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희령이가 부쩍 말수가 많다.

어젯밤에는 엄마와 아빠에게 각각 장문의 편지를 써서 주더니...

엄마랑 산책하고 싶다며 종알거리는 애를 데리고 오후 늦게 나갔다.

공원을 산책하려다가 왠지 가까운 바다로 가고 싶어졌다. 아이를 꼬드겼더니 금세 발길을 돌려준다.

토요일 오후라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물론 자동차들도 서서히 기어가고 있다.

어렵게 주차할 곳을 찾다가 별다방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들어갔다. 한 시간은 무료가 되니까.

희령인 오렌지주스를 나는 카페라떼를.  통유리 밖으로 마주보이는 광안대교 불빛이 보라빛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바다색이 어느새 짙어지고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희령이랑 이야기를 나누면 기분이 좋아진다.

친구들 이야기,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 지금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하고 있는 것들,

앞으로 아나운서보다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말, 자기가 생각하는 남편감과 자녀계획까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고 하느님이 주시는 대로 딸이든 아들이든 감사한 거라고 말해주었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응, 그러면 남매가 좋겠네, 란다. ^^

장난꾸러기 남학생들이 방학 때 길에서 만나니까 무지 점잖고 착해졌더라며 이상하다고 갸우뚱..

철이 드는 거겠지, 라고 했더니 어제 수업온 5학년 오빠들은 왜 그렇게 유치하냐고 반문한다.

남학생들은 원래 좀 유치해, 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근데 이거 맞나? ^^

내일 노랑할아버지 생신 카드 써야겠다는 말,  자기는 누구 어른스러워 보인다고 하면 좋지만

너무 아이 취급하면 싫다는 말, 하지만 어른들은 젊어보이는 게 좋더라며 할아버지는 올해 일흔여섯

되는데도 참 젊어보인다며, 엄마 아빠도 그렇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을 알고 기혈을 누르듯 꼭꼭 짚어주는 아기여우~

난 엄마가 참 마음에 들어,,, 엄마는 우리희령이가 제일 좋은 걸,,,

이렇게 닭살멘트를 서로 날려주었다.

결론은 희령이는 엄마아빠 같은 사람의 딸이라 무척 행복하고,

난 행복해 하는 희령이를 보면 제일 행복하다는 것.  ㅎㅎ 사진이나 한방 찍자꾸나, 김치~



<마음 내키면 꼭 저렇게 귀걸이를 하고 나오는 희령꽁주, 귀찌인데 귀를 뚫은 것 같이 보이고 예쁘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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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7-01-27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마음 먹으면 바로 바다를 볼 수 있는 부산 사시는 님이 부럽습니다. 저두 바다가 보고 싶어요~~~~
희령이와 님 참 예쁘십니다.

水巖 2007-01-2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령이가 서울에서 보았을때 보다 더 예뻐졌는데요.

프레이야 2007-01-27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그래서 참 좋답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수암님, 네 그동안 또 좀 자란 것 같아요. 여전히 통통한 게 식성이 워낙 좋아서요^^

춤추는인생. 2007-01-27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희령이ㅎㅎ야무지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이곳까지 다 들리는데요?^^
귀찌한 희령이는 아가씨같구요! 혜경님 표정에서 사랑스러운 딸을 두신 엄마모습이 엿보여요...
아......참..평화로운 풍경이네요. 혜경님..*^^*


프레이야 2007-01-2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추는인생님/ 왜 그렇게 엄마랑 이야기하고 싶었던지, 이제 알게 되었어요. 방금에야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를 꺼내네요. 금요일오후에 잘 놀던 친구의 한 마디에 마음이 무척 상해 속이 많이 아팠나 봐요. 어쩐지 그날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표정이 좀 안 좋더라구요.^^ 그래도 그런 일을 나한테 말해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속으로만 끙끙 앓는 건 좋지 않은데 말이에요. 님, 편히 쉬세요^^

서연사랑 2007-01-2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너무 행복하고 아름다운 모녀의 모습입니다.^^

hnine 2007-01-2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워요.
혜경님이 부럽고, 희령이가 부러워요...

