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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의 시대유감
안경환 지음 / 라이프맵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사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단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대통령이 범죄의 수괴인데,
대통령을 탄핵하려면 그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이런 모순 앞에서 '쾌도난마'는 벌어질 수 있을까?
참담한 나날들의 연속이고, 분노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인생은 외국어.
모든 사람이 그것을 잘못 발음한다.(크리스토퍼 몰리, 414)
국가라는 제도 자체가 괴물일진대 '올바른 국가'를 상상하는 일 자체가 부조리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식민지ㅡ전쟁-분단-살육-독재-정경유착-빈익빈부익부-자유의 억압
이런 일이 유전자에 남아 '모난 돌이 정맞는다'가 살아남는 길이 된 나라에서,
선진국과 비교하여 끝없이 부족함을 느끼는 일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정직하면서 타인의 내면을 겸손하게 해독하는 일,
쉬울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 불안감과 다소간의 무모함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소통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편지란 결국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내부를,
그 내부의 희미한 움직임을 읽어내는 일일 테니까요.(정이현, 414)
독서도 그렇고, 모든 공부의 목표는 하나다.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읽으려 애쓰는 일.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나, 결국 이명박이 몰아낸다.
촛불시위 이후의 일이다.
격동기와 안정기는 다르다.
정치도 외교도 이제는 일상적인 정의를 세우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성과 합리에 기초한
흔들리지 않는 정의의 체계를 만드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157)
아아...
지나고 보니,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과오가 이것이었다.
<격동기>를 <안정기>로 착각한 일.
한국은 아직도 격동기의 와중인데,
독재자들을 사면하기 이전에 엄벌을 내렸어야 했고,
부역자들을 같이 처벌했어야 할 일인데,
이성과 합리를 내세워 대화와 토론을 하려 했으니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이다.
지금의 <청와대>와 <검찰>, 그리고 여당의 <친박과 그 출신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퇴로를 만들어 주는 열린 마음>으로 지나가면
언젠가는 다시 볼드모트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인권위라는 독립기구가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그는 <유감>을 표명한다.
'유감'은 '어떤 감정이 든다'는 뜻이 아니다.
'유감'은 못마땅한 것이다.
이 시대와 불화할 때 쓰는 말이다.
[유감]마음에 차지 않아 못마땅하고 섭섭한 느낌 .
이명박의 시대에는 그저 못마땅하고 섭섭한 '유감'정도로 표현했을지 몰라도,
지금 시대는 '유감'을 뛰어넘는 시대다.
잠이 보약이고 자괴감드는,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 새누리와 신천지, 7시간과 여자의 사생활,
가장 심각하고 진지해야할 정치가
가장 저질스러운 처지에 놓여있다.
초등학생이 '금붕어에게 미안하지만, 그여자는 금붕어같다'고 할 정도.
국민과 불화하는 역겨운 정치가들을 반드시 처벌하겠다는 시민의식이 이렇게 높았던 적은 없었다.
다만 매일 불같이 화가 나는 일이 연속이어서,
이 분노가 나라를 태워버리지 않기를...
그저 '유감'인 정도를 넘어 분노가 승리의 시기까지 달려가기를... 바란다.
다시 '김수영'의 시대가 도래했는가...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詩(시)와는 反逆(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山頂(산정)에 서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간과 마루 한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妻(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詩(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裸體(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詩人(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反逆(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김수영, 구름의 파수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