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 유산 이야기 샘터 솔방울 인물
한상남 지음, 김동성 그림, 최완수 감수 / 샘터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책은 무척 반갑다. 6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었는데 처음엔 간송 선생님이 누구인지부터 모르는 눈치였는데 다 읽고 나더니 상당히 감동을 받아 상기된 얼굴이었다.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수업을 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이 7만 4천 점이상 해외에 나가 있는 실정이란 사실을 알고 더욱 놀랐다. 그리고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들과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 그리고 우리 것에 대한 인식과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대영박물관 이야기도 나와 문화유산이 있어야할 곳에 대한 짧은 토론시간을 가졌다. 간송이 한 일과 그 의미를 생각하며 아이들이 이런 문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가져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대개는 우리의 얼과 정신이 담겨있는 문화유산을 가장 잘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우리라는 쪽이었는데, 그런 것을 지킬 수 있는 확고한 인식과 믿음 그리고 경제적인 힘까지 갖출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하는 모 방송프로그램 이야기도 나왔다. 일본에 가 있는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프로젝트였는데 우리쪽에서도 모른 채 넘어가있는 경우도 있어서 문화재관리 면에서 각성해야할 점이 많았다. 조금 늦은 시각에 하긴 해도 아이들이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월 말에 간송미술전에 갔다왔다. 그곳은 일제강점기에 보화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어 지금껏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어 옛모습 그대로 나무냄새를 간직하고 있었다. 정원이 보이는 입구에서 30분 넘게 입장을 기다리고 서 있으면서 손질하지 않은 듯 자연스러움을 보이고 있는 나무들과 그 사이로 보이던 부도도 생각난다. 입장이 시작되고 서서히 건물로 들어가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침 일찍 갔는데도 사람들이 붐비고 일부 사람들은 너무 떠들기도 해서 감상을 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여러 부류가 보였는데 이들이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는 우리 문화유산들이 비록 일부이지만 한 점 한 점 대단히 돋보였다. 오래된 유리장식장 안에서 말없이 수더분한 모양새로 앉은 그것들, 그동안 책에서만 보았던 그것들을 보며 오래된 벗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간송미술관은 일년에 두 차례만 개방이 되는 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그것에 대해 뭐라 말하기 어려운 점이 보였다. 먼저, 국보급만도 10여점을 소장하고 있는 이곳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산만하고 진지하지 못한 면이 보여 좀 난감하고 씁쓸했다. 물론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놓지 않은 전시태도가 다소 불만스러웠지만 사전에 조사를 하고 공부를 좀 하고 오는 자세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장을 나오며 도록을 사서 오긴 했지만 어린 학생들이 친근하게 보기에는 옆에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안내원이 있어야할 것도 같았다. 어떤 엄마는 너무 떠들며 설명을 하고 있어서 오히려 옆사람에게 방해가 되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간송미술관의 문화유산을 보게되기까지 험난했던 시대에 전 재산을 털어 그것을 되찾고 지켜낸 사람들의 노력과 공헌을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은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물론 중요성이나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문화유산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간송미술관의 유산들은 남다르다. 개인의 노력과 재산으로  지켰고 개인이 설립한 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다는 점을 잠시 잊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문화유산은 공동의 자산이라 말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을 되찾아 지킨 인물의 감식안과 노력은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아무리 큰 재산이 있다고 아무나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노력 앞에 조금은 숙연해지고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간송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는 바로 이런 점에 촛점을 맞춘 '샘터솔방울'의 인물이야기 책이다. 우선 하드커버의 표지가 하나의 작품 같다. 은은하게 그려져있는 바탕무늬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랫쪽에는 훈민정음의 낱자들이 그려져있다. 편집도 읽기에 좋게 잘 되어있다. 간송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그의 의식의 변화를 읽을 수 있고 그의 담대함과 사람됨을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그의 노력을 함께 알 수 있다.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고 그런 시절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간송의 정신을 아이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의 호사취미가 아니었냐고 한다면 그가 훈민정음 원본을 살 때 일천원을 부르는 값을 무시하고 일만원을 선뜻 내어주며 샀던 일화를 말하라. 그는 문화재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제대로 값을 매길 수 있는 안목이라 생각했다. 빼앗긴 문화재를 구할 때 값을 깎거나 야비한 방법을 택하는 일도 없이 담대했지만,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몸을 사렸다. 

