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아이들의 교육에 관하여

그들의 교훈을 배울 게 아니라 그들의 정신에 젖어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원한다면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과감하게 잊어버리되,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알게 해야 합니다. 진리와 이성은 누구에게나 공통이요, 처음 말한 사람의 소유도, 나중에 말한 사람의 소유도 아닙니다. 내가 말해서 진리가 아닌 것처럼 플라톤이 말해서 진리인 것도 아닙니다. 그와 나는 똑같이 그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벌은 이 꽃 저 꽃에서 꿀을 따 오지만, 그것으로 순전히 제 것인 꿀을 만듭니다. 그 꿀은 이제 백리향도 꽃박하도 아니죠. 그와 마찬가지로 학생은 다른 이에게서 빌려온 조각들을 변형시키고 섞어서 완전히 자기 것인 작품, 즉 자신의 판단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르침, 숙제, 공부의 목표는 오직 자신의 판단력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 P282

학생이 도움받은 것들은 모두 숨기고, 그것들로 자기가 만들어 낸 것만 내보이게 하십시오. 표절자나 차용자들은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라, 짜 맞춘 솜씨 또는 자기의 구매력을 자랑합니다. 한 법관이 받는 보수(報酬)는 보이지 않고, 그들이 얻은 인맥과 자식들에게 물려줄 명예는 보입니다. 아무도 자기 수입은 공개하지 않지만, 그것으로 자기가 사들여 갖게 된 것은 누구나 내보입니다.

공부의 성과, 그것은 우리가 좀 더 나아지고 좀 더 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 P282

무엇을 확실하게 알면, 우리는 그 주인을 쳐다보거나 책으로 눈을돌리지 않고도 알아서 처리합니다. 순전히 책에만 의지한 능력이라니, 가련한 능력이로다! 그런 것은 장식으로나 쓰이지, 토대로 쓰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굳셈과 믿음과성실성이 진정한 철학이요, 다른 것을 겨냥하는 나머지 모든 학문은 겉치레에 불과하니까요. - P283

아이의 양심과 미덕이 그가 하는 말에서 빛나게 하고 오직 이성만을 지침으로 삼게 하십시오. 자신의 생각에서 잘못을 발견했을 때, 자기만 알아봤다 할지라도 그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판단력과 진실됨의 증표요, 그것이 아이가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해야 합니다. 고집을 피우며 우기는 것은 저속한 정신에서 두드러지는 평범한 자질이라는 것, 열띠게 주장하는 중에도 자기를 돌아보고, 스스로 고치고, 옳지 않은 쪽을 버리는 것이 보기 드문, 강력하고 철학적인 자질임을 깨우치게 하십시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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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보부아르 ‘패밀리’ (1933-1939)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192124


아렌트의 ‘부족’이 있다면 보부아르의 ‘패밀리’

걷기와 여행, 등반을 즐긴 걸로 보이는 보부아르는 1930년대 말을 인생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절로 회고한다. 전쟁은 다가오고 다자간 연애관계는 덫에 걸린 기분이 들게 했다. 올가 자매, 자크로랑 보스트, 비앙카 그리고 모두와 연관하여 관계를 나눈 사르트르까지, 사랑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성을 고민했다. 우연에 기반하여 시작하나 필연적인 그 관계는 “자아와 타자의 대립”을 주제로 철학적 사유를 하고 타자들의 의식이라는 문제를 전개하고 싶었던 열아홉 살 보부아르 자신을 소환해 끊임없이 혼란에 밀어넣는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 질문을 자신의 삶에 끌어들인다.

“올가가 멀찍이 서서 낯선 눈길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나는 우상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는 대상으로 변했다.” (186)

“ 타인의 경험은 자기 자신의 경험처럼 실재하는가?” (202)


1938년, 카페 드 플로르에 앉아 집중적으로 원고를 봐준 보부아르에 대한 헌사를 달고 세상에 나온 <구토>와 연이어 나온 단편 <벽>으로 문단의 기대감을 받은 사르트르. 그와는 달리 보부아르의 <정신이 우선시되는 때> 원고는 출판사로부터 몇 차례 반려되고 문제점을 지적받는다. 보부아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10년 후 <제2의 성>을 쓴다.

