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

며칠간 책들과 씨름했다. 이때 '씨름'은 물론 비유적인 의미에서 쓴 것이지만 비유만은 아닌 게 책을 읽고 이해하느라 고투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책장의 있는 책들을 모두 빼서 다시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의미에서의 '씨름'이기 때문이다(그 결과 삭신이 쑤신다).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려고 몇 주전부터 진행중인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로서 3단 책장 6개와 5단 책장 3개에 꽂혀 있던 책들을 모두 거실(혹은 베란다)로 빼내고 그걸 기화로 서재의 책들도 전부 재배열했다. 전쟁터 같은 집안 풍경이 다소나마 정리된 게 어젯밤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칠하느니 마느니 갈피를 못 잡다가 결국 딸아이의 방에 칠할 '친환경' 페인트를 구했고 그 사이에 날은 저물었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본 비디오를 반납하러 나갔다가 편의점에서 조간신문을 사들고 온 게 조금 전이다. 읽은 시간상으론 '석간'이라 해야 할 그 신문이 수요일자 한국일보이고 내가 읽은 건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이다. 특별히 오늘은 '文靑 사로잡은 비평의 신화' 김현을 다루고 있기에 여기에 옮겨놓도록 한다. 김현, 김윤식이란 이름은 내 청춘의 10년을 사로잡았던 '신화'이기도 했었기에(사실 고종석이 '말들의 풍경'이란 제명 자체를 빌어온 김현에 대해서는 연재의 말미에서나 다루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칼럼의 서두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 불세출의 비평가가 세상을 뜬 지도 열여섯 해가 되었다. 그의 부고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어떤 막연한 의무감에 영안실이 안치돼 있다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던 기억마저 나는 갖고 있다(짧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만 되뇌었던가). 책장 정리를 다시 하면서 가장 가까운 서가에 그의 책 대여섯 권을 아직 꽂아둔 것도 그런 '인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그 중 손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이 <말들의 풍경>(문학과지성사, 1993 5쇄본)인데, 그가 세상을 떠난 1990년 12월에 나온 초판이 아닌 것은 내가 어떤 사정으로 이 책을 한번 더 샀기 때문이다(초판은 내가 군복무시절에 산 책이어서 지방에 놓아둔 것으로 기억된다).

사후적인 회고가 되겠지만, 언제부턴가 지난 90년대 문학을 '김현 이후의 문학'으로 나는 기억/규정한다. 마땅한 당대의 비평가를 갖지 못한 문학의 허전함을 나는 지우지도 채우지도 못하겠다. 칼럼의 중간에 나오는 고종석의 말을 미리 빌자면 "사실 김현은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비평가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목소리 큰 비평은 많고 그보다 예민한 비평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비평도 '문학'이라는 걸 확증시켜준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였고, 그래서 그의 부재는 아쉽고 유감스럽다. 최근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기대어 비평의 종언을 시비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만약 비평에 종언이 있(었)다면 그건 지난 199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4.19 세대가 소위 한국사의 '근대' 혹은 '근대 시민정신'과 '학생운동의 정신'을 웅변하는 세대였다면 김현이야말로 4.19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비평가였고, 지난 1990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이니까.   

한국일보(06. 10. 04) [말들의 풍경]<31>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

문학비평가 김현(1942~1990)이 돌아간 지 16년이 되었다. 16년이면 한 사람의 생애와 정신의 궤적을 감정의 동요 없이 되돌아보기에 꽤 넉넉한 시간적 거리다. 그에 대한 친구들의 사랑도, 적들의 미움도 그 격렬함이 많이 잦아들었을 테다. 그가 작고하고 세 해 뒤에 16권으로 완간된 ‘김현문학전집’의 종이빛깔도 제법 누렇게 되었다.

