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는 힘 틱낫한 스님 대표 컬렉션 3
틱낫한 지음, 김은희 옮김 / 명진출판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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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틱 낫한 스님의 글을 읽다 보면, 그 분의 인격을 느낄 수 있다.

종교에 대해 아는 체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이야기는 어느 소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소년이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과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소년은 기도를 버리게 된다는 것.

과연, 기도의 본질은 무엇인지, 사람들은 기도한다고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왜 기도에 집착하는지... 기도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인지를 스님은 조용히 말씀하신다.

꿀맛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하느님을 믿어라. 기도하면 이뤄진다고 강요하는 것은 억지다. 이렇게 조근조근하게 설명해 주어도 중생은 알아들을지 말지 한 거다.

‘기도는 한계에 맞닥뜨린 인간의 懇求간구에서 시작되어 영원하고 무한한 차원에 접속하는 것으로 끝나는 내면의 순례’라는 말이 옮긴이의 말에 나온다. 그렇다. 잘 나가는 사람은 기도할 일이 별로 없다. 누가 아프거나 수술을 받을 때, 기도는 저절로 나온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무한의 힘을 빌리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가 당장 나오진 않는다.

‘주여, 형이 암에 걸렸습니다. 부디 그를 고쳐주세요.’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에게 할 일을 요구한다. 마치 하느님이 자신이 할 일을 모르는 양...

이런 성찰을 보여주시는 것으로도 기도의 의미를 보여 준다. 왜 하느님께 원망을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기도는 궁극의 차원에서 거닐기다. 우리를 구하는 것은 사랑과 자비의 에너지다.

기도할 때 반드시 스스로를 통찰해야 한다. 우리는 절할 때 그 불상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자기 내면의 가장 고귀한 불성을 향해 절해야 한다.

기도란 좋지 못한 과거를 바로잡고, 더 좋은 미래를 예고하는, 오늘의 선순환의 씨앗이라고 보면 된다. 오늘 내가 심는 겨자씨만한 선한 마음이 내 미래가 된다.

세상의 모든 요소는 모두 연관되어 있고, 전혀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다 이어져 있기 때문에, 기도의 에너지를 통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로운 장으로 전화(轉化)할 수 있을 것이다.

전화기를 쓰려면 전화선이 있어야 한다.
전화선에는 전기가 들어와 있어야 한다.
기도도 마찬지다.
사랑과 자비 없이는 어떤 신과도 소통할 수 없다.

감사합니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고맙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 햇살과 공기와 미소를
만족합니다.
행복합니다.

이렇게 좋은 기도를 왜 안 하랴.

하느님께서 이루는 모든 일들은 그대로 이루어 지는데, 왜 감사 기도를 하지 못하고, 늘 불평 불만에 싸여 살겠는가.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라... 전화벨이 울려도 기도하고, 정각을 알리는 시보에도 기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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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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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홍준이 인문학적 시각을 넓히면서 문화 유산 답사를 강의했다면,
오주석은 우리 그림의 성공적 형상화를 찾아서 쉽고도 재미있게 강의한다.

처음 그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었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려 한참을 혼이 났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권을 읽을 때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김홍도까지 읽었다.

그러던 중, 우리에게 더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고 세상을 버리셨다.

막연하게, 한국에 대해서 애국심을 가지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나는 한국을 사랑할 수 없었다.

매주 운동장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쳐다볼 때, 나는 눈이 부셔서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광주에서 동포를 살육하고,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여 최장기수를 양산하는 나라를 조국이라고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십 년 월급을 모아도 집 한 칸 살 수 없고, 장군의 아들은 거지가 되고 친일파 후손은 땅땅거리며 땅부자가 되는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주석 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면 한국인이란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된다.

형상을 극소화하면서도 상상을 극대화 하는 김홍도의 그림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한국화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종이 창에 흙벽 바르고 벼슬 없는 선비로 살며 시가나 읊조린다. 단원"처럼 부박하게 살면서도 단아한 품위를 잃지 않는 선비의 모습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신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송하맹호도처럼 우리 겨레의 상징인 호랑이를 통하여 나약하거나 패배적 민족이 아님도 보게 되고...

이 책은 고인의 유작이어서 뒷부분에 가서는 메모만 남은 부분도 있어 고인의 글을 더이상 만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게 한다.