생 제르맹 거리의 그 유명한 카페 드 플로르 2층에서 하루 8시간 집필에 몰두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보부아르가 조용히 집필할 수 있는 방은 말년에나 마련되었다고. 미스트랄 호텔과 카페에서 집필하고 토론하고 만남을 가진 보부아르. 조롱과 비난에도 의연히, 고심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젊고 모순적이고 지적으로 유능한…

“사랑은 영원한 갱신 속에서 부단히 창조되어야 하는 것”
- 1927년

1936년 여름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여행했다. 보부아르는 둘만 있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축하할 만한 소식도 있었다. 드디어 파리로 발령이 난 것이다! 보부아르는 휴가 이후 파리 몰리에르 고등학교로 옮겨 갔다. 하지만 9월에 파리로 돌아와보니 정치를 외면하기가 힘들어졌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에스파냐 내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친구 페르난도 제라시의 조국이어서 더 마음이 쓰였고, 에스파냐 여행 이후로 그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민전선 출신 총리 레옹 블룸(Leon Blum)이 에스파냐 내전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보부아르는 분개했다. - P187

타자들의 의식이라는 문제가 계속 되돌아왔다. 하루는 신문에서 택시 요금을 낼 돈이 없어서 창피했던 나머지 택시 운전사를 살해한 남자의 사연을 읽었다. 어떻게 사람이 수치심 때문에 그렇게까지 흉악해질 수 있을까? 왜 사람들은 때로-자기 자신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정신에 나타나려는 것처럼 - 타인을 위해 사는가? - P190

"당신은 무너져 가는 세계를 묘사하는 걸로 만족하고 독자를 새로운 질서의 문턱에 내버려 둘 뿐, 그 질서의 장점이 어떤 것일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보부아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10년 후 그 ‘새로운 질서‘의 선언문<제2의 성》을 쓰게 될 터였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파리 문단의 찬사를 한몸에 받는 동안 보부아르는 점점 더 아버지의 앙심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책으로 나오지도 못할 글을 쓴다고 비웃었고 "버러지 같은 창녀"보다 더 나은 삶을 살 리 없다고 했다.
직장에서 받는 대접은 달랐다. 파리 16구에 위치한 몰리에르 여자고등학교의 제자들은 보부아르를 매우 인상 깊은 교사로 기억했다. 보부아르는 실크 블라우스와 화장으로 세련되게 맵시를 냈고 늘 수업을 노트도 없이 매끄럽게 진행했다. 학생들에게는 데카르트, 후설, 베르그송을 가르쳤다. 프로이트는 주로 반박을 하기 위해 다루었고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칸트를 선호했다. - P191

1939년 여름에 보부아르는 쥐라에서 등반을 하고 제네바를 방문했으며 프로방스에서 아주 먼 거리를 도보로 주파했다. 7월에 프랑스정부는 출산 장려 차원에서 피임약 판매를 금지하고 자녀를 키우는 전업주부에게 수당을 주는 ‘가족법‘을 통과시켰다. 1804년에 제정된 ‘나폴레옹법전‘은 남성에게 여성에 대한 권위를ㅡ 남편으로서나 아버지로서 - 부여했다. 보부아르는 1960년대까지도 통용되었던 이 민법의 해체를 주도한 여성 중 한 명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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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자기만의 방 (1929-1935)



아렌트처럼 보부아르도 경험을 쓰고자 했다. 경험에 뿌리 둔 사유를 중요시했다. 하지만 아직 보부아르는 정치적 현안에는 눈을 두지 않았다. 두 살 먼저 태어난 아렌트가 겪고 있었던 이 시기의 삶이 떠오를 수밖에… 동시대에 멀지 않은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산 사람들. 어두운 시대를 각자의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나간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아래 문장, 의외였다.

