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水巖 > 문제는 99% 부모에게 있다
현명한 부모들이 꼭 알아야 할 대화법
신의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구판절판


아이가 왜 그렇게 심한 반항아가 되어 버렸을까?
가장 큰 원인은 끊임없이 엄마가 무서운 표정으로 '하라', '하지마라'하고 말하면서 아이의 자율성을 해치고 간섭한데 있다. 사소한 일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엄마에게 맞추느라 지친 아이는, 자신의 자유 의지를 '반항'이라는 모습으로 내 보였던 것이다.
아이들ㅃ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주체적으로 무언가 선택하는 대신 그저 끌려가야만 할 때 반항적이 된다. 자율성을 침해당하는 것만큼 사람에게 무력감과 좌절감을 갖게하는 일이 없다. 비록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슷로 어떤 선택을 한다는것이 불가능해 보일지 몰라도, 선택권을 박탈당한 아이들의 좌절감은 생각보다 크다. -59~60쪽

특히 만 두 살쯤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극도로 강해지기 때문에 부모가 잠시 눈을 뗀 사이 순식간에 위험에 처하곤 한다. 그런데 이때 혼내는 말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반항적이 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
만약 부모가 " 야! 하지마!" 하고 강하게 혼을 냈다고 하자. 그다음부터는 아이를 제재하가 위해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엄마 말을 들어서 안전해졌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자유 의지가 침해당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자유 의지를 발휘하려 들것이고, 따라서 같은 상항이 또 벌어지게된다.그렇게 되면 고함을 쳤던 부모는 매를 들어야 하고 다섯 대로 아이를 다스렸던 부모는 열대 스무대를 때려야 하는 상항에 처한다.-60쪽

1. 아이 감정에 둔감한 부모
내가 가장 심각한 부모 유형으로 꼽는 것이 바로 아이의 감정에 둔감한 부모다. 아이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크게 화를 내고 나서는 아이가 놀라서 떨고 있는 걸 보지 못하고 자기의 불쾌한 기분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가 이에 속한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표정이 거의 없다. 눈도 장 맞추지 못하고 엄마에 대한 태도에 기복이 심하다.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사회성이 떨어지는건 물론이며 더 자라면 심한 공격성을 보이기도 한다.-66~67쪽

2. 잔소리를 참기 어려워 하는 부모
그래서 잔소리 많은 엄마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진다. 엄마가 잔소리의 형태로 사사건건 자율성을 침해했기 ‹š문에 늘 자기가 하는 일에 확신이 없고 '틀리면 어떡하지?' , '안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안되도 할 수 없지.' 하는 대범함을 갖지 못해서 잘못하다가는 엄마보다도 더 걱정거리가 많은 아이가 되어 버린다.
-70쪽

3. 말로 표현을 잘 못하는 부모
한마디로 말하면 폭력적인 부모다.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안 드는 행동을 했을 때 말로 차근차근 타이르는 대신 손부터 올라가거나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들, 흔히 '불같은 성질', '욱하는 성미'를 가진 엄마들, 가부장적인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집안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아빠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바로 학교 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자신이 부모에게 당한 것만큼 주변에 있는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는것이다.-71쪽

4. 자신의 말을 어기는것을 못 견뎌 하는 부모
시댁 어른들에게 꼼짝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아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엄마, 직장 상사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아빠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자신보다 높은 권위에 납작 엎드리는 ㅁㅁ만큼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복종해 주기를 바란다. ㅡ 중략 ㅡ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냉소적이 되거나 극도로 반항적이 되기 쉽다. 앞서 보았듯이 이런 부모들은 자기가 어떤 경우에 아이를 못 받아들이는지를 분석해서 자신의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72~73쪽

5. 자식에게 하소연을 일삼는 부모
" 안 그래도 힘든데 너까지 왜 이러니?"
" 엄마, 아ㅃ빠가 너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
ㅡ 중략 ㅡ
자식에게 하소연 하는 부모들은 자신이 겪는 아픔을 아이를 위해 이겨내기보다는 아이를 그 고통을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일찌감치 애 어른이 된다.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 매 맞는 아내의 아들 딸들 중에 이런 아이가 많다.
-7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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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27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부모가 되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되는걸까요? 끊임없이 간섭하지 않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또또유스또 2006-06-28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목조목 저를 두고 하는 말...
부끄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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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알립니다] 동화 <시간을 갖고 노는 아이>에 서평써주실 분을 찾습니다~