스포츠 쇼비니즘같은 광신적 애국주의를 벗어나는 길은, 우리 문화를 이렇게 알림으로써 식민지와 전쟁을 통해 내면화한 자격지심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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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잊었는가. 모두 잊어버렸는가.... 하던 26년 전의 5월을 우리들은 잊지 않았다.

내가 대학 강의실에서 읽었던 얼룩얼룩한 인쇄물들과 여러 번의 복사를 통해서 흐릿해진 사진들 속의 피눈물들을...

강풀은 무등의 5월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5월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고, 권력자의 주변에서 아무 생각없이 <열심히> 살고 있는 생활인들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적 특성인 <망각>이라는 조각상을 망치 한 방으로 통쾌하게 깨버리고,
<용서>에는 반드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가르쳤다.

해결책은 그것뿐이 없음을 이 만화를 통하여 강풀은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와 삼청 교육대의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망월동을 바라보며 날마다 눈물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이 만화는 고마운 약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는 없다 하더라도, 위로가 되는 진통제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리고 26년을 망각하고 하루하루의 생활에 얽매인 한국인들에게,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욕하기 전에, 한국에서 과연 <죄송합니다. 다 제 책임입니다.>하고 반성한 놈 있었는지 강풀은 외치고 있는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겨레 신문을 욕하고, 노조와 노동자들을 욕하고,
스크린쿼터 반대하는 영화인들을 욕하고,
FTA 반대하는 데모꾼들을 욕한다.
전교조를 욕하고, 자기 자식을 욕하고, 자기 친구를 욕하고, 바로 자신를 욕한다.

우리에게 서로 욕하고 서로를 헐뜯으며 이전투구를 벌이도록 꼭두각시 놀음줄을 흔들고 있는 이의 이름은 바로 <자본>이다.

한국 정치라고 하면, 대통령과 여당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여길 정도로 이 땅에선 대통령과 여당의 힘과 권력, 그 부패가 심했던 것이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적은 <여당>도 <야당>도 <미국>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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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과식이라 하고, 무섭게 먹으면 폭식이라 한다.

책도 적당히 읽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읽으면 과독이 될 것이고, 겁나게 읽으면 폭독이 될 것이다.

요즘 책읽는 습관을 보면 과독을 너머 폭독으로 넘어가는 듯하다.

2학기 들어 3학년 녀석들이 아무 할 일 없이 앉아 있어 독서를 시킨다. 대부분 책을 읽지 않고 만화를 보거나 휴대폰으로 장난을 치거나 하지만, 아직 중간 고사가 먼 지금 시점에서 수업을 열심히 할 수가 없다. 그 시간에 책을 보는 양도 무시할 수 없다.

집에 가서도 지난 주까지는 가족과 외식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했는데, 이번 주부터는 중간고사 준비한다고 같이 책을 잡고 앉아 있어야 하니 책 읽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얼마 전에 학교 도서관에 신간이 들어왔는데, 내가 신청한 책이 수십 권 들어와서 읽어 달라고 대기중이어서 도서관에만 가면 묵직하게 책을 빌려 오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권'과 '이덕무의 사소절'이다.

오주석 선생님의 글을 여섯 편 중 두 편 읽었는데, 미치겠다. 오주석 선생님의 설명으로 미술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래서 오주석 선생님의 빈 자리가 그만큼 더 크다. 이덕무의 사소절은 조성기씨의 설명으로 따라가는데, 단아한 선비의 모습과 칼날선 꼿꼿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오주석 선생님을 읽다가, 오전까지 읽은 책 세 권을 반납하고 새 책을 빌려 왔다. 오주석 선생님을 훌쩍 다 읽어 버리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다.

오늘은 큰 맘먹고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빌렸다. 지난 번에 시립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서문만 읽고 반납한 책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좀 여유있게 봐도 되니 좋다. 이사하는 통에 다 못 읽은 것이 아쉽던 차에 차근차근 읽어볼 예정이다.

한스 크루퍼의 '마음의 여행자'와 틱낫한 스님의 '기도'는 마음 공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늘 깨어있는 마음을 재우치기 위해 보약삼아 빌렸다.

밀드레드 테일러의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와 나카지마 야츠시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깨어있는 올바른 정신을 위해 빌렸다. 혹시 교과서에 실을 만한 것이 없을까 생각하면서...

