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표지는 손택의 주장을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야의 그림인데, 터번을 쓴 놈 하나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교수형 당한 이의 시신을 지그시 올려다 보는 그림이다.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매일 엽기적인 사건, 사고가 인터넷을 통하여 방송되며, 엽기적인 이미지들이 올라온다. 과거처럼 타인의 알몸을 훔쳐보는 관음증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다. <엽기>란 말은 이미지 시대에 떠오른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도 엽기이고, 지저분해 입에 담기 힘든 것도 엽기이며, 상식을 깨는 것도 엽기라는 말로 쓴다.

엽기 중에 시신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있다. 이것은 오랜 이야기다. 전쟁터의 시신, 부상자, 기아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기자들은 이미지로 남겨 두었다. 그런데 그들의 고통을 통해 그 이미지가 던지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아는 생산량이 적어서가 아니라 분배가 잘못 되어서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그런 사진을 왜 찍는단 말인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잔인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것이란 전제를 이 책에서는 깔고 있다. 손택은 그걸 반성하라고 하는 말도 아니고,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상한 척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표지 그림으로 돌아가면, 목졸려 죽은 이의 정면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바지가 무릎까지 내려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터번을 쓴 녀석은 죽어가면서 발기되고 사정하는 장면을 느긋하게 관찰하고자 하는, 마치 만주에서 맹활약을 했던 731부대의 마루타와 같은 광경이 아닐까 한다. 오죽하면 그 소중한 관동군 부대의 자료를 얻기 위해 미군이 그렇게도 일본에 관대했다지 않은가.

작년에 달리 회화전이 열렸을 때, 달리의 스케치 중에서 목졸려 죽는 이의 발기된 모습과 사정하는 장면, 혀를 길게 뽑은 장면을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아, 인간의 본성이란 이토록 잔인하고 지저분한 것일까? 진정 성악설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을까?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인간의 심리는 <정의>나 <폭로>의 그럴싸한 미명으로 치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 고통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일때, 그것을 보여주고 싶겠는가?

정신대 할머니들이 솔직히 털어놓기 힘들었던 것이 그런 것이고, 정신 나간 이승연이가 돈벌이를 하겠다고 발광을 했던 것도 인간의 그런 속셈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펜트하우스나 허슬러의 홀딱 벗은 여인네는 이제 인터넷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시시한 것이 되고 말았다. 더 짜릿한 장면은 좀더 강한 타인의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다.

진중권이 빨간 바이러스에서 <효순이와 미선이> 사진전과 <미군에 찔려죽은 창녀> 사진을 전시하는 것을 마구 깠던 적이 있다. 80년 광주의 사진을 들이미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광주는 전두환이가 죽으라고 막았던 사진이기 때문에 충분히 폭로했어야 하는 사진이었단 거다. (하긴 그 사진들에 보면, 전두환이 갈아 마시자...란 구호도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효순이와 미선이 사진은 다 밝혀진 범죄인데 과연 그 아이들의 허연 뇌수가 드러난 사진을 전시한다고 해서 <주둔군 지위 협정>이나 <미군의 폭력>을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인지를 문제제기한 것이다. 난 처음에 참 까탈스레 군다고 생각했더랬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진중권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폭력은 폭력의 피해자를 <사물>로 뒤바꿔 버린다. 광주에서는 피해자를 <폭도>로 몰아버렸고, <빨갱이>로 매도했다. <빨갱이>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물 아니던가.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서 <삼청교육대>를 운영하면서 법 아닌 법을 휘둘렀던 광기의 시대였다. 내가 80년대에 경찰서에 몇번 가서 얻어터진 것도 <사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언제 <사물>로 둔갑할 지 모르는 정신적 광란 상태에 늘 빠져 있다.

FTA에 대한 기대를 잠시 내보내고, 그 외의 시간에는 붉은 악마 바이러스에 전염되어버린 텔레비전. 이 바리러스를 치료할 백신은 구할 수 없고, 오로지 확산 일로에 있는 빨간 바이러스. 빨간 바이러스의 확산에는 빨간 신호등이 없다. 오로지 푸른 신호등으로 신호를 조작하는 <검은 손>이 있는 것이다. 그 검은 손 이면에는 보수 꼴통과 미 제국주의자들의 음흉한 웃음이 자리하고 있다. 좌파 자유주의자라고 착각하는 보수 기회주의자들의 정권도 주체를 못하고 꼭두각시 놀음에 빠져 있다.