김현 이후 16년 세월은 이른바 ‘문지 동아리’ 안에서 김현 신화가 더욱 굳건해진 세월이기도 했고, 그 동아리 바깥에서 김현 신화가 사뭇 바랜 세월이기도 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치달은 이 세월의 힘 가운데, 더 큰 것은 뒤쪽이었던 듯하다. 그것은 생전의 김현이 누린 권위가 워낙 컸던 탓이기도 하다. 정점에 이른 자에겐 또 다른 상승의 가능성보다 추락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아닌게아니라, 그 16년 세월은 김현 글의 모자람을 드문드문 드러낸 세월이었다.

그 모자람은 김현 둘레 사람들의 글과 견주어서도 더러 드러난다. 김현 이후 16년은 김현의 제자나 후배 비평가들의 나이를 김현보다 더 먹게 만들었다. 그가 아끼던 후배 김인환과 황현산은 이제 그들의 선배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었고, 그가 아끼던 제자 정과리는 스승이 도달했던 마지막 나이에 이르렀다. 그 제자와 후배들의 글들 옆에 나란히 놓일 때, 김현의 글은 어쩔 수 없이 낡아 보인다. 사실 이런 ‘낡음’은 이미 김현 생전에도 기미를 드러냈다. 김현의 어떤 글은 정치함에서 김인환만 못해 보이고, 자상함에서 황현산만 못해 보이며, 화사함에서 정과리만 못해 보인다.

생전에 낸 마지막 평론집 ‘분석과 해석’의 서문에서 김현은 청년기부터 그 때까지 자신의 변하지 않은 모습 가운데 하나로 ‘거친 문장에 대한 혐오’를 거론했으나, 그 혐오를 철두철미하게 실천한 것 같지는 않다. 청년 김현의 글에서는, 청년 정과리의 글에선 찾기 어려운 유치함과 허세 같은 것도 읽힌다. 현학은 ‘배운 청년’이 흔히 앓는 병이지만, 청년 김현은 그 병을 좀 심하게 앓았던 듯하다. 물론 김현은 이내 그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러나 김현의 글은, 이 모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이 후배와 제자들의 글보다 훨씬 더 맛있게 읽힌다. 그의 윗세대나 동세대 평론가들의 글과 견주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김현은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비평가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김현이, 적어도 30대 이후의 김현이, 비평이란 수필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드문 비평가였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을 테다.

그에게 비평은 논리와 지식의 전시장이 아니라 직관과 감수성의 연회였다. 김현은 비평을 제 앎을 드러내는 자리로 사용하지 않고, 마음(의 파닥거림)을 주고받는 자리로 사용했다. 작품론이나 작가론에서, 김현은 (초기 글들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불문학 교양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김현 특유의 직관과 감수성이, 모든 뛰어난 비평가에게 그렇듯, 오래 축적된 문학 교양과 어찌 관련이 없으랴?

김현이 자신의 직관과 감수성으로 작품에서 길어낸 의미가 늘 옳았던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한 작품이 김현의 손길을 통해 늘 제 비밀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한 작품에는 고정된 의미(들)만 있다는 속 좁은 문학관이 그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생전의 김현이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견해다. 그러니 이 말을 이렇게 바꾸자. 김현이 작품에서 길어낸 의미가 늘 표준적이었던 것 같진 않다고. 사실은 그 반대다. 김현의 말 읽기, 마음 그리기는 거의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바로 그 독창적인 의미화를 통해 한 작품을, 한 작가의 정신세계를 두텁게 만들었다. 모든 독창적 해석이 누군가에게는 오해로 받아들여진다면, 김현은 오해의 대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김현은 한 작품을 그 안으로부터만 읽어내지 않았다. 그는 한 작품을 그 작가의 다른 작품 전부와의 맥락 속에서 읽을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한 세대 내 또는 세대간 영향(의 불안)이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서 읽을 줄 알았다. 그것은 유년기 이래 평생 이어진 그의 글 허기증 덕분이었다. 김현은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썼지만, 진짜 잊어서는 안 될 점은 그가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다.