글샘 2007-01-27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오늘 저랑 같은 바다를 보고 계셨군요. 오늘 유난히 광안리 바다색이 예쁘더라구요. 엄마는 딸이 있어야 한다더니, 좋은 엄마와 따님의 모습입니다.^^

꽃임이네 2007-01-2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다가 보고싶으면 볼수있는 부산에 사시니 부럽네요 ..
다정한 모녀모습이군요 . ~~ 저도 그런 날이 언제 올까요 ..
너무아름다운 님의 모습입니다 .희령이도 이쁘구요
전 대학로에서 음악체험 하고 옆지기 만나서 찜질방에서 늦게까지 놀다 왔어요 .
주말 잘보내세요 ^^*

프레이야 2007-01-28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연사랑님/ 고맙습니다.^^ 님이 따님과 함께 하는 모습도 풋풋하게 느껴지더이다.
hnine님/ ^^ 고마워요. 오늘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글샘님/ 작은애가 좀 그래요^^ 친구 때문에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까 생각하면 속상
하지만, 스스로 그런 감정도 다스리고 건강하게 풀어가는 것 같아 뿌듯해요.^^
같은 바다를 보고 있었다는 말이 듣기에 좋습니다.^^
새벽별을보며님/ 닭살 풍경! 때론 괜찮지요 ㅎㅎ
꽃임이네님/ 꽃임이가 조만간 그런 역할 할 것 같은데요^^
옆지기님이랑 찜질방도 가시고, 따끈따끈한 시간 보내셨네요.
대학로 음악체험도 무척 좋았겠어요.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 바래요^^

건우와 연우 2007-01-2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부모가) 마음에 든다고 말 할 수 있다는건 그만큼 아이와의 공감대가 많다는 거겠죠.
희령이와 님은 정말 행복한 모녀지간이시군요.^^

프레이야 2007-01-2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연우님/ 오늘 좀 쉬고 계신가요?
아이가 고민이 있을때 제일 먼저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되고 싶어요.
언제까지 그렇게 유지할 수 있을지... 아이가 크면 점점 멀어질지도 모르는데..
긴장하고 노력해야겠어요.

진주 2007-01-28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정하고 자연스럽네요. 저는 제가 워낙 무뚝뚝한데다가 머스마들은 커갈 수록 엄마와 멀어져서 저런 다정한 모습은 연출하기 힘들어요. 큰놈은 팔짱끼면 기절초풍해요.

프레이야 2007-01-2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전 팔짱끼고 기댈 아들녀석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딸은 딸이라 좋고 아들은 아들이라 좋을 것 같아요. 욕심이지요.^^
윤이는 팔짱끼면 기절초풍한다니... 사춘기인가 봅니다.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좋으시겠어요. 아들, 딸 골고루 있으니...^^

마노아 2007-01-2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한 시간 나누셨군요. 한폭의 그림같고 영화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따스하네요. 님이 보셨을 그 바다도 부러워요~ ^^

무스탕 2007-01-28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큰 아가들... 이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시겠어요.
바다가 가깝다는건 참 좋은일이에요 ^^

바람돌이 2007-01-29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와 딸의 대화가 너무 정겨워보입니다. 미모를 자랑하는 사진까지.... 딸아이들은 점점 커갈수록 엄마의 친구가 되가는 것 같아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모녀의 모습입니다. 그리 멀지않은 저의 미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맘대로.... ^^

icaru 2007-01-2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딸을 낳아야 해. (으아~ 자매같슴다!..) 희령이 동그랗고 맑고 오목조목 정감가는 얼굴이어요..

짱꿀라 2007-01-2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보기 예쁜 사진입니다. 다정히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행복해 보이시는 것 같네요....... 행복의 미소를 지어보고 봅니다.

전호인 2007-01-29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글동글한 희령이가 귀엽습니다. 못지않게 혜경님 또한 글에서 풍기는 이미지 만큼이나 곱네요. 아이~~~ 고와라! ㅎㅎ. 바다와는 거리가 워낙 멀다보니 말만들어도 운치가 느껴집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겨울바다의 서정적인 이미지에 반하여 인천 월미도 쪽을 찾은 적이 있지요. 추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꿈과 현실은 다르더라구요. ㅋㅋ, 행복한 미소가 얼어붙은 마음을 녹게합니다.