#
여성의 능력을 향한 아버지의 부정적 시선은 시몬이 탐독했던 일부 철학자들의 성과도 비슷한 데가 있다. 시몬이 학생 시절 일기에서 곧잘 인용한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여성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여성은 모든 면에서 첫째가는 성보다 열등한 두 번째 성이며 단지 인간이라는 종의 존속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그는 여성도 재능이 있을 수 있으나 결코 천재는 될 수 없다고 보았다. - 148쪽

학교에서 보부아르는 거침없이 자기 생각대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보부아르는 노동, 자본, 정의를 가르쳤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수군거렸다. 정신은 여러 면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성생활은 관습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동료 교사가 성적으로 접근해 왔을 때도 그 구애자가 남자가 아니라 투르믈랭 ‘부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마르세유에는 파리에서처럼 만날 사람이 많지 않았으므로 근무일에도 퇴근 후에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원고는 아무것도 출간되지 않았지만 어떤 글을 쓰든 ‘타자의 신기루‘, 그리고 정직, 자유, 사랑의 관계라는 늘 똑같은 주제로 돌아왔다. 보부아르는 "이 특수한 매혹이 진부한 연애와 혼동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주인공을 둘 다 여성으로 설정하여 그들의 관계에서 성적 함의를 제거하려 했다. - P162

‘자기 기만‘은 20세기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예로 든 ‘웨이터‘는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이 무엇이지 잘 보여준다. 그런데 왜 보부아르는 이 개념을 ‘우리‘가 발견했다고 말하는가? 1930년대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서로에게 무엇을 이바지했는지 명명백백하게 가리기란 매우 어렵다.
엘렌의 남편 리오넬 드 룰레(Lionel de Roulet)는 두 사람의 관계를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들은 끊임없는 대화, 모든 것을 공유하는 방식을 통하여 서로를 너무 밀접하게 비춘 나머지 둘을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게 됐다."

이 단계에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정치적 인식에 눈떴다. 비록 원숙기의 보부아르는 이때의 그들을 돌아보며 "정신적 자부심이 넘쳤고" "정치적으로는 장님이었다."고 했지만 말이다. 오드리와 다른 친구들을 통해 트로츠키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만났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자신들의 혁명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들의 투쟁은 철학적이었다. 그들은 이성적이고 육체적인 자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자유를 이해하기 원했고 사르트르는 신체를ㅡ신체의 욕구와 습관을 -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했다. - P165

1935년 3월에 히틀러는 징병제를 재도입하여 군인의 수를 10만여명에서 55만 5천명으로 대폭 늘렸다. 프랑스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공포에 빠졌다. 그래서 소련과 협약을 맺었고 스탈린은 프랑스의 국방정책에 동의했다. 소련과 프랑스가 손을 잡았으니 평화는 굳건할 성싶었다. 독일이 승리할 가능성도 없는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어리석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보부아르는 자신이 "신문도 대강읽는 둥 마는 둥 했다."고 회상했다. 그때만 해도 히틀러가 제기하는 문제에는 회피가 최선의 접근법이라고 생각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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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4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지금책 나무님도 이 책 보시던데....
저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보겠다고 사놓고 쌓아놓기만 하고 있어요. 한나 아렌트 평전 나온것도 보고싶다 하면서 언제 보지 하고요. ^^

프레이야 2022-10-04 22:23   좋아요 2 | URL
작품 먼저 읽는 것도 좋겠지만 평전 먼저 읽는 것도 도움 될 것 같아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사람과 작품의 내외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그렇고 주변인들과 에피소드 자체로도 한 사람의 살아온 길이 흥미롭네요. ^^ 쇼펜하우어의 문장 위에 첨가했어요. 놀라서 ㅎㅎ
 

6장_ 자기만의 방(1929-1935)

이 평전은 많은 부분 보부아르의 회고록과 일기를 참고해서 쓰고 있다. 회고록에 기술하지 않았거나 완곡하게 쓴 부분은 일기장에서 자세히 언급된 경우가 많았다. 안에서 보는 나와 밖에서 보는 나, 둘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했던 게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인다. 일기장도 백 퍼센트 순수한 나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세간의 추측과 오해가 오히려 당연할 듯.

#
어리석은 사람들을 봐주지 않기로 평생 정평이 나 있었던 보부아르가 교사로 일하며 이 시기에 쓴 원고는 아무것도 출간되지 않았지만 어떤 글을 쓰든 “타자의 신기루” 그리고 정직 자유 사랑의 관계라는 늘 똑같은 주제로 돌아왔다. 그들은 열렬히 대화했고 눈물과 결핍, 오해와 이해로 점철했으며 감정에서든 글에서든 서로 날카로운 조언과 비평을 반겼다. 사르트르가 편지에 썼듯 “일심동체”적 믿음이 있었다.