설령 그가 이런저런 작품들에 매긴 자리(생전의 김현은 ‘자리매김’이라는 말이 싫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자리매김이란 관계맺기, 관계짓기보다 훨씬 고착적이어서, 한 번 자리가 매겨지면 변경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상자 기사의 ‘말들의 풍경’ 서문은 그의 이런 생각을 매혹적인 한국어로 펼쳐 보이고 있다)가 늘 공정하게 보이진 않았다 할지라도,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넘나들며 작품과 작가에게 그럴듯한 자리를 마련해준 것은 김현 이전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후에 출간된 독서일기에서, 김현은 자신의 글을 괴팍하다고 평한 어느 소설가의 말을 거론한 뒤, “괴팍하다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라고 적고 있다. 김현의 이 자부심은 온전히 정당하다.

김현의 글은 어느 순서로 읽어도 술술 읽힐 만큼 자기완결적이지만, 시간축을 따라 읽을 때 그 저자의 ‘인간적 매력’을 한결 또렷이 드러낸다. 그 ‘인간적 매력’이란 지적 정서적 윤리적 성숙의 여정이다. 청년 김현의 글에서 설핏설핏 보였던 문장의 어설픔, 현학 취미와 자기애는 만년 글에서 거의 말끔히 걷혀지고, 단정하되 윤기 있는 문체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겸양이 독자를 맞는다. (물론 그는 자신의 ‘앎’에 대해서는 겸손했으나 자신의 ‘감식안’에 대해선 끝내 겸손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식안을 감식하지 못하는 한국 문단을 슬그머니 타박하기도 했다.) 기분 좋은 일이다.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나이가 늘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이와 함께 푹 익은 인격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한 분야의 세속적 정점에 이른 이의 인격일 때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생전의 마지막 평론집 ‘분석과 해석’과 유고 평론집 ‘말들의 풍경’에 묶인 글들은 한국어 산문이 도달한 아름다움과 섬세함의 꼭대기를 보여준다.

 

 

 



김현은 문학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정치적 문인이었지만, 그의 문학평론은, 특히 만년에 이르러, 폭력의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의 고갱이를 건드리곤 했다.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1987)와 그 즈음의 몇몇 평문에서 그가 탐색한 폭력의 의미는, 깊숙한 수준에서, 1980년 봄과 관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과, 역시 깊숙한 수준에서, 무관치 않았던 것 같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전라도 지식인들이 흔히 그렇듯, 김현도 ‘억눌린 자’와 ‘억누르는 자’ 사이에서, 아니 보편(적 지식인 됨)과 특수(한 소속감) 사이에서 정서적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제임스 쿤의 ‘눌린 자의 하나님’을 읽고 쓴 1986년 5월27일치 일기의 한 대목은 이렇다.

“나는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숙고했다. 때로는 혐오하면서, 때로는 연민을 갖고서,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도피의 마음으로.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하숙을 거절당한 것, 사투리 때문에 놀림받은 것, 전라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80년 이후에도 조용하다는 것…… 등의 것들이 뭉쳐져 내 가슴에 밀려들어왔다. 쿤의 책은 내 경험세계의 신학적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나는 억눌린 자인가? 아니다. 억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문학장’ 속에서 권력을 효과적으로 획득하고 합리적으로 행사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점에서 김현은 매우 정치적이기도 했다. 대학시절의 ‘산문시대’에서 ‘사계’와 ‘68문학’을 거쳐 ‘문학과지성’으로 이어지는 그의 동아리 운동에는 세대 전쟁과 세계관 전쟁이 버무려져 있었고, 김현은 늘 제 캠프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그가 문학의 고유성과 (은밀한) 위엄을 그리도 강조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 ‘문학’이었기 때문이리라.

