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릴케 시 여행 정현종 문학 에디션 1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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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건 좀 불독처럼 생겼으나 ㅋ

그 이름만으로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아름답다.

윤동주 '별헤는 밤'에서 만나 더 그런 게다.

 

나무 한 그루 저기 솟아올랐다. 오 순수한 상승!

오 오르페우스가 노래한다! 오 귓속에 높은 나무!(68)

 

이런 소네트를 읽으면서 마음의 상승을 경험한다.

정현종의 육필 원고를 곁들인 쪽지글들도 아름답다.

시를 읽으면서 어느 부분에 집중하지 못했다가도,

정현종의 글을 통해 다시 그 부분을 읽게 되면,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마치 화원에 있는 화분들을 일별할 때면 눈에 띄지 않던 것들도

집에 하나 가져다 두면 매일 친숙해 지는 것처럼.

 

참된 노래는 다른 숨결이다, 무를 둘러싸는,

신 속의 돌풍, 한 바람.(84)

 

노래와 숨결과 돌풍.

좋은 시는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릴케에게 시는 노래는, 그대로 세계였다.

 

노래만이 온 땅을

드높이고 치유한다(114)

 

오르페우스의 노래가 그러했듯,

 

그의 묘비명도 아름답다.

그리하여 그의 무덤가엔 늘 장미가 핀다 한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수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잠도 아닌 즐거움이여.

 

장미 꽃잎을 수많은 눈꺼풀처럼 본 것도 재미있고,

그리하여 잠이 든 세계가

향기롭고 즐거울 것이라는 모순의 묘비명.

 

그가 죽은 것이 내 나이였다.

시공을 초월하여 한 영혼의 울림을 듣는 일은 고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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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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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학생은 장래가 창창한 젊은이입니다.

물론, 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히 말해 애정싸움이지요.

그런 일 때문에 두 젊은이의 장래를 망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따님의 이미지에 상처를 입힐지도 모릅니다.(31)

 

권투선수 남자아이와 처음 만난 딸아이가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항의도 못하고 만다.

성폭행 가해자측에서 하는 저런 말은 참 지긋지긋하다. 앞날이 창창하다니...

우연히 만나게 된 박순신이라는 재일조선인 청년에게서 싸움 기술을 배우는데...

 

어쨌든 근육을 만들고 싶으면

일단 오래된 근육을 파괴해야해.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워서 새롭게 하는 거야.

그걸 수도 없이 반복하는 거지.(110)

 

어쨌든 해피엔딩인데, 재미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배불뚝이 아저씨가 매일 운동을 통해 나아져 가는 모습을 읽는 일.

마치 내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다.

 

우리는 시험문제를 잘 풀지 못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쭉정이 취급을 당해요.

우리가 어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죠.

간단히 시험을 쳐서

그 결과로 인간을 분류하고 레테르를 붙이고

알기 쉽게 한 곳에 모아서 관리하려는...(118)

 

학교에 대한 평가도 시니컬하다.

틀린 말 없다.

 

그래. 오래된 근육을 파괴해야 새살이 돋는다.

그 반복을 통해 세상은 조금 나아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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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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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래된 책이다. 

그래서 가부장제의 질곡이었던 호주제나 유리천장 같은 용어 훨씬 이전 책이지만,

'여성'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임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로서는 불편함이 여전할 것이고,

그만큼 정희진의 15년 전 저작이 아직도 유효함은 안타깝기도 하다.


이 책은 일관성이 없다.

페미니즘은 원래 일관성이 없는 운동이다.

처음 시작은 사회 고위층 여성들의 참정권 수준이었을지 모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매맞는 여성, 성판매 여성 등 수도 헤아릴 수 없는 관점에서 

마치 잠자리 홑눈으로 모자이크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일관성을 부여할 수는 없는 상황일 게다.


아직도 연속극의 가부장은 뭔 대기업 회장이런 넘이고,

그 재산에 연연하는 첩도 등장하고, 

이혼녀라도 얼굴이 예쁘면 멋진 젊은 남자가 꼬이고... 이런 식인 수준이다.