간송은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인맥을 살펴보면 고등학교시절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위창 오세창 선생이 있다.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며 정신적인 지주로 여겼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고 한국전쟁이후로는 최순우 등과도 호를 친히 지어주며 친형제같은 사이로 지냈다. 인민군의 손에 넘어가 평양으로 옮겨졌을지도 모를 문화재들이 지금 간송미술관에 있는 문화재들이다. 일본인을 상대로 강탈당한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며 감동적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구한 것들이라 가슴 졸이게 한다. 간송미술관에 현재 전시되어있는 문화재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아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다. 이 책을 먼저 읽고 다음에 간송미술관에 가서 실물을 본다면 감동이 배가될 것이다.

이 책의 삽화는 동양화를 전공한 김동성님이 맡았다. 여기서도 역시 동양화풍의 사실적인 그림이 깨끗하고 멋스럽다.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도 되도록 많이 실어놓아 은은한 멋을 풍기는 우리 문화유산을 감상하며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도 얻는다. 뒷장에는 '간송전형필(1906~1962)'와 '간송미술관' 그리고 '찾아보기'를 두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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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유스또 2006-07-0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퍼 갈께요..~~~ 추천도 ....

씩씩하니 2006-07-0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했어요,,근대...참 요즘은 책을 뒤적이기 넘 힘들어서,,,,언제 읽을 자유가 내게 올 것인가...
 
 전출처 : 가넷 > [현대미술 따라잡기] 우연을 통제·활용하는 예술가들

[현대미술 따라잡기]

우연을 통제·활용하는 예술가들
유진상 계원조형예술대 교수·미술이론
 

예전부터 미술에는 다양한 우연성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우연성 때문에 합리적인 사람들은 미술이 어렵다거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면서 예측할 수 없는 효과와 사건들로 인해 숱한 실패를 겪은 사람들은 이 때문에 미술을 저주하기도 한다. 우연의 서구적 어원은 주사위에서 비롯된다. 아랍어에서 온 ‘hasard’나 라틴어의 ‘alea’가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우연성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림을 그리다가 우연히 놀린 붓이 가져온 뜻하지 않은 효과를 ‘우연의 일치(coincidence)’ ‘우발적 사고(accident)’ ‘우연적 사건(incident)’이라고 하고, 작가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른 ‘임의성’ 혹은 ‘자의성(arbitrariness)’ 도 있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른 ‘예기치 못한 효과(unexpectedness)’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le)’도 있다.

여기에는 물론 ‘선택(choice)’과 ‘기회(chance)’가 존재한다.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우연을 ‘확률(statistic)’이나 ‘개연성(probability)’으로 표시하기도 하지만, 의도하지 않고 ‘거저 얻어진(gratuitous)’ 경우나 ‘재수가 좋은(fortunate)’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럴듯한(likely)’ 경우나 ‘그럴 수도 있는(plausible)’ 경우도 있고, ‘일어날 수도 있는(contingent)’ 효과들도 기다리고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통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술가들은 오랜 훈련을 통해 실패할 확률을 줄여나가거나 개념적으로 우연 자체를 활용하기도 한다. 예술은 우연에 대한 통제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우연을 활용하는 기술이다. 현대미술에 ‘사태(event)’나 ‘발생(happening)’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이들을 ‘수행’ 혹은 ‘공연(perform)’하는 장르들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기성제품을 차용하는 마르셸 뒤샹이나 뿌리기 회화로 유명한 잭슨 폴록(사진) 같은 예술가들이 인정받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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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넷 > [현대미술 따라잡기] 예술가는 어떤 사람?