하긴, 조중동, 타워팰리스, 대한민국 1%, 기득권자들에게는,
농촌에서 지렁이들이 살려둔 흙을 만지며 봄을 파종하는 농부들의 마음이나,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의 가난한 심사와,
어떻게 들어간 직장인데, 금세 잘려버린 철도 여승무원들의 파업 따위는,
결국 FTA가 되든 말든 자기네들은 상관 없는데, 아니 성장률이 올라갈테니 지들은 이익이겠지...
<타인의 고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닐테지.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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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시선 <타인의 고통>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8-07 03:50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전반적인 리뷰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외로운 발바닥 2007-03-26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절반까지 읽고 있어서 전체적인 내용이 정리는 안되지만, 요즘 FTA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손택의 지적처럼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FTA 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타인들이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텐데 말이죠...
 
 전출처 : 돌바람 > [퍼온글] [펌/민소] '먹튀' 자본 부추기는 한미 FTA - 이해영 한신대 교수 짧은 인터뷰

 

'먹튀' 자본 부추기는 한미 FTA
<민소라디오 전문서비스> 이해영 한신대 교수
현석훈의 시사광장    메일보내기

   
 서세진 - 한미 FTA 1차 본협상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15개 분과 중 농업과 위생 검역, 그리고 섬유, 무역규제를 제외한 11개 부분의 통합 협정문이 마련되었는데요. 현 정부는 과거 어느 나라보다도 신속하게 협상을 진행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님과 한미 FTA 1차 본협상 결과에 대해서 말씀 나누어 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해영 - 안녕하십니까?
  
  
  서세진 - 11개 부분의 통합협정문이 마련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통합협정문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해영 - 통합협정문 자체가 최종결정문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큰 의미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통합협정문이라는 것은 양국이 제안한 협상 초안들을 합해서 하나의 협정 문안을 만든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서세진 - 1차 본협상에서 11개 부분 통합협정문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1차 본협상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평가를 해 주신다면요?
  
  이해영 - 통합협정문이 만들어 졌다고 하더라도 협정 문안에 대한 협정이 마무리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협정문의 60% 가량의 부분들은 여전히 협의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까지 한미 FTA 1차 협상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문제는 합의된 부분이 합이되지 않은 부분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겁니다. 즉, 한미 FTA와 관련해서 투자와 서비스 분야에서 양국이 합의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한미 FTA라는 것은 서비스, 지적 재산권 등 이른바 신통상이슈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에 과한 부분이 합의가 되었다는 것은 향후 한미 FTA에 관련된 협상의 전망을 매우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세진 - 학계 전문가들은 제2의 금융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협상에 대한 위험성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해영 - 투자 분야는 이미 IMF 이후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미 투자협정(BIT)이 오랫동안 협상이 진행되다가 스크린쿼터문제에 발목이 잡혀서 타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이것을 제외하고 한미 간의 협상은 완료가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에서 협정 문안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투자부분에 대한 부분은 BIT를 통해서 이미 공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이 BIT에 관한 문제는 매우 심각한 독소 조항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미 FTA 투자부분 협상의 첫 번째 문제는, 투기자본까지도 투자로 분리되는데도 불구하고 투기자본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미국식의 투자개념에 따르면 사채까지도 투자가 됩니다. 결국 이것은 투기와 투자에 대한 구분 없이 모두 수용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행의무 부과금지 조항입니다. 이것은 일체의 이행의무를 부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자율 송금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럴 경우 론스타 같은 '먹튀'자본의 경우 이 과실 투자 이익을 본국으로 송금하는데 전혀 방해를 받지 않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투자자 국가 제소조항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 투자자가 한국에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봤을 경우 한국 정부의 규제로 몰아서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국제법상으로 봤을 때는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NAFTA 에서 유래되어 한미 FTA도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멕시코의 예를 들면 미국 회사가 '메탈 클래드'라는 회사가 멕시코에 산업폐기물들을 갖다 버려서 그 주변이 오렴이 되고 주변 주민들이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멕시코 주민들과 멕시코 정부가 규제를 가하자 메탈 클래드는 NATFA 조항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메탈 클래드 사가 승소했던 예가 있습니다.
  
