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 한국 대표 애니메이션 그림책 1
이성강 지음 / 문공사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이성강 감독은 2004년에 앙시 페스티벌에서 이미 ‘마리이야기’로 장편 부분 대상을 수상했다. <오늘이>는 2004년 자그레브 애니메이션 영화제 특별상을 비롯하여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전문가들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그 애니메이션이 그림책으로 재탄생되었다.


<오늘이>는 제주도의 계절 근원 신화, 원천강 본풀이를 재구성한 이야기이지만 신화와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하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오늘이를 통해 성장과 회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간의 욕심과 행복의 근원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림책 <오늘이>에는 VCD가 부록으로 들어있어서 1학년 아이와 함께 재생하여 보았다. 17분정도의 애니메이션으로 장면의 전개가 빠르고 이야기전개에도 박자감이 느껴져 전체적으로 율동적이다. 애니메이션과 그림책 모두 낮고 깊은 색감을 주로 하여 사람의 무의식의 세계나 꿈속의 세계 혹은 전생의 장면을 상상하는 것 같이 환상적이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녹색톤과 잿빛톤에 밤하늘처럼 진한 잉크색의 색감이 신비롭다. 그러다 인물이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동글동글 귀염성스러운 윤곽과 밝은 색감을 곁들여 보는 이가 지루하지 않게 한다. 아이들을 눈높이로 한다는 점에서도 이렇게 밝고 고운 색감과 무게감 있는 진지한 색감을 동시에 쓴 점이 좋아 보인다. 배경의 아스라함과는 대조적으로 등장인물은 눈에 띄는 색상으로 도드라지게 그려놓았는데, 특히 여의주를 너무 많이 갖고 있어 승천하지 못하는 욕심꾸러기 이무기가 어찌나 귀엽게 그려졌는지, 마치 아기공룡둘리에 나오는 둘리엄마 같기도 하여 재미있다. 오늘이와 매일이가 머리를 부딪히며 만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난다.


이무기가 그렇게 움켜쥐고 있던 여의주를 다 버리고 위험에 처한 오늘이를 구해주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이무기가 드디어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고 입에서 내뿜는 불로 얼어붙었던 원천강을 녹이는 장면은 스펙타클하다. 원천강은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이다. 그 섬은 우리의 근원적인 고향이지 뿌리다. 신화에서는 오늘이가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선녀가 되는 것으로 맺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원천강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학, 야아와 재회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 아이들의 정서에 훨씬 안정감을 주는 행복한 그림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의 미덕을 한껏 발휘한 그림책 <오늘이>는 한국 대표 애니메이션 그림책 시리즈의 첫 권이다. 그림책에서는 만화의 장면처럼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면의 크기를 일정하게 하지 않고 변이를 주어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다양한 면의 분할과 적절하게 절제된 글귀가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에 버금가는 독특한 경험을 안겨준다.


그림책 <오늘이>는 한국 대표 애니메이션 그림책 시리즈의 첫 권이다. 국내 시장의 열악한 사정으로 독자들에게 선도 못 보이고 사라지는 우수한 애니메이션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렇게 주옥같은 그림책은 아주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멋진 판타지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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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부부는 닮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상당히 비과학적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DNA가 섞여 가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오랜 시간 본다 하여 얼굴 형태가 변하는 것도 아닐테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혼한 지 20년이 지난 부부는 누구라도 사진만 보고도 부부임을 짝지을 수 있다. 심지어 약혼자나 결혼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부부 역시 가려낼 수 있다. 그만큼 부부는 닮았다는 얘기다.