안녕하세요 ^^ (오늘 무척 자주 뵙습니다 ^^:;;;)



브라질의 국민작가 지라우두 아우베스 핀투가 간결하고 재미있는 그림에 의미 있는 이야기를 담아낸 어린이 철학 동화이다. 끝없는 호기심과 넘치는 힘으로 이 세상이 비좁은 아이,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에 모두를 사랑할 줄 아는 아이, 주어진 시간을 넉넉하게 쓰면서 행복해하는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은 어떻게 보살피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어린 시절에 누려야 할 기본적이고 소중한 것들과 무엇이 내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지, 그렇게 자란 아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주인공 아이의 모습에서 반추해 보는 기회를 갖도록 한다.

이 책에는 더 많이 아는 데 관심 갖기보다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힘을 사랑하기보다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지혜를 담겨 있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자녀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길 바라는 모든 부모를 위한 책이다.

 

어린이를 위한 책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서평 올려주실 분을 찾습니다. 댓글을 통해 29일 목요일 오전 11시까지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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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알립니다] 어린이 흑설공주 이야기에 서평 써주실 분을 찾습니다

안녕하세요, 새로 출간된 책 <어린이를 위한 흑설공주 이야기>에 서평 써주실 분을 찾습니다.



그림책, 동화, 완역본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전 세계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명작과 전래 동화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가득하다. '여자는 순종적이고 착해야 한다', '여자가 똑똑하면 피곤하다', '계모는 악하다' 등 고정관념으로 가득 차 있는 것.

세상의 모든 차별과 편견을 깨뜨리는 동화책. 노경실, 양연주 등 여섯 명의 대표 동화 작가들은 이 책에서 온갖 편견을 단순히 깨부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남성에게 의존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져 온 공주, 누이, 아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풀어낸다.

사회적 편견에 의해 성격 지어졌던 여자들이 자신들만의 가치를 깨닫고, 지금까지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해 왔던 제도로부터의 탈출을 감행,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여자들끼리 손잡아 협력하면 한층 더 지혜로워지고, 남자와 여자는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특별한 동화책이다.
 
 
 
6월 28일 수요일 오전 11시까지 댓글을 통해 신청하여 주시면 됩니다. 서평은 책을 받으신 후 10 일 이내에 올려주세요.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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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0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인돌에서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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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알립니다] 청소년으로 새롭게 쓴 <사회계약론>에 서평 써주실 분을 찾습니다

안녕하세요 ^^

아이세움에서 출간한 새 책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에 서평을 써주실 분을 찾습니다. 루소가 쓴 <사회계약론>을 청소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책입니다. 언뜻 어렵게만 생각되는 <사회계약론>이지만 이 책이라면 안심하고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초등고학년~중학생 자녀가 있으신 분이나, 또래 아이들을 접할 기회가 많은 분이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29일 목요일 오전 10시까지 댓글을 통해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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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2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받은 후 15일 이내에 서평 올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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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넷 > [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열정과 이해관계]

[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열정과 이해관계]

희로애락 삼킨 차가운 ‘경제적 인간’
외향 인성 근대화 거치며 내성적 인간으로 … 물질 소유의 욕망 다른 모든 정념 희생

베르니니의 ‘다비드’ (1623~24)

한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몸부림치며 울던데요?” 일본에 갔다가 들은 얘기다. 가족이 죽었는데 땅을 치며 곡을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럼 “일본 사람들은 가족이 죽어도 울지 않느냐?”고 물었다. 일본인들도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슬퍼하기는 해도, 한국 사람들처럼 격렬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고 한다. 문화가 다르면 감정의 구조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살던 기숙사 옆에 큰 병원이 있었는데, 종종 거기서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사망한 환자의 가족이 내지르는 절규다. 그러던 어느 날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땅을 뒹굴며 울부짖는 이들이 대부분 검은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에 격렬한 슬픔을 나타내는 이들은 라틴계나 동양계뿐이고, 금발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요란하게 우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냉정과 열정