  
  서세진 - 정부가 협정 초안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해영 - 지금 한미 FTA의 경우 국민 경제 생활에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가 어떤 피해를 입을지 조차 예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물구하고 미국과 합의를 했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죠.
  
  우리의 경우 협상 동의권을 대통령이 가지고 있고, 국회는 그 비준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 헌법 60조에 명시되어 있는 동의권을 최대한 활용해서 행정부와 협상팀을 통제해야 합니다. 한-칠레 FTA의 경우에 행자부가 협상을 해 온 것에 대해 넋 놓고 있다가 결국 행자부의 거수기 노릇을 하고 만 것이죠.
  
  
  서세진 - 체결된 부분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 해 주셨는데요. 2차, 3차 본협상을 대하는 우리 측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해영 - 이번 협상의 경우는 실패한 협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얻어간 것과 우리가 가져온 것을 비교해 볼 때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 미국이 가져간 것은 실직적인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만큼은 다 챙겨 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적재산권의 문제, 신 금융서비스에 대한 부분, 노동 분야의 Public Communication의 문제 등 실질적으로 알맹이는 미국이 다 챙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의제 설정의 대부분은 미국의 요구안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죠.
  
  정부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저 다 받아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이 추세로 간다면 사실상 한미 FTA 협상을 끝났다고 보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이상 가져올게 없는 상황입니다. 농업 분야에서 미국이 몇 년 정도 더 봐줄 것이냐 정도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문의 상징적인 효과 때문에 마치 우리 국민들이 한미 FTA에 목매는 것처럼 보여지는데요. 결국 이렇게 되면 농업과 개성공단에 대한 부분은 질질 끌다가 결국은 일괄 타결에서 한국은 엄청난 조건을 떠안고 협상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 잘못된 협상에 대해서 협상단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동시에, 이 협상의 중단을 촉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세진 - 오늘 한미 FTA 1차 협상에 대해서 이해영 한신대 교수님과 말씀 나눠 봤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영 - 감사합니다.


2006년06월12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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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퍼온글] [프레시안]'서민경제 회생'의 전제는 한미FTA 저지입니다 - 정태인

'서민경제 회생'의 전제는 한미FTA 저지입니다  
[기고] 열린우리당 김근태 당의장께 보내는 공개편지

FTA라는 환상
 
  당의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다 붙이니 영 딱딱하군요. 하지만 많은 분들과 함께 읽는 편지라 생각하고 사적인 얘긴 되도록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정부의 한미 FTA 추진이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결국은 국민이 한미 FTA를 막아내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초가 받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정치지도자의 의무가 아닐까요? 특히 김 의장께서 경제학을 전공한 분이라는 데 또 한 번 희망을 걸어봅니다.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매체에서 얘기를 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수출과 투자에 대한 효과는 미미하거나 나쁜 쪽으로 나타날 것이고, 양극화는 극단으로 진행되리라는 겁니다. 이 점은 나프타 12년 동안 멕시코에서 마킬라도라 효과에 힘입어 그나마 수출과 외국인투자가 급증했지만, 살리나스 전 대통령의 약속과 달리 오히려 양극화가 심화한 것과도 대비되는 것이죠. 지난 6월 3일 KBS 스페셜을 보셨다면 눈으로, 또 가슴으로 확인하셨겠지만 양극화의 실태는 다음 그림으로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 제조업 생산성과 노동비용(연간 누적변화율, %, 1993~2002.6). 자료: J.W.Foster and J.Dillon, "NAFTA in Canada : The Era of a Supra-Constitution", KAIROS, p3.