서가에 꽂혀 있는 김현 전집 가운데서 아무 거나 뽑아 들어 띄엄띄엄 읽노라면 문득 가슴이 울렁거린다. 거기에 내 글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나 그 눈길을 담아내는 문체에서나 내 글은 김현의 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리고 격조와 깊이에서 도저히 김현의 글과 견줄 수 없지만, 그 근원은, 행복해라, 김현의 글이었다.(고종석 객원논설위원)

● '말들의 풍경' 서문 (앞부분)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변화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 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팽창하고 수축하는 우주가 바로 우주의 본질이듯이. 내 밖의 풍경은 내 충동의 굴절된 모습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풍경이다. 밖의 풍경은 안의 풍경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안과 밖은 하나이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의 참뜻은 바로 그것이다...

06. 10. 04.

P.S. 이 칼럼/페이퍼를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해놓는 것은 이전에 옮겨놓은,김윤식의 서문집에 대한 고종석의 칼럼('나는 '쓰다'의 주어다')과 짝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지극히 정당하게도) 칼럼 말미에 인용돼 있는 <말들의 풍경> 서문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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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weetmagic > 2006_by sweetmagic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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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다독이던 손길

바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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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0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흡인력 있는 사진은 뭘까요... 궁금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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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건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이세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성 바르바라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을 때 아이를 가지려는 계획을 했던 건 아니었다. 아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완전한 타자였다. 어느 날, 그녀의 뱃속에 자리를 잡고부터 그녀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쥐고 흔드는 무법의 이방인이었다. '행복한 사건'은 그녀의 철학논문 주제인 '타자의 문제'와 병행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독백처럼 나아간다. 독백형식이다보니 관념적인 서술이 많은 편이다. 인물의 구체적인 행동이나 아름다운 묘사, 섬세한 감정의 실타래를 풀기보다는 직설적이며 냉소적인 어투로 감정의 최대혼란을 겪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를 여과없이 솔직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의 심경에 비추면 적절한 문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흥미로운 제목, <행복한 사건>은 타자가 어떻게 내 안에 들어와 나로 인해 신의 존재로 구현되는지를 말하고 싶은 자전적 소설이었다.

나로선,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경험을 두 번 겪은 독자로서 여기 바르바라가 겪는 심리전이 구체적으로 와닿았다. 병원에서 첫아기를 안고 퇴원하여 집으로 들어올 때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수술로 낳았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의 공백이었는데도 집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들어오자마자 아기침대에 아기가 깨지 않게 조심하여 아기를 눕힌 후 젖병을 준비하고 기저귀를 쌓아두고 목욕 용구도 챙겼다. 이전의 내 생활은 소리없이 잠적하고 아주 새로운,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 날마다 반복되었다. 잠깐 미루거나 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스무장도 넘게 나오는 천기저귀를 빨고 분유를 세네시간에 한 번씩 타서 먹이고 얼러서 재우고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그런 생활이 나를 미치도록 몰아가던 시기가 있었다. 아이를 돌보는 행복감이나 재미는 솔직히 길지 않고 나머지는 잠이 모자라 거의 빈사상태에 밤에도 울고 보채는 아이를 업고 안고 꾸벅꾸벅 졸던 시기가 있었다.

여기 바르바라가 니콜라에게 느끼는 감정들도 무척 공감된다. 남편은 방관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요즘의 젊은 남편들이야 육아에 많은 부분 동참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로서 감당해야하는 것들은 영역 밖의 고립된 성과 같다. 그 성 안에서 여성 혼자 부대끼며 하루에도 몇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대책없이 울어대기만 할 때 아기는 바르바라가 느끼는 것처럼 에일리언이나 다름없다. 아기가 '부부사이의 파괴자'이거나 '섹스트러블' 메이커처럼 굴던 시기도 분명 있었다. 아이 때문에 다투게 되고 서로 신경을 곤두 세우고 피곤해하며 지쳐선 우리가 언제 사랑이나 했던가, 그저 습관처럼 살던 시기도 분명 있었다. 분명 행복한 사건 중의 '덜 행복한' 사건이었다.