한국의 길거리에서 이따금 목격하는 게 있다. 다 자란 성인들이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멱살을 잡는 장면이다. 특히 도로에서 접촉사고가 나면, 두 운전자가 벌컥 문을 열고 튀어나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한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다르게 행동한다. 사고가 나면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나와 “구텐 탁!”이라고 인사를 한 뒤 경찰관이 올 때까지 도란도란 얘기하며 기다린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동서양의 차이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동양에도 일본처럼 비교적 냉정한 문화가 있는가 하면, 서구에도 라틴계처럼 비교적 뜨거운 문화가 있는 것이다. 유학 시절, 주세페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친구랑 길을 걷는데, 갑자기 베를린공대의 못생긴 건물을 보더니 두 팔을 벌리며 외치기를 “오, 수학과 건물이여. 그대를 사랑하노라” 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구조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일본의 경우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 혹은 자본주의화에 성공한 나라다. 반면 서구의 라틴계 나라들은 문화적 보수성 때문인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근대화에 늦은 축에 속한다. 이것으로 보아 감정을 자제하는 문화는 ‘근대화’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앨버트 허시먼의 ‘열정과 이해관계’는 중세의 열정이 근대의 냉정으로 변하는 과정을 다룬다. 중세인들은 감정이 풍부했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표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외향적 인성이 근대화를 거치면서 어느새 제 감정을 억누를 줄 아는 내성적 인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허시먼은 세 철학자의 텍스트를 재료로 하여, 서구인의 내면에서 벌어진 이 변화의 궤적을 추적한다.

   


이성으로 정념을 정복하라

폰 스테판 로흐너의 ‘성 빌립보를 조롱한 사람’(1450~51·왼쪽). 외르크 브로이의 ‘십자가를 진 예수를 조롱한 구경꾼들’(1501년경).

데카르트의 과제는 감정에 치우친 사람들을 이성적 존재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격정에 휘둘려 합리적 판단을 그르치지 않는 존재. 이런 존재가 되려면 이성의 힘으로 희로애락의 정념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사람들이 격정에 휘둘리는 것은 정념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 따라서 정념의 메커니즘을 인식하기만 하면 정념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정복하기 전에 지도부터 만든 것처럼, 정념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정복하려면 먼저 정념의 지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정념론’에서 데카르트는 인간이 가진 모든 정념을 일일이 나열한 뒤, 그것들을 비슷한 것끼리 묶어 체계적으로 분류한다. 아울러 육체에서 발생한 정념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지, 당시의 해부학적 지식에 기초한 생리학적 분석을 내놓는다. 가령 사랑이라는 정념에 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오성이 자기 앞에 사랑의 대상을 그릴 때, 이 사고가 일으키는 인상은 동물 정기들을 여섯 번째 부분의 신경을 통해 창자와 위의 둘레에 있는 근육들로 이끈다. (생략) 그 정기들은 사랑스런 대상에 대한 첫 생각이 거기에서 일으킨 인상을 강화하면서 정신으로 하여금 이 생각 위에 멈추도록 강요한다. 이로써 사랑이라는 정념이 성립한다.”

이성으로 정념을 극복하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철학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데카르트 철학으로 무장한 고전주의 비평가들은 감정을 즉자적으로 표출하는 바로크 예술을 싫어했다. 가령 이탈리아의 조각가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당시 고전주의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지는 다비드의 찡그린 얼굴에 격정이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념으로 정념을 다스리라

하지만 데카르트의 말대로 정말 이성만으로 야생마 같은 정념의 힘을 억누를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 행위의 후과를 몰라서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범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아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어디 범죄자가 범죄가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서 범죄를 저지르는가?

똑같은 얘기를 데카르트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정념의 메커니즘을 아는 것만으로 과연 정념의 광포한 힘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격정이 왜 일어나며, 그것을 표출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뻔히 알면서도 격정에 휘말리곤 한다. 따라서 ‘이성으로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처럼 ‘이성으로 정념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견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사뭇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정념은 그것과 반대되는 정념, 그것보다 더 강한 정념에 의하지 않고서는 억제될 수도, 제거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이성은 무력하기 짝이 없어 광포한 정념의 힘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정념은 오직 그보다 더 강한 다른 정념으로써만 억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차분하면서도 강한 정념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에게 욕을 하는 민중(1480년경·오른쪽).