  나프타를 맺은 세 나라 모두 제조업 생산성은 올라갔지만 실질임금은 오히려 하락했습니다. 경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나프타 이후에 관련 국가의 전체 국민소득은 증가했겠지만 노동자들에게 돌아간 분배 몫은 줄어들었다는 걸 금방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생산성 향상이 많은 나라일수록 실질임금 하락이 더 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고용 없는 성장'이 이뤄졌고, 그나마 증가한 고용도 '질이 낮은 고용, 예컨대 비정규 노동'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라 안의 지역 간 격차, 수출산업과 내수산업 간 격차는 더욱 심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일과 같기 때문이고, 또 김 의장께서 강조한 '서민경제'의 어려움도 바로 이 때문이니까요. 그런데도 명백한 사실을 호도하고 나프타가 성공적이었다고 강변하는 청와대와 정부 부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의 재경부 관리 중 일부는 '결과적으로' 1997년 금융위기는 보약이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 주장들
 
  한미 FTA에 관한 한 청와대의 국정브리핑과 이른바 '조중동(그리고 한나라당)'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대통령께서 그토록 원하던 '대연정'이 실질적으로 이뤄진 셈이죠.
 
  우선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구한말의 쇄국론자로 모는 주장부터 기가 막힙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의 무역의존도는 70%에 달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럽의 몇몇 소국을 제외하곤 최고 수준입니다. 미국, 그리고 무역의존도가 높을 것으로 그들이 지레 짐작하는 일본은 10% 후반대에서 20% 초반대를 오르내리는 것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숫자입니다. 또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서 공무원들이 외자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자는 것이 쇄국이라뇨? 쇄국이란 말의 뜻을 알고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김 의장께서도 경제학을 공부하셨으니 잘 아실 겁니다. 무역의존도가 저렇게 높다는 것은 곧 내수가 지나치게 적다는 것, 따라서 국민의 삶의 질이 낮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경제학자라면 당연히 내수를 늘려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할 법합니다. 그런데 경제학 박사인 우리의 부총리는 오히려 더 개방을 해서 무역의존도를 더 높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FTA를 맺지 않으면 영원히 후진국으로 남을 것이라는, 박병원 재경부 차관의 대국민 위협은 더욱 가관입니다. 세계의 FTA 체결 현황을 볼 때 중남미 나라들은 평균 7개, 아프리카 나라들은 평균 5~6개, EU가 평균 3~4개, 동아시아 나라들이 평균 2개의 FTA를 맺고 있습니다. 1인당 경제성장률이 낮을수록 FTA를 많이 맺고 있다고 주장해도 무방합니다. 적어도 FTA의 갯수와 경제성장률은 전혀 무관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1개의 FTA를 맺은 선두주자 멕시코가 무역수지 적자와 낮은 성장률에 시달리다 결국 FTA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걸 박 차관이나 경제보좌관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까요?

  
▲ 자료: Penn World Tables, EPI Issue Brief (2005년 10월 25일). 

  심지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낡은 일본형 시스템을 버리고 미국형으로 우리 경제를 개조하자고 무지에 찬 신념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미국과 가까운 덕에, IMF가 요구한 개방화/자유화를 통해, 그리고 그 완성태로 미국과의 FTA를 통해 미국형 경제시스템을 백분 받아들인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 국가들 간 성장률 격차의 확대를 그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까요?
 
  미국 FTA의 특징 - 상대 나라의 제도와 법을 다 바꿔라
 
  사실 우리 국민은 물론, 정치권이나 심지어 경제학자들도 FTA에 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 약 200여 개의 FTA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제로 WTO규정("실질적으로 모든 교역의 개방")을 만족시키는 것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FTA는 우리도 수없이 맺고 있는, 특정 분야에서의 경제협력 협정에 불과하고 따라서 구속력도 약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그러니 이런 숫자에 현혹되어 초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FTA는 다릅니다. 미국이 양자 간 FTA에 적극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로부터 시작된 다자간 협정이 지지부진하고 한편으로는 EU 등 선진국, 다른 한편으로는 개도국들의 반대로 자신들의 주장이 쉽사리 관철되지 않는 가운데 야심적으로 밀어붙인 FTAA(전미자유무역협정, 나프타를 중남미 국가들에게까지 확대하려던 것)가 수포로 돌아가자 당시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였던 로버트 죌릭(현 국무부 부장관)은 "경쟁적 자유주의(competitive liberalism)"를 들고 나옵니다.
 
