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까칠한’이라는 낱말이 유행어가 된 이유를 더듬어보았다. 시작은 연예인의 입에서 된 것 같은데 사람들이 이 낱말에 공감을 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내면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것이든지, 타인들의 얄미운 속내를 꼭 집어내어 주는 말로 여겨서인가 싶다. 사람을 대상으로 ‘까칠한’이라는 수식어를 쓸 때면 내면의 결이 부드럽지 못하고 꼬여있어서 모든 대상을 사팔뜨기의 시선으로 보며 호전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논쟁을 즐기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온화한 인상을 주지만 때로는 숨기고 있던 까칠한 일면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주변인과 분쟁을 일삼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러니 자신의 까칠한 ‘무엇’을 대패질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운동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과레스키 가족의 까칠함은 보다 냉소적이고 다분히 정치적이다. 게다가 따뜻한 인간애를 깔고 있으니 적대적 감정이 일지 않는다. 원어(corrierino)의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번역제목으로서는 반어적인 효과까지 노려 성공적인 것 같다. 이 책이 나온 때가 50년대이며 제 2차 세계대전 후 산재한 혼란을 겪었던 작가의 고국을 생각하면, 특수한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까칠한 가족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대를 형성한다. 반세기가 흘러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 삶의 본질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작가가 내세운 이야기의 매개물이 ‘가족’이라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데에도 있다.


하지만 과레스키를 비롯한 네 명의 평범한 가족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들은 그리 평범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과분한 일들은 알고 보면 사소하고, 따져보면 그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너무 사소하고 단순한 종류로 치부되어 지나치기 십상인 일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분명 남다르다. 민감하고 독특한 촉각을 지닌 듯, 그들이 일상의 사건들을 프리즘으로 하여 인식하는 부부, 자녀, 세대, 종교, 교육, 복지, 국가, 이념, 전쟁, 그리고 일상의 권태로움과 희망을 포함한 삶과 죽음의 보편적 밑그림은 섬세함과 예리함을 겸비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상황으로 바로 진입하여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고밀도 대화를 따라 자연스럽게 읽히는 게 장점이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속속들이 묻어놓은 작가의 농익은 사유와 그것을 흥미롭게 표현해내는 대화술이 위트 있다. 은근슬쩍 치고 나오면서 오리발을 내밀기도 하고 때로는 신랄하고 때로는 관대하기도 하여, 그들이 톡톡 튀기며 나누는 까칠한 대화에 빨려든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과레스키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른 가족들의 내면세계다. ‘에드가 앨런 포’의 꿈을 꾸며 상속놀이를 즐기는 아내 마르게리타, 아버지의 이마에 빨간 딱지를 붙이며(과레스키의 은밀하다할 수 있는 정치적 색깔로 보인다) 소유물로 낙인찍는 어린 딸 파시오나리아, 성 베드로 광장을 방문해서도 최근 만화 ‘도널드 덕’ 시리즈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아버지의 교육적 욕구는 무시하고 교과서에서 본 사진에만 충실하려는 아들 알베르티노. 각각의 인물 설정이 모두 개인적인 성향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얼굴을 대변하고 있다. 물론 50년 전의 것이지만 지금도 시대착오적이지 않으니 묘하다.


이들 중에서도 파시오나리아는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과레스키의 딸이 이런 성향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되어있을 그녀의 까칠함은 전혀 미워할 수 없는 발칙함이다. 어느 날, 유산을 선불로 받겠다고, 개인적 파시오나리아가 아니라 파시오나리아와 알베르티노의 '대표' 자격으로 과레스키 앞에 등장한 파시오나리아와 아버지와의 승부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사람에게 선불을 주지 않아. 내가 벌어들이는 돈은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불행에 처하거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주겠어.” 라고 논리적 반박을 하는 과레스키 앞에 잠시 후 다시 나타난 맹랑한 아가씨 파시오나리아는 말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잃은 두 미장이 보조원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면...” 과레스키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 나는 그들을 도와주었고,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칙은 유지되었다.(p316) - 이쯤 되면 누구의 승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부녀간의 설전을 통해 실업자 문제를 진지하게 끄집어내고 싶은 것이다. 에피소드마다 터지는 반전과 예상치 못하는 대화의 흐름만으로도 유쾌한 책이다.