이 책은 다양하다.

요즘에서야 이야기되는 위안부 '할머니' 같은 용어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하고 있고,

(왜 장기수는 '선생님'인데 위안부는 '할머니'인지...)

헤아리기도 힘든 많은 부분을 다루려고 노력한 점은 인정된다.

그런데 그 15년이 지난 지금도, 

김여사, 김치녀, 된장녀...등 여혐은 심각해 지고 있고, 여적여 같은 말도 횡행한다.

꼴페미라는 둥, 메갈리안이라는 둥, 또 한편에서는 찌질한 한남충의 세계를 욕하기도 한다.

여성이라도 페미니즘의 구도에 적극 동참하는 사람은 적은 것이 현실인게다.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소수자>는 권력에서 먼 거리에 놓인 약자다.

한국에는 흑인은 없지만, 현대판 심청이로 팔려오는 동남아 며느리들이 있고,

열악한 현장에서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일을 싼값에 해치우는 노동자들이 있다.

(일부 영화에서는 그들을 비하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약자에 대한 공부라 생각하면 어떨까?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고, 누구라도 어떤 측면에서는 소수자가 될 수 있으므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부로 생각하는 시대가 오면 좋겠다.


세상 지식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주의에 무지한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아직도 아는 것 자체로 비난받는 경우도 흔하다.

지식이 특정한 사회의 가체 체계에 따라 위계화 되어있음을 보여준다.(머리말)


세상에는 미친놈이 더 많다. 권력을 가진 만큼 미친짓을 할 기회가 많았을 게다.

그 나쁜 놈들이 박근혜를 이용해 사익을 취할 때, 박근혜를 <미스 박>이나 <배드 걸>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물론 박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가 여성이어서 죄인인 것은 아니다. 

그의 죄를 욕하지 않고 그의 여성성을 조롱한 것은 지적받아 마땅하다.

조윤선이나 정미홍같은 골빈 여자들도 있지만,

여성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다한 사람들도 있다.

추미애나 박영선 같은 캐릭터는 한명숙처럼 듬직한 멋이 좀 없어 아쉽긴 하다만...


여성주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편안할 수는 더욱이 없다.

여성주의뿐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12, 머리말)


이 책의 머리말이 참 좋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기존의 대립된 시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상상력과 가능성을 뜻한다.

대립은 서로를 소멸시킬 뿐이다.(14)


그래서 페미니즘은 충분히 더 문제가 되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36)


니들도 군대 가라, 김치녀 증말 싫다, 김여사 좀 걸어 다녀라...

짜증이 그냥 묻어나지만, 이런 것에서 폭력을 읽어내는 것이 공부다.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기존의 성차별적 언어들이 개선되고 있다.

남성은 인과관계, 의사전달 위주의 말하기를 하지만,

여성은 맥락적, 공감적 말하기에 능하다.

여성이 비논리적, 사적이라 비하되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여성적 방식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민주주의에 훨씬 가깝다.(76)


폐경, 처녀막, 미혼 등 남성 중심의 언어를

완경, 질주름, 비혼 등 사유의 변화로 많이 바꿔 나가야 한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마르크스, 80)


페미니즘은 철학이어서는 안 된다.

생활에서 차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개선되도록 살아내야 한다.


위례별 초등학교라는 곳에서 페미니스트 교사 모임을 하면서,

다양한 교육을 했던 모양인데, 학부모 단체, 종교 단체 등에서 항의를 해서 교사 모임 자체를 해산햇다는 뉴스를 접한다.

무서운 세상이다.

사상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다.


물론 조금의 문제는 있을 수 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는 성소수자 문제나 동성애 등 시기상조인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정식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은 

권력을 가진 교회의 망상에 다름아닌듯 싶어 씁쓸했다.


여성들의 의식 변화는 급격한데

여전히 무례하고 폭력적인 남성이 많다.(88)


성추행 논란으로 징계를 받는 남교사가 많다.

