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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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연히 수수롭다...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 년도 수유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정비석, 산정무한)'

우리가 어린 시절 지긋지긋했던, 아니 그래서 지겨운 줄도 몰랐던 초췌함이 오롯이 살아있었다. 그는 어쩌면 행복한가? 지금의 흥성거림을 모르기에...

'...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주요한, 불노리)' 라던 시인의 말을 그는 안 뱉어도 되잖는가.

이 시집에서 건진 말은 딱 두 마디다. 가난, 때, 결핍, 소외, 작은 공을 쏘아올린 난쟁이의 모습을 읽는 작업은 참 지긋지긋한 일이었으나, 그의 시집을 부등켜 안고 있는 건, 이 두 마디 때문이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미빛 인생의 마지막 구절)와 그의 청년 시절에 붙인 김현 선생의 '암연히 수수롭다'는 단 두마디.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며 크레졸 냄새 가득하던 그의 젊음은 봄날처럼 가고,
그의 죽음과 겹쳐졌던 이 땅 교육의 죽음의 여름, 주검 썩어가는 역한 냄새가 겹쳐져 그의 이름은 '기이하게도' 그로테스크하다. 내 머릿속의 기형도는 기이하게도와 중첩되어 교육 살해 원년의 피비린내를 지긋지긋하게 떠올린다.

이 어쩔 수 없는 심상의 부유함을 두고 '암연히 수수롭다'는 두 마디로 정리할 줄 알았던 정비석의 '산정무한'은 명문이고, 그것을 적확히 옮겨 쓸 줄 알았던 김현 선생도 '삶'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도 모르는 그 삶을,...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삶이란 것의 심연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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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청소부 풀빛 그림 아이 33
모니카 페트 지음, 김경연 옮김, 안토니 보라틴스키 그림 / 풀빛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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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행복이 전염력이 있는 거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를 생각하고, 그 소중함을 위해서 다른 데 마음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고갱이에서 분출되는 자연스런 욕구에 동화되어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한 마음이 말입니다.

그의 웃음이 전염력이 있는 거라면 좋겠습니다. 그는 자전거를 타거나, 표지판을 닦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늘 웃습니다. 사람은 기뻐서 웃기도 하지만, 웃어서 기쁠 수도 있음을 깨닫도록 말입니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염력이 있는 거라면 좋겠습니다. 음악은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고통을 쓰다듬어주는 마리아의 손길이고, 가을날 아무리 나누어주어도 닳지 않을 햇살같은 풍요로움을 가진 거란 걸 말입니다.

그의 책 읽는 즐거움 - 그의 눈을 보세요. 정말 즐거움이 가득한 독서 아닙니까? - 이 전염력이 있는 거라면 정말 좋겠습니다. 잘 모르는 구절은 읽고 또 읽는 거라고 하지만, 그가 발견한 책 속의 길들을 우리가 모두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말이에요.

그의 욕심 없는 마음이 급속한 전염병이고 불치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표지판을 닦으며 부르는 노래와 읊조리는 시들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뒤에도, 대중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욕심에 눈이 멀어 마음과 육신을 산산히 부숴버리는 물질에 구속된 영혼들이 완치될 수 있는 이 전염병이라는 불치병이라는 바이러스를 영원히 쓸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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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3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정민 지음 / 태학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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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란 비슷하지만, 아닌 것이다. 사이비 종교, 그건 사이비야 하고 많이 쓰지만, 그 뜻을 이 책처럼 통렬하게 그리는 책도 드물다.

어떤 분은 이 책의 저자가 한문을 번역한 것을 다시 곱씹고 있어서 아깝다는 분도 있었지만, 한문의 일차번역은 직역에 가까워서 주해가 필요한 것이다. 옛날 책들은 다분히 상징적으로 쓰여 있어서 원래의 고전보다 그것의 의미를 고증하는 훈고로서의 철학적 상상이 학문의 본류였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주해서들이 그 증좌다.

이 책은 아주 드문 박지원의 주해서이다. 연암 박지원이 가지는 비중에 비하여 원문을 직역한 책(특히 열하일기)이 워낙 널리 유포되어 있다보니, 박지원을 읽어보려 한 사람들이 모두 질려버리게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박지원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허생전, 양반전, 호질 같은 유명한 풍자소설들 외에도, 일야구도하기(우리는 얼마나 외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같은 글도 교과서에 실려 있고, 많은 학생들이 문제집에서 엄청나게 공부했을 '민족 문화의 전통과 계승'이란 글에서 극찬하는 연암 박지원을 알맹이로 읽어 본 이는 참 드물 것이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진실을 보기 두려워하여 눈감을 뿐이다.

까마귀의 빛이 검다고만 여겨서는 안된다는 걸 우린 안다. 내 자식이 공부를 잘 해서 돈 많이 벌게 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을 수 없다는 걸 우린 알지 않는가. 왜 까마귀의 찬란한 초록빛, 자줏빛을 읽을 수는 없는 걸까. 그냥 검다고 생각하면 편하니까? 글 읽기 좋아하는 아이로 기를 수도 있고, 음악하기 좋아하는 아이로도 기쁘게 길러내야 하지 않을까. 내 자식의 빛을 남들이 검다고 하지만, 나는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이라고 말할 용기를 갖기 위해 필요했던 책이다. 자식 기르기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이 있을까.

정민 선생님이 박지원의 상징적인 이야기들을 현대적 안목으로 술술 풀어주셔서 정말 고마운 책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더 써 주시기 바란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내 비유로써 말할지니,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고 했듯이, 연암의 상징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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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3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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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공항 벨 이마주 28
데이비드 위스너 그림, 이상희 옮김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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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상상력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 있답니다. 구름이 맨날 같은 모양으로 살면 얼마나 지겨울까. 왜 구름은 다른 모양으로 생길 수 없을까. 동화를 어려서는 읽지 못한 우리같은 세대에게는 이런 책을 아이들에게 만들어주기 어렵겠지만,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짓밟지는 말아야 되겠단 생각을 했답니다. 구름을 설계하는 아이의 진지한 모습에서는 공부를 잘 할 필요도, 피아노를 잘 칠 필요도, 그림을 잘 그릴 필요도 없었잖아요. 남을 이길 필요도 없고, 그저 어울려 사는 그것이 삶의 이유였는데... 그걸 바라보는 어른들의 못마땅한 표정들이란... 어리석은 어른들의 노파심까지 잘 그려낸 수작이었습니다.
이젠 책방에서 누굴 기다릴 때 이런 그림책을 많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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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쿵! - 0~3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14
다다 히로시 글 그림 / 보림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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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서 시종 느낀 것에 일본 책이라서 아쉽다는 거였습니다. 일본어도 우리 말 못지않게 훌륭한 의성의태어들이 있습니다. 그걸 일본아이들에게 자연스레 익히게 하는 훌륭한 책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책에 아이들이 익힐만한 재미있는 의성어와 의태어들을 만들 순 없을까 하고 아쉬웠습니다. 번역에 기대다 보니깐, 좀 아쉬웠거든요. 예를 들면 꽃들이 한들한들, 아기가 방실방실, 토끼가 깡충깡충, 봄비가 보슬보슬, 새싹이 뾰족하게 돋아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좋은 책이지만, 왠지 우리 것이 아니라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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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3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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