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새벽에 눈뜬 자만이 볼 수 있다
김수덕 지음 / 한문화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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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라니...

나는 성경을 읽고, 금강경을 읽고, 노자를 읽으면서 마음 공부를 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해 왔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마음 공부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자기 기만이냐.

네 일생동안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느냐?
그게 누굽니까?
너다.
네가 의문을 품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그게 무엇입니까?
너다.
네가 네 삶 속에서 추구해 온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 줄 아느냐?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너다.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마다 저렇게 빛나고 있는데... 책에서 진리를 구하지 말 일이다.
아카시아 꽃 향기를 맡으면 '아카시아 껌 냄새'가 난다. 과연 본질은 아카시아 꽃인가? 껌인가?
진리를 눈 앞에 놓고, 매 순간을 사는 기적을 행하면서, 책 속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 책을 읽으며 반성을 한다.

인생의 은유로 가득한 "쇼 생크 탈출"이란 영화 이야기를 떠올린다. 황금빛 비가 내리는 자유로 가득한 그곳과 온갖 지저분함으로 가득한 이곳 사이의 아득한 거리란...

정성 안 들여도 잘 살 수 있을 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을 삶을 먼저 살아본 이들은 증거로 보여준다.

어제 소풍으로 등산을 갔다. 백양산 오르는 길은 터벅터벅 지루하고 고달팠다. 안개로 가득한 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이게 무슨 짓인가... 하다가도, 산을 오르는 것은 산을 올랐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니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배웠다.

크게 한 번 죽으면 도를 얻는다고 하는 말이 있다. 大死一番得道라.

등산을 마친 사람의 마음에 일렁이는, 말로는 옮길 수 없는 그것.
맛집 할머니가 까잇거 대충 집어 넣는 조미료의 양이 무게로 측량될 수 없는 그것.
그 도를 얻기 위해서는 정신의 화학 반응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화학 반응은 책을 통하여 얻기 어려운 법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문화가 욕망의 문화가 아닌 혼의 문화여야 하고, 혼의 성장이 그 목적이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명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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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 스페인 산티아고 편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김남희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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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문의 산티아고 가는 길 읽은 것이 3년 되었다. 그때 스페인어 회화 책을 사 두고 한 장 본 뒤로 그 빨간 책은 책꽂이의 어디에서 낡아가고 있다.

김남희의 전국 순례를 읽었을 때, 큰 감흥이 없었던 탓에 2권을 도서관에서 만나고도 다음에 다음에... 하고 있었다.

이번에 갔을 때는 어쩐 일인지 갑자기 '산티아고'가 눈에 확 들어왔다.

김남희의 사진도 멋있지만, 3년 전에 타올랐던 산티아고에 대한 욕정이 화르르~~~ 살아 오름을 느낀다.

내 나이 이미 마흔을 넘었지만, 올 겨울쯤 걸어서 서울까지 한 번 가볼 일이다. 그리고 마흔 다섯까지는 산티아고에 한 번 가볼까 계획을 세워서 저금도 하고, 준비도 해볼 일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우물안 개구리처럼 한반도 안에서 꼬물거리는 우리 민족에게는 좀 넓은 땅에 대한 이야기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산티아고 가는 길을 잘 모르는 한국인들에겐 유용한 책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필력과 사고의 깊이가 그닥 깊진 않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 몸무게를 내가 이겨나가는 일만큼 정직한 일도 없기에, 그가 극구 칭찬한 길위의 친구들을 차치하고라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생각한다.(가치가 충분하대도, 13,800원이란 가격은 너무하다. 이러니 도서관엘 뻔질나게 들락거릴 수밖에...)

삶은 어차피 혼자 가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곰곰 생각할 시간을 한 달 정도 가져보는 일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4년 뒤에 산티아고 가는 길을 밟을 것을 꿈꾸면서 뛰는 가슴을 잠재워 본다.

언제부턴가, 텔레비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Wellbeing이란 용어가 천박하게도 건강함 정도로 인식되어서 파워워킹을 하거나 운동장을 돌거나 채식을 하는 정도로 느껴지는 점은 아쉽기만 하다. 평일에 9시까지 연속극을 본 아줌마들이 학교 운동장에 9시에 몰려드는 것을 보면서, 그런 똑같은 삶이 어떻게 웰빙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wellbeing은 결국 welldying을 염두에 두고 이어져 나가는 한 개체의 한살이가 아닐까?

