는 마음도 버리지 못한다. 이들이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그들의 지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쓰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사소하고 순연한 유년생활, 심층의 죄의식과 욕망, 꿈이 쏟아져 나오고 그속에는 과장과 환상이 섞여 존재한다. 작가는 이들의 오랜 동거와 몇 번의 이별이라는 긴긴 인연의 고리를 보여주며 이들은 결국 필연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말한다. 상대를 닮아가려는 건 몰락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시나브로 동일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쪽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동서양의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작가의 긍정적이고 균형 잡힌 세계관과 동시에 동양에 대한 자부심을 비추어 봄직하다.


<하얀 성>이 이렇게 명료한 표피만을 드러내는 소설이라면 표지의 그림이 내뿜는 강력한 자성에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작품 전체에 보석처럼 박혀 빛을 발하고 있는 은유와 상징들 중 몇몇은 이해가 되지만 쉬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터키에 돌연히 번진 흑사병 같은 것이 그렇다. 인간이 품는 죽음과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빗대기 위한 소도구로 보인다. 짧지 않은 서문으로 시작하여 이야기의 개연성을 강조하면서, 긴박한 분위기를 만들지도 않고 시종 차분한 어조로 끌고 간다. 이야기에 극적인 구조를 굳이 장치하려고 하지 않고 '나'와 호자, 파디샤가 만들어내는 삼각의 긴장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게 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나’와 ‘호자’가 동일시되어 '나'와 '그'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으로 휘몰고 간다. ‘호두나무 높은 가지에 긴 끈으로 묶은 그네 하나가 희미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앞에서 펼쳐진 기나긴 이야기들의 파노라마를 얼른 감지되지 않는 율동감으로 그리게 되며 내 마음속에 그네 하나가 달강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 복선이 장치되어 있었지만,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걸 읽는 내내 체감하지 못했다. '서로의 삶을 바꾼 두 사람 이야기'! 소설의 끝에서 그들이 도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야 조용히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다’라는 후렴구가 머릿속에서 맴돌아 괴로워하는 호자에게 주인공 ‘나’는 ‘나는 왜 나인가’를 자문하라고 충고하지만, 결국 작가는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이기도 하고 타인이기도 하지 않던가.  ‘나’라고 하는 자아 안에는 주체와 객체가 공존한다. 주체는 객체를 밀어내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하면서 우호와 적대의 노선을 끝없이 교차하며 상생한다. 여기서 ‘호자(선생)’와 ‘나’는 하나의 자아인 ‘나’로 통합되면서 각각 주체이면서 객체로 변별되기도 한다. 그들은 역할을 수없이 바꾸어가며 하나의 ‘나’로 가기 위한 울퉁불퉁한 비탈길을 걸어간다. 모호하고 아득하기만 한 '정체성' 이라는 '하얀 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가 기다려왔던 고통의 시간은 그것을 찾기 위한 시간이나 다름없다. 즐거웠던 시간도 간혹 있었지만 대체로 얼마나 암울하고 비굴했던 노예(‘나’는 터키 갤리선에 잡혀온 노예의 신분)의 나날이었나.


파디샤의 명령으로 병사들과 행군하는 숲에서 불현듯 ‘하얀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성을 보며 ‘그에게도 고요하고 조심스럽게 끝나고 있는 그 어떤 것의 완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서술한다. 이들의 앞에 놓인 '새로운 인생'을 예감하는 이 대목에서 하얀 성을 묘사하고 있는 고고하고 아련한 색채에 취했다. 작가는 인간성의 기품을 믿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새로운 인생'은 다음 차례로 내가 읽을 파묵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 빛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에서 당신이 어두운 숲속 구불거리는 길에서, 언덕이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 황급히 뛴다면 마치 그곳에 당신도 참가하기 원하는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p218)


대개의 우리처럼 주인공 ‘나’의 불운은, 그곳으로 가는 비탈길을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자 하나이며, 고통과 평화와 어둠을 완벽하게 두루 갖춘 곳임을 깨닫는다. 우연의 경험이라 여겼던 일들이 필연임을, 그럼에도 그 성의 하얀 탑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중요한 것은, 호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대목이다. 드디어 자기합일의 경지에라도 오른 것일까. 하지만 쉽사리 이루어낼 수 있는 과제라면 화두도 아니었을 테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다소 절망적인 숙명으로 보인다.

