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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1999년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
_ 이토록 평범한 미래, 첫문장
여덟 편 중 두 편 읽었는데 벌써 참 좋다. 작가가 더 담담하고 단단하면서도 넉넉해진 느낌이다. 책날개 띠지 QR코드로 들어가면 김연수라디오로 연결된다. 각 단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직접 들려준다. DJ를 하고팠다는 연수 작가 귀여우심. ^^
아직 다 나온 건 아닌 것 같다.
두 편 모두 내 기억을 부르는 무엇도 있어 그렇게 우리는 시간속에서 서로서로 연결되어 위안받는다. 1999년 나를 떠올려 보았다. 작은아이가 태어난 지 일 년이 지나서도, 잘놀고 잘먹는데, 밤잠을 안 잤다. 만 세 살이 될 때까지 밤마다 포대기에 업고 식탁에 서서 책 읽거나 뜨개질했다.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고속도로 위 자동차 불빛이 아스라히 꺼져가면 아이는 잠이 들었다. 나는 45킬로그램까지 살이 빠졌다.
어느 누구의 삶도 같지 않으면서 비슷한 전환점들이 있다.
김연수 작가는 2018년 세종시 강연에서 시간을 사는 또다른 방식에 대해 나직이 말했다.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과거나 현재에서 보는 미래가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 서서 과거를 바라보는 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미래의 괜찮은 나, 그 눈으로 지금을 본다면 지금의 나는 훨씬 허용 가능한 인간이고 지금을 사는 마음 또한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주 잊어먹고 지냈다. 우리, 있을 것 같다고 생각지도 않은 미래의 구체적 평범한 하루에서 특별했던 과거의 첫날을 향해 걸어가는 하루하루, 그 관점으로 사는 삶은 세 번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에겐 그 방식이 유효하진 않을 것도 같고. “이토록 평범한 하루”는 세계에 지지 않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지혜와 긍정의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 “난주의 바다 앞에서”도 비슷한 위안과 용기를 불러준다. 세컨드 윈드! 폭풍우 치는 난바다 앞에서 지지 않는 사람들. 슬프고도 강하고 따뜻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대 쪽으로.”
이 글을 읽고 추자도에 가보고 싶어졌다. 당장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일기가 조금만 나빠 보여도 배가 뜨지 않는다고 한다. 추자도는 정말 바람이 거센 곳이구나. 아기 황경한과 눈물의 십자가 길! 그곳은 하추자도에 있다.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다 보려면 섬에서 일박 하는 걸로 계획하는 게 좋겠다. 제주 대정읍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는 여러해 전에 가봤다. 빗방울 떨어지는 어스름 저녁이었고 나 말고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 어미이자 아내, 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한 인간의 삶을 떠올려보며 든 그때의 먹먹함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어둑신 내려앉는 스산한 그곳에서 나약하나 강인한 한 인간상을 떠올렸다. 김연수 작가는 이런 걸 새삼스레 말하지 않는다. 힘을 빼고 한 걸음 물러나 순진한 신념이 몰고온 생의 난파를 바라보고 “새 바람”을 건넬 뿐.
책을 에코백에 넣어 마산으로 잠시 나왔다. 세컨드 윈드는커녕 소소한 바람이나 쐬러 갈 일이었다. 동행자가 위에 인용한 첫문장을 떠올려주는 말로 입을 열었다. 워낙 아무말이나 잘 안 하는 사람이라 약간 긴장되었다. 한 고비였던 십 년 전에도 이제 끝났을 거라고 돌파구가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고 했다. 나는 아홉수라는 말이 있듯 십 년 단위로 생을 정비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 같다고, 위기를 기회로 삼고 또 나아가보자고 뭐 그런 답답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너무 부셔서인지 좀 울컥해져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가을 햇살이 따가워 맞춤이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구산마을에 당도했다. 평범한 하루가 오후 세 시 나른한 포구 마을에도 흐르고 있었다. 겉으론 모두 고요하다. 오늘은 고요한 것만 보리라. 할머니 세 분이 홍합을 까서 판다. 한 봉지 샀다. 홍합 손질해 보면 알지만, 이렇게 많이 만 원이면 거저다. 미역국 끓여야지. 캠핑카들이 제법 보인다. 양말 널어놓고 낮잠을 즐기고 있다. 조금 걷고 차로 한 바퀴 돌아 나와 구복마을을 통과했다. 저도로 들어가는 연육교, 시뻘건 다리, 콰이강의 다리란다. (그옛날 대학교정에 있던 일명 콰이강의 다리는 운치가 있었다) 동행자가 사진 담으러 간 동안 그 아래 카페 콰이,에서 그림자 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