마지막 에피소드, <특급열차 136호>는 잔잔한 여운을 주었다. 까칠한 가족들 틈에서 조금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변주는 <춤추는 두 사람>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과레스키 자신을 빗대어 등장시킨 특급열차 136호의 기관사는 권태로운 일상을 떠밀려 살고 있으면서도 탈선을 꿈꾸는, 그러면서도 기차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의 자아와 그에 대한 집착, 자가당착의 갈등으로 심각해 하는 모습은 <치촐라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에피소드 전체가 하나의 은유로 쓰이는데 마지막 글귀는 그 화강암 덩어리 같은 치촐라타(돼지고기 부스러기를 굳혀서 만든 이탈리아 음식의 일종)를 깨부수는 영웅을 떠올리며 당당하게 맺는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싶은, 글을 쓰는 사람 특유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이 글 쓰는 사람에게만 있을 텐가.

 

- 고양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영웅, 고양이보다 훨씬 더 커다란 승리를 거둔 영웅이다. 왜냐하면 나는 치촐라타 덩어리를 부수고 깨뜨렸으며, 바로 오늘 저녁에는 완벽하게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을 장애물 너머로 내던졌으며, 단지 하느님만 나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물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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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7-01-03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 쓰려고 앉았는데요 와 님 정말 잘쓰셨네요. 확 쓰지말까 싶지만 그래도 써야겠죠? 정공법은 안되겠고...귀염성에 호소하는 리뷰를...^^

프레이야 2007-01-0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새해 셋째날 아침이에요. 여전히 복 많이 받으시는 한 해 되시기 바래요. 만두님 벤트엔 참가할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ㅜㅜ(뜬금없이...)
님의 리뷰는 비교될 수 없는 경지에요^^
과레스키 못지않은 웃음을 줄 님의 리뷰, 기대되어요.
 
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절판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아직 사는 데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벌써 죽는 데 익숙해져야 해요. 우리는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 위로 난 좁다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어요. 필사적으로 땅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심연 속의 영원함에 매력을 느껴요. 때로는 몸을 내밀고 영원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느껴요.

우리는 거의 신경을 쓰고 있지 않지만, 절벽 가장자리에는 이런 팻말이 세워져 있지. '몸을 내밀면 위험합니다.'-16쪽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개혁과 새로운 것, 혁명적인 것을 찾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싸우고 법석을 떨지요? 결국에는 자연의 법칙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 말이에요. 혹시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오늘 당신이 떨어진 것처럼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던가요?-25쪽

우리가 나폴리를 향하고 있지만, 지금 내려가지 않고 올라간다고 해서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니오. 물론 북쪽은 위에 있고, 남쪽은 아래에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쪽으로 가면 오르막길이 없고, 북쪽으로 가면 내리막길이 없는 것은 아니오.-27쪽

어느 순간 아버지는 집 안에 이방인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새로운 눈으로 아버지를 관찰하는 아들이다. 아들이 자신의 적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결국 아들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에 대해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더 강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동맹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결코 자기 자신에게 위선적이지 않아야 한다.-78쪽

선물을 살 때 사람들은 가장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사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진짜 선물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좋아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정복이라고나 할까.-88쪽

파시오나리아, 나는 네 손을 놓아야 하고, 너는 벽 사이의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야 해. 그러니까 파시오나리아, 너도 안녕. 너는 나의 삶에서 떠나 국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저들은 너에게 국가의 위선을 가르치겠지. 이제 더 이상 네 생각도 네 것이 아니게 될 테고, 너는 교육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지. -113쪽

국가는 도로를 만들고, 철도를 만들고, 밤이면 도시들을 환한 불빛으로 비춰준다. 그렇지만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의 행동과 생각까지 규제하고, 법률과 규정의 풀어헤칠 수 없는 실타래 속에 우리를 더욱더 옭아매고, 우리를 더욱더 하찮은 톱니바퀴로, 피를 빨아먹으면서 헛되이 돌아가는 무서운 기계의 톱니바퀴로 만든다.-114쪽

완전히 나만의 세계이지만, 그것은 내가 완전히 거기에 속해 있다는 의미에서 그래요. 나는 그 신비로운 세계, 그림자들과 욕망들, 두려움들이 가득한 그 세계의 포로이고 절망적으로 혼자예요. 나는 고통스러운 발을 이끌고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끝이 없는 길을 헤매고 있어요.