잘 살고 있는 <존재>란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야 판명나는 것일테니 말이다.

well-being과 함께 well-dying을 곱씹으며 걷고 또 걸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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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10-1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정군님이 서재에서 절찬리에 연재 중이신데...
그걸 보니..아 책에서 보던 걸 실현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어요.
저도 근간에 여기 한번 가야겠슴다..길 위에서..걷고 생각하고...

글샘 2006-10-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선수들 모아서 산티아고 한 번 갈까요? ㅎㅎㅎ
정군님을 보니, 가야지 하는 마음을 정말 내시는 분도 계신 모양입니다.
정군님께 용기를 얻어, 혼자서 적금이라도 들어야겠습니다.^^
 
박정만 시전집
박정만 지음 / 해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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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상 살다 보니 병도 홑적삼 같다...<죽음을 위하여>

... 숨쉬는 한밤의 일만은 끝내고 싶다... 나는 그저 바람부는 하늘로 돌아가야지... 너무 많이 외롭고 슬펐다... 마음은 항상 절집 추녀에 누워 명부전 부처님께 가는 곳을 물었었지만 지장은 땅속의 사람에 누워 산 자의 죽음 하나 건지지 못하고 그저 그런 날만 죽기까지 서원하고서... 이젠 평온한 모습으로 잠을 자야지...<고요한 잠으로>

저쪽 서빙고동 전철역쯤의 어느 모진 동네의 어두운 지하에 갇혀 조여오는 구두코에 맥없이 마음 상했네... 3일간의 추억이었어...<먹빛으로 물들어>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종시>

네 쌓은 탑이 하늘에 닿아, 이 뜻을 만방에 전하라. 눈물 있으면 그 슬픔 하늘에 주고 슬픔 있으면 그 슬픔 땅에 주어라. <불국사 역전>

박정만 시인을 읽노라면, 서정주가 그 안에 살아있다. 사람은 좀 모자라 친일을 해 놓고도 전두환 만세불렀으면서도 부끄런줄 몰랐지만, 모국어의 아름다운 리듬감을 감칠맛나게도 살렸던 그 미당의 노랫가락이 박정만 안에 살아있다.

짧은 서정적 노래에선 3음보의 가락으로 까치발 뜨다가도,
좀 뻣뻣하기도 한 생각이 피어오를 땐 4음보를 쳐올린다.

박정만 시집을 읽노라면, 그가 죽기 1년 전, 거의 10분 간격으로 써내린 싯구들은 그야말로 신내림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란 생각이 든다.

그가 시도한 넉줄 더하기 한 줄의 시 형식.

넉줄은 기승전결의 한시 형식으로 앞에는 경치가, 뒤에는 정서가 나오는 선경후정이고,
마지막 딱 한 줄 떼어 쓴 것은 마치 일본의 하이쿠라도 되는 양, 심금을 퉁~~ 울리고 만다.

그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긴 자유시를 쓰기엔 너무 짧았고, 그렇다고 고정된 시조같은 시를 쓰기엔 피가 뜨거웠던게지. 하이쿠가 보여주는 인생에 대한 통찰이 죽음 직전의 시들에선 가득 배어 나온다.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병을 얻고, 그래서 간을 앓다 올림픽 폐회식날 숨을 거둔 그의 시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 끊이지 않고, 이에 쫓기듯 써내린 원고지들이 피를 흘리는 듯한 시들로 가득하다.

그의 시 전집을 읽노라면, 지랄같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고문당할 일은 별로 없으니...),

미국놈들은 황새울로 병력을 옮기고, 북한은 긴장하여 오늘 핵실험을 해버렸다는 시끌벅적한 뉴스는 아직도 언제든 잡혀가서 고문당해 병신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이 우리를 지켜주는 잔혹한 나라라는 현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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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10-0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영혼이 자유로이 육체를 벗어나
자아의 허울이 문득 벗겨져버린 내면의 깊은 소리를 따라 써내려간 글들...
그의 글을 읽으면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의 이마를 짚어다오... 무척 좋더군요,..

글샘 2006-10-1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나의 이마를 짚어 다오.
저 외로움을 견디기 두려워서라도 건강해야겠습니다.
자아를 벗어던지는 길은 많기도 하겠습니다.
점심 먹고 유엔공원 한 바퀴 돌겠습니다.
 
리영희 저작집 12 - 21세기 아침의 사색 리영희 저작집 12
리영희 지음 / 한길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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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있는 미국 군대의 각급 사령관들은
남한을 세계에서 제일 이상적인 군사훈련장으로 확신하고 있다.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땅,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는 '무제한 사격 지역',
휴전선 북쪽에 있는 사격 목표로 가장 이상적인 살아있는 인간 표적,
그뿐이 아니다.
남한은 지구상에서 우리를 쫓아내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땅을 쓰는 임대료조차 달라고 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다.
(미하원 군사보고서 중)

 

리영희 선생님께...