2년의 계약을 깨고, 헤어져 있는 괴로움을 극복하고자, 사르트르가 결혼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보부아르는 당혹스러웠고 거절했다. 이건 보부아르를 위해서였는데 영리한 그녀는 계산을 했다. 부르조아 제도에 대한 생각을 바꾼 유일한 이유는 출신문제. 아이를 남는 것은 “아무 목적도 없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세계 인구의 증식으로 보였다.” 계약 기간을 늘리고 자주 만나는 걸로 했다. 이 시기, 서로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두 사람이 받아들이는 생의 의미는 좀 달랐다. 마르세유에서의 이 때를 보부아르는 괜찮아 하면서도 가장 불행해 했다. 사르트르는 우울이 찾아왔다.

보부아르는 이미 알고 있던, 후설의 현상학에 감명받은 사르트르는 철학을 일상으로 돌려놓고 경험을 쓰는 데에 뿌리가 되게 하고 싶었다. 이는 “생생한 현실”을 쓰고 싶었던 보부아르의 생각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사르트르는 경험을 살아 내는 대신 글로 쓰려 했고 그 점이 Beauvoir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에 대한,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한” 충실성에 거슬렸다. 사르트르는 세계를 관찰과 반응을 너머 언어로 정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보부아르는 그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런던을 고작 12일 여행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게 보부아르 생각이었다.

보부아르는 많은 문학작품을 읽었고 버지니아 울프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 사르트르가 우연성에 대한 철학적 집필로 고심할 때 소설로 써보길 권했고 탐정소설을 좋아한 사르트르는 자신을 앙투안 로캉탱에 투영하여, 르아브르를 배경으로, 철학적 질문을 담은 소설을 쓸 수 있었다.


#

“ 보부아르의 비판은 상세하고 깐깐했지만 그게 바로 사르트르가 ‘변함 없이’ 그녀의 조언을 수용하는 이유였다. “(172)


시간 나는 대로 여행을 함께 다닌 두 사람. 11월의 르아브르 해변 카페에 이십 대 두 사람이 앉았다. 그 자리에서 절대자를 향한 오래된 갈망과 지적 욕망과 삶의 노력이 속상해 “한바탕 눈물 쏟는” 보부아르를 상상해본다. (아마도 바다는 흐렸을 것이고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잠시 가닿았던 르아브르 해변은 7월이었어도 흐렸다)
다음날에도 보부아르는 심란해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이고… 격론하고 상대에게 자기주장을 직설하면서도 금이 가지 않는 관계 그런 타자와의 관계라면 말년에 최고의 관계였다고 회고하고도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사르트르는 모르겠지만 보부아르는 그가 자기 생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사르트르 사후 보부아르는 ‘작별의 의식’을 쓰고 사르트르 삶의 증인이 된 셈이다. (이 책 표지 참 깔끔하다. 전에 읽다가 접어두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야겠다)

감정적 결핍에는 서로 같은 거리로 더 깊이 다가가지 못한 면도 있지만 완벽하지 않아서 완벽한! (아직은 이십 대) 상대의 기호에 자신을 맞출 필요도 예쁘게 보일 필요성도 느낄 이유 따위 없이,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고 오롯이 자기 자신 되기.

#
1927년 보부아르의 일기에 벌써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그녀는 자신에게 명령한다. “보부아르 양이 되지 마. 내가 되자. 외부에서 부과하는 목표, 충족해야 하는 사회적 틀에 연연하지마. 나에게 작용할 것이 작용하면 그걸로 다 된거야. “ -140쪽


르아브르 해변에서의 논쟁에 “사르트르는 술과 눈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없다면서 그녀가 형이상학이 아니라 술 때문에 우울해지는 것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술이 장막을 걷어 진실의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172)”

1935년 2월 사르트르가 환각증과 우울증을 인정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철학대로라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니까 광기도 본인이 미쳤다고 믿는 것밖에 더 되겠느냐고 냉담하게 지적했다. (173)”

막상막하 천생연분.