힘들겠군, 마르게리타. 혹시 자전거라도 한 대 살 가능성은 없소? 노고를 상당히 덜어 줄 텐데.-141쪽

나는 단지 선생님을 위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뱉는 독약은, 국가의 태만함과 관료제의 귀머거리연한 무관심 때문에 공동체의 선을 위해 정직하게 일하고 힘겹게 살아온 삶의 마지막 날들을 슬프게 보낸 그 모든 사람들과 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165쪽

고양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영웅, 고양이보다 훨씬 더 커다란 승리를 거둔 영웅이다. 왜냐하면 나는 치촐라타 덩어리를 부수고 깨뜨렸으며, 바로 오늘 저녁에는 완벽하게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을 장애물 너머로 내던졌으며, 단지 하느님만 나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물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230쪽

마르게리타, 어제는 당신이 '추론'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오늘은 '신랄하다'고 말하는군. 당신 생각을 표현하는 데 평범한 낱말들로는 충분하지가 않소? 당신도 이제 애매한 지성주의의 오솔길을 걷고 있는 것이오?

아뇨. 단지 낱말들의 꽃밭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떤 이국적인 꽃을 하나 꺾어 낡은 생각을 새로운 꽃으로 치장해 보는 것이 좋아요.-316쪽

과거는 맥주 한 잔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모욕을 주는 사람은 그 모욕을 모래 위에 쓰지만, 모욕을 받은 사람은 청동에 새겨 두는 법이에요.-319쪽

조반니노,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저건 악마 같은 전략이에요. 만약 열다섯 사람이 누군가에게 덤벼든다면 그것은 공격이에요. 하지만 이백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격분한 군중의 납득할 만한 반응'으로 소개될 수 있어요. 법은 군중을 처벌할 수 없어요. 군중은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있지요.-323쪽

나는 지금 아프지 않게 해 주는 기계들이 있는 치과에 가는 것이 아니야. 옛날식 치과에 갈 거야. 어렸을 때 우리를 아프게 했던 치과에 말이야. 그런 고통을 포기하면 내 젊음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우리 세대는 엘리베이터와 비행기를 불신하지만 고통을 두려워하지는 않아!-339쪽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세대란 메스가 자신의 생살을 찢는 것을 확고한 눈으로 지켜볼 수 있고 울지도 않는 세대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을 너무나도 존중해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심지어 자신의 살이 외과 의사의 칼에 의해 고통당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아요.-340쪽

햄릿, 기술의 발전이 단순한 사람들을 매혹시키듯 너 또한 매혹시키는구나. 너는 거기에 혹하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너는 기술 발전을 문명과 혼동하게 될 것이고, 또 네 근본에서 벗어나게 될 거야. 사람들이 사람다움을 유지할 수 없을지라도 너는 개다움을 배신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348쪽

나는 근무를 할 때마다, 또 치명적인 커브 지점에 도착할 때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며 생각하지. '다음번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뛰어내릴 거야.' 권태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 마르게리타. 그리고 더욱더 내 일을 힘들고 어렵고 불쾌하게 만들지 나는 절망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싶고, 바로 몇 년 전부터 창가에 있는 아가씨의 미소 속에서 내가 읽어 내는 초대에 응하고 싶어. 그런데 매번 뒤로 미루지. 바로 특급열차 136호 기관사의 이야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야.-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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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빈집의 약속 -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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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8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12-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근소근님/ 긴 이야기, 아픈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랬군요. 살다보면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은 없는 것 같아요. 표면적인 것으로만 봐서도 안 되구요. 속내를 들여다보면 누구든 그만한 사정과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요. 힘든 부분 있더라도 잘 해내시리라 믿고 싶어요. 그러고 계신 것 같지만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06-12-19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30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30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12-3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선한님/ 그렇군요. 몸과 마음 푹 쉬고 돌아오세요. ^^
 
평생 잊지 못할 한 구절 - 명사 28명이 소개하는 '내 인생의 시와 문장들'
신경림.김명곤.장영희.최영미 외 지음 / 예담 / 2006년 6월
절판


"산에 숨지 않고 속세로 내려가 죄 짓고 살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함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오히려 큰 일이 아닙니다. 죄 짓지 않고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모든 죄는 저마다 자기 속에서 사해질 것이니 타인의 죄는 타인에게 주고 자신의 죄는 마땅히 스스로 풀며 사십시오. 모든 고통은 한계가 있어 그 너머에 진실이 있으니 느낄 수 없을 때까지 느끼십시오. 그것이 고통과 진정으로 관계하는 법입니다."
어쩌면 인생은 고통을 풀어 둥지를 만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 이주향-44쪽

사랑한다는 것은
허무의 바다 건너가기입니다
한쪽은 나룻배가 되고
다른 한쪽은 사공이 되어.