바르바라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은 부분은 모유수유 숭배자라는 점이다. 나같은 경우는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모유를 먹이지 못했다. 병원에서 초유 조금 먹인 게 모두다. 그리고는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주 건강하게 자랐지만 모유수유의 장점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감이 든다. 이러는 나도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의 가슴이 어떤 것인지 안타깝게도 잘 알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행복한 사건>에서 모유수유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가는 바르바라를 지탱하게 한 정신적 힘이자 거듭 나게 한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유를 먹이며 어린 딸 레아가 '신'이라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레아로 인해 비로소 절대성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글귀는 모성의 본질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타자를 대하는 순수성을 시사한다. 자신은 레아를 낳았지만 레아는 자신을 낳았고 레아로 인해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됨이다. 모성이란 모유수유에서 비롯된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보인다. 작가는 페미니즘적인 시각과 마초적 성향을 다소 균형있게 그리려고 한 점이 눈이 띄는데, 모유수유의 영역은 여성고유의 것이며 현대적인 어떤 문화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작가는 그런 점에서 가장 본능적인 포유류의 특징을 들어 여성이 어머니로 진화하는 위대한(?)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는 복잡한 길이었다.

이 책을 덮으면 가족이란 이름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대개는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분담해야하며 좀더 다른 의미의 사랑으로 엮어가야 한다고 알고는 있다. 하지만 삶의 소소한 부분들이 거슬리고 짐이 된다고 느낄 때 자신의 역할을 성스럽게 수행하기란 쉽지가 않다. 딸과 어머니, 아들과 어머니,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자매간의 심리도 사실적으로 그려지는데, 이들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 가장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여기며 산다. 여기에 아이가 들어가면 조금은 사이가 부드러워지며 각자의 위치가 재정립되기도 한다. 아이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이견으로 서로 마음을 다치기도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아이로 인해 가족의 틀이 굳건해지고 그속에서 웃음소리가 난다는 사실이다. 니콜라에게서 다시금 예전의 사랑을 떠올리고 '너무 사랑했기에 더 이상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됐구나, 사랑 없는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구나.' 라고 중얼거리는 바르바라는 이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가족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 다시 임신을 한 것이다.

<행복한 사건>은 모성 신화에 대한 솔직한 불평불만으로 시작하여 결국 모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맺는 듯하다. 모성신화에 끝까지 발칙한 도전을 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지 궁금해진다. 남성의 입장에서 아이를 갖게 되는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이렇게 육체적이며 심리적인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나올 수 없을 테다. 몸으로 심정으로 직접 겪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성은 위대하다느니 성스럽다느니, 모성은 그 모든 희생 위에 있다느니 하는 진부한 이야기로는 모성 신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자의식이 강하며 자기애가 많은 바르바라가 타자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기에 이르는 과정이 여기 '모유수유에서 재임신까지'다. 모르긴 해도 둘째 아기를 낳고 기를 때면 제법 달라져있을 바르바라를, 경험자들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연민'이 그 해답이다. 이는 그녀의 삶을 통틀어 진정 행복한 사건임에 분명하다.

- 레아가 울면서 보챌 때, 그 애가 내게서 멀어져 가고, 내가 그 애에게서 멀어져 갈 때 나는 레아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동정심은 아름답다. 아니, 동정심이 인류의 첫 번째 단계는 아니다. 본능적이기는 해도 그것은 가장 숭고한 감정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타인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는 감정이다. 타인의 기대를, 희망을, 고통을 느끼는 감정이다. 어떤 성스러운 이끌림에 따라 우리는 타인에게 몸을 숙이고 손길을 건네며 자신의 품으로 맞아들인다. 그것은 본래적이며 심오하다. 그게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어머니의 젖과 가슴, 그것이 바로 그러한 관대함이다. (p 227)

 ps : 이 책의 뒤쪽 책날개에는 알라디너 두분의 실명과 멋진 서평이 적혀있어요. 올리지 못해 아쉽네요. 보신 분은 누구일지 알아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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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10-03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아프락사스님은 알겠는데 한 분은 또 누구실까나...

