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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일기 - 인조,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다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6
작자미상 지음, 김광순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역사적 평가가 다르게 되고 있는 인물들 중 광해군을 들면 그의 실리외교를 빼놓을 수 없다. 광해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국난을 겪고 피폐한 시대에 원하지 않는 왕위에 올라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 원래 심약했으나 강경한 치세를 하여 폭군이라는 오명만을 후대에 썼던 임금이다. 1980년대 어느해부터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우리역사교과서에도 다르게 적히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개혁과 중립외교를 추진했다.' 그만큼 국제정세를 파악한 실리외교의 중요성을 실감했다는 말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 현실이 그의 인기를 높힌다. 지금도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군의 작전 통제권 환수 문제에 관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는데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꽃이라며 작전통제권을 미군으로부터 회수하려고 하고 군 장성들은 시기상조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과연 어느쪽 의견에 손을 들어주어야 하느냐는 문제는 명분만으로 생각하기에도, 실리만으로 생각하기에도 쉽지 않은 판단이다.
대의를 거스르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라도 명분을 지켜야한다는 측은 그 명분이라는 것이 어느 누가 지켜야할 명분인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 명분인지에 대해 재고해야한다. 명분론자들은 그 명분의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화가 되는 일은 아닌지, 소수의 이익에 눈먼 명분은 아닌지, 닫혀있는 사고에서 나온 잘못된 믿음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실리를 추구하는 측은 자존감이 훼손되는 일까지 감수하는 일에 눈을 감아야하는 무모한 용기가 필요하다. 실리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영악하고 가벼운 인상을 주기 마련이지만 외교에 있어서는 실리론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것이 국익을 염두에 두고 백성의 삶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산성일기>는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에 당한 삼전도의 치욕을 생생한 필력으로 써내려간 일기형식의 책이다. 작자미상으로 알려져있지만 당시 남한산성에 왕과 함께 피신해있었던 자들 중 척화파의 가족 쯤으로 추측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정묘호란)을 도입부로 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는 과정을 중심부로 하여 삼전도비를 세우게 되는 종결부까지 셋으로 내용을 나누어볼 수 있다. 한자체였던 것을 읽기에 쉬운 문체로 바꾸어두었고 각 장의 옆에는 알기 어려운 단어와 용어들에 대한 주석을 달아두어 이해를 돕는다. 전체 글의 맥락을 흐트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건발생 시간연대상 필요한 위치에 두려고 한 것 같다. 중간중간에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옮긴이의 꼭지가 들어가 좀더 자세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역사의 현장에 대한 사진과 필요한 지도들도 잘 실어두었다.
가장 생생한 읽을 거리는 청에 보낸 국서와 답지들이다. 청 황제 홍타이지가 보낸 편지를 보면 조목조목 인조를 꾸짖는 목소리에 공감이 간다. 안타깝고 분한 내용들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분노가 인다. 서인들이 내세운 명분이란 명나라에 충성하고 명나라만 의지하고 오랑캐들의 나라와는 화친할 수 없다는 것이니 국제정세를 파악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볼 수 없을뿐만 아니라 우둔하고 오만하기까지 하다. 주나라가 세워지면서 일기 시작한 중국인들의 천명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황제가 되고 아니 됨이 네 뜻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늘이 도우면 필부도 천자가 되고, 하늘이 벌을 내리면 천자도 필부가 되나니, 너의 이 말 또한 망령되도다.' 이는 이미 명나라로 부터도 인정받은 왕임에도 조선이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고 거부하는 것에 대한 오만함을 말한다. 또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혼자 몸만 산성에 들어있는 비겁함을 지탄하는 글귀에 서슬이 퍼렇다.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으로 양측의 상반되는 태도와 행동을 유의깊에 보면 척화파를 무조건 비난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명분이란 게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으니 말이다. 모두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흑백논리이전에 조금더 바람직한 쪽은 어느 쪽이었을까. FTA 문제나 다른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명분과 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역사의 교훈은 돌고돈다.
종결부에는 삼전도비 사진이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항복의식을 기록하고 있는 비석이라는 점에서 한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준비도 없이 명분만을 내세우고 일으킨 전쟁의 결과가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알려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선조 13년 부터 효종 2년 까지의 연표를 간단히 정리하여 실어놓아 참고가 된다. 중2와 함께 읽었는데 이렇게 청의를 입고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며 이마에 피가 흘렀다는 당시 인조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국치의 뼈저림이 느껴지지만 이 책은 보다 소상하게 그 과정이 진술되어있어 안타깝고 긴박한 순간들의 현장감이 느껴진다. 척화파 쪽 사람의 일기라는 점을 감안해도 대체로 기울지 않은 눈으로 보고 쓴 것 같다. 하지만 <산성일기>를 읽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면만 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 단면만 보지 않는, 균형잡힌 시각을 갖도록 다른 역사관련책을 확장하여 읽어나가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