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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나무
호시노 미치오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5월
평점 :
먼저, 생각했던 형식의 책이 아니었다는 점을 밝힌다. 알래스카의 풍광을 기대했던 나는 몇 장의 사진으로만 상상력을 발휘했어야했다. 저자의 담백한 묘사로 상상해보는 정도로 그쳐야했다. 사진이 있는 글로 기대했는데 내가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다른 세상을 여행하는 꿈을 꾸어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글이 주는 마음의 안정감도 좋았다.
이 책은 소박한 문장과 저자의 겸허한 인품이 돋보인다. 저자는 일본인으로 야생동물학을 전공하여 알래스카에서 살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머나먼 다른 곳으로의 동경을 품고 있어 16세에는 무작정 미국여행길에 오르기도 했다. 1978년 알래스카에 도착하여 지금껏 살면서 외경심을 품게 되는 대자연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한 사람을 어떻게 키워나갔는지, 잔잔한 영상이 그려지는 글이다.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 누구든 자신만의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여행하는 나무>라는 제목을 따온 것 같다. 나무는 성장하고 죽어서도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 이 책을 보는 내내 나는 지금 어디쯤의 여행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구리 우물 안의 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선 광활한 대자연에서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꿈에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도저히 몸으로 느껴지지 못하는 삶이다. 알래스카는 러시아의 재정궁핍으로 1867년 단지 720만달러라는 돈에 팔려간 극북의 땅덩어리다. 알래스카에 가보고 싶은 사람은 그곳의 자연을 보고 싶어서라기보다, 저자에게나 저자가 만나 영혼을 교류한 여러 사람들에게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한 땅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래스카의 풍광들을 볼 수 있는 사진이 극히 적어 아쉬웠지만, 그곳 사람들의 삶이나 인디언들과의 만남 그리고 인디언들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감동을 주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가치관이나 자연에 대한 생각들은 문명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고래를 작살로 죽이는 모습이 잔인한 야만인의 모습이 아닌 것은, 그들이 사냥을 한 후의 기도와 희생의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연을 인간의 마음대로 파괴하는 사람들이 야만인이지, 이들은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에서 얻고 자연에 베풀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은 사람에게 친절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들은 자연이 주는 선물에 겸허하며 언젠가 자신들도 자연에게 바쳐질 것을 순리로 생각하며 산다.
빙하, 툰드라, 오로라, 백야, 북극곰, 고래사냥 등.. 저자의 체험을 따라 슬슬 가다보면 그 야생의 냄새를 맡고 싶어 몸부림이 난다.
목차를 보면 모두 네 장으로 나누어 묶어 각각 새로운여행, 북방을 향한 그리움, 백야, 그리고 여행하는 나무라는 소제목을 달아놓았다. '새로운 여행'편에서는 1993-94년도에 쓴 편지를 실어놓았다. 수신자는 밝혀져있지 않고 겸양체의 어조가 낮고 진지하다. 처음 알래스카에 왔을 당시에 쓴 오래된 일기장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회고식으로 이야기가 풀린다. 낯선 곳에서의 소외감을 남미 적도부근의 여행에서 느낀 점과 함께 떠올리기도 하고 알래스카가 처한 현실, 즉 문명과 자연이라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 현실을 생각하기도 한다.
2장 '북방을 향한 그리움' 부터는 회상을 통해 저자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얻게된 소중한 깨달음을 나긋나긋한 어조로 들려준다.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멋부리지 않아 편안하다. '백야'에서는 상상만으로 펼쳐지는(독자에게는) 알래스카의 풍경들이 대자연의 야생동물들과 함께 그려진다.
'여행하는 나무'에서는 저자의 삶에 대한 통찰이 보인다. 특히 시간에 대한 생각과 시간을 쌓아가는 과정에 대한 생각이 관념으로 그치지 않고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 호감이 간다. 넓디넓은 자연의 품에서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간다는 걸 몸으로 실감하며 산다면 내게 허락된 시간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까. '주어진 순간을 놓쳐가면서까지 과거와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란 저자의 생각이 새삼 다르게 들린다.
인디언은 세 가지만 생각했단다. 첫째는 대지, 둘째는 동물, 그리고 셋째는 사람. 살아남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고. 가장 중요한 건 대지였다고.. '살아남는다' 라는 말을 되뇌어보게 된다.
"... 모든 물질은 결국 화석이 된다. 그러나 화석이라고 해서 생명이 없던 것은 아니다. 바람이 불어올 때 귀를 기울여라. 분명 사라진 옛이야기가 들려올 것이다. 바람이야말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화석이기 때문이다." (253 쪽)
ps ; 오자를 발견했다. '온화한 표정 뒤에 한 시대를 살아온 인간만이 갖출 수 있는 위험이 서려 있었다."(248쪽) ( '위험'이 아니라 '위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