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마음
조향미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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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생님은 호박같이 생기지 않았다. 호박처럼 펑퍼짐하면서도 넓적한 호박잎 사이로 떡벌어진 엉덩짝을 푸짐하게 깔고 앉은 노점상 아줌마같이 생기지 않았고, 뾰족한 뾰중새 닮았다. 난 그 선생님과 10년 전에 한 번 수능 시험 감독을 같이 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선생님은 전혀 모르겠지만... 조선생님의 시에는 투명한 따사로움이 묻어있다. 파스텔 톤의 봄 햇살이 나뭇가지와 재재대는 참새 소리 사이로 아스라히 비추이는 교정이 있고, 그 옆에 참새보다 더 재재거리는 지지배들이 있고, 낡은 교실과 국기 게양대에서 펄럭이며 그 모습을 저만치서 바라보는 태극기가 있다.

님의 침묵을 가르치면서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정수박이로 슬픔을 쏟아 붓던 그의 희망론을 읽어 내기도 하고, 봄비에 새싹 돋는 소리도 들을 줄 아는 섬세한 귀가 있다. 그러나 선생님의 시에는 상실의 아픔이 담담히 잠겨 있다. 돌출되지 않았을 뿐, 잠겨있지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아픔의 빛. 아픔의 내음새. 그리고 선생님의 글에서는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 길가에 피어있는 잡초와 풀꽃데미와 함께, 논과 밭 사이로 넌출지게 흐드러진 호박넝쿨처럼 헝클어져 열려 있다. 헝클어졌지만 어지럽지 않고 오히려 정겨운 길이다.

그 밭두둑엔 넓적한 호박이 툭 소리 내며 날 좀 보란 듯이 버티고 앉았다. 변명따윈 필요 없었다. 호박이 익어 있는 건,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저절로 그러한 것이었으니까. 길을 돌이켜 보면, 논두렁 밭두렁 사이로 저 머얼리 학교 그림자 비추이고, 하늘엔 멀리서 초저녁 부지런한 별 한 녀석 반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하늘은 하늘색이었다가, 점차 보랏빛으로 물들며 저녁놀을 맘껏 풀어 놓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도 지치면 남보랏빛으로 붉은 자줏빛으로 검보랏빛으로 바뀌는 하늘을 지붕삼아 펑퍼짐한 엉덩이로 대지를 깔고 앉아 하늘을 맘껏 누리는 새와도 같이, 가슴 활짝 열어 놓고 누운 호박같이 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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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법정(法頂) 지음, 류시화 엮음 / 이레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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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법정 스님의 글을 참 좋아한다. 산이 좋아 산으로 가신 산사람. 법정 스님. 수행자의 근본은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생각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무소유의 역리를 실천하신 그는, 진리 탐구의 참 자세를 어렵지 않은 언어로 보여주신다. 이 책은 그간의 단상들을 계절별로 묶어 엮은 책이다. 류시화의 감성과 법정 스님의 이성이 결합된 책이라 할 수 있다. 도라지 한 송이가 하얀 색에서 흙의 정기를 받아 보랏빛으로 살아남을 관조하는 이 시대의 '뜬 눈'의 글을 읽노라면, 삶이 그다지 팍팍하고 재미 없는 것만은 아니란 위안이 가슴을 쓸어 안기도 하고, '너는 누구냐', '너는 어디서 와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는 일갈이 들리는 듯도 하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시간이 해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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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엠툰
정헌재 지음 / 청하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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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지 않은 사람은 이 만화시를 읽고 '좋다'고 할 거다. 앓아 본 사람은 이 만화시를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눈가가 시큰거리기도 하고, 멍하니 한 페이지를 바라보면서 책장 넘기기를 잊기도 한다. 가슴이 뻥 뚫린 마음. 그리고 너는 내 곁에 없는데, 나는 네가 그리워 어쩔줄 모르는 마음을... 아는 사람은 차마 이 책에 대한 비평을 가할 수 없다. 그저 동감할 뿐. 앓은 사람뿐 아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도 이 책을 보면,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어렵다.

나의 한 마디가 그이를 얼마나 마음 아프게 했을까. 내가 상처준 며칠간이 그이에게는 얼마나 기나긴 어둠의 터널이었을까. 부서진 사진기 속에 짓눌린 이미지로 남아 있는 기억의 터널 속을 헤매이는 담배 연기같은 'loveholic'의 진한 추억을 가슴 한켠에 오롯이 심어놓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만화시로서 충분히 서정적인 감동을 주고, 만화로서의 재미도 준다. 문학적으로 가치롭다기 보다는, 시의 독백 형식의 외로움을 초월하기 위해서,새로운 방법의 의사 소통 방식을 찾아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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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아라비안 나이트 1
리처드 F. 버턴 지음, 허순봉 옮김, 박정욱 그림 / 알라딘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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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낯설어하는 아랍의 이야기, 천일과 또 하루의 이야기를 여느 아이들의 동화나 만화처럼 간결하고 유명한 이야기(알라딘과 요술 램프나, 사십인의 도적같은) 위주로 그리지 않고, 차근차근 천일 야화를 잘 이해할 수 있게 그린 책이다. 박정욱 씨의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도 아주 쏠쏠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그림에 나타나는 섬세한 여성미와는 다른, 뭔가 아랍권의 문화에 맞는 필체로 보이는 익살과 재치의 선이 보인다. 아이들에게 고전을 읽혀야 한다면, 이왕이면 이 책이나 가나 출판사 간행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만화라도 원전에 충실하게 그려 줬으면 한다. 오랜만에 만화를 보면서도 뿌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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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의 눈물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작가정신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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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구로야나기 테츠고의 '창가의 토토'를 감명깊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이번엔 속편인가 하고 서점에서 펼쳐 보았다가, 서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두 시간을 꼬박 읽었다. 우리가 툭하면 들르는 동물원의 동물들을 막상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른다는 엄청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눈물조차 말라붙은 아이들이 '행복하세요'라며 감동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고, 전쟁과 폭력, 쇠붙이에 시들어가는 전 세계의 어린 생명들이 떠올라 가슴 아렸다.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 떠오른 건 왜일까. 동구의 시린 겨울 소련제 총알 수발이 부다페스트 소녀의 두부를 삼십보 상공으로 날렸던 57년 겨울, 김춘수는 7년 전 한국 전쟁의 한강의 모래알을 쥐고 죽어갔던 한강의 소녀를 떠올렸다. 나는 1년 전, 미제의 탱크 캐터필러에 짓눌렸던 조선의 효순이 미선이와 부시 일당의 총칼에 난자당한 이라크의 순박한 아이들의 눈빛이 가슴을 찌르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우린 촛불 하나 켜 놓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계에는 아직도 수천만의 아이들이 피가 모자라고, 밥이 모자라서 죽어가고 있는데, 우린 먹는 데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는 돼지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센의 부모님이 변해갔듯이... 개성없는 가오나시들이 되어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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