[현대미술 따라잡기]

예술가는 어떤 사람?
유진상 계원조형예술대 교수·미술비평
 

우체부 슈발이 만든 상상의 궁전.

예술가의 삶은 어떨까? 명예와 부, 모든 이들의 찬사와 압도적인 재능으로 가득 찬 삶일까, 아니면 고독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삶일까?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이는 자신의 예술적 이상에 사로잡힌 독선적인 사람으로, 또 어떤 이는 베짱이처럼 인생을 즐기기로 작정한 사람으로 비친다. 예술가와 그들의 삶은 일반인에게 이처럼 몇 가지의 고정된 이미지로 각인된 듯하다.

 

1997년 프랑스 ‘리옹 비엔날레’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은 ‘타자(L’autre)’라는 비엔날레 제목처럼 ‘다른 것(타자성·alterity)’ 혹은 ‘다른 인간’이라는 유형으로 예술가를 규정하고 있다. 그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해 비엔날레에서 제만은 한 우체부를 예로 들었다. ‘슈발(Cheval·말(馬))’이라는 이름의 이 우체부는 리옹 남동쪽에 위치한 오트리브(Hauterives)에서 매일 32km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 우편물을 배달했다. 1879년 어느 날 꿈에서 성을 본 슈발은 자신이 걸어다니는 길가의 돌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1912년까지 33년간 이어졌다.

 

요정과 화초, 머나먼 곳의 문명과 상상의 여행, 그리고 역사에 등장하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이 성은 앙드레 브르통과 피카소, 팅겔리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 발견돼 20세기 미술사에 기록됐다. 이윽고 이 성은 1969년 앙드레 말로에 의해 역사적인 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제만에 의하면, 예술가는 꿈을 이루는 사람이다. 일반인과 다른 것은 바로 그 꿈의 내용이며,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는 방식이다. 동시대 미술은 점점 더 예술적 형식에서 이 꿈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 놀라운 꿈의 현실화를 구경하기 위해 매년 14만여 명이 프랑스 산골의 이 성을 찾는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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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혼도와 페이비언의 즐거운 하루

누가 더 즐거웠을까?

피터 매카티 글, 그림 / 장미란 옮김 / 바다어린이

 

 




 

고양이 페이비언은 창가에서,

강아지 혼도는 마루에서,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색색 자고 있습니다.

 

 




 

"혼도야, 일어나. 놀러 가야지!"

혼도는 재미있는 곳에 놀러 갑니다.

 

 




페이비언은 집에 남아 있습니다.

 

 




도는 자동차를 타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혼도는 바닷가에서 친구랑 놉니다.

 

 




페이비언은 집에서 아가랑 놉니다.

 

 




혼도와 친구는 신이 나서 바다로 첨벙 뛰어듭니다.

 

 




페이비언은 어디론가 뛰어갑니다.

 

 




혼도는 친구랑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페이비언도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이제 혼도는 배가 고파요.

혼도는 물고기가 먹고 싶어요.

 

 




페이비언도 배가 고파요.

페이비언은 칠면조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요.

 

 




드디어 혼도가 돌아왔습니다.

어서 저녁밥을 먹어야지요!

 

 




혼도와 페이비언은 사이 좋게 저녁밥을 먹습니다.

 

 




혼도와 페이비언은 배가 부릅니다.

이제 늘 자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혼도야, 잘 자."

"너도 잘 자."

 

 




"아가도 잘 자!"