- 사랑한다는 것은 - 열애일기 27의 전문(한승원) 중-74쪽

들꽃 한 송이와
한밤에 들에 나와 쳐다보는 보석 같은 별들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똑같다. - 한승원-75쪽

사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구름은 내게 와서 나의 벗이 되어 주었다.
내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다음에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내가 보고 싶은 건 바로...너.
파란 하늘과 흰 구름. - 최영미-136쪽

행복은 선택이다. 행복은 가까운 곳에, 현재에 있다. 행복은 쟁취해서 얻는 먼 훗날의 결과물이 아니다. 더 자주 웃고 더 많이 사랑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 우리 존재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행복이다. - 조안리-19쪽

진정으로 살고자 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 모두가 연애와도 같은 이토록 뜨거운 희망과 열정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희망과 용기의 재료들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꿈과 행복의 맛이 달라질 것이다. - 서진규-32쪽

나는 인류가 진화되어 가고 있는지 잘 모른다.
이라크에서의 미 제국의 살육과 같은 국가적 대형 범죄를 보거나, 로마 시대의 검투사를 방불케 하는 근육질의 남성들이 이종격투기의 이름으로 서로를 피멍투성이로 만드는 광경을 눈요깃감으로 삼아 즐기는 선남선녀의 경기 중의 눈빛을 보면 솔직히 진화론에 대해 의심이 든다. 지능이 아무리 진화했어도 심성은 토굴에서 살았던 시절보다 퇴보했으면 퇴보했지 선량해진 것 같지가 않다. - 박노자-53쪽

삶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강조되어야 할 시적 진실이 아닐까. 아름다움이 균형 있는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긴 시간에 걸친 지적 훈련과 인간적인 각성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내 사진 역시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진실의 기록이다. - 최민식-61쪽

힘없이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내려오는 길에서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몇 번의 실패와 함께 내 가장 소중한 친구들의 목숨을 잃어야했던 까닭을. 그것은 안나푸르나의 책임도 그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오만이었다. 내 헛된 욕망이었다. 정상을 보는 순간 이번에는 반드시 정복하고 말리라는 헛된 욕망. 그로 인해 무리를 하게 된 경거망동에 풍요의 여신이 벌을 내렸다는 것을.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인간의 어리석은 오만에 경종을 울렸다는 것을 - 엄홍길-95쪽

난 길을 걸으면서 배웠다. 내가 해결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일에 저항하는 건 어리석다는 것을. 운명도 그 중에 하나이다. 지금도 난 크고 작은 고민이 닥칠 때마다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내버려둔다. 고민은 애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길 위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유재하의 길이 그랬듯, 나의 길은 아직도 멀고 아득하다. 하모니카를 벗 삼아 좀 더 천천히 걸어야겠다. - 전제덕-110쪽

푸른 숲과 푸른 낙원을 만드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마음 안에서만 발아하고, 마음 안에서만 꽃을 피우는 사랑처럼 나의 음악도 많은 이들의 마음 안에서 발아하여 꽃을 피우는 감동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부끄럽지만 음악이 나의 사랑, 음악이 나의 휴식이었노라고 고백한다. 내가 걷는 이 길, 결코 끝나지 않을 이 길의 종착지 역시 음악이리라고 나는 확신하다.
- 윤도현-120쪽

동심이 로맨틱을 내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타는 많은 이들을 그러한 로맨틱의 세계로 데려다 준다. 그러하기에 기타를 치는 건 내게 그저 즐거움이고 행복이었다. 그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타를 치며 살아가는 내게 행복 그 이상이 온 건 행운이었다. - 이병우-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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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4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12-1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은 시련을 견뎌낼만한 사람에게 준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110쪽을 읽으며 포기할것과 인정할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겨울 2006-12-1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노자의 글에 공감해요. 특히 이종격투기를 보며 즐기라는 의도의 잔인성에 신물이 올라오곤 합니다. 하긴 요즘의 스포츠에서 스포츠 정신을 찾는 건 어리석지요.

프레이야 2006-12-1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몽님/ 저도 박노자의 글에 깊이 공감했어요. 인터넷의 폐해 중 하나이기도 해요. 우리 정서, 우리 심성의 퇴보가 의미하는 것이란...

승연님/ 따뜻하고 빛나는 구절들, 어쩌면 평범해서 잊고 사는 생각들이 많았어요.

하늘바람 2006-12-1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윤도현의 글이 와닿네요

2006-12-15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 2006-12-15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말들이네요..전제덕님의 글도 좋구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네요..이번주특히요.
 