책꽂이에 새로 읽을 책을 가득 빌려다 놓고 차를 한 잔 하고 있으면, 추수를 마친 농부의 심정이 되어 흐뭇하다. 정말 맛있는 책을 야금야금 조각내 아껴가며 꼭꼭 씹어 읽는 일은 어떤 즐거움보다도 내겐 큰 행복이다.

이사를 하고 책장 짜는 아저씨가 구석에 징그럽게 쌓인 책들을 보더니, "책만 저렇게 보는 신랑은 재미 하나도 없겠다."는 말을 하는 걸 듣고 쿡 찔렸던 적이 있다. 아내가 놀자고 하면 놀면서도 간혹은 책보고 싶은 생각이 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난 아내가 놀자고 하면 두말 않고 논다. 하던 일이 정말 시급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이 이혼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만, 당분간은 아들 녀석 시험 기간이라 근신하며 지내야 하므로 아내는 답답할는지 몰라도, 나는 책 속에 푹 파묻혀 있을 수 있는 조용한 기간이다. 쉿! 아내에겐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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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9-27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쉿!, 세상엔 빔일은 엄따!!(고자질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해콩 2006-09-2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저렇게나 많은 책들을 한 번에 읽으신단 말예욤? 나같으면 벌써 -,,- 이렇게 쌍코피 터졌겠다. 나카지마 야츠시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좋아요~ 읽은 게 이것 밖에 음네요.. ^^;

글샘 2006-09-2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고자질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래요. 세상에 비밀로 해야할 것은 정말 얼마 안 되지요.
해콩샘. 한번에 읽는단 말이 아니고, 빌려다 놓았단 겁니다. 오늘은 그럼 나카지마를 한번 읽어 볼까요?

해콩 2006-09-3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며칠만에 저 많은 책 모두, 결국 독파하실 거잖아요.. ^^;

글샘 2006-09-3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파라고 하시니... 좀 전쟁같은 분위기가^^
어제 도서관 가서 시집 네 권 더 빌려왔습니다.^^ 추석때 봐야지...
 

[즐거운 그림읽기 7] 콜리어와 헌트, 두 화가의 그림 비교
텍스트만보기   고지혜(sophiako) 기자   
그림이나 사진에 작가가 담아두고자 하는 주제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자연이나 인간의 삶과 내면을 표현하게 됩니다. 또 더러는 전설이나 신화를 바탕으로 작가 특유의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그 영상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과 이야기를 시간와 공간의 제한없이 듣고, 보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욕심 많고 힘 있는 자들이 대접받는 어수선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오히려 맑고 아름다운 그림이나 순수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더 그러워지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여 양심을 지켜 행동했으며, 지금도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속의 한 여인을 만나보고 외모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아래 두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그 당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11세기 영국(England)를 무대로 한 유럽 귀족들의 사랑과 전쟁을 그린 역사소설이 그 배경이며, 이 그림 속의 인물이 고다이버(godiva)입니다. 당시 영국 코벤트리(Coventry) 지방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한 영주 리어프릭(Leofric)의 열 일곱 살 난 어린 부인으로, 남편의 폭정에 마음 아파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금을 내려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남편은 벗은 몸으로 마을을 한바퀴 돌면 그러겠노라 조롱하였고, 그런 남편의 말에 고다이버는 새벽을 이용하여 마을을 돌기로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 마을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녀의 모습을 내다보지 않기로 굳게 약속을 하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래 두 그림은 1000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 전설 속의 여인을 900년 뒤이며,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도 훨씬 전에 두 화가가 각각 그린 작품입니다. 각 그림의 작가에 대한 약력을 먼저 간략하게만 살펴보고, 두 그림을 비교, 감상하면서 그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 고다이버 부인 (lady godiva), 1898
ⓒ Collier
콜리어(Hon John Collier, 1850~1943)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신고전주의 화가로 그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습니다. 1850년에 콜리에는 후에 몽스웰(Monkswell)의 군주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유명한 재판관이었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화가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나이가 어려 학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당시 유명했던 화가 타데마(Alma-Tadema, 네덜란드, 신고전주의, 1836~1912)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하였습니다.