최근 영국의 리버풀대 연구진은 ‘부부가 오래 살면 살수록 닮아간다’는 비과학적 사실을 과학적 사실로 밝혀냈다. 얼마나 자주 웃느냐 찡그리느냐에 따라 특정 얼굴 근육과 주름이 당기고 펴지면서 결정되는데, 오래 살수록 부부의 감정 표현이 비슷해지면서 근육과 주름의 움직임이 같아져 얼굴 표정이나 인상이 닮아간다는 것이다. 즉 결혼생활을 하면서 부부가 서로 웃고 즐긴다면 둘 다 좋은 인상을 갖게 되고, 서로 싸우거나 인상을 많이 쓰면 결국 주름이 많이 느는 얼굴 형태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부부가 닮았다는 것은 가치관이나 성격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스타일이나 외모, 식성이 닮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성격이 닮아가다 보면 서로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같은 가치관을 갖게 되고, 같은 걱정과 같은 즐거움을 공유하다 보니 같이 웃게 되고, 따라서 서로서로 풍기는 인상이나 행동이 비슷해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부부가 길게는 몇십년을 함께 살면서 전혀 닮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부는 병도 닮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한 집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사는 부부는 같은 식성을 갖게 되고, 같은 운동습관에 음주․흡연처럼 나쁜 생활습관도 닮아가기 때문에 병도 유사한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 복부 비만 등의 질병을 조사한 결과 부부는 비슷한 병을 함께 앓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부 과학자들은 “부부는 닮아진 것이 아니라 원래 닮아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부부는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자신과 닮은 이성에게 더 매력을 느끼고, 자신과 닮은 사람을 더 신뢰하며, 자신과 닮은 이성을 배우자로 선택하여 결혼한다고 한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배우자를 선호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계에서 충돌이 적고 원만한 사이가 유지되며, 아이를 기르는 데도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일반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시절에 본 부모의 모습을 닮은 이성에게 서로 끌린다고 주장했다. 자신과 가장 유사한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부모의 얼굴을 연상하기 때문이며, 내면적인 성격이나 가치관에 국한된 게 아니라 외모가 반드시 포함된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부모를 닮은, 즉 자신과 유전자가 비슷한 배우자를 선택하는 근연교배가 특정 환경에 잘 적응한 유전자들을 더욱 잘 보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전적 특성이 비슷한 부부일수록 행복지수가 높다고 한다. 성격이나 체형이 비슷한 커플일수록 유전적으로도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성격과 체형이 비슷한 부부일수록 행복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그럼 애초부터 나와 닮은 사람을 배우자로 찾아나서야 할까. 과학은 이렇다, 저렇다고 하나의 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특히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배려하는 사람에게 이끌린다는 점이다. 얼굴이 하나도 닮지 않았어도, 체취가 딴 판이라 하더라도 상대에게 진심으로 익숙해지려고 노력한다면, 상대는 나를 자신과 닮은 사람으로 여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부부는 3주 서로 연구하고, 3달 사랑하고, 3년 싸우고, 30년 참고 견딘다고 한다.
‘다름’으로 만나 ‘같음’으로 사는 게 부부다. 부부가 서로를 닮으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서로에게 바치는 최상의 배려이자 이해다. 좋은 부부는 그래서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글 :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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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5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09-15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30년이면 더 참고 견뎌야하나봐요. 아직은 닮았다는 느낌이 덜 드는 걸 보면요. 그러고 나면 어떤 시간이 찾아올까요? ^^

씩씩하니 2006-09-1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주 서로 연구하고, 3달 사랑하고, 3년 싸우고, 30년 참고 견딘다..........
근대여,,전 14년차인대..지금도 싸우는걸요???ㅋㅋㅋ
참고 견딜 시간이 줄어드는건가? 글구여,,전 별루 닮고 싶지 않은대...어쩌죠? 큰일이네...

프레이야 2006-09-1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니님, 저도 18년차인데 아직도 싸워요. 하지만 전과 다르다면 참는 부분도 늘어간다는 것이에요. 그러니 과도기란게 있는건가요? ㅎㅎ

2006-09-15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09-15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100 미터 달리기선수같이 가을을 향해 퍼붓는다는 표현이 좋으네요^^

전호인 2006-09-1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적으로까지 증명을 하다니 대단합니다. 뭘 과학적으로까지 다 증명을 하고 그러나 그래.....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이 대단합니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을 하셨으니까여. 그리고 그분들께서 살아가시는 민간요법이 과학적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그런 과학이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프레이야 2006-09-1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그러게요^^ 연륜이 묻어나는 말, 참 지혜롭지요.
 
