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현대신서 50
피에르 쌍소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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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하루 단위로 배달되던 뉴스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기에 이르렀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는 세상을 향해 지구는 달려간다. 그러나...

시간은 원래 간다, 흐른다는 개념이 없는 것이거늘... 사람이 그렇게 느낄 뿐이다. 이런 글을 쓰는 피에르 쌍소도 참 재미없는 인물이고, 그런 걸 읽는 나도 참 재미없는 인종이다.

살면 되는 거지, 느리게 산다는 것에 의미까지 부여할 이유는 또 뭔가. 그건, 우리가 너무도 빨리빨리 병에 걸려 살면서 주변을 살필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사소한 지적에 불과할 따름이다.

난 일을 빨리 하기 좋아했다. 뭐든지 마무리되지 않으면 애가 달아서 마무리짓기 위해 골몰했고, 남들이 좋아하는 '빠릿빠릿한' 인간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만만디를 배우고 있다. 빠릿빠릿했던 나에게 만만디는 정말 학습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은 금세 내 핏속에 스며들어 쾌락이 되었다.

악마가 지옥에 가니 그곳이 바로 천국이었다.(이건 예전에 듣던 좀 외설스런 이야기였는데... 지금 딱 어울린다.)

천성이 게을렀던지, 일을 미루고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만화도 보고, 필요한 책이 아닌 눈 가는 대로 읽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너무 분별하며 살아왔다. 세상은 '저절로 그렇게(自然)' 거기 있거늘, 난 바른 생활, 도덕, 시민과 국민과 세계인의 윤리... 이런 것들에 맞춰 살아왔다.

그래서 느리게 사는 죄악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느리게 걷고, 느리고 숨쉬고, 느리게 눈 돌리고, 느리게 눈 거두고, 느리게 마음주고, 느리게 맘 거두는 안단테의 삶을 놓치고 살았던 거다.

느리게 산다는 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법정 스님의 수필집 제목' 산다는 것이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하고 고흐보다는 덜 고독했다던 킬리만자로의 조용필도 이젠 알리라. 우리 삶이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는 것임을... 21세기가 자신을 간절히 원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 업슨 청산(靑山)이요 태(態) 업슨 유수(流水)ㅣ로다
갑 업슨 청풍(靑風)이요, 님자 업슨 명월(明月)이라.
이 중(中)에 병(病) 업슨 이 몸이 분별(分別) 업시 늙으리라.

우계 성혼의 시조를 읊노라면, 소유도 능력도 자연 앞에 분별 없음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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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 이야기
김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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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은 우연의 연속인가.

그의 수필집을 읽다가,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데, 갑자기 라디오에서 텔레만의 트럼펫 협주곡을 들려주었다. 지금까지 존재하던 세계를 내가 인식하고 있지 못했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자리에 그렇게도 견고하게 서 있던 존재. 이런 걸 느낄 때, 세상의 넓음과 독서의 이유를 생각한다.

텔레만을 읽고, 다음 날 바로 들려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다. 세상은 늘 그자리에 서 있건만,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얼마나 작으냐. 내 눈은 얼마나 좁으며, 내 귀는 얼마나 얕으냐. 세상의 이 넓은 음역을 듣지 못하는 나의 무능한 귀로도 세상을 만날 수 있게 책을 벗삼아 주신 님께 감사할 일이다.

김갑수의 음악 이야기를 만나고 싶었는데, 그의 앰프와 스피커에 대한 집착 이야기를 만나면 좀 시들해서 훌훌 넘기고, 그의 짠한 연애담이 나오면, 괜히 같이 짠해지고 했다. 역시 그의 삶보다 그의 음악 이야기가 맛이 난다.

삶에 좌절해보지 않은 자가 누가 있으랴. 저 이보다 못한 나를 늘 불평하고 나보다 못난 사람들에게 오는 행운에 늘 샘내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빌게이츠는 가르쳐준다. 세상은 공평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늘 불공평하다고...

김갑수가 소리를 사랑할 수 있는 걸 부러워했다. 그렇게 깊은 사랑이 있으니 어떤 시련인들 그를 좌절시키랴. 내겐 뭐가 있나. 나는 정말 무얼 사랑하나. 난 책을 사랑한다. 음악도 좀 좋아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좀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도 즐길 줄 안다. 영화를 보면 즐겁고, 시디를 사는 것도 재미있다. 자고나면 초라해지고, 자고나면 잊혀져 버릴 존재일지라도, 늘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살 일이다.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난 깨어있지 못할지라도, 그에게 한 수 배웠다.

삶은 살만하지 않은 거라도, 재미를 느끼며 살 수 있는 거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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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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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을 들은 건,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쇼킹한 제목을 보고서이다. 그러나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사저널 편집국장이란 명함을 보고서 그를 속단했던 것일까. 그가 별로 읽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니, 신성한 척 하고 있으면서도 누구나 갖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 버리는 걸 우리 문화는 싫어하지 않는가. 너무 도발적으로 들렸던 것이다.

