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되고 싶은 화가 장승업 - 한국편 3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한국편 3
조정육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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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머리를 내젓는 말, 화려한 장닭의 모습,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매, 천연덕스럽게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 경치좋고 인습 좋은 산과 마을, 흰 도포를 느긋이 두르고 우리를 마주 보고 있는 신선... 이런 그림들이 때로는 여유롭게, 때로는 다정다감하게, 그리고 주로 곧은 선비 정신으로 다가오는 장승업의 그림들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조선의 화인을 셋 꼽으라면, 단원, 혜원, 오원을 3원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그 중,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뛰어난 화풍과 차이점에 대해서는 누차 들어왔지만, 조선 후기 신선같은 술꾼 오원 장승업의 이야기는 최근 취화선이란 영화로 세인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단원만 화인이냐? 나도 원이다.(吾園)는 씁쓸한 자부심을 가졌던 사내 장승업.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중국풍의 얼굴을 하고 있다. 퉁퉁하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느끼한 탕수육같은 얼굴.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바로 '매'다. 김수영이 선비정신을 '폭포'이 곧은 소리에 비유했듯이, 장승업은 썩어 문드러진 세상을 살아갈 마음의 먹줄로 매를 그린다. 날카로운 터치와 먹의 농담만으로 그려낸 무채의 세계는 너무 난잡해서 인생의 진실되고 질박함을 잃고 사는 우리의 퇴폐한 영혼에게 일체의 나타와 답보를 차버리라는 무언의 '할'을 내지르는 듯 하다. 매의 눈은 달마대사처럼 아래로 쳐졌지만, 긴장을 잃지 않는 발목의 팽팽함과 깃털의 정갈한 표현은 '명마를 기르는 행복'의 말주인이 짓는듯한 흐밋한 눈빛으로 살아가는 내 정수리를 친다.

책읽은 즐거움과 그림보는 여유와 옛사람을 만나 이야기 듣는 시공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자,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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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 블루스 1
정철연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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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할인매장의 밤 늦은 시각은 도시 생활의 또 하나의 재미다. 조용한 시골의 한적함을 즐기지 못할 바에는 이런 공간의 틈새를 이용할 법도 하다. 아들 녀석과 주온2 영화를 보고 나니 열한시가 넘었다. 둘이서 사람이 거의 없는 할인매장에 가서 한 시간 너무 책을 읽는다. 낮이면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의 공간에 높이가 낮아 마음 편한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읽기엔 역시 만화가 최고다. 동화를 읽든지...

요즘들어 포엠툰, 스노우캣, 파페포포 같은 만화류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각기 다른 강점들을 갖고 있다. 마린 블루스 2권은 아직 할인 매장에 없다. 1권을 읽은 소감은 '아직'이다. 역시 인터넷에 오른 그림 답게, 재치있기는 하지만, 뭔지 허전함을 지울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허공을 짚은 것일까?

空 그 자체인 생각을 인식하려 하는 나의 '오온'이 어리석은 탓일까...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그려내긴 했지만, 성게군, 불가사리, 선인장 양 등의 형상화는 그다지 탐탁하지 못하다. 그 성격에 딱 어울리는 소재라야 하는데.. 그중 선인장 양은 조금 맘에 든다. 성게군은 남들 곁에 가기 힘들다는 건지.. 좀 어색하기도 하고...