 

 

 

햇살이 따뜻한 곳에서 읽으면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책이죠?
짤막짤막한 글임에도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누가 강아지와 고양이를 천적이라고 했을까요?
여기서는 너무 다정해 보이기만 하는걸요.
그림도 너무 예뻐요.
전 그림을 보자마자 크빈트 부흐홀츠를 떠올렸는데 여러분은 어떠세요?
부드러운 파스텔 그림이 서로 닮은 것 같아요.
파스텔은 선명하다기보단 은은한 느낌이잖아요.
그래선지 꼭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아기가 자기 전에 읽어 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책은 저만 예쁘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나 봐요.
2002년에는 <뉴욕타임즈> 올해의 최고 그림책상과 2003년에는 칼데콧 아너상을 수상했거든요.
(칼데콧상은 최우수상 1권, 칼데콧아너상은 우수상으로 1~5권이 선정됩니다.)

이책을 보고 나니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의자 위에 예쁘게 앉아 있는 페이비언이... 마치 "날 가지세요~." 하고 유혹하는 것만 같아요. ㅠ.ㅠ)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고양이는 요물이라는 집안 식구들의 반대로
아이가 태어나서는 아이 건강에 해롭다는 반대로
이래저래 고양이와는 인연이 없는데요.

만화가 이우일씨네 집에 있는 너무나도 멋진 고양이 카프카가 순간 떠오르네요.
그럼 날 때부터 카프카와 함께 자란 은서는 어떻게 건강하단 말입니까!!!

참, 책 날개 뒷쪽에는 혼도와 페이비언의 진짜 모습도 볼 수 있답니다.
피터 매카티와 그의 아내 윤희, 딸 숙희가 실제로 키우는 애완동물들이거든요.
이름을 보니 우리 나라 분과 결혼하셨나 본데...
그렇다면 페이비언과 함께 놀던 아가가 숙희인가 봐요.
아무튼 오랫만에 따스한 감성의 그림책을 만나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혼도와 페이비언 둘 중에 누가 더 즐거웠는지는 여러분의 생각에 맡길게요! ^^

 

출처 : http://paper.cyworld.com/boo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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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넷 > [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사진 이론의 역사]

[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사진 이론의 역사]

어떤 사진에 강렬한 ‘필’이 꽂히는 이유는
대부분 관습적 독해 코드로 이미지 읽기 … 메시지 담긴 사진 감동이 살아 있어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주체의 사라짐

마이클 스노, ‘Authorization-사진사의 초상’, 1969.

캐나다 오타와 국립미술관에 가면 재미있는 작품이 있다. 전시실 벽에 거울이 걸려 있고, 그 매끈한 표면 위에 다섯 장의 사진이 붙어 있다. 넉 장은 거울의 중앙에 함께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 한 장은 뚝 떨어져 왼쪽 상단에 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사진사가 거울 앞에 서서 폴라로이드카메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그는 텅 빈 거울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즉석에서 현상된 사진은 거울에 테이프로 표시된 사각형의 한쪽 귀퉁이에 붙여진다. 그것이 거울 속 사진사의 모습을 4분의 1가량 잡아먹는다. 이어서 같은 위치, 같은 각도에서 또 한 번 셔터를 누른다. 곧바로 카메라 밑으로 삐져나온 사진은 앞 사진의 오른쪽에 나란히 붙여진다. 이제 사진을 찍는 사진사의 모습은 절반이 가려졌다.

이어서 같은 방식으로 다시 셔터를 누른다. 이번 사진은 두 사진의 아래쪽에 배치되고, 이로써 사진사의 모습은 4분의 3이 사라진다. 이제 다시 그것을 찍어 남은 귀퉁이에 붙이면 테이프로 표시된 거울 위의 사각형에서 작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럼 이제 찍을 것은 하나뿐이다. 사진사를 집어삼켜 버린 넉 장의 사진. 그것을 찍은 마지막 사진은 거울의 왼쪽 상단으로 올라간다.