씩씩하니 2006-10-0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물만두님 아니에요?????

프레이야 2006-10-0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아니에요. 여섯자랍니다..^^

프레이야 2006-11-2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그래요 정말. 효부상, 열녀상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 굴레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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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고달픈 나의 아내여! 사랑으로 A/S 해드릴게요


아내의 명절증후군 퇴치 위한 남편들의 애프터서비스!

추석이다. 모두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며 추석 반기는 건 아니다. 주부들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과도한 가사, 가족 간의 갈등 등으로 신체ㆍ정신적 장애를 겪는 명절증후군 때문. ‘그래서’ 대한민국 소문난 애처가 5인이 모였다. 평소 ‘착한 남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들. 요리사, 한의사, 재테크전문가, 샐러리맨, 여행칼럼니스트 등 자신의 직업적 특성 살려 명절증후군 퇴치와 아내를 행복하게 만드는 비법을 마련했단다. 그들의 아내 행복 비법에 귀 기울여 볼까?


문영숙(29)씨 위한 남편 정신우(37ㆍ요리사, 아시안웍대표)씨의 ‘행복 쿠킹!’

“나의 아내, 영숙씨. 지난 5월 결혼했으니 지금 신혼 4개월 차. 남들은 깨가 쏟아질 만한 시기라는데 내가 가게일로 너무 바빠 신경 많이 못 써 미안해요. 올해 처음으로 시집에서 추석 제사상을 차리게 됩니다. 많이 힘들 거예요. 그래서 연휴가 끝나는 주말, 당신만을 위해 요리할 생각입니다. 제사상 차리기는 시댁의 가풍 따라 요리 하는 것. 거꾸로 내가 처갓댁의 가풍 따라 맛있는 요리 만들게요. 장인어른의 고향이 제주도죠. 그래서 ‘전복갈비찜’을 준비했어요. 제 정성과 손길 듬뿍 넣을 겁니다. 추석 지나면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겠죠. 갈비찜에 생 전복과 은행, 밤, 대추 등을 넣어 건강에도 좋은 요리. 맛나게 드세요. 나랑 결혼해줘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도 맛있는 요리 많이 해줄게요. 이다음에 생의 마지막 순간이 올 때도 저와 같이 맛있는 요리를 먹어요!”


김미경(39)씨 위한 남편 강봉석(42ㆍ조은한의원 원장)의 ‘아내 기 살려주는 사랑지압’

“결혼한 지 벌써 16년이 되었네요. 성질 급한 경상도 남자와 사느라 그간 고생 많았어요. 내가 무뚝뚝해서 마음 표현을 잘못 했죠. 하지만 매년 제사상 차리느라 고생하는 당신 모습 볼 때마다 내 마음도 편친 않았어요. 새삼스럽지만(웃음) 올해 당신 위해 선물 하나 준비했어요. 당신의 기를 ‘팍팍’ 살려주는 사랑지압. 스트레스와 가사노동 때문에 간이 많이 손상돼 있을 겁니다. 기 순환도 잘 안되겠죠. 척추 중심, 양쪽으로 약 2cm정도 되는 부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지압해드릴게요. 척추 위부터 아래로 쓸어 내리듯이 10분 정도 지긋이 누릅니다. 그리고 처음 지압한 부위에서 바깥쪽으로 다시 2cm정도 되는 부위를 한번 더 지압합니다. 이 부위를 ‘방광경락’이라 부르죠. 오장육부가 모두 연결돼 있어 이곳을 자극하면 전신의 피로가 풀리고 기 순환이 잘 됩니다. 그 동안 좋은 아내, 두 아이의 좋은 엄마로 정말 수고 많았어요. 이제부터 힘들 때마다 사랑 실은 지압으로 기 살려 드릴게요.”