데이비드 흄은 경험주의 철학자답게 경험에서 출발한다. 현실의 여러 사례들을 관찰해보니 이성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일 뿐이며,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외에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흔히 ‘이성의 힘으로 정념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경우에도, 잘 살펴보면 실은 이성이 아니라 하나의 정념을, 또 다른 정념을 가지고 극복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는 말은 ‘의식은 무의식의 노예’라는 프로이트의 명제를 연상시킨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가 ‘정신’ 혹은 ‘이성’이라 부르는 의식은 무의식의 명령에 따라 욕망을 실현하는 방도를 찾는 시종의 구실을 할 뿐이다. 때문에 이성이 감히 정념을 정복할 수는 없고, 정념을 극복하려면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다른 정념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흄은 ‘격렬한’ 정념과 ‘강한’ 정념을 구별한다. 대개 격렬한 정념은 냄비와 같아서 순간적으로는 달아올라도 열기가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의 행위를 그르치는 정념은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한다. 반면 어떤 정념은 온돌처럼 차분하면서도 오랫동안 지속된다. 정념을 극복하는 흄의 전략은 이 ‘격렬하나 약한 정념’을 ‘차분하나 강한 정념’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탄생

그렇다면 문제는 ‘차분하고 강한 정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격정을 억누르게 해주는 이 강력한 정념. 앨버트 허시먼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이해관계(interest)’, 즉 무한한 물질적 소유의 욕망이라고 한다. 이해관계는 격렬하지는 않으나 어떤 것보다 강하여, 다른 모든 격정을 굴복시킬 수 있다. 이렇게 ‘이해관계’로 모든 격정을 억누르는 존재, 그것이 바로 근대인이라고 한다.

근대인은 그 모든 정념의 풍부함을 단 하나의 정념, 즉 이해관계에 종속시킨다. 이성이란 이 물질적 욕망의 실현에 필요한 노하우를 제공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이해관계’가 근대인을 움직이는 동력이라면, ‘이성’은 이 욕망의 전차를 조종하는 핸들이다. 이렇게 ‘이해관계’라는 단 하나의 정념에 차가운 계산능력을 가진 근대인이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이들은 이미 ‘경제적 인간’이 되었으나 거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고객의 요구가 도를 넘어섰다고 느끼면, 한국의 상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더러워서 안 팔아.”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고객이 항의하면 무조건 “스미마셍”을 연발하며, 절대로 그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순간의 불쾌함을 참고 이익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더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가깝다.

   


정념의 부활

캥탱 마시스의 ‘화폐교환사와 그의 부인’(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근대인의 무표정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언젠가 어느 체스 챔피언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세계 챔피언이 되었어도 그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상대가 두는 수에 제 감정의 동요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극도의 냉정을 유지하는 버릇 때문에 정작 기뻐해야 할 때조차 기쁨을 표출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챔피언의 얘기는 이해관계라는 단 하나의 욕망을 위해 다른 모든 정념의 풍부함을 희생시킨 근대인의 상징이 아닐까?

사실 한국인들은 근대화의 과정이 짧아서 그런지 아직도 쉽게 정념에 휘둘리는 편이다. 격정에 휘둘려 판단을 그르칠 때, 대개의 경우 불필요한 폭력이나 이해관계의 손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념이 풍부한 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민의 그 격렬한 열정이 없었다면, 제 자신의 이해를 희생시켜서라도 표출해야 했던 그 고귀한 분노가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냉정한 태도로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맘껏 기뻐하고, 한껏 슬퍼하고, 무섭게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생명활동의 본질이 아닐까? 기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슬플 때 슬퍼하지 못하며, 분노할 때 분노하지 못하는 것을 어찌 ‘삶’이라 부르겠는가. 이익과 계산만으로 살아가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실은 삶의 대부분을 희생시킨 불행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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