  그는 아주 명석하고 직설어법을 구사하는 사람입니다(제가 보기에 미 정부 내에서 가장 지적인 이 사람의 말은 외교안보 면에서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나프타 공식문건에서도 애매하게 표현하거나 부정했던 미국의 의도를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 미국은 나프타를 통해 '상대방 나라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지지'하고, '각종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겁니다. 즉 미국 FTA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개방화, 민영화, 금융긴축)를 상대국에 압박하는 수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앞에서 IMF 구제금융과 나프타의 효과가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만, 죌릭은 그게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죠.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 발표된 미 의회 조사국(CRS)의 보고서(5.24)는 한국과의 FTA가 '경쟁적 자유주의'의 시범 케이스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p6).
 
  또한 미국의 FTA 정책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FTA, 즉 나프타보다도 더 포괄적이고 강한 FTA를 하는 겁니다. CRS 보고서 역시 솔직해졌습니다. 미국의 FTA에서 관세나 쿼터는 가장 덜 중요한 이슈에 속합니다, 오히려 미국 FTA는 경제행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규제, 정책, 그리고 관행에 초점을 맞춘다고 공언합니다(p5). 즉 관세 등 국경 상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 나라 국경 안의 제도와 법률, 관행을 바꾸겠다는 겁니다.
 
  이들은 한미 FTA에서 최초의 요소들(generic elements)을 도입하겠다, 즉 여태 구경도 못한 혁신적 조항을 담겠다고 강조합니다. 미국이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이른바 신이슈로 알려진 무역관련 지적재산권(TRIPS), 무역관련 투자(TRIMS), 서비스교역(GATS)입니다.
 
  미국이 신이슈에 집중하는 것은 물론 미국 산업이 이 세 분야에서 압도적 경쟁력 우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려져 있는 것만 해도 서비스 교역에 WTO의 포지티브 리스트(명시한 분야만 개방)가 아니라 네거티브 리스트(명시하지 않은 분야는 모두 개방)를 적용한다든가, 무역관련 투자 조항을 나프타 이상으로 강화하는 것, 지적재산권의 보호 연한을 20년 더 연장하는 것 등 가히 충격적인데 이 외에 뭔가 '혁신적인 것'이 더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투자에 관한 장은 민주주의를 말살합니다
 
  이들 항목을 낱낱이 지적하는 건 이미 다른 분들이 많이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투자에 관한 장(chapter)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나프타 플러스'로 알려진 한미 FTA의 투자에 관한 장은 공개되지 않았으니 여기서는 나프타를 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단도직입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투자에 관한 장은 '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입니다. 방금 작은 따옴표로 묶은 주장은 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해 당사자라고 할 수도 있는 미국의 시민단체인 퍼블릭 시티즌(Public Citizen, 저 유명한 랄프 네이더가 시작한 단체입니다)이 만든 보고서의 제목입니다.
 
  시민운동이라면 혀를 내두를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온건한' 미국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의회가 나프타의 11장(투자에 관한 장)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들은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브너 미크바, 전 미 연방법원 패널리스트, 뢰벤(Loewen) 케이스 나프타 패널리스트). 미국조차도 이 장이 어떻게 활용될지 충분히 짐작하지는 못했다는 얘깁니다.
 
  "우리의 헌법 3조는 연방법원에 각 사건과 논란에 관한 결론을 내릴 권력을 부여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이러한 법률적 권력의 '핵심(essential attributes)'을 다른 심판위원회(tribunal; ISCID나 UNCITRAL를 지칭)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산드라 오코너 미 연방대법원 판사)
 
  이런 얘기는 미국 미시시피 주정부가 1994년 캐나다의 장례회사 로우언이 불법적, 반경쟁적 행위로 지역의 장례회사를 퇴출시키려 한다고 로우언을 고소하여 승소한 뒤, 로우언이 연방대법원에 제소했다 기각당하자 1998년에 다시 나프타의 기업-정부 제소권을 이용하여 반캐나다, 인종차별 등의 혐의로(나프타 1102조, 1110조 위반) 미국 정부를 제소한 사건(로우언 케이스) 때문에 나왔습니다.
 
