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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평점 :
그의 삶을 읽는 일은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한반도가 특이하게도 온갖 산들과 강들로 굽이굽이 휘어진 강산의 모양을 갖고 있듯이, 그의 삶은 직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주름살처럼 곡절로 가득한 아홉 굽이 양의 장처럼 굽어 있었다.
그렇지만, 허영철, 그 사람의 '삶'은 오로지 '하나의 신념'으로 올곧은 것이었다.
여느 장기수의 이야기들이 다소 감상적으로 0.75평 감옥 안의 삶을, 그 인간답지 못한 살이를 이야기하는 데 그쳐서 좀 식상하기도 한 반면, 이 책은 그의 삶이 오롯이 펼쳐져 있고, 오히려 장기수로서의 삶에서는 이야기 대신 사료로 뒷받침하고 있다.
역사가 그를 한 번도 비껴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역사를 한 번도 비껴가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의 감옥 생활은 길게 소개되지 않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35년의 삶을 감옥 속에서 오로지 자기 사상을 굽힐 수 없다는 신념만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하는 나의 의문을 풀어주기에 이 책은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여느 종교가 오로지 '믿음' 하나로 삶의 목적을 삼는 반면, 북조선이란 나라에 대한 믿음은 그들이 살아왔던 짧은 삶, 짧은 역사에 대한 믿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 후, 남조선에 들이닥친 미군정의 강포한 폭압정치와 대조적으로 북조선의 정치 체계는 민중에게 땅을 주고 희망을 주고 삶의 이유를 주는 것이었다.
북조선에서는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화국'으로서의 국가 정체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기수들은 그 국가의 정체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분단이 되고 어언 60년이 흘러 가건만,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이름에만 '大'자를 써 붙였을 뿐, 민주주의 나라도, 공공의 이익을 위한 연대에서 비롯한 공화국이란 정체에서도 멀어져만 가고 있다.
시절이 흐르고 흘러, 소련은 망했고, 북한은 가난에 시달리며 핵폭탄으로 미국의 압박에 저항하는 극단적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허영철 옹 같은 장기수들이 꿈속에나마 그리던 인민의 조국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득할 것이다. 추억을 먹고 사는 것이 노인이라면, 공화국의 추억을 지니지 않고서는 그 장기수들이 '독종'인 인간이어서 그 전향 공작의 광풍을 이겨낼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지금의 남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그것 아닐까? 국가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단 하나의 비전을 보여주는 일. 자본가로 이루어진 '국익'이 아니라, 국가는 미국과 맞서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나라. 민주주의와 공화국이라는 정치 체제를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나라.
그저 미국에게 굽신거리며, 국민을 조선일보란 기관지를 이용하여 분열시키고, 사리사욕을 채우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자기들 돈은 스위스 은행에 모셔두는 <그들>의 나라, <밀실>의 나라가 아닌 <공화국>으로 만들기엔 이미 첫 단추가 너무 오래 전에 잘못 끼워져버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