 전출처 : 진/우맘 > 발맘발맘, 아리잠직....

 

생전 처음인데도 어쩐지 낯설지 않은 우리말이, 적재적소에서 귀에 짝짝 달라붙는다. '더러운 책상'에서 생뚱맞게 머리 속을 갉작거리던 단어들과는 또 다르다.  얼마나 공을 들이면 이런 단어들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으려나....

 

 

발맘―발맘 [발맘발맘하다]

발맘―발맘[부사][하다형 자동사] 1.남의 뒤를 살피면서 한 발 한 발 뒤따르는 모양. ¶아이의 뒤를 발맘발맘 따라나서다. 2.팔을 벌리어 한 발씩 또는 다리를 벌리어 한 걸음씩 재어 나가는 모양.


왜자기다 

왜자기다[자동사] (여러 사람이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다.


아리잠직―하다 

아리잠직―하다[―지카―][형용사][여 불규칙 활용] 키가 작고 얌전하며 어린 티가 있다.


콩켸―팥켸 

콩켸―팥켸[―켸팾켸/―케팾케][명사] ‘뒤섞이어 뒤죽박죽으로 된 사물’을 이르는 말.


잘코사니 

잘코사니 Ⅰ[명사] 고소하게 여겨지는 일.Ⅱ[감탄사] 얄미운 사람이 불행을 당하거나 봉변당하는 것을 고소하게 여길 때 하는 말. ¶잘코사니! 공연스레 허풍을 떨고 으스댈 적에 알아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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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기 형 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거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비자림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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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9-11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제목의 영화도 이 시에서 따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어쨌든 이 시의 제목은 참 묘하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듯..
기형도에게 질투는 책 속의 사람들이었겠지만...
저에겐 마지막 두 행이 참 쓸쓸하게 박혔어요. 더 사랑해야 할 나 자신.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할 내 자신의 인생...

프레이야 2006-09-1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공감이에요^^

겨울 2006-09-1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어제, 이 시를 읽노라니 마음 가득 회한이 밀려오더군요.
이 시를 씩씩하게 낭독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프레이야 2006-09-1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 이 시를 씩씩하게 낭독하던 시절은 가고 지금 그런 회한이 밀려오는 걸 보면 세월이란 녀석이 참 덧없이도 흘러갔나봅니다. 덧없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 변화는 새로워지는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에 좀 열심이고 싶어요. 님 좋은 시간 보내세요. 빗방울이 간간이 보입니다..
 
비 온 뒤 맑음 - 아빠와의 배낭여행기
뱅상 퀴벨리에 지음, 김준영 그림 / 거인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4학년 남자아이들에게 아빠와의 마음의 거리가 얼마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보통이다, 전에는 보통이었는데 요즘은 가깝다, 가깝다, 이런 대답이 나왔다. 우리집 아이들에게는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두 딸에게 이 질문을 해보아야겠다. 돌아올 대답이 조금 두려워 묻지를 못하겠거든 먼저 이책을 읽어보라고 부모님께 먼저 권하고 싶다. 아이들이 품을 수 있는 불만들이란 소소한 것일 때가 많다. 하지만 그걸 소홀히 할 때 문제는 확대되고 나중엔 걷잡을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 책의 원제는 '킬로미터 제로'다. 21일간의 배낭여행을 뜬금없이 제안하는 자유분방해보이는 아버지와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따라나서는 벤자민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열두 살이면 사춘기가 시작되는 정도의 나이다. 부모님과 대화가 줄어들고 불만들이 쌓이고 세상사가 모두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불합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고 철썩같이 믿게 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모와 어딜 같이 가기도 꺼리고 또래친구들과 있는 시간을 더 가지려는 경향도 있다. 아니면 차라리 혼자 있기를 선호한다.