  결국은 우습게도 로우언이 외국인기업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기각됐지만, 어쨌든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판결을 제3의 민간기구인 ISCID나 UNCITRAL의 심판위원회에서 내리는 건 위헌적이라고 하여 미국의 두 법률가가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나프타 11장은 온갖 독소조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돈 되는 대상이라면 공기업이든 공공서비스든, 아니면 '투기'든 광범위하게 규정되는 투자의 정의에 따라 투자계획 때부터 내국민 대우를 해야 한다는 조항, 수용(expropriation), 나아가 수용에 해당하는 행위(measures tantamount to expropriation)를 현존하는 어느 법률보다도 관대하게 정의한 조항,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업이 정부를 제소할 수 있는 권리 등이 대표적인 독소조항입니다.
 
  기업은 언제나 정부에 불만이 많기 마련입니다. 물론 국내 기업은 대부분 불만에 그치고 말겠지만 이제 외국인 대기업은 나프타라는 국제협정에 근거해서 그 나라 정부를 제소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초국적기업에 대한 투자 보장을 넘어 이윤 보장을 꾀하는 이러한 조항을 다자간 투자협정(MAI)에서 관철시키려다 프랑스 등 EU 나라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이것을 FTA에 적용하여 전범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도 전파하려는 것이 바로 나프타로 시작한 미국 정책의 핵심입니다.
 
  캐나다의 위헌소송
 
  2001년 캐나다의 시에라 법률구조기금은 캐나다 공공노동조합(CUPE)을 대표하여 나프타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나프타 11장 심판위원회의 비밀유지 조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혐의였습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심각한 문제점을 의식했던 이 제소는 2005년 1월 24일 캐나다 위원회(Council of Canadians)와 캐나다 우체노동조합(Canadian Union of Postal Workers)이 온타리오 대법원에 제기한 위헌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세계적인 특송업체 UPS가 공기업인 캐나다 우체국(Canada Post)을 상대로 나프타 11장 및 15장 2조 및 3조(국가독점기업 및 국영기업은 나프타 11장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조항), 12장 2조 위반으로 소송을 제기한 데서 문제는 비롯됐습니다.
 
  UPS는 캐나다 우체국이 소포와 택배 서비스에서 자신의 인프라를 교차보조(cross -subsidize)하는 데 이용함으로써 특별한 독점적 지위를 남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편, 철도, 전기와 같은 망 산업에서 교차보조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경제학 교과서는 그러므로 공기업의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소송에서 UPS가 이긴다면 똑같은 논리가 거의 모든 공공 서비스에 적용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통상교섭본부는 교육이나 의료 부문의 개방을 미국이 요구하지 않았다고 자못 자랑스럽게 선전하고 있습니다만, 언제든 시장이 성숙해서 돈이 될 때 미국의 어떤 영리법인도 정부를 제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겁니다. 예컨대 미국 보험회사나 병원은 한국의 건강보험 또는 당연지정제를 제소대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신경독성 물질인 MMT의 반입 금지, 유독 쓰레기의 수출 금지, 수자원 보호가 모두 차별적 조항으로 제소됐고, 멕시코 정부도 쓰레기장 설치에 관한 인허가, 농업보조금 등의 이유로 제소를 당했습니다. 제소의 대부분이 환경, 건강, 공공서비스에 집중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서 당연한 것으로 가르치는 바, 공공성의 파괴자가 벌금 등으로 그 비용을 치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부를 제소하여 보상금을 받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주권과 공공성의 침해이고, 이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의 위반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통상교섭본부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마치 나프타 11장과 같은 내용이 누구나 받아들이는 국제기준인 것처럼 반박하고 있으니 정말 기가 찰 노릇입니다. 더욱이 판결문 자체는 11장, 12장, 또는 15장의 어느 조항의 위반 여부로 나올 수밖에 없음에도 마치 그렇기 때문에 환경권 등의 침해는 없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데 이르러서는 과연 우리 정부가 이 문제를 이해하고 있기나 한 건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한국기업도 정당한 권리를 가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훈계조의 지적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 반덤핑 제소를 하고 상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미국정부를 제소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나프타 협상 때 캐나다 정부는 만사를 제쳐놓고 반덤핑 제소, 상계관세 등 이른바 무역구제 조치의 기준을 엄격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나프타 이후에도 이런 무역분쟁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정부의 안이한 태도는 미국 정부/기업과 한국 정부/기업 간의 힘의 불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얘깁니다. 실제로 2004년 말까지 한미 간 제소 42건 중 11건이 해결됐고 이 중 5건은 기업이 승소했고 6건은 기각됐습니다. 이긴 다섯 개의 기업이 모두 미국계이고 미국 정부가 아직 한 번도 패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아직 표본이 너무 적으니 그냥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다고 뒷짐 지고 있는 게 과연 능사일까요?
 