평생 잊지 못할 한 구절 - 명사 28명이 소개하는 '내 인생의 시와 문장들'
신경림.김명곤.장영희.최영미 외 지음 / 예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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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낭독의 발견>을 보았던 적이 있다. 단 한 번이었다. 가수 SG 워너비의 멤버 세 명이 나와 무언가의 글귀를 낭독하고 있었다. 그때 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중 가창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소에 생각했던 '젊음' 한 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믿어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 눈이 젖어드는 걸 보았다. 이 책은 그 프로그램에서 방영되었던 구절과 진솔한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다. 현재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사회 명사 28명이 소개하는 ‘내 인생의 시와 문장들’이 부제로 적혀있다. 그 중 제주도를 사랑한 김영갑님은 저세상에 산다.

 

누구나 삶의 길은 탄탄대로이거나 산새 지저귀는 한적한 오솔길만은 아닐 테다. 역경과 꿈, 절망과 희망의 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게 인생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만이 그 길을 말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오르한 파묵도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서전을 내지 않았던가. 세월의 길이가 아니라 그것의 색깔과 질량이 가져다주는 삶의 의미만이 사람의 길 위에서 주울 수 있는 보석이 아닐까.

 

이 책에 실린 사람들이 ‘평생 잊지 못할’ 한 구절이라고 들고 나온 글귀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인생길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힘을 준 것들이었다.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도 빨려들어가서 마음속에 이는 공명이 생각보다 크고 깊다. 이 책의 미덕은 삶의 아름다운 방식을 은유한 여러 가지 시와 산문들을 28가지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자신의 분야에서 열정을 아끼지 않으며 대중으로부터 흠모를 받고 있는 사람들, 그들 삶의 길에서 그 글귀들이 어떻게 힘이 되었고 빛을 발했는지, 감동적으로 소개된다. 한 사람의 인생에 결정적 변화를 주는 건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는 ‘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우연히 만나게 되는 ‘한 구절의 글귀’이기도 하다는 증거가 된다.

 

가장 아름다운 산문을 쓰는 사람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장영희님의 글을 서두로 하여 가장 마지막에는 코미디언 이홍렬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이 모두 감동적이었지만 이홍렬이 소개한 어머니의 자필 편지는 코끝을 찡하게 했다. 한글을 배우지 못한 어머니가 군대에 가 있는 아들에게 쓴 편지인데 철자법이 엉망이어서 남들이 제대로 해독하려면 한 시간도 넘어걸릴 글이지만 자신은 단숨에 읽었다는 대목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진실된 교훈을 아들에게 늘 일러주셨던 그 어머니는 아들이 제대하고 얼마 되지 않아 영면하셨다 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이 편지에 그는 지금에와 늦게 어머니께 답장을 썼다. '그리운 어머니께'로 시작하는 편지글이다. 그저 멋 부려 썼거나 어려운 문자를 쓴 편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쉽게 읽고 해독할 만한 글로, 정말 소박하고 진실해 뵈는 문장이었다. 웃음을 주는 사람답게 그토록 눈물겨운 편지글 중에 우스갯소리가 들어있어 눈웃음을 자아낸다.

 

이 책의 아름다운 시와 문장 그리고 사람들의 향기 나는 이야기 못지않게, 책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싶다. 표지에서부터 안에 여럿 들어가 있는 꽃사진들이 책의 멋을 더해준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사진인데 론 반 돈겐이라는 미국의 사진작가가 찍었다. 라벤더 색상의 간지와 함께 눈부시게 고운 색감의 종이 위에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 마음의 한 구절’이라고 적힌 부록을 뒷장에 두어 환상적인 꽃사진과 함께 독자도 평생 잊지 못할 한 구절을 글로 옮겨 적을 수 있게 해 두었다. 하루하루 적어두었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면 오래 간직될 귀한 선물이 될 것 같다. 역시 사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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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4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12-14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빨리 갔네요. 뭘요.. 받아주셔서 고맙지요^^

2006-12-15 0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나무집 2006-12-15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제가 좋아하는 분들의 이야기네요.

프레이야 2006-12-1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 네 감동적인 부분들이 많았어요. 산악인 엄홍길님이 죽은 대원에게 보낸 편지도 울컥했습니다.

글샘 2006-12-25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책을 서가에서 몇 번 만났는데, 담에 담에...하고 미뤘더랬는데요.
배혜경님 글 읽고, 담에는 찾아 봐야겠습니다. 근데 꼭 그러고 가면 없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