 

-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얀 성처럼, 갈수록 어두워지는 바위투성이의 비탈과 잠잠하고 어두운 숲의 모습처럼 완벽했다. (p219)

문학에서 숲은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장치로 쓰인다. 숲의 탐색은 무의식의 탐색을 은유한다. 불온하고 은밀한 어둠의 숲을 뚫고 나오는 여정은 짧지도 순탄하지도 않다. 차가운 바람 속, 야생동물이 노리는 눈빛과 독버섯 가득한 유혹의 숲을 지나 부르튼 발을 질질 끌며 숲을 빠져나오는 순간, 피로에 지친 두 눈 가득 여명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은 그러니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완벽한 어둠과 동시에 완벽한 밝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물은 삼각의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파디샤는 호자와 ‘나’를 조이고 당기는 역할을 한다. 그는 이들에게 있어서, 서로 자기 것이라면서 싸우는 형제에게 이건 네 것이고 이건 내 것이라고 구별 지어 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아홉살에서 스무살이 넘기까지, 파디샤는 상대적으로 어리지만 지략과 담대함을 갖추었고 학문에 대한 호기심 또한 강한 인물로 나온다. ‘나’는 파디샤의 능력력을 간파했고 그와 같은 '아이'가 되고 싶어 하며 적어도 그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다운 통찰력과 직관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호자도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이지만 드러내 보이는 행동은 적대적이어서 파디샤에 대한 열패감을 반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파디샤의 위엄이 두려워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지만, 후반부에서 파디샤가 이들이 만든 부풀린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을 보고 나(호자와 동일체)는 실망감과 함께 분노감을 느낀다. 이들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거리낌없이 쓰고자 했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이다. 이들은 정체성을 잃지 않는 방법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이야기로 가득 찬 거대한 세상에서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빛이 된다는 진리를 얻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우리의 인식을 뒤집어준다. 어느 날 호자와 ‘나’를 아는 다른 타인이 오고, 호자가 된 ‘나’, ‘나’가 된 호자는 하나이지만 둘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놀라며, 오히려 기뻐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서로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타인에게 도리어 감명을 준다. 그는 그렇게 많은 세월을 같이 살았던 두 명이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닮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이 사람은 호자인 ‘그’와 동일인물일 수 있다)가 쓴 책을 읽으며 하얀 성의 이름을 소리쳐 말했고 허공의 끝없는 부분, 존재하지 않는 초점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가 ‘나’가 쓴 책을 즐겁게 읽으며 책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찾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 집 뒤뜰이 보이는 그 창문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았다.’ 그가 본 것은 실패한 무기에 대한 무용담이나 학자연하는 거만한 태도, 명성과 부를 위한 위선적인 행동들이 아니라, 자기 취향대로 가꾼 뒤뜰,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점성술을 보러 찾아온 사람들과의 즐거운 대화, 자기 자신에 대한 속수무책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p238) 일흔이 된 '나'는 이렇게 생의 마지막 고백을 한다.  ‘나’와 ‘그’는 동일자아다. 내 속에는 타인의 얼굴이 다분히 투영되고 그 속에도 여러 가지의 얼굴들이 괴물처럼 언제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그 모습 속에 투사되는 갖가지 감정들은 불쾌하거나 유쾌한 종류로 이분되겠지만 그 뒤에 그늘처럼 드리워지는 건 늘 연민의 감정이다. 때로는 땅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생이 지리멸렬하거나 생명의 연약함에 태생적인 열등감이 들 때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곁에 있는 ‘그’를 쳐다보고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눈짓을 보내는 것이다.

- 내가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내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내 생각을 아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오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 못생긴 입, 연필을 쥐고 있는 내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p238)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는가이다. 행복은 높고 아득한 하얀 성에 있지 않고 바로 저 창문 밖, 살랑 바람 불어대는 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 자신이 시인했듯이 거울을 보는 행위가 상징하는, 두 가지 얼굴의 자아가 상충과 화해를 거듭하는 과정은 문학작품의 빈번한 소재가 되어왔지만 파묵은 그 위에 자신만의 고아한 색채를 입혔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 행복에 관해서도 이 책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결론을 재현해 내고 있지만, 작가는 영민한 눈을 반짝이며 진실된 이야기꾼답게 낮고 맺힌 목소리로 조근조근 풀어놓고 있다. 호자의 말처럼 우리의 뇌가 쓰레기로 가득찬 서랍 같은 것일지라도 그의 서랍은 뭔가 다른 종류의 것으로 가득할 것만 같다. 이제 우리에게는 거울을 보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하는 의무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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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2-1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어렵다는 소문이 들려서... 머뭇머뭇 거리고 있었는데...^^; 역시 봐야겠어요.