  진정 '서민경제'의 회생 원한다면 한미FTA부터 막고 볼 일
 
  한미 FTA는 명백하게 양극화를 심화시킬 겁니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며 사회권 등의 규제를 완화하고 공기업을 민영화한다면, 또 가뜩이나 심각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극까지 추구된다면 사회적 약자들에게 피해가 집중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더구나 기업이 정부의 제도를 대상으로 제소를 하고 그 판결을 제3의 민간기구가 비밀로 처리한다면 우리 국민의 주권은 산산조각나고 말 겁니다. 김 의장이 말하고 있는 서민경제의 회생이란 결국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심화일 겁니다. 그런데 한미 FTA는 바로 그 민주주의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한미 FTA를 저지하거나, 천보 만보 양보해도 투자에 관한 장 전체를 삭제하거나 최소한 기업의 정부 제소권은 삭제해서 EU처럼 정부와 정부가 분쟁을 처리해야 합니다. 한껏 양극화를 조장하고 나서 이를 다시 증세로 치유하겠다는 건 정말 바보짓입니다. 선조들은 이럴 때 쓰라고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말을 만든 모양입니다.
 
  양극화를 막고 동반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면상 정책목표와 정책의 원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계화, 금융화 시대에 성장과 분배가 맞물리면서 선순환이 일어나도록 하려면 자산에 대한 서민의 접근 기회를 높이고 동시에 현재 소유하고 있는 자산의 형태전환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 부동산 가격의 상승은 서민의 자산접근 기회를 결정적으로 봉쇄합니다. 투기수요가 없어질 때까지 보유세를 강화하는 현 정부의 정책은 올바릅니다. 오히려 경제부처와 당 일부의 고질적인 '공급확대론'이 정책을 혼미에 빠지게 했을 뿐입니다. 공급곡선의 이동보다 더 빨리 수요곡선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투기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한 어정쩡한 공급확대는 오히려 가격의 폭등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교육, 즉 인적 자산의 기초에 접근할 기회를 확대하는 정책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좋은 정책입니다. 현재처럼 특정 지역이 그런 기회를 독점하게 되면 그 나라는 머지않아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맙니다. 실업자에 대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역시 양극화를 해소하는 정책입니다. 마이크로 크레디트 등 금융에 대한 접근기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산업의 클러스터화도 근접성에 의한 기회의 확대라는 점에서 같은 범주에 속하는 좋은 정책입니다.
 
  이 모두 당의장께서 복지부 장관일 때 드린 '동반성장의 길'이라는 글에 들어 있습니다. 멀리 해밀튼 보고서를 뒤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하면 실행계획도 언제든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도 지금처럼 졸속으로 한미 FTA를 추진하는 한 제대로 시행할 기회조차 잡지 못할 겁니다. 100% 확실하게 정권이 넘어갈 테니까요.
 
  모든 걸 시장에 맡기면 해결된다는 시장만능론은 잘 아시다시피 원래 한나라당의 전유물입니다. 특히 한미 FTA는 재벌-고급 경제관료-조중동 등 보수언론이라는 3각동맹이 자신의 사익을 위해 적극 추진하는 정책입니다. 재벌들은 한미 FTA로 기존의 규제가 풀어질 것이라 기대하고 경제관료들은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맹신에 빠져 있습니다. 보수언론은 이번이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일 뿐 아니라 방송을 손아귀에 넣을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한미 FTA는 단순한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시스템 개조를 부르는 정책기조입니다. 엄청난 부작용을 몰고 올 외부쇼크 요법을 노무현 대통령이 대신 써준다 하니 한나라당 처지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열린우리당을 포함해서 이른바 '개혁세력'이 살려면 단호하게 한미 FTA를 저지해야 합니다. 물론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가만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한나라당도 뒷짐 지고 침묵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한미 FTA를 명시적으로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겠죠. 다음 대선의 구도가 한미 FTA 찬반의 정책 논쟁, 그리고 그 외에 서민경제의 회복 방향을 둘러싼 논쟁으로 짜일 때 비로소 한나라당이 거저 정권을 줍는 불행의 길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김 의장 등 당 지도부, 이보다 훨씬 외연이 넓은 범개혁세력이 살 길입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이 궁지에서 벗어날 길이기도 합니다. 한미 FTA의 부작용은 다음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할 겁니다. 그럴 때마다 전 대통령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급기야 청문회에 서야 할 지도 모릅니다.
 