토트 2007-01-2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너무 보기 좋아요. 역시 딸이 좋군요.ㅎㅎ
배혜경님 너무 미인이시네요. 희령이도 너무 예쁘고. ^^

향기로운 2007-01-2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미소가 너무 예뻐요^^ 엄마를 좋아하는 딸하고 딸을 좋아하는 엄마. 보기 좋습니다^^

춤추는인생. 2007-01-2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희령이가 님께 조곤조곤 고백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희령이의 고민을 생각해서는 그러면 안되겠지만. 얼마나 귀엽고 예쁠까.. 그생각이 먼저드는거 있죠?
희령이 마음 빨리 풀리기를 언니가 기도한다고 전해주셔요..^^.

프레이야 2007-01-2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겠지만, 잠시라도 이런 시간 좋은 것 같아요.
바다... 자주 보실 시간이 없어시죠? 우린 자주 보게 되는데도 늘 새롭네요.^^
무스탕님/ 혼자 앓지 않고 엄마에게 털어놓아주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그렇게 건강
하게 자라면 좋겠어요. 아이 왈, 바다를 보면 마음이 시원해진다나요 ^^
켈님/ 분위기로 승부하는 ㅎㅎ
이카루님/ 자매 같단 말에 헤벌쭉 합니다.^^
산타님/ 갖고 있던 폰으로 찰칵.. 행복은 작은 것에서..^^
전호인님/ 꿈과 현실을 다르던가요 ㅎㅎ 월미도라면 저도 20년 쯤 전에 가 보았어요.
배를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지요. 저도 그때 겨울이었는데... ^^
토트님/ 딸이 좋지요. 그날 희령이가 자기는 딸만 낳고 싶다고 하길래
제가 꼭 딸만 좋은 건 아니고, 그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었더니
그럼 하나씩이 좋겠다고 하더군요^^
향기로운님/ 님은 희령이 말대로 하나씩이니까, 최고지요^^
춤추는인생님/ 그날 나랑 이야기하고 일기 쓰고, 그러더니 스스로 풀리고 있나
봐요. 예쁜 언니가 기도해 주었다고 전할게요^^

박예진 2007-01-29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꿈이 비슷하네요 :) 바다 가까워서 너무 좋으시겠어요.

프레이야 2007-01-3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진님/ 반가워요. 외교관의 꿈? ^^
정말 잘 해낼 것 같은 걸요. 방학 즐겁고 보람되게 보내고 있겠죠?

바람돌이님/ 해아와 예린이는 더블로 더할 것 같은데요. 애들이 참 예쁘던걸요.
아마 엄마랑 잘 맞고 친구처럼 좋은 사이가 될 거에요.^^

sooninara 2007-01-30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쟁이 미모의 모녀라니...정말 부럽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찻집 데이트..좋은데요. 저도 나중에 딸이랑 해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07-01-30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님/ 은영이랑 당장 하셔도 좋을 걸요. 딸, 은영이가 친구 같고 더 좋지요 ㅎㅎ
 
헨쇼 선생님께 보림문학선 3
비벌리 클리어리 지음, 이승민 그림, 선우미정 옮김 / 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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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물리적 무게와 책값에 들어가는 불필요한 무게에 대한 쓴소리도 있지만 난 이런 종류의 하드커버 책을 좋아한다. 어린이책도 디자인이나 장정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책을 고를 때 옆에서 가만 보면, 품격 있어 보이는 모양과 색상, 삽화 그리고 한눈에 매료되는 어떤 것들에 무의식중 좌우되는 걸 알 수 있다. 취향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손에 쥐고 펼쳐보고 싶은 책이라야 소유욕이 있기 마련인 아이들도 가까이 하고 싶어할 것 같다. 늘 믿거니 하고 고르게 되는, 보림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우선 내 맘에도 들었다.