책의 서두에,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 값 월부를 갚으려 하니,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하고 쓴 작가를 들어 본 적도 없다. 이거 시간 낭비 아닐까?라며 읽기 시작하고, 기인(奇人)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어보니, 유홍준 다음으로 글을 맛지게 적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벼이 하룻거리로 들고 갔다가는 화장실에서 두고두고 야금야금 열흘 정도를 읽었다. 내가 그에 대해서 편견을, 선입견을 가진 이유를 지금 곰곰히 씹어보면, 그가 쓴 책들의 제목이 너무 도발적이어서가 아니었을까. 한다. 칼의 노래는 소설이니 그렇다 치고.

유홍준의 남도답사일번지를 읽을 때, 돌담사이로 얼굴을 내민 능소화를 들으면서 능소화가 어떤 꽃인지도 모르면서 너무도 반했던 기억이 새롭다.

유홍준이 역사의 틈바구니를 관광전세버스를 타고 옮겨 다니면서 낯선 것들을 재미난 입담으로 읽어준다면, 김훈은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달리면서 익숙한 것들을 낯설지 않게 풀어내는데, 그 눈이 신선하다. 특히 꽃피는 해안선...

향일암에서 본 동백꽃 -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매화 -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 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있다. ...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산수유 -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목련 -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이건 시다. 이런 시를 써 내려면, 적어도 꽃 하나를 품에 안고 몇 년간을 곱씹어 올린 고갱이가 아니면 안된다. 하기야 그가 자전거를 타면서 뭘 했겠는가. 언어와 함께 달리지 않았겠는가. 달리면서 그의 뇌리에선 매화가 동백이 산수유가 목련이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길 수천 수만번 거듭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목련이 진 무거운 자리처럼 각인된 말들이리라. 마치 우리가 살아낸 무거운 삶의 단편처럼.

이젠 그의 글을 다 읽고픈 맘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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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 2004-03-08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자전거 여행, 제 책꽂이에 꽂혀 있습니다. 하지만, 다 읽지 못했습니다. 이 책이 다른 어떤책을 사면 끼워서 준다고 광고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만큼 팔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왜일까요?
글은 참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깊은 사색, 그 사색을 풀어내는 글솜씨
하지만, 사색이 깊은 만큼 글을 읽는 사람 또한 그러한 깊은 사색이 없고서야
결고 책장을 가벼이 넘길 수 없더군요.
그래서 여지껏 다 읽지 못했습니다.

2004-03-27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벽 속의 편지 창비시선 105
강은교 지음 / 창비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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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 시절 강은교 시인을 좋아했던 이유는, 건조함과 사랑 사이의 절묘한 긴장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민중문학이 주도권을 잡던 그 시절, 리얼리즘의 승리를 부르짖던 그 때, 강은교의 시는 민중의 아픔을 에둘러 드러내어 주었고, 난 그런 수사를 통해 세상에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90년대 넘어서면서 시인의 관심도 역시 세계로 돌아온다. 시가 더 좁아지고, 더 작아지고, 결국 한 사람만큼의 시가 된다. 그러면서 시는 더 넓어지고, 더 커지고, 결국 한 세계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가 양파들이 구멍 숭숭 포대 속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은, 그의 시가 넓어진 증좌이자 그의 시가 깊어진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데, 자꾸 아쉬운 건 왤까. 그의 사랑법이, 그의 헤매는 발길들을 위한 노래가 맴도는 건, 나약한 나 자신에 대한 자기 방어 기제가 살아나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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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4
고은 지음 / 민음사 / 197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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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년이 넘은 누렇게 찌든 책을 책장에서 뽑았다. 속표지에는 내 친구가 사준 책이라고 적혀 있다. 수정이는 참 시를 좋아하던 친구였다. 늘 시를 쓰고 읽고, 나중엔 자기 시를 내게 보여주기도 했지만, 한번도 시원스레 좋은 시라고 평해준 일이 없이 십년 너머 못만나고 있는 사실이 좀 아쉽다. 그 친구는 아직도 시를 쓰고 있을까? 가끔 아련하게 생각난다. 특히 고은을 보면. 그 친구가 고은을 짝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고은의 '부활'이란 시집을 보고 누구는 일기장이라고 했다. 그렇다. 부활에는 '동해창망하라'로 시작하는 서사시의 부활이 있고, 우리는 보지 못하는 대자연의 섭리를 그의 눈은 읽어내는 신기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고은을 읽는다는 건 내게는 치열했던 청년 시절을 반추한다는 것이고, 관념적 세계의 지적 유희를 맘껏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의 후대 시가 훨씬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초기 시가 갖는 상징성은 나를 그의 시에 몰입시킨다.

고은을 읽으면 그를 이해할 수 없어서 좋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정확히 형상화되어 있지 않아서, 내 마음껏 내 상상을 하며 '동상이몽'의 즐거움을 누려보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만인보'를 싫어한다. 단순한 이유는 '만인보'는 돌아보기 싫은 내 젊은 스무살의 비극적 현실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만인보를 읽노라면, '동상이몽'의 몽환적 즐거움을 놓치게 되는 까닭에...

만인보에서 박혜정을 읽고 나는 울었다. 내 갈갈이 찢어진 속내를 어쩜 고은은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며 흘겨보고 있었을까. 아아, 그이는 이미 이생에서 흘릴 눈물 전생에 다 흘리고 난 이일까.

오랜만에 고은을 읽으며 세상 만물의 자리매김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강아지도 매일 킁킁거리며 확인하는 세상의 존재를, 무시하며 살고있는 내 어리석음을 통찰하는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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