김은순(36)씨 위한 남편 서기수(36ㆍ재테크전문가)의 ‘펀드 통장’

“장남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죠. 재산도 변변치 않았죠. 그런 나와 당신은 흔쾌히 결혼해 주었어요. 고마워요. 주말도 없이 지난 몇 년 동안 재테크 강의와 회사일로 바쁘게 뛰다 보니 벌써 결혼 8년 차. 당신도 부동산 컨설턴트로 일하니 우리는 정말 ‘천생연분’인가 봅니다. 올해도 추석에 고생할 당신 위해 깜짝 선물 하나 준비했어요. 바로 펀드 가입통장! 가입 상품은 ‘한국삼성그룹 적립식 펀드 시리즈’. 최근 1년 수익률은 33.7%로 같은 유형의 평균 수익률 12.2%를 훌쩍 넘긴 상품이에요. 당신을 더욱 기쁘게 만들기 위해 약간의 목돈까지 넣었어요. 내년 추석 전까지 재테크 하며 재산증식의 기쁨도 이어가 봅시다. 물론 운용에 관해서는 언제든지 상담 요청하세요. 내 당신만은 무료 상담해주리다. 그리고 올 11월엔 당신에게 ‘유럽 여행’ 선물도 안겨드릴 겁니다. 이 약속, 꼭 지키겠어요.”


김기정(30)씨 위한 남편 맹태수(30 금강제화 제품기획실)의 ‘건강 신발’

“대학시절 소개팅 통해 당신을 만났죠. 이후 8년의 연애기간 무사통과하고 결혼으로 골인! 특히 군복무시절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아준 당신. 정말 고마워요. 직업이 임상병리사라 매일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는 당신 보면 마음이 아파요. 항상 웃는 낯으로 우리 부모님을 모셔 ‘내가 결혼 하나는 잘했구나’ 싶네요. 올해로 당신은 시집에서 세 번째 명절을 맞게 되네요. 당신을 위해 소박한 선물 마련합니다. 좋은 신발제품을 설계하고 기획하는 것이 내 전문! 그래서 가장 편한 신발을 골랐어요. 편한 신발은 일단 가죽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굽이 낮고, 밑창 부분에 쿠션이 적당하게 들어있는 신발이 좋죠. 항상 서서 일하는 당신에게 그만입니다. 그리고 회사동료에게 발 마사지하는 방법도 배웠어요. 올해 당신의 명절증후군은 내가 완벽히 날려줄게요.”


설희정(32)씨 위한 남편 이태훈(36ㆍ여행전문 칼럼니스트)의 ‘간이역 여행’

“결혼한 지 7년 만에 첫 임신한 나의 아내, 희정씨. 그 동안 아이 안 생겨 노심초사했죠. 이제 마음 푹 놓고 함께 출산 준비해요. 나는 여행전문칼럼니스트, 당신은 스튜어디스. 일주일에 잘해야 하루 이틀 정도 얼굴 보며 살아왔죠. 서로 자주 볼 수 없으니 아직까지 신혼 기분 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올 추석에는 당신을 위해 1박2일의 짧은 여행을 가려 합니다. 친척들로 북적대는(?) 한가위 잔치를 뒤로하고 한적한 간이역을 향해 떠나요. 영화 ‘편지’의 무대가 되었던 ‘경강역’.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경춘선에 몸 싣고 대성리와 청평 지나면 경강역이 기다립니다. 역사(驛舍)가 참 아름답죠. 사람 사는 정이 은근히 묻어나는 그곳에서 연애시절의 추억 떠 올리며 철길을 함께 걸어요. 하루 푹 쉬고 오면 명절후유증이 말끔히 가실 거예요. 열심히 일한 당신, 함께 떠나요~”


애처가 5인의 추석맞이 아내 위한 행복 5계명

* 아내를 위해, 문제가 생길 때 한발 짝 물러나 양보하겠습니다. 더 많은 여지가 보여요.
* 아내를 위해, 하루에 적어도 30분씩 함께할 수 있는 취미를 갖겠어요.
* 아내를 위해, 게으름 피지 말고 운동 열심히 해 S라인 만들겠어요.
* 아내를 위해, 하루에 3번 이상 전화하겠어요.
* 아내를 위해, 매달 1번씩 세상에 둘도 없는 특선 요리를 만들겠어요.