주인공 리(Leigh)는, 이또래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자기 이름을 못마땅해 하고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평균치 소년’이라고 평가했지만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그리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과 사려 깊고 자립심 강한 사고가 엿보이는 아이다. ‘리’가 2학년에서부터 6학년이 되어서까지의 성장기록이 그가 쓴 편지와 일기를 통해 드러난다. 편지와 일기는 어린이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이다.  편지는 채도를 낮춘 연두색 종이에, 일기는 약간 노란 종이에 씌어있다. 종이질감도 좋고 눈이 아주 편안하다.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읽어주신 무척 재미난 동화에 반해, 그 동화작가 Mr. Henshaw 에게 보내기 시작한 편지로부터 이 아이의 글쓰기는 시작된다. 그 과정을 보면 글은 자라고 변하고, 침체기도 있으며,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글을 쓰면서 ‘리’는 자신의 갑갑한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바라보고 표현하며 보살핀다. 글쓰기가 아니라면 이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와 갈등을 표출할 수 있었을지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글을 쓰고 생각하며 자신을 돌보는 과정에서 ‘리’는 이혼한 후 홀로 자기를 키우며 늘 집세를 걱정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야간에는 간호조무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기대에 어긋나게도 전화를 자주 해주지 않는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도 외로워 보이는 아빠의 어깨를 보며 왠지 슬픔을 느끼는 마음으로 점차 바뀐다. 오랜만에 보게 된 아빠가 전처럼 커 보이지 않았다는 대목은 ‘리’의 성장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리'의 성장을 엿볼 수 있는 다른 대목은 좋은 책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어가는 부분이다. 처음 헨쇼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동기는 <개를 재미있게 해 주는 방법>이라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몇년이 지나 헨쇼가 쓴 신간 <가난뱅이 곰>을 읽고 '리'가 가진 감상은 정신적 성장과 함께, 우리가 좋은 책, 혹은 좋은 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이다운 글귀로 헨쇼에게 보내는 편지에 '리'의 생각을 담아보낸다. "(작가는 늘 생각하는 버릇을 길러야 된다고 하셔서요) 좋은 책이라는 게 반드시 내용이 웃겨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웃기는 내용이 종종 이로울 때가 있지만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없는 책이에요......"(62쪽)  이 대목은 어린이책 작가로서의 비벌리 클리어리의 신념이기도 할 것이다. 키치 문화가 만연한 요즘 아이들도 가볍고 신기하고 기이한 것만이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진중한 생각을 물어다주는 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리’의 성장을 보며 한 아이가 자라는데 필요한 건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아이는 이미 많은 것을 안고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씨앗처럼, 그 안에 이미 나무가 있고 숲이 자리하고 있다. 이래라저래라 가르치고 고치려드는 게 아니라 품고 있는 것들을 끌어내어주는 게 어른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리’의 주변에 있는 의미 있는 타인들이다. 이들이 건네는 관심과 따스한 한 마디는 스스로 자신을 사랑스럽게 대하는 아이로 만든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전학 온 학교에서 자신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말을 걸어오는 프리들리 아저씨와 도서관 사서 선생님, 자꾸 없어지는 맛있는 점심식사의 도둑을 잡기 위해 도시락경보장치를 만들 재료를 사기 위해 갔던 동네 철물점 주인아저씨. 이들은 잠깐씩 등장하는 조연이지만 ‘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생의 순간을 소중한 기회로 만들어 주는 배려심 깊은 타인들이다.

 

이 책에서는 아이의 성장과정과 함께 글쓰기의 성장과정이 병행한다. '리'는 글쓰기에 점차 자신감이 붙고 끈기있게 '쓰기'를 하면서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게 된다. '어린이 작품집'에 낼 글을 쓰려고 고심하는 과정은 눈여겨 볼 만하다. 먼저 다른 아이들처럼 재미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써보려고 의도하지만 그게 뜻대로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헨쇼 선생님에게 조언을 구한 편지의 답장으로 '이야기 속 등장인물은 문제를 해결하든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되지만 구상하기가 만만치 않다. 시를 써보기로 마음을 바꾸지만 '시는 이야기보다 리듬이 중요'하더라는 것을 알게된다. 이점은 꼭 동의되진 않지만. 또한 '이야기를 만들어 쓰는 능력은 살면서 얻는 경험이 더욱 풍부해지고 이해하는 힘도 깊어졌을 때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은 후반부에서 만나게 되는 또다른 작가가 해준 말이다. 이 작가는 미래의 작가 '리'에게 중요한 말을 들려준다. "너는 다른 사람을 흉내 내지 않고 네 자신 그대로, 가장 너답게 글을 썼잖아. 그게 바로 네가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증거야." 라고.