아마 70년대 교사들이라면 한 학교에서 10% 이상은 옷 벗엇어야 할 것이다.

폭력교사까지 치면 절반 이상 될 것이다.


세계 통계에서 한국 여성의 평등 지수가 최하위인 것은,

그만큼 한국 여성의 인권과 의식 상승이 세계 최고라는 방증일 것이고,

불평등이 커진다는 것은, 아직도 한국 사회가 변화에 둔감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흑인에게 피부색이 뭐냐고 묻지 않듯이,
세상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윤리'라는 그 말의 뜻처럼(倫 의 의미는 '무리'다' 인륜이란 다수자의 횡포일 수 있다.)
시선은 편파적이다.

누군가 찬성하지 않아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동성애자 역시 누군가의 동의와 허락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110)

미운 오리 새끼는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자괴감에 빠졌을까.
이미 20년도 전에 우리반 1,2등 하는 녀석이 일기에 썼다.
자기는 감옥을 가야 한다고... 여호와의 증인이어서, 어떤 일도 하기 힘들다고...
페미니즘은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고, 횡포의 시선에 대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공부하는 것이라야지, 그저 싸움의 도구로 전락하면 안 된다.

여성 운동은 사회 안에서 여성이 지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 역사, 정치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문제는 기존의 공적 영역 중심의 협소한 개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125)

성폭력을 저지른 명문대생은 법관이 너그럽게 봐준다.
앞날이 창창한 남자 아이라서 그렇단다.
성폭력의 피해자 여자 아이의 앞날에는 관심이 없다.

법 운용이나 일상 생활에서 모두 피해 여성의 입장이 아니라
남성의 경험과 이해에 의해 구성된다.
남녀 모두에게 여성의 주장은 지나치게 에민하고 과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남성의 주장은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것으로 수용된다.(156)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이 사회가 얼마나 불공평한지를 알게 된다.
페미니즘을 만나면 화가 나는 사람은, 그만큼 사회에서 불공평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군대다. 너도 군대 가봐~는 논리는 그 사회가 '죽어 버려도' 총 쏜 사람을 찾지 말아달라고 말해야 하는
슬픈 사회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이 누구 중심의 평등인가는 언제나 논쟁거리다.
정의로서 평등한 인권은 같아짐이라기보다는
공정함(fairness)을 추구하는 것이다.
양성평등한 인권은 남성과 여성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다.(178)

남성만큼 배우고, 남성만큼 능력을 보여줘도,
독박 육아에 시달리고, 유리천장에 제한을 받는다.
온갖 청소, 빨래, 설거지에 아이 공부 지도까지 관리해야 한다. 현실은 결코 페어하지 않다.

남성이 생산한 지식은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214)

법률을 만든 자도 남성이고, 
일터의 구조를 만든 자도 남성이다.

한국 사회의 소수자는 참 광범위하다.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의식을 가진 나라다.
교육 인프라가 이렇게 많지만,
거기서는 민주주의와 페미니즘 대신, 
가장 남성적인 경쟁과 전투를 세뇌시켜 사회화한다.

결국 성공한 여성이라고 해도, 집에서 밥을 잘 해야 한다고 엉너리를 쳐야하는 것이다.
심상정 대선 후보처럼 역할을 나눠도 세상 뒤집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멋진 일이다.

세상은 흐르고 바뀌게 되어있다.
거꾸로 노를 젓다가 두손 두발 들지 말고,
시류에 따라 공부할 일이다.

세상에는 페미니스트 교사가 더 많이 필요하다.
억압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가르침과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 교사를 적극 지지하고, 나 역시 페미니즘 확산에 노력하며 살려 한다.
이 책은 참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부분부분 여러 번 읽어야 할 고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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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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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연휴였다.

겨울이 쓸쓸한 나라 독일의 문학을 연구하는 한 교수가

시간날 때마다 시인의 집을 탐방하면서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절은 가난했고, 세상은 혼탁했고,

사람들은 잘 아프던 시절이었다.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 본다.