 

사진적 행위

“주체는 자신의 복제 때문에 점진적으로 매장되고, 언제나 이미 지나간 순간을 고착시키는 재현에 의해 각각의 조준과 촬영 순간마다 조금씩 삼켜지고 지워진다.” 여기서 “주체는 사진적 행위에 의해, 그리고 그 행위 속에서 완전히 용해된다.” 주체가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작가의 얼굴을 집어삼킨 다섯 장의 사진으로 표상되는 것, 즉 사진을 찍는 이미지 행위(image-acte)뿐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즈,‘시녀들’, 1656.

‘사진적 행위’에서 필립 뒤바는 이 작품에 자신의 논지 전체를 암시하는 ‘상징의 역할’을 맡긴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을 에피스테메론의 엠블럼으로 삼아 그것을 회화의 회화, 즉 고전주의적 표상의 표상으로 규정한 바 있다. 뒤바 역시 이 캐나다 작가의 작품을 사진의 사진, 즉 사진 찍기의 사진으로 푼다. ‘Authorization-사진사의 초상’(1969)이라는 제목은 ‘작가에게 권한을 부여한다’고 말하나, 정작 작품에서 사진사는 점차 지워진다.

이는 물론 당시에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이라 부르고, 탈근대 철학자들이 ‘주체의 죽음’이라 불렀던 것의 사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미학에서는 예술가를 타고난 ‘천재’로 보든, 아니면 후천적인 ‘장인’으로 보든 작품을 작가의 주체성의 표현으로 보았다. 하지만 현대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을 ‘영매’로 간주하곤 한다. 이 경우 작품은 작가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어떤 객관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사건의 성격을 띠게 된다.

 

실재의 거울

뒤바는 이 작품을 작가의 주관성의 표현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의 작동(une mise en acte)으로 본다. 이는 물론 진리의 발동(ins Werk Setzen)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을 불역한 것이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나 작품이 아니라 ‘그린다’는 행위 자체다. 뒤바 역시 스노의 작품에서 작가를 지우고 그것을 ‘찍는다’는 행위로 환원시킨 뒤, 이제까지 사진 이론에서 그 행위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해왔는지 추적해 들어간다.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 ‘포토제닉 드로잉’, 1840.

사진 이론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면 먼저 퍼스의 기호학을 알아야 한다. 퍼스는 기호를 크게 도상, 지표, 상징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도상(icon)은 흔히 보는 그림처럼 ‘유사성’을 토대로 한 기호. 지표(index)는 남편의 와이셔츠에 묻은 루즈가 그의 바람기를 의미하듯이 ‘인과성’을 토대로 한 기호. 상징(symbol)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처럼 지시 대상과 아무런 유사성이나 인접성 없이 그저 관습과 협약에 따라 사용되는 ‘무연성(無緣性)’의 기호다.

사진도 일종의 기호라면,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처음에 카메라가 발명됐을 때 당장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진이 현실을 빼어나게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사진은 현실을 쏙 빼닮은 도상기호였다. “사진과 영화는 그 속성상 사실주의의 강박관념을 충족시켜 준다.” 현대 회화가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 넘겨주고 추상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19세기 사진 이론에서 사진은 무엇보다도 ‘실재의 거울’이었다.

 

실재의 변형

하지만 우리는 이게 얼마나 소박한 생각인지 잘 알고 있다. 사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변형해서 보여준다. 루돌프 아른하임에 따르면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이미 관습적 도식, 즉 문화적으로 형성된 지각의 코드를 적용한다. 인류학의 연구 역시 문명 이전 사회에 사는 부족들은 종종 사진을 보고도 이해를 못한다고 보고한다. 이 역시 사진의 바탕에는 해독을 위해서 따로 배워야 할 어떤 관습적 코드가 깔려 있기 때문일 게다.