<헨쇼 선생님께>는 읽을수록 잔잔한 울림이 있다. 문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런데 2학년부터 6학년까지 아이가 쓴 편지와 일기라는 점을 감안하여 번역하였는지 약간 궁금해진다. 초반에는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아이의 문장으로 보기에는 너무 단정한 문장이다. 후반에는 ‘개인적으로는’ 이라는 말이 이 문장 중에 나오는데 6학년 아이가 이런 단어를 쓸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 책에는 별 다섯을 주고 싶다. 그시절을 지내온 어른이 보기에도 울림이 담담하고 진솔하며 형식면에서도 주제성과 어울림이 있다. 톡톡 튀는 아이다운 말투와 발상도 곳곳에서 재미나다. 헨쇼 선생님에 대해 독자가 상상하는 몫도 흥미로운데 끝에 가서 나오는 한 구절은 대개의 상상보다는 의외라서 더 그렇다. 그리고 이승민님이 그린 삽화가 한 몫 한다. 마치 목탄으로 거칠게 스케치한 느낌을 주는 흑백의 삽화가 아련한 그리움과 왠지모를 슬픔을 자아낸다. '리'라는 아이가 어른이 된 후 지나간 날들을 반추하는 기억 속의 필름 같다.  책표지에는 금발의 남자아이가 연필로 꾹꾹 눌러 편지를 쓰고 있다. 초등 5학년이상이면 권하고 싶다. 특히 글쓰기를 어려워하고 문제에 부딪혔을 때 피하거나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드는 아이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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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7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1-27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그 나이에는 아직 읽기가 지루할 것 같구요 내년 쯤이면 좋아할 것 같아요.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아이라면 더 ... 어른들이 읽기에 더 좋은 것 같은 동화...
맞아요. 그게 동화 쓰는 사람들이 넘어야 할 부분 같아요. 그래서 더 어렵구요.
아이들 나름대로 느끼고 건져올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해요.^^

비로그인 2007-01-28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책으로 보이는데요? 어른이 봐도 재밌어요?

프레이야 2007-01-2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라님, 전 재미있게 보았는데요, 특별한 사건이나 신기한 일들을 원하는 독자는
그저그렇게 여길 것 같아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최상철 2007-03-04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동 도서에서 느끼는 감동은 포장되어 있지 않아 좋은 것 같습니다.
느끼면 느끼는 대로, 생각하면 생각하는대로...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찰리맘] ^^*

프레이야 2007-03-04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리맘, 상철군이랑 좋은 책들을 많이 읽으시더군요. 반갑습니다. 아동도서의 감동은 남다르지요. 아이랑 소통 가능한 매개이기도 하구요^^

봄날의왈츠 2015-07-31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클럽 때문에 원서로 이 책을 읽었는데 다 읽고도 왜 좋은 책인지 몰라 검색하다가 들렀어요.
님의 글을 보니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다른 글들도 얼핏 봤는데 참 좋네요.

프레이야 2015-07-31 09:35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썼던 리뷰로 만나게 되어 더 반갑습니다. 아이들과 독서수업 하며 함께 읽고쓰고 하던 시절이었네요. 원서읽기 북클럽인가요? 차츰 더 알아가며 좋은정보 공유하기로 해요. 고맙습니다~
 
 전출처 : 동그라미 > 씨팔! / 배한봉 님




씨팔!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앗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 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질문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흑조(黑鳥)》(1998), 《우포늪 왁새》(2002) 출간
계간 <시와 생명> 편집위원
웹진 <詩鄕> 편집주간

 

왠 욕!!!!....

욕이라서 깜짝 놀라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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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1-19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랐습니다. 더구나 혜경님과 같은 성씨라 더더욱...윽!

다락방 2007-01-19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화들짝!! 놀라서 달려왔잖아요. 하하 :)

짱꿀라 2007-01-1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너무 놀랐는데 내용은 그게 아니었네요.

마노아 2007-01-20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멋져요^^

프레이야 2007-01-20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질문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해 본 적 있나..
자잘한 일에나 큰소리 치고 말이에요^^
놀라셨죠, 님들.
저도 화나면 마구 욕해요... 이 욕은 안 해 봤지만요..