▲ 콜리어(Hon John Collier)의 초상
ⓒ Don Kurtz
슬레이드(Slade) 학교를 거쳐 파리와 독일 뮌헨(Munich)에서 공부하였고, 전쟁 중에는 외국인 사무실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몇몇 학교에서는 그를 화가로 주목하지 않았으나, 그는 실제로 유화 입문서(A Manual of Oil Painting)의 저자였으며,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표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구성적인 느낌과 선의 표현에 있어서는 높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이른 아침으로 보이는 미명에 마을의 중심가를 향해 말 한 필이 걸어갑니다. 그것도 자태 고운 한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알몸으로, 긴 생머리와 고개를 늘어트린 채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다소 외설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림의 상황으로 볼 때, 시끌벅적해야 할 마을의 광장은 이상할 만큼 고요하고 정적에 쌓여 있습니다.

사람 하나 볼 수 없으며, 심지어 건물의 문이나 창문조차 굳게 닫힌 채,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누구 하나 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이 없음은 물론이고,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마을 같아 보입니다. 햇빛도 수줍은 듯, 그녀의 몸을 비껴 부드럽게 흩어집니다.

다시 그 당시의 배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1세기의 영국은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으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6세기 이후 유럽대륙에서 건너온 앵글로색슨(Anglo Saxon)의 나라였고, 8세기와 10세기에는 북유럽바이킹 족인 데인인들의 침략을 받았으며, 11세기 초반은 이 데인족의 왕인 크누트 1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데인인들의 영국 통치로 농민계층의 몰락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전에는 영주의 땅을 빌려 소작만 하던 농민들의 자유 신분이, 데인인들의 가혹한 세금징수에 의해 노예상태인 농노의 신분으로 하락했고, 급등하는 세금의 무게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으며, 영주에게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속박되었습니다.

런던과 비교적 가까운 코벤트리도 마찬가지여서, 이 지방의 영주 레오프릭도 농민으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신실한 종교인이었며, 신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던 고다이버는 본 토착민인 앵글로색슨이며, 남편은 통치하던 데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다이버는 나날이 몰락해가는 농민들의 입장에서 가슴 아파 하였고, 남편의 과중한 세금을 줄여 영주와 농민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고다이버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 보내던 남편 리어프릭은 그녀의 간청이 그칠 줄 모르자,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제안을 그녀에게 하는데, 그녀의 농민에 대한 사랑이 진실이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세금감면을 고려해보겠노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림으로 보아 그녀는 깊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며, 많이 망설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코벤트리 마을의 농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며, 거사가 이루어질 날짜와 시간도 알려졌습니다. 이에 마을 농민들은 영주 부인의 마음과 결단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녀의 숭고한 의지를 존중하여, 다함께 큰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녀가 마을을 도는 동안, 누구 단 한 사람도 내다보지 않기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마침내 고다이버 부인이 벌거벗은 채 마을로 내려온 날 아침, 코벤트리 전체는 무거운 정적이 흐렀으며 이 은혜로운 알몸행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호기심을 참지 못했던 코벤트리의 양복재단사 톰이 마을사람들과의 약속을 잊어버렸고, 그만 커튼을 슬쩍 들추어 부인의 벗은 알몸을 보려는 순간, 그만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습다. 아름답고 숭고한 고다이버의 뜻을 성적인 호기심으로 더럽힌 데 대한 신의 징벌이었다는 전설입니다. 또한 훔쳐보기의 대명사(관음증)로 피핑 톰(Peeping Tom)이라는 말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학자와 역사가,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관행이나 상식, 힘의 역학에 불응하며, 대담한 역의 논리로 뚫고 나아가는 정치'를 고다이버 부인의 대담한 행동에 빗대어, ‘고다이버이즘(godivaism)’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의 숭고한 정신과 지성을 기리고, 이런 정신을 존중하는 정치를 그리워함 일 것입니다.

▲ 고다이버(Godiva), 1856
ⓒ Hunt
헌트(William Holman Hunt, 영국 런던, 1827-1910)는 전라파엘파(협회)의 설립자이며, 런던에서 한 도매상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생을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며, 진지한 성격으로 유머 감각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1844년 왕립예술학교에 입학하여 밀라이스와 로세티를 만났고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1854년에는 그가 그리고자 하는 종교 그림의 실제 배경을 관찰하기 위해 성지를 방문하기로 결심합니다.