행복플러스
글 전범준기자 jbj@chosun.com
사진 허재성기자 heopho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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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름은김삼순 2006-09-3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정말 이런 자상한 남편분들이 많을까요? 배혜경님의 옆지기분은 어떠실지요, 곱고 연약한 님 많이 도와드리고 힘이 되어주셔야 할텐데,,^^
겨우 3시간 자고 목욕 다녀오니 사실 지금도 댓글은 달지만 약간 몽롱한 상태에요,
이러다 앉은 채로 졸겠어요,ㅎㅎ
벌써 주말이네요, 가족들과 즐거운 주말 보내시구요,^^

Mephistopheles 2006-09-3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애처가는 저렇게 표내지 않는데........
-포에버 머슴 메피스토-

프레이야 2006-09-3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순님, 정말 몽롱하겠다.. 좀 쉬세요. 몸도 약한데 삼순님 쓰러지면 안 된다구요^^
메피스토님, 맞아요 맞아!! 저렇게 표내지 않는 진정한 애처가이실 것 같아요^^

전호인 2006-09-30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례지내고 오후 2시부터 친구들 모임이 부부동반으로 있답니다. 친구들의 계획은 사람들이 몰려오기전에 아내들을 모임에 빼돌려(?) 쉬게 해주자는 데 있다는 것. 그런 후 청주로 나오서 영화를 보고 밤을 세운답니다. 자유를 만끽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옆지기들의 명절증후군을 날려보내곤 하지요.

비자림 2006-09-3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의 사랑으로 위안은 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니.. 좀 간소하게 차리고 가족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어요.

프레이야 2006-09-30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그렇게 깊은 뜻이~~ 정말 좋은 아이디어네요. 옆지기님 행복하겠어요. ^^
비자림님, 그래요,, 명절도 집집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짐을 나누어 가지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 주말 행복하게 보내시길..

꽃임이네 2006-09-3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함께하는 명절 문화로 바뀌어야 해요 ,우리 집에선 잘하면서 본가 가면 시어머님 땜시 ,,아주 어린아이로 돌변해 버린다죠 ,ㅠㅠ
열심히 일하고 있겠죠 ,,전

프레이야 2006-10-01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임이네님 사랑스러운 며느리이실 것 같아요. 분명히 그럴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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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깊은 나무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 신영복의《나무야 나무야》중에서 -

 

아침편지를 읽다 참 좋은 글귀에 잠시 쉬어갑니다. 쇠가 힘을 쓸 수 있게 손자루가 되어주는 나무. 나무의 의연함과 자신감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힘에서 나오는군요.  나무의 미덕과 사려깊음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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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6-09-26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인생이 힘들다고 느껴질때마다 신영복 선생 글을 읽으면.
그 사소함앞에 어리광 피우던 제마음이 움푹 숙여집니다...

바람돌이 2006-09-26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선생님 스스로가 큰나무이기도 하지요.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기운차게 아자 아자!!! ^^

프레이야 2006-09-26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좋은 아침이에요^^ 정말 우리들도 한 그루의 나무인데 제 구실을 잘 해야겠어요.

춤추는인생님, 사소한 불평들이 죄스러울 때가 많지요..

2006-09-26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우와 연우 2006-09-26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우리가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한 쇠는 우리를 해치지 못하는법이지요...^^

씩씩하니 2006-09-2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정말,,너무 뜻있는 구절인걸요...
나무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네..싶어요~

하늘바람 2006-09-26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해요

전호인 2006-09-2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모두 자기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망각하지 않으면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면서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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