행복희망꿈 2007-01-2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목만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 졌네요. 내용은 그게 아니네요 ^*^

푸하 2007-01-2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는 정말 휩싸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있는 태도가 갖고 싶어요.

프레이야 2007-01-2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희망꿈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푸하님, 정말 저도 그런 태도 가지고 싶어요. ^^
 

'1:2:3'의 법칙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다 보니
주변에서 말을 잘하는 비결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제일 먼저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1:2:3'의 법칙이다.


하나를 이야기했으면 둘을 듣고 셋을 맞장구치라는
뜻이다. 맞장구는 내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드러내고, 둘 사이의 대화에 깊은 유대와
공감의 분위기가 형성되도록 도와준다.


'하이파이브'를 기억하자.
서로의 손바닥이 "짝!"하고 경쾌하게 맞부딪히는 것,
그것이 바로 대화의 맞장구이다.


- 이숙영의《맛있는 대화법》중에서 -

 

오늘 아침 고도원의 편지. 톡톡 튀는 여자 이숙영의 책에 나오는 글귀인가 보다.

맞장구의 미덕을 이야기하고 있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맞장구를 쳐서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고 공감한다는 뜻을 전달하라는 말이다. 텔레비전에서 오래 전 보았는데, 쾌활하게 이를 다 드러내고 눈웃음을 치며 이야기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이 글귀를 보고 나니 약간은 호들갑스럽다고 느꼈던 그녀의 어조와 태도가 오히려 부럽다. 난 이걸 잘 못하니 말이다.

유난히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도 있다. 그녀를 보면 생기가 돌고 대화의 분위기 또한 자연스러워지면서 나같은 사람이 함께 있기에 더없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면서 나도 말을 술술 하게 되고 어느새 그녀의 분위기로 빨려들기 때문이니, 신기하지 뭔가. 맞장구를 잘 치려면 상대의 말을 귀담아들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진심을 잘 헤아려야한다. 말이 다 하지 못하는 표정이나 손짓까지, 또한 그들의 머뭇거림과 말줄임까지 더듬어보아야할 것 같다. 쉽게 내뱉는 말로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는 일도 없어야한다. 맞장구를 잘 치려면 상대의 박자를 잘 따르고 그 사이사이에 내 박자를 적재적소로 넣어야한다. 얼쑤, 추임새도 넣어가며... 오늘 만날 문우들에게도 대화의 맞장구를 잘 쳐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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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8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8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8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향기로운 2007-01-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의 글을 보면 어딘가 막혀있던 데가 뚫리는 것 같이 시원해져요. 신기해요.. 말보다 글이.. 글 보다 눈빛이 더 진실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마도 배혜경님은 두루두루 갖추셨을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1-1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s님/ 기다려져요^^
속삭이신 ㅂ님/그새 5개월이 되었군요. 기대됩니다. 고맙구요^^
향기로운님/ 전 절대로 갖추지 못했어요. 그래서 늘 숙제에요^^

프레이야 2007-01-1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 ㅍ님/ 그러고보니 그래요. 1:3:2 ^^
어느분은 맞장구를 너무 자주 넣어주셔서 말이 자꾸 끊기는 경우도 있어요.ㅎㅎ
관심어린 시선만으로도 다독거림을 받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정말 있지요^^

비로그인 2007-01-18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는 1:1이 되려고 노력해요. 배혜경님과는 대화가 아주 잘 될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말을 정말 못하는 거 같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과연 그사람 말을 집중해서 잘 듣고 있었는가
누구든지 자기 말에 관심을 기울이고
30분 이상만 그 사람 말에
"아 그렇지, 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 다음은?"
이런 말을 30분만 해주면 누구든지 말을 잘 할 수 있게 된다. 

-김제동 어록 중에서-


춤추는인생. 2007-01-18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어요 그런사람에게는 정말 다 털어놓고 싶고 만나면 늘 편안해 지는것 같아요..^^
님 오늘 성공하셨나요?^^ 전 내일 꼭 그래볼래요....!!