- 맨아래 사진은 2016년 칠월 초 흐린 르아브르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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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10-04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서의 사르트르는 왠지 철학가가 아닌 진짜 한 남자인 남편으로 비춰지는군요?
일기라서 더 친근하게 읽혀서일까요?^^

프레이야 2022-10-04 22:05   좋아요 2 | URL
여러 가지로 조명하는 것 같은데 재미난 일화가 많네요. 한 사람의 구석구석을 알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겠죠. 모순되고 격렬하고 지적이면서 열망도 많은 두 사람. 똑똑한 인간들 같으니라구. 시몬이 일기장에다가 키작은 그남자라고 ㅎㅎ

2022-10-04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4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10-05 0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해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같은 느낌이 듭니다 쉰한해라니... 언젠나 자신이 되려고 했다니 멋지네요


희선

프레이야 2022-10-05 11:38   좋아요 2 | URL
그죠 ^^ 평생을 기약하는 결혼식 올리고 헤어지는 커플에 비하면 평생 서로의 생에 증인이 되어준 관계이니 이러쿵저러쿵 말들은 많아도 결국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순 없는 사람은 없으니.

기억의집 2022-10-05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브아루 찾아보니 1908년 생이네요. 시대를 비교해도 엄청 진보적이었네요. 울프와 교류가 있었을까요? 울프의 작품을 다 읽었다면… 울프와 보브아르의 서로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궁금해집니다…

부산에서 프님 만나 편안한 여행 되서 즐거웠어요. 조만간 부산 페이퍼 올려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여행끝나고 갑작스레 알바 제의가 들어와 금토일 풀 알바 했는데 나이 들어 일하니 너무 힘들어 북플에 들어와 글읽을 수조차 없더라고요. ㅎㅎ 어제부터 피곤이 좀 가시긴 하는데.. 개피곤합니다. 하하. 프님덕에 즐거운 여행 돼서 고마움 한가득입니다. 조만간 트리조명 오면 보낼께요. 아직도 작가님이 발송 안 해 주셨어요 ㅠ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0-05 10:02   좋아요 1 | URL
울프와 교류하진 않았나 봅니다. 그런 말은 아직 나오지 않네요.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하니 좋아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이죠^^

2022-10-05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5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래서 내가 좇은 것은 서양 근대 문명의 최첨단이었다.
‘생산적‘이고 ‘경제적‘인 일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저녁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차려줬다는 카트린마르살의 일침에는 남성중심의 경제학에서 여성의 노동이 어떻게 지워지는지가 담겨있다. 살림을 여성의 몫으로 할당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몫은 무엇인가? ‘살림‘의 반대인 ‘죽임‘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그리고 육식주의는 똑같은 죽임의 메커니즘으로 유지된다. 재고 나누고 옮기고 가두어 생명을 빼앗는다. 생산 과정을 세분화하여 인간을 반복적인 단순 노동을 하는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전락시킨바 바로 그 자본주의는 동물 역시 생명이 아닌 기계로 여긴다.
공장식 축산이란 공장식 노동의 확장판이다. - P34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살림으로 하나 된다. 모두 생존과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비거니즘은 우리의 밥상을 죽임이 아닌 살림의 먹거리로 채우는 것이 시작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중심 사회가 여성의 몫으로 할당하고 폄하했던 살림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죽임의 문명에서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공통의 적을 갖는다. 자크 데리다는 그것을 ‘육식-남근-로고스중심주의carno-phal-logocentrism‘라고 부른다. 육식주의와 남성중심주의는 이성의 언어로 지어진 철옹성 위에서 함께 군림한다. 둘은 동시에 해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채식을 시작했을 때부터 나의 남성성을 의심받았다. 남자가 힘을 쓰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말에는 죽임이야말로 남성의 필연적인 역할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 P35

원래 인간은 홀로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 삐뚤빼뚤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좇는 반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나무가 모여 숲이 되는 것과 같다. 나무는 각자 햇빛을 향해 자라기 때문에 모여있으면 위로 꼿꼿하게 큰다. 살기 위해 그러는 것이지만 결과는 아름답다. 인류를 아름답게 하는 문화 예술 역시 개인이 모여 살기 위해 스스로 반사회적 기질을 다스린 결과다. 첨예한 줄다리기의 산물이다. 권리를 완벽히 보장하는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과업은 인간을 모아 숲을 만드는 것만큼 어렵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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