선생님,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요.

전환 시대의 논리를 만난 85년 봄부터 이미 이십 이년이나 흘렀건만,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가슴이 울컥거리고, 지난 가르침들이 모두 도루묵이 되어버리는 회한에 파묻히게 됩니다.

군부 독재의 하수인이었던 경찰들이 <의식화 원흉>으로 꼽으며 대학생들의 자취방, 하숙방에서 수거해간 선생님의 책들은 <의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에 충분히 논리적이었습니다.

반공, 애국적 국민으로서만 길러진 비논리적 인간이 <논리적 인간>이 되는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는 친일파가 계승한 남쪽과 친일파를 청산한 북쪽으로 나눠진 데서부터 비극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남쪽에서는 친미 정권과 미국이 만든 서울대 출신들의 활약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이성적이고 가장 퇴폐적인 자본이 지배하는 괴물 국가로 전락해 버렸고요.

선생님께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시는 세계 평화를 위한 휴머니즘적 문제들.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인의 무지와 무관심, 무식한 신념들...

원폭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인이라면 죽어도 좋다는 과격한 맹목들...

남한은 천사, 북한은 악마라는 이분적 무뇌아의 발상들...

하나님의 나라 미국은 무조건 착한데, 악의 축 북한은 가증스럽기가 끝없다는 기독교환자들...

아직도 한반도를 덮고 있는 폭력과 억압의 매카시즘...

이 문제들을 선생님의 목소리로 듣기 어렵다는 것이 너무도 가슴아플 따름입니다.

 이젠 노자를 생각하시겠다는 선생님을 생각해 봅니다. 젊은 시절, 올바른 길을 향해 굽히지 않으시던 선생님이셨기에 폭력 정권에 의해 투옥되셔서 얻은 병환으로 이젠 더이상의 문필 활동은 불가능하시겠지요. 이젠 마음 편하게 사십시오.

아직은 바보같은 대통령밖에 뽑아놓지 못하는 바보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폭력 정권보다는 바보같은 대통령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바보같은 대통령이 할 소리는 하겠다고 했으면서도 바보같이 이라크에 군인을 보내고, 추가 파병, 연장까지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글이 아닌 대담을 통해서나마 들을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입니다.

북한의 핵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 거짓으로만 뒤덮인 소위 언론이란 도둑놈들과 허접한 쓰레기만 돌아다니는 인터넷으로는 진실의 하늘을 바라볼 수 없어 답답하지만, 선생님의 시원스런 이야기들을 듣노라면 하늘 덮은 쇠항아리, 금세 찢겨지는 소릴 듣는 듯 합니다.

물질이 부족해서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나치게 숭배해서 가난해져 버린, 마음마저 가난해져 사람마저 사고 파는 구역질나는 시간과 공간에서 사는 일도 참 어렵습니다. 이 가난한 영혼의 나라에서 종교마저 물질 숭배로 치닫는 모습을 보며 정신적 지주가 얼마나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부디 건강 조심하시고, 오래오래 우리에게 엄한 스승님이 되어 주십시오.

수시로 물질에 휘둘리고, 안락에 유혹받는 중생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불쌍한 이 땅의 인민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은 아닐지라도, 부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도록 옳은 말씀을 두고 두고 들을 수 있도록 시원한 생명수를 자주 들려 주십시오.

선생님의 책이 열 두권의 저작집으로 묶인 것이 한편 흐뭇하면서도,

이 책을 끝으로 선생님의 책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이 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에는 이 땅의 이야기들이 가득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처럼 읽겠습니다.

다섯의 떡과 둘의 고기로 먹지 못할 것이란 생각으로 걱정만 앞세우는 반통일주의자의 마음을 몰아내고, 먹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가난한 이의 천국을 만드는 데 정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군대식 조직으로 가득한 이 나라와 이 정신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하겠습니다.

미국이란 초강대국에게 가장 수탈당하는 이 땅의 민중을 잊지 않고, 휴전선에서 뚝 떨어진 평택 땅 황새울에 기지를 세우고, 이제 이라크전을 덮고, 한반도 전쟁을 준비하는 슈퍼맨의 나라가 저지르는 모든 죄악을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겠습니다.

아직도 반공법과 꼭같은 국가 보안법이 형형하게 눈을 부릅뜨고 인민을 억압하는 <애굽>의 나라에서 날마다 날마다 탈출하는 엑소더스를 연출하기 위해서 잊지 않고 마음을 다짐하겠습니다.