프레이야 2007-01-1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라님/ 전 일대일에 약해요. 마음은 그렇지않은데 상대를 재미나게 못 해주니 괜스레 어색한 분위기 만들기 십상이죠 ㅎㅎ 그래서 맞장구 잘 쳐주는 사람보면 배워야지 싶어요^^ 김제동 어록,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말이네요.

춤추는인생님/ 오늘 그런대로 성공했어요.^^ 님, 오늘 하루 잘 보내셨지요?
전 오늘 행사 있어 나갔다가 옆지기 만나 칵테일 한 잔 하고 방금 들어왔어요.
아이들 줄 빵 사서요. 붕어빵 사오라는 희령이 주문으로 골목을 몇군데 뒤졌는데
늦은 시각이가 다 들어가셨더군요. 그래도 붕어 대신 피자빵으로다가... ^^

글샘 2007-01-1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젤 못하는 거죠. 직업이 그런 거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선배님들과 있으면 또 선배님들이 좋아하기도 해요. 조용히 있으니깐.
말은 적게, 듣기는 많게, 맞장구는 많이...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월욜날 조용히 있어야쥐. ㅋㅋ 혜경님이 많이 말 하세요. ㅎㅎㅎ

水巖 2007-01-19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하고 당연한 소식

서재의 달인

아름다운 책방
닉네임 : 배혜경(mail), 서재 지수 : 67530

나는 한 송이 꽃, 상쾌함을 느낀다. 나는 하나의 산, 견고함을 느낀다. 나는 잔잔한 물, 사물을 그 모습 그대로 비춰본다. 나는 공간, 자유로움을 느낀다. -


프레이야 2007-01-1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저도 말 좀 많이, 잘 하면 좋겠어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ㅎㅎ
수암님/ 어머, 이런,,, ^^ 오늘 아침 상쾌합니다.
수암님도 건강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씩씩하니 2007-01-1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를 얘기하라는 말에 제일 많은 공감을 하고 갑니다,,
나이 들수록 누구를 만나든 말을 더 많이 했다는 생각에 만남 뒤에 약간 허탈해지곤하지요,,,
젊은 애들 앞에서는 또 왜 이리 하고픈 말이 많은지.....

프레이야 2007-01-1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니님, 님은 분위기를 밝게 하시는 분일 거에요^^
 
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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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으로 김훈을 처음 만났다. ‘칼의 노래’는 왠지 내키지 않아 읽어보지 않았고 ‘현의 노래’로 그의 소설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개'를 읽었다. ‘강산무진’에는 읽고 싶었던 ‘화장’과 ‘언니의 폐경’이 실려 있어 우선 반가웠다. 그 외에도 여섯 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는데,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정서는 허무성이다. 내가 느낀 허무(虛無)는 덧없음이나 무상함의 그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상태 혹은 마음속이 비어 아무 생각이 없는 경지의 허무성이다.


‘현의 노래’에서 천착한 시간의 허무성이 ‘강산무진’의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서술과 묘사는 장편보다 단편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관념성 짙어 몸에 와 닿지 않는 그의 생경한 표현들이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현의 노래’보다 여기 여덟 편의 단편들은 좀 더 삶에 가까이 가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러 군데 공중을 떠다니는 표현들이 걸리지만, 작중 주인공들의 나이와 직업, 비슷비슷하니 비루하고 통속적인 삶들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징그럽도록 세세한 묘사가 더욱 그러하다.


‘강산무진’ 속의 이야기들을 읽는 사람들이 어떤 연령대에 있느냐에 따라 느낌은 무척 달라질 것이다. 작품 속 인물 주된 연령은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오십대 중후반이다. 그만큼의 시간을 아직 살아내지 못한 독자라면 삶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회의적인 것인가, 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흔 고개를 넘는 중년의 시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작중 인물들의 서늘하리만치 담담한 태도에 깊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네 삶이란 행, 불행이 날실과 씨실처럼 직조되어 있지만 그것이 빚어내는 약간의 틈 속에서 한 숨을 쉬고 세상으로 난 또다른 길을 보며, 흘려보내야 할 것들에 더 이상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체득한다. 울며불며 매달리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어느 날은 가슴 터지도록 기뻐하는 등의 격렬함은 이미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단지 진정한 것들의 거죽이었던 셈이다.