(휘청인다, 파임이 깊다.)(66)


트라클과 파울 첼란은 낯선 이름들인데,

작가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들으며 가다 보면,

인간사의 고독도 발자국들 위에 얹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다스해 진다.


독일어는 그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나라의 언어이고,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자신을 말살하려 한 살인자들의 언어였지만

그에게는 모국어이고 또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즐겨 읽었던 문학 언어였다.(90)


아, 이런 아이러니를 만나는 일은 가슴 아프지만,

또 문학이 아니라면 이런 절절한 아이러니를 어찌 접할 수 있으랴.


죽고 나서도 수치는 남아있을 듯 하다.(소송의 마지막 문장, 147)


카프카도 등장한다.

내가 카프카의 소송을 읽던 때는 아마도 저 추악했던 9년의 어느 그늘이었을 게다.

정말 죽고 나서도 수치스러웠을 기억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상 역시 그러할지 모르겠다.

세상은 그런 것인지도...


넌 그럼 안 돼, 라고 부엉이가 뇌조한테 말했다.

넌 태양을 노래하면 안 돼./ 태양은 중요하지 않아.//

뇌조는/ 태양을 자신의 시에서 빼어버렸다.//

넌 이제야 예술가로구나/ 라고 부엉이는 뇌조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름답게 캄캄해졌다.(쿤체, 예술의 끝, 185)


블랙리스트야말로 예술의 끝이다.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예술조차 캄캄하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서

충분한 백분의 일 초들이 있기를 빕니다.(쿤체 대담 중, 201)


아, 인생에서 소중한 백분의 일 초들이... 그렇구나.

행복은, 문학은, 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구나. 아닐 수도 있구나.

그저 백분의 일 초, 느낌을 받는다면, 그런 것이구나... 싶다.


늘 열린 문 하나를 찾아 헤매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망설였다.

언제나 완강하게 앞을 가로막는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닫힌 것은 늘 벽이 아니라 문이었을 것이다.

열릴 가능성이 없는 것이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끌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오래 닫혀 있었던 만큼 더 찬연하게,

방금 어느 땅 끝자락 쯤의 강가에서 내게 열려왔던 문 하나.

어느 눈 내리는 저녁 내가 섰던 외딴 마을의 '해뜨는 언덕'에.

이제라도 열려올 한 문이,

그렇게 열려질 한 세계가 있는 듯...(221)


릴케를 이야기하려는 초입의 떨림을 쓰는 부분이다.

이런 연애편지가 또 있을까.


우습다.

내가 여기 내 작은 방에 앉아 있다.

나, 스물 여덟 살이 되었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말테가

나는 여기 앉아 있으며,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생각한다. 오층 높이에서.

어느 잿빛 파리의 오후에 이런 생각을(271)


릴케의 '말테'다.

그 뜨거운 열정과 삶에 대한 자각을 저렇게 기록했다니...

그들이 살아온 시대가 느껴지는 듯 하다.


시인의 열정은 그침이 없었다.

세상의 지리멸렬함에 대한 분노와 역사에 대한 성찰도 여전히 그침이 없었듯.

시인이란 아마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람과 세상을.(290)


하이네 이야기다.

사람과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는 글을 쓰는 시인.

그러나, 그런 시인들을 찾아 읽고, 그의 흔적을 찾아 더듬는 작가 역시,

아마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글쓰기 역시, 그런 사랑에서 비롯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하여...


모든 예술은 예술 중의 예술, 삶의 기술에 기여한다.

예술가는 사회에 대해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를 책임으로 이끌어야 한다.(325)


브레히트다. 아, 독일어로 글을 쓴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있었구나.


감사함을 모른다면 

네가 나쁜 사람이고

감사함을 안다면

네 형편이 나쁜 것이다.(377)


아, 참 힘든 것이 문학인 모양이다.

이런 촌철살인은 역시 괴테다.