날이 점점 차가워집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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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4-04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일부러 저런 제목 붙인 거예요. ㅋㅋ
사실 역사의 양지에는 한승조 조갑제 저런 새끼들이 살잖아요. 국가보안법의 철통 밑에서... 그렇게 비꼬려 한 겁니다. 저도 범죄일보는 안 보지만, 버러지이긴 한 것 같네요.ㅋ
 
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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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알라딘에서 이 책의 리뷰를 읽고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열심히 찾았다. 학교 도서관에는 산도르 마라이의 이혼 전야만 있고 이 책은 없었고, 도서관에서는 늘 대출중이었다. 이번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만났는데 이미 그 표지가 손때에 절어서 테이프까지 붙여 둔 낡은 상태였다.

겉표지의 여인이 감춘 감정이 열정이라는 듯이 표지는 독자를 끄는 힘이 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다 보니, 낡고 오랜 성에 웬 장군 출신 노인이 느릿느릿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오로지 노인의 시선으로 노인의 모놀로그(독백)로만 이야기는 진행된다. 마치 노인은 추억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 듯이... 더욱이 유모 니니의 존재는 잿빛 스토리를 더욱 그레이 톤으로 바래게 만든다.

41년 만의 친구의 등장으로 지루하기 그지없던 노인의 이야기에는 탄력이 붙고, 드디어 스토리가 개입하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열정>이 불붙는다. 그 모놀로그에는 철학이 담기고, 오랜 삶을 반추하며 털어 놓는 회한과 의문이 쏟아지는데... 이 책의 뒷부분 1/3을 차지하는 노인의 이야기를 읽기 위하여 지루함을 조금 참고 앞의 2/3를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마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있는듯한 인간의 분류와 사랑과 질투, 인생의 덧없음이 교차되며 직조하는 <열정>이란 직물에는 오로지 헨리의 모놀로그라는 실만 부려쓰는 작가의 노회함이 돋보인다.

아가사 크리스티 류의 추리 소설처럼, 친구 콘라드의 시점으로 본 모놀로그도 삽입되고, 거기에 이미 죽어버린 크리스티나(난 크리스티나를 읽으면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 가진 박진감과 크리스틴 다에가 지닌 신비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가 기록한 노란 일지의 진실마저도 부가되었더라면 이 소설은 통속하기 그지없는 러브스토리로 전락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글을 쓸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충동에 대한 오성의 승리를 선포하고 죽음에의 동경을 제어할 수 있는 정신의 저항력을 믿은 시대와 세대가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려 한다."는 저자의 말에서 헤세가 보여준 지와 사랑의 한 측면, 즉 <지>로서의 화자로 헨리를 선택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인간들이 처한 상황을 깊은 뜻 없이 기계적으로 정의내리는 낱말들이 있는데, 지금 우리 두 사람처럼 모든 것이 끝나는 경우, 그런 낱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기만, 부정, 배반..." 이같은 대목은 뜨거운 연애담을 깊이있게 만드는 장치로 보인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삶이란 것은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진 존재들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으로 엮어지며, 그 동경은 동류임을 확인한 존재들끼리 교류하는 것을 바라보는 이의 질투를 자아내게 하는 역정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스스로 소외시키고 마는 <지>의 오성은 고독하고 퇴색한 잿빛으로 울고 있는 것이다.

이 <서로 다름>에 이끌리고, <서로 다름>에 상처받는 인간이 만든 작품이 <2분법>이란 것이다. 지와 사랑을 나누고, 이성과 예술로 나누고, 혈액형별로 기질을 나누고, 히포크라테스처럼 기질을 구분한다. 점액질인 사람과 다혈질인 사람은 서로 끌리면서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다르다>를 써야할 경우에 <틀리다>를 쓰는 경우가 많다. 틀린 그림 찾기에서부터 '나는 너와 생각이 상당히 틀려.'처럼 쓰고 있기도 하다. 다른 것은 서로를 인정하는 표현이지만, 틀렸다는 말은 가치를 포함한 용어다. 산도르 마라이는 계속 대답을 요구하다가 독백으로 점철하고 끝내 독백으로 마치는 이야기 전개를 통해서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열정에서 비롯된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지나갈 것임을 <지적>으로 통찰함으로써 이야기를 마치고 있다. 그의 내부에서 <지>가 <사랑>을 맞아 승리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다.

산도르 마라이를 찾아 읽으며 이 가을을 보냄도 재미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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