시간은 많은 걸 가르쳐준다고 하던가. '시간'은 한때 정을 나누었던 여인과 그녀의 아이를 사납금을 못 채우더라도 공항까지 자신의 택시로 배웅하게 하고(배웅), 뇌종양으로 죽도록 고생하다 죽은 아내를 화장하면서 시원(始原)의 여인, 그 아름다움의 육체를 꿈꾸게도 한다(화장). 등대불빛으로 막막한 바다공간에 시간이란 지표를 부여하고(항로표지), AD 4세기의 철제도구들을 부식시켜 구멍을 내고, 여인의 골반뼈에 기원화(花)라는 공허한 이름을 부여하기도 한다. 게다가 시간은 사람을 머물러있고 싶은 과거 어느 시점으로 퇴행하게 하고(고향의 그림자), 사랑도 청춘도 스미듯 사라지는 노을처럼 혹은  물을 가르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흔적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언니의 폐경). 시간은 또한, 속세로 더욱 묻히라고 말하고(머나먼 속세), 암진단을 받은 아버지에게 유산만을 바라는 아들에게로 헛헛한 마음을 달래며 가면서도 강산무진도의 말없는 풍경들처럼 그렇게 담겨서 흘러가라 말한다(강산무진).


시간은 소멸해가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속성을 지닌다. 그 속에서 명멸하는 별들처럼, 흘러가는 물결처럼, 끊일 듯 끊이지 않는 우리네 삶. 그것은 구체적이고 세속적이다. 섣불리 희망을 강요하지 않고 생명의 찬가를 부르며 들뜨지도 않는다. 타고 가던 배가 난파했다고 바다를 탓하고만 있을 수 없듯이, 냉엄하지만 분노할 수만은 없고 죽음을 곁에서 보고도 살기 위해 한 손으로는 밥숟가락을 들어야 하는 게 삶이다. 모든 건 예정된 것처럼 그다지 슬퍼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묵묵히 자신의 삶을 견디고,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누구의 것이든 진정어린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살아내야 '허무'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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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7-01-1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서늘하리만치 담담한 태도. 김훈선생님께 받는 제시선을 정확히 짚어주신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배웅은 처음읽을때는 그냥 무심코 읽었는데. 왜 그부분.
사장님 어떻게 지내신지요.라고 묻는데 그래, 겨우 견뎌..라고 말할때..
눈길을 뗄수가 없었어요 맞어 생은 겨우 견디는것이구나.
빼도 박도 못해서 무작정 살아가는거... 아직 생을 절반도 못살아 본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고 가요.^^
(에궁.. 난 언제쯤 이런 내공이 나오는걸까 ㅠㅠ)

뽀송이 2007-01-1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의 리뷰를 읽고 있으니까...
저도 한번 읽어 보고 싶어요~^^
김훈의 <강산무진>이라...

프레이야 2007-01-17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추는인생님, 님 덕분에 좋은 책 읽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정말 한참 더,, 저도 '시간' 이란 걸 배워나가야 하는 걸요.
작품 중 <뼈>에 나오는 그 패륜엽기행각의 오문수라는 작자, 전 그 인간에 그리
연민이 느껴지네요^^

뽀송이님, 뽀송뽀송 부르면 기분이 뽀송해지네요^^
네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기도 해요.
그속의 삶이 참 폐경기(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같은데,
어떻게 느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비로그인 2007-01-18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에 김훈팬이 있어서 언젠가 꼭 읽어야지 했는데..이분 문장이 그렇게 좋다면서요?

프레이야 2007-01-18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라님/ 이분 문장에 대해선 개성이니 뭐라고 말 하지 못하겠지만...
좋은 하루 보내세요^^

푸하 2007-01-2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드는 생각이 부유하는 문장을 써보고 싶네요. 허무를 드러내는 그런 문장들을...^^;

프레이야 2007-01-2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 김훈의 문장이 그런 문장이지요.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개성이라 보여요.

2007-01-23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1-2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선물 받았는데, 얼른 읽어보고 싶어요. ^^

프레이야 2007-01-26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님/ 서사성은 역시 부족하지만 술술 읽힐 겁니다.
님의 멋진 리뷰 기대할게요^^

2007-03-28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