이 책의 벤자민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아빠의 이혼을 경험하고 아빠와 단둘이서 살아온 아이다. 이 책에서는 벤자민과 아빠의 살아온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자세한 에피소드도 없고 인상적인 사건도 나열되지 않는다. 어쩌면 부모의 헤어짐으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많이 나와있으므로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런 부분을 피해가는 것 같다. 그 대신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여행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것도 둘만의 여행으로 21일간 300킬로미터를 걸어서 하는 여행이다. 벤자민은 프랑스 지도를 펴고 아빠가 표시해 둔 빨간색과 흰색의 선을 따라 걸어갈 예정이란 말밖에 듣지 못한다.

엄마의 권유까지 합세하여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여행 제안 앞에서 뚱한 얼굴로 출발하는 벤자민의 마음의 변화가 여정과 함께 드러난다. 21일간 300킬로미터의 길 위에서 투박해보이지만 사실은 섬세하게 나타난다. 강한 척 하지만 속으론 연약한,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갖는 이중적, 어중간한 감정의 양립은 육체적인 과도기 못지 않게 격렬하게 겪게 되는 변화다. '바보처럼 우리는 걷기만 했다. 마른 땅인데도 왜 발이 질척거리는 흙에 빠지는 것처럼 무거운지 알 수 없었다.' (11쪽)  이런 식으로 벤자민의 마음은 자연 또는 날씨 그외의 다른 것들에 비유되어 간접적으로 표현된다. 그런 글귀들을 따라가며 마음의 변화를 엿보는 재미가 있다. 벤자민은 그동안 아빠의 대화가 부족하였고 아빠의 관심도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아왔다는 것을 여행 중간 쯤에서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억눌려있던 감정들이 설움에 복받쳐 터져나오면서 벤자민의 마음은 점점 화해의 길로 접어든다. 어쩔 수 없는 취향의 차이, 세대차이로 인한 정서의 차이 같은 것도 둘만의 여행을 통해 서로가 알게 되며 인정할 것을 인정해야함도 배운다.

이들이 가까워지는 시간은 삶을 통틀어볼 때 그리 길지 않다. 20일 남짓 동안, 이들은 자연을 몸으로 느끼고 함께 호흡하며 원시적인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고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숨막힐 듯 감사하기도 한다. 특히 복잡한 심경을 끌어안고 억압되어있던 벤자민은 낯선 길 위에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정을 느끼며 부대끼는 소중한 경험을 한다. 어려운 일 앞에서도 스스로 해보거나 도움을 청할 줄도 안다. 더구나 어른들이 가질 수 있는 복잡한 감정 같은 것들에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성장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을 꿈꿀 정도로 말이다.

벤자민이 도착한 곳은 30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가 아니라, 아빠의 마음이다. 처음엔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아빠의 마음에 걸어서 걸어서 도착한 것이다. 그곳은 아늑하고 미더우며 말하지 않아도 힘이 느껴지는 곳이다. 마음의 고향, 태어난 곳이자 돌아갈 곳, 생명의 원류인 것이다. 그래서 늘 그리운 곳이기도 하다. 여행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식의 여행이라면 둘이서, 가깝고도 먼 사람 둘이서 꼭 해보고 싶다. 나의 딸, 나의 아들 혹은 사랑하는 어떤 대상과 마음의 거리를 좁혀서 서로의 종착지로 삼고 싶다면 말이다. 마음과 마음,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가까울 수 있는 거리가 아닐까. 제로 킬로미터로 좁혀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사이가 어디에 있을까싶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한 편의 잔잔한 여행기로 군더더기 없이 풀어냈다는 점이다. 자연 속에서 한 호흡을 하며 감정의 거리를 좁혀가는 점도 그렇다. 걷다가 지치면, 우리는 아무 말없이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아빠와 나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70쪽)  또다시 그 거리가 멀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의 경험이라면 살면서 되돌아보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공유될 것이다. 삽화도 깔끔하다. 하지만 한 문장에서 오자가 발견되어 아쉬웠다. 138쪽 - 해자 지는 모습을 싶은데요. -->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요., 로 바뀌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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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1 0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09-11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조카가 4,5학년이상이면 좋겠어요. 좋은날 시작하시기 바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