그러나 시작만 보고 장래를 점치기 어려운 법, 마린 블루스의 2권을 보고 싶다. 작가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것이다. 젊은이의 힘을 보고 싶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시대가 힘들어 그렇지, 다들 깊은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진다. 청춘이 아니면 누리지 못할 정열과 열정과 이상의 세계를 구체화시켜 주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한 켠으로 접으면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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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지음 / 김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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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라는 땅은 지구의 블랙홀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류시화의 시선을 좇아 움직여 본 인도 사람들의 삶은 행복을 위한 여행, 그 자체이다. 늘상 '아 유 해피?'라고 인사하고, 인도 말을 하나 가르쳐 달라는 시화의 말에 처음으로 '아즈 함 바후트 쿠스헤!(오늘 난 무척 행복하다)고 가르쳐 줄 수 있는 행복의 달인들. 누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삶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인도의 스승들은 '그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매 순간 기억하라'고 알려 준다. 신은 언제나 어디에나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면 불행할 일이 없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투스도 '삶에서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우리는 잃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난 이러이러한 것을 잃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말하면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늘 행복하고, 불행할 수 없으므로, 늘 '노 프라블럼'을 외치는 짧은 식민지 영어로 사는 사람들. 가장 가난하고, 가장 더럽지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신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 그 속에서 사기꾼같은 스승들도 만나고, 반딧불이로 홈시크를 고쳐준 소마의 따스한 사람의 마음. 주그누, 순다르 주그누(반딧불이, 아름다운 반딧불이)를 잊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우리는 불평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배우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인데, 우리는 얼마나 나의 신세에 대해 쉽게 불평하며 사는가.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원숭이가 골프 경기를 방해할 때마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신의 뜻임을 이해하는 지혜를 가지고, 우리가 창조한 어제와 내일에 마음 태우지 말고, 신이 창조하신 '오늘'을 심호흡하며 살기를 간절히 바라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고 마음 속 울림이 너무 컸던 기억이 난다. 한 5년 전이던가. 이제 다시 류시화를 만나 보니, 지구별을 여행하는 그같은 사람이 있어, 이 좁은 서재에서도 네모난 산들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감싸안고도 더럽지 않은 어머니 강, 갠지스가 내려다 보이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몇 년 마다 한 번 씩 그와 함께 인도를 거닐고, 멍하니 대지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일은 축복받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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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파리 한 조각 - 전2권
린다 수 박 지음, 이상희 옮김, 김세현 그림 / 서울문화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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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수 박. 이름이 좀 웃겼다. 수박이라고... 근데 책을 넘기면서 점점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부모님의 조국에 대한 사랑이나 의미를 뛰어넘는 뜨거운 것이 그의 글 속에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금파리'란 말을 알고 있을까? 원 제목은 A single shard이다. 샤드는 도자기, 질그릇의 파편이라는 뜻이다. 뜻은 통하는 말이라지만, 샤드와 사금파리 만큼의 정서적 거리가 세상에는 있을 수 있다. 김세현 씨의 그림은 참 정감넘치는 그림이다. 색감이 온화하고, 선이 친근했다.

고아로 자란 목이가 두루미 아저씨와 나누는 이야기들은, 마치 선문답이나 선지식을 전수하는 과정과도 같다. 어느 날 두루미 아저씨가 생선을 놓치고 와서 지팡이를 다듬으며 던진 다음과 같은 말은, 불교의 화두가 될 만 하다.

'오늘 저녁에 생선을 못 먹었으니까.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 때문에 속상해 하는 건 어차피 우리 모두에게 시간낭비일 뿐...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엔 나도 멀쩡한 두 다리를 갖게 되겠지...'

민영감은 고지식하고 성격이 강퍅한(강파르다)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도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고, 그 부인은 모성과 여성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난 민영감보다는 그 부인의 마음 씀씀이에 더 감동받았다. 목이의 곤궁함을 돌봐주는 섬세한 마음. 현모양처가 봉건 사회의 여성들에게 족쇄의 역할을 한 이데올로기라고 비판받는 세상이 되었지만, 지극한 사랑의 시원인 모성애를 이젠 어디서 찾아야 된단 말인가.

린다 수 박은, 먼 옛날 고려청자의 신비를 통해 고난받던 민족의 한 조각 예술혼을 승화시키고 있다. 이 절대지향적인 예술혼 앞에서는 사소한 '사악함'은 얼마든지 성스러운 힘으로 극복되고 있다. 람세스를 읽으면서 람세스가 위기에 닥칠 때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듯이.

그는 비록 이국땅에 태어나서 이국의 말로 이 동화를 썼지만, 그의 뜨거운 붉은 적혈구들은 우리 조상들의 산수윳빛 혈액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 피의 의미가, 사랑이고, 민족이라는 것이다. 월드컵의 해, 작년 6월에 우리가 가슴 벅차하며 감격했던 바로 그 것말이다. 오랜만에 뜨거움이 느껴지는 책을 써 준 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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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
정채봉 지음, 정현주 그림 / 동쪽나라(=한민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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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길손이가 엄마라고 불렀을 때, 기꺼이 와서 엄마가 되어 주신 관세음보살님. 파랑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간 길손이를 보다 눈이 뜨인 감이. 정채봉의 동화는 파란 가을 하늘 같고, 거기 드리운 단풍잎처럼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로 다가 온다. 이 책은 오히려 색연필의 불투명한 톤이 투명한 언어들을 흐린 느낌이 든다. 그림책으로 보다는 상상 속의 색감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소설이었는데... 그림을 폄하하려는 뜻은 없지만, 상상 속의 아름다운 색감들을 놓치기가 아쉬워서 하는 소리다. 우리 속에 다들 가지고 있는 불성을, 내 앞의 얼굴 아닌 뒷면의 부처를 만나려면, 숙고할 지어다. 너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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