빛나는 혜안들과, 

역사 속에서 번득이던 지혜의 글들을 만나게 되고,

삶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힘들었구나... 하는 위안도 얻게 된다.


힘든 전영애 작가의 발걸음들 덕에,

아니, 즐거웠을 그의 여행들 덕분에,

연휴를 느긋하게 독일과 함께 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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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레닌 전집 58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양효식 옮김 / 아고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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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유럽의 근대는 기계와 전쟁무기를 개발했고,

천만명의 청소년을 학살하는 전쟁을 벌였다.

 

그 시절 쓴 레닌의 글들이다.

아고라 출판사의 내공을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전쟁은

부르주아적, 제국주의적, 왕조적 전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음이 명확히 규정되었다.

이 전쟁은

시장 획득을 위한 투쟁, 외국을 약탈할 자유를 위한 투쟁이며,

각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을 진압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다.

또한 부르주아지한테 이롭도록,

한 나라의 임금 노예를 다른 나라의 임금 노예와 대립시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를 기만하고 분열시키고

학살하기 위한 욕망을 담고 있는 전쟁이다.

이것이 전쟁의 유일한 실제 내용이자 의미다.(9-20)

 

이렇게 명확한 글을 읽지 않을 수 없다.

박그네 정부에 싸드를 팔아먹으려던 미국은 결국 문재인 정부도 손들게 만들었다.

모든 무기는 전쟁과 함께, 부르주아, 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것이다.

 

약소국과 프롤레타리아들은 늘 분열당하고 억압당하고 학살당해왔던 것이 세계사다.

 

현대 유럽 인터내셔널을 필두로 하여 붕괴한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불충분한 사회주의.

즉 기회주의와 개량주의다.

붕괴한 것은 바로 이 경향 - 도처에, 모든 나라에 존재하며

이 경향은 수년 동안 계급투쟁을 비롯한 기타 등등을 잊으라고 가르쳐왔다.(23)

 

마치 소비에트 러시아의 몰락을 예언한 듯 하기도 하다.

모든 저항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투쟁을 잊게 만들고자 한다.

 

영토를 강탈하고, 타국을 복속시키고,

경쟁국을 파멸시키고 그 부를 약탈하고,

러,독,영 여타 나라들에서

국내의 정치적 위기로부터 노동대중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깨뜨리고 민족주의로 호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를 말살하려는 것,

이것들이 바로 현 전쟁의 유일한 실제 내용이자 중요성이자 의미(29)

 

폭격없는 전쟁은 언제나 진행중이다.

가진자들은 더 가지기 위하여 단결하지만,

못가진자들은 얄팍한 선전에 현혹되어 갈등한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그의 집필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마르크스를 소개하고, 그의 업적을 간결하게 설명한다.

인간의 노동만이 유일하게 가치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소외시키는 것을 밝혀낸 천재 마르크스를 그 당시에 이렇게 간결하게 설명한 것은 돋보인다.

 

모든 계급 및 모든 나라는

정태적으로가 아니라 동태적으로,

즉 정지상태에서가 아니라 운동 속에서 고찰된다.(114)

 

변증법이라는 관점으로 과거와 미래를 바라본 레닌이라는 탁월한 관점을 읽는 일은 즐겁다.

한국의 오늘 역시 복잡하다.

이미 정경유착으로 인한 산업 불균형, 지역 불균형이 심각하지만,

썩어빠진 세력은 버티고 버티면서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당장 내년 6월 선거조차 어떻게 될는지 투명하지 않다.

박그네를 석방하려는 기류도 보이고,

암튼 세상은 늘 가진자들의 놀음에 가려진다.

 

한용운은 '알 수 없어요'란 시에서 그렇게 말한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고...

아무리 사그라든 것처럼 보이는 운동의 세력도,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다고.

세상의 이치는 그렇게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다만, 그 이치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이에게만 보인다고...

그칠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그 엄혹하던 1920년대의 중반에,

이렇게 '약한 촛불' 들고 있던 한용운은

지금의 촛불 시민의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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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2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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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2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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