▲ 헌트(Hunt)의 자화상
ⓒ Hunt
그의 첫 번째 결과가 속죄양(The Scapegoat)과 세계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며, 화가로서의 인정과 재정적인 안정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영국 남부의 서리(Surrey) 주에 있는 시원한 숲에서 타고난 재능은 없었지만, 순전한 노력과 헌신으로 밤에 작업하였습니다. 성공한 화가로 인정도 받았으며, 말년에는 빅토리아 로마 여황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를 끄는 화려함과 매력적인 개성이 있습니다.

이제 소박해보이는 연필소묘의 위 그림을 보는 느낌이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첫째 그림에서 그 사연을 들었기에 자태가 고운 부인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림만 놓고 보아서는 그냥 평범해 보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하지도, 결심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 여인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마을 농민들의 세금 인하를 위해 말을 타고 알몸 시위를 했던 전설을 듣고 보는 그녀의 모습은 결코 평범해보이지 않습니다. 이야기로만 듣던 그녀를 이 그림에서 만나는 처음 느낌은, 전설과는 다르게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화려하고 무척 아름다우리라고만 상상했던, 그녀에 대한 기대를 무참히 뭉개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그녀의 모습과 그림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런 실망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에게 또 한 번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는 앞 모습이 아닌 조금은 도도해 보이는 옆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연필로만 그린 흑백 그림이기에 그다지 화려해 보이지 않는 옷차림이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자태와 곱게 빗어 뒤로 올린 우아한 머리와 당당한 손 매무새, 단정하게 여민 앞섶, 그리고 곱고 길게 느러진 옷자락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예사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배경으로 보이는 소품들 하나하나도 그녀의 자태를 돋보이게 합니다. 뒷 배경의 가운데를 채우고 있는 아치형의 문과 왼쪽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 위의 인간 예수의 모습, 왼쪽으로 앞에서 중간 쯤의 학의 모습, 그 밑에 카멜레온 모양의 벽장식이 그녀의 삶과 영혼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른쪽 뒷 배경에 보이는 보리 이삭 같기도 하고, 이름모를 들풀의 꽃 같기도 한 벽면 장식까지 그녀의 결단과 행동으로 인한 농민들의 결실과 풍요로워진 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점은 그토록 아름다운 마음과 지성(至誠)을 지닌 고다이버 부인의 초상화를 색깔도 넣지 않고, 소박한 연필 소묘로 그렸다는 것이며, 작가의 이런 의도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헌트는 그의 약력에서도 살펴보았던 것처럼, 실제보다도 더 화려하고 매력적인 그림을 많이 그려 당대에서도 인정을 받았던 화가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화려한 색채를 버리고 굳이 단아한 연필소묘로 그린 의도는 그녀의 숭고한 영혼에 예의를 갖추고자 했던 배려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눈으로 보이는 겉모습이 아닌 그녀의 마음과 인성을 담아내려는 화가의 의도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기에 그 어떤 채색그림보다도 더욱 놀랍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림에 대한 사연과 뒷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보는 윗 그림의 앳된 고다이버는 숭고하고 성스러워 보이며, 전혀 외설스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도 아름다울 것 같은 그녀의 앞 모습도 보고 싶어집니다. 쉽지 않았을 결정을 내리기 위해 깊은 고민과, 그 실천을 위한 깊은 사색에 잠겼었을 그녀의 영혼이 그리워집니다.

당당한 자태와 담대한 용기, 그 마음에 품은 지성(至誠)이 더욱 고결해 보이며, 그림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그 뜻 깊은 행동을 다시 돌아보고 기억하게 합니다. 고다이버 부인의 파격적인 알몸 시위는 힘없는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아름다운 결심이었으며, 이웃을 돌아보는 고귀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진솔하고 성실했으며, 현실을 성찰할 줄 알았던 자비로운 지성을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화가의 약력은 "영국 빅토리아왕 시대의 예술(Victorian Art in Britain)" 이란 책에서 발췌, 번역한 것이며, 그림과 설명은 Art Renewal Center(http://www.artrenewal.org)와 이스리(http://blog.naver.com/viriditas), 라르고(http://blog.naver.com/ks070)에서 도움을 받았고 참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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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9-2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오늘은... 고다이버로 여는 아침이군요 ^^

글샘 2006-09-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음'에서 쬐끄맣게 실린 저 그림을 클릭했다가 이런 이야기를 퍼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피핑 톰인 듯...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