사진은 거울처럼 실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게 아니라 대개는 현실을 변형시켜 제시한다. 가령 지난번에 본 로젠탈의 사진은 연출된 장면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굳이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아도 사진이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무엇을 찍을까, 어떻게 찍을까를 결정할 때부터 이미 사진 속에 찍히는 세계는 찍는 사람의 머릿속의 관념에 따라 변형되게 마련이다. 사진은 세계의 그림이기 이전에 그것을 찍는 이의 머릿속 그림이다.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 ‘포토제닉 드로잉’, 1840.

이 때문에 ‘카이에 뒤 시네마’ 그룹에서는 사진의 바탕에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사진은 그림이기 이전에 관념이라는 것이다. 사진이 일종의 감추어진 텍스트라면, 그것은 도상기호가 아니라 상징기호가 되는 셈이다. 20세기 초의 사진 이론은 사진을 세계의 거울이 아니라 ‘실재의 변형’으로 보았다. 사진은 세계를 찍는 이의 관념에 맞게 세계를 변형시켜 제시한다. “글자를 모르는 자가 아니라 사진을 못 읽는 자가 미래의 문맹이 될 것”이라는 베냐민의 언급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실재의 자국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 사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한다. 이미 루돌프 아른하임은 “물리적 대상들은 그들의 이미지를 빛의 광학적, 화학적 반응을 통해 스스로 자국으로 남긴다”고 말한 바 있다. 엄밀히 말하면 사진은 도상기호가 아니다. 사진기는 현실을 재현할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반사광과 감광물질 사이의 광학적, 화학적 인과관계뿐이다.

이는 특히 포토그램에서 잘 나타난다. 탈보트는 피사체를 인화지 위에 올려놓고 바로 현상하는 ‘포토제닉 드로잉’을 선보였다. 만 레이 같은 예술가도 비슷한 작업을 남겼는데, 그는 여기에 ‘레이요그래피’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잘린 크라우스의 말대로 “포토그램은 모든 사진에 적용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거나 명확하게 한다. 모든 사진은 빛의 반사에 의해 감광면 위로 이동된 물리적 자국의 결과다.”

   


로버트 카파,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 1936.

물론 사진은 분명히 사물과 사람을 닮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물리적 효과, 즉 사실적인 모방 개념과 상관없는 빛 자체의 물질효과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무엇보다도 그 본성상 지표기호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사진은 실재의 거울, 실재의 변형을 거쳐 마침내 ‘실재의 자국’이 되었다. 이렇게 20세기 후반에 사진 이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 ‘카메라 루시다’다.

 

스투디움과 푼크툼

우리는 사진의 의미를 독해할 수가 있다. 가령 흑인 장교가 프랑스의 삼색기에 경례를 하는 사진이 있다고 하자. 거기서 우리는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즉 ‘조국 프랑스는 피부 색에 상관없이 누구나 프랑스군의 장교로 받아들인다. 삼색기는 우리 모두의 조국이며, 그 아래서 피부색이 다른 우리 모두는 하나의 국민이다.’ 이때 그 사진은 프랑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시각적 표현이 된다.

만 레이, 레이요그래피 ‘키스’, 1935.

이렇게 사진을 읽을 때 관습적으로 동원되는 독해 코드를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부른다. 스투디움에 대해 무지할 때 우리는 사실상 문맹자가 되어 사진 속 이미지를 그대로 세계의 거울로 생각하는 주술적 의식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사진의 의미를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투디움을 이해해야 한다. 이로써 사진은 상징기호가 된다. 하지만 사진의 본질이 과연 그런 일반적인 해석의 틀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어떤 사진을 볼 때, 그 모든 의미의 해석에 앞서 이른바 ‘필이 꽂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전선의 병사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포착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을 생각해보라. 이런 강렬한 체험을 일으키는 것은 그 사진의 의미를 읽게 해주는 ‘일반적’ 해석의 틀이 아니라 그 사진의 ‘개별적’ 존재가 찌르는 고유한 효과다. 이는 곧 사진이 우리 신체에 남긴 ‘자국’이라 할 수 있다. 이 촉각적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부른다. 사진의 진정한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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