소나무집 2007-02-1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저는 내가 누구인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프레이야 2007-02-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소나무집님/ 내가 누구인가는 풀리지 않는 해답이지만 그 해답을 찾아 고민하고
나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또 진실이겠지요.

짱꿀라 2007-02-1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소설의 한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편의 철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이 너무 어려워요. 혜경님의 리뷰를 보니 완전히 소화하신 듯 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2-16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제가 읽은 파묵의 첫작품인데 상당히 매료되었습니다. ^^

산도 2007-03-0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 성'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다음 작품에 손이 가질 않고 있네요. 어려웠던가... 어쩐지 내게는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어요. '호자와 '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소리지르며 동화되어갔던 어두운 밤, 집 밖에서 창틀로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 내가 훔쳐보는 것' 같은, 표현하자면 조금 오싹해지는 느낌.. ^^;

프레이야 2007-03-0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 이미지가 바뀐 것 같네요. 참 아름다운 밤하늘입니다. 그리고 반가워요.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오싹한 느낌이 들더군요. 이미지로 남아있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래요^^

오우아 2007-04-1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려고 몇 번 망설였을 뿐 아직도... 멋진 리뷰....

프레이야 2007-04-1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아님, 감사합니다. ^^ 저의 글쓰기도 현재진행형이에요!

책속에 책 2007-05-0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저 이거 읽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오르한 파묵은 완전히 포기했는데, 배혜경님 리뷰 보니 다시 도전하고 싶어지네요

프레이야 2007-05-0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aydreamer님, 네 읽어보시면 괜찮을 거에요.^^ 저도 다른 오르한파묵 작품들을
사두고 아직 못 읽고 있어요. 얼른 읽고는 싶은데 또다른 책들이 쌓여있으니..
 

상상플러스, 라는 티비 프로그램을 아이들이 잘 본다.

그 중 우리말 관련 코너는 재미있는 출연진들 때문에 웃어가며 볼 수 있어서 더 인기인가 보다.

초등교과서에 나오는 동시를 아나운서 진행자가 먼저 낭송하고

출연자 여섯 명이 돌아가며 낭송해 보는데,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는 어려운 시간이다.

잠깐 보았는데, 동시 낭송 중에 '만지작만지작' 과 '갉작갉작' 과 '괜히' 라는 낱말이 나온다.

이거 막상 하려니 애매하다. 역시나 나도 틀렸다!

우리말! 역시 제대로 말하고, 읽고, 쓰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만지작만지작  -- 만지장만지작 --- 만지작만지작, 으로 잘못 읽기 쉬움

 

갉작갉작 -------- 각짝각짝 --------- 갈짝갈짝, 으로 잘못 읽기 쉬움

 

괜히  ------------- 괜; 히 -------------- 괘니, 로 잘못 읽기 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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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2-11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갈짝갈짝으로 읽었는데 각짝각짝이라니... 에고, 우리말도 어렵네요.

뽀송이 2007-02-1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_*
바르게 읽기 싫은뎅...(__)
그냥... 내 맘대로 할래용...^^;;;; ㅋ ㅋ

날개 2007-02-11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지작만지작은 정말 몰랐어요..^^;;

무스탕 2007-02-11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어려워요... 그냥 편안하게 읽으면 안되는건가...

프레이야 2007-02-1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르게 읽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쓰기가 정확하지 않은 아이들 보면 읽기가 정확하지 않더라는 경험이... ㅎㅎ 그래도 뭐... 뽀송이님은 맘대로 하셔요^^

마노아 2007-02-1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어렵고 재밌어요. ^^

2007-02-12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나무집 2007-02-1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말에도 미심쩍어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정말 만자장만지작으로 읽네요. 왜 그렇게 읽어야 된대요?

프레이야 2007-02-1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 그 힌트로 '국물'을 들더군요. <궁물>로 소리나지요.
마노아님/ 정말 재미있기도 하고 어렵지요.
속삭인님/ 고맙습니다. 칭찬도 격려도 힘이 되어 더욱 기뻐요.
건강한 나날, 힘찬 나날, 날로 빛이 더 하는 시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2007-02-12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