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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산사 가는 길
이기와 지음, 김홍희 사진 / 노마드북스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이기와'라는 시인을 처음 알게 되었다. 마흔 가까이의 세월을 살아오며 보통의 여성보다는 좀더 많은 상처를 받은 듯하다. 이 책은 파란이 많았던 이런 시인이 길을 떠나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의 독백이다. 일종의 기행사진에세이 종류로 넣고 싶다.
김훈의 자전거여행이 떠올랐다. 김훈의 글에서 느껴졌던 맛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여성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섬세한 감정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시인은 자신의 사생활도 고백하며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 출가하는 어느 여성, 세속의 것을 다 비우고 떠나는 그 사람의 가방안에는 생리대가 가득했다는 글에서, 여성이라서 짊어져야하는 짐 같은 것에 대한 시인의 애틋함이 보인다. 시인은 자신도 버거워했던 그런 것들에 신물이 나면서도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자전거여행의 사진 못지않게 둘다 사진이 멋스럽게 곁들여져있어 글의 인상을 도드라지게 해준다.
<비구니 산사 가는 길>은 전국의 유명 비구니 사찰 열세 곳을 찾아간다. 시인은 비구니 사찰을 골라 다니며 비구니들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다. 사찰의 유래도 설명해놓았고 비구니들과의 선문답 같은 이야기 그리고 그저 도란도란 느껴지는 따뜻한 분위기를 글로 전한다. 역시 상처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따스한 마음이 약인 것 같다. 산사의 풍경묘사에서도 시인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뜨거운 마음이 엿보인다.
사실, 글보다 사진이 한층 더 눈을 사로잡았다. 비구니의 맑은 얼굴마냥 사진이 참 담백하다. 김홍희님은 마음에 '나'를 담지 않고 셔터를 누른 것 같다. 두 장을 차지하며 넓게 펼쳐지는 풍경사진들 속에는 한결같이 '빛'이 있다. 어느 땐 비구니가 벗어놓은 단아한 흰고무신짝에, 어느 땐 단장한 색시마냥 색을 풍기는 문살에, 그렇게 '나'대신 '빛'을 실었다. 그 빛에 가만히 눈길을 주고 있으면 아련한 그리움이 구슬픈 가락처럼 들려오는 것 같다. 사물의 한 곳에 매달린 빛이 너무 아름다워 서러워진다. 풍경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그 사진들이 어찌 좋은지 한참을 머물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기와 시인의 글도 읽어내려가며 자꾸 눈에 걸린다. 공감되는 부분에서는 멈추어 쉬었다 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는 그래서 또 걸린다. 그녀의 길에는 다른 시인들의 싯구와 자신이 지은 싯구도 동행한다. 그 싯구들에 시인은 또 자신의 생각을 하나 더 걸어둔다. 좋은 시들을 감상하는 시간도 덤으로 괜찮았다. 하지만 이런 류의 기행에세이가 넘었으면 하는 약간의 벽이 자꾸만 보이는 건 왜일까, 나도 그만큼 변했다는 증거인지 모르겠다.
무상은 헛됨이나 공허함이 아니라 변화임을 강조하듯, 우리는 변하는 것을 위한 준비를 하는 생을 살고 있음이다. 머물러 있지 않는 나. 그러니 '나'는 버려라. 변화하는 '나'만 있을 뿐... 시인이 던지는 화두와도 같은 글귀와 그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찾으며 자신과의 화해를 청하는 대목들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나'와 '너'라는 인칭이 없어질 때 비로소 우주의 우주가 된다는 글귀 또한 울림이 있다. 아상이 많아 칭찬에 인색한 사람을 이야기하다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인의 생각은 강물처럼 유연하게 흘러흘러 가는 것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어들을 곳곳에 설명하듯 들려주는 것은 좋았는데, 여기 소개된 사찰들을 찾고 싶은 사람을 위해 지도라도 곁들여주었으면 좋았겠다. 고즈넉한 그곳에 가보고 싶어지니 말이다.
허공을 온종일 날아다녀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 새처럼,
항상 웃고 있어도 시끄럽지 않은 꽃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호수 밑을 뚫어도 상처 하나 남기지 않는 달빛처럼 비우고 또 비워 가벼워져야 하건만,
작은 몸짓 하나에도 이처럼 잔뜩 힘이 들어가서야 어느 천 년에 구름 되어 열반에 들 수 있을까...(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