  모두 살 길을 놓아두고 왜 죽을 길을 찾아드는지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추가성장이 필요하다, 한국형 신자유주의를 모색한다는 의장의 말씀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 건 제가 지금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기 때문이겠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보기에 의장께서는 근년에 항상 두 박자쯤 뒤늦은 결정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이미 한 박자는 놓쳤습니다. 이제 결심을 할 시기입니다. 좌고우면하며,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습니다. 연말까지 한미 FTA를 졸속으로 해치우려는 세력, 더구나 EU 등과의 FTA까지 도박에 가까운 '동시다발적 FTA'를 추진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정부 안팎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개혁세력이라 부르든, 아니면 민주화세력이라 하든 기나긴 동면을 하면서 추억 속의 훈장만 만지작거려야 할 겁니다.
   
 
 
  정태인/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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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 AG건축기행 1, 옛절에서 만나는 건축과 역사 김봉렬 교수와 찾아가는 옛절 기행 2
김봉렬 글, 관조스님 사진 / 안그라픽스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서 관광을 간다는 것은 '절집'을 구경간다는 의미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아이들이 수학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왜 절에를 가요?'하고 묻는다. 교회는 종교를 위한 건물이지만, 절집은 그만큼 문화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종교'적 가치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것으로 보인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천오백 여년이 되었으니 그 절집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겠지만, 특이하게도 90% 이상의 절집은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것인데도, 억불 정책을 써 온 조선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건축물로 살아남은 것을 보면,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이 책의 표지에 정말 고요한 경지의 절집 계단이 등장한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여기는 꼭 가봐야 겠다. 도대체 어딘지 알아 둬야지... 하는 속셈으로 책을 들여다 봤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내가 수십 번을 갔을 부산 범어사 계단이란다. 아는 만큼 보인다던가... 하긴 내가 범어사에 갔을 때는 거의 소풍때니 사람이 득시글거리는 범어사에서 이 한적한 계단을 볼 수 없었으리라. 조만간 틈을 내서 범어사를 평일에 가 보리라 생각한다.

건축은 신심의 상징이라고 한다. 험난한 지형에 난공사일수록 신심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일까? 낙산사 홍련암처럼 바닷가 절벽 위에 지은 암자도 있는가 하면, 남해 금산 보리암, 관악산 연주암처럼 산꼭대기에 얹은 암자도 있다. 대단한 조상들이다.

주어진 조건이 어려울수록 명 건축이 탄생할 확률은 높아진다고 한다. 불리한 지형을 창의적으로 건축해야 하므로 그렇다는 결론이다. 하긴, 이것이 인생이다...에 등장하는 이들이 대단해 보이지만, 결코 부럽지 않은 것이 그런 연유 아닐까.

이 책에 등장하는 절집들의 건물과 여백은 참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갖고 있다.

관조 스님의 사진 덕이겠지만, 건물과 여백의 관계가 사라질 때 건축은 사라지고 <건물>만 남는다는데, 내가 절집에 갔을 때는 주로 사람이 많은 때여서 그 고즈넉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내리는 날, 우산을 받고 찾았던 절집들이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한국의 절집들을 내가 몇 군데나 가 봤을까? 족히 수십 군데는 가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화엄사 구층암의 모과나무 기둥처럼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둔 절집 기둥은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고, 안성 청룡사 대웅전의 휘어진 소나무 기둥들도 눈맛을 시원하게 한다.

부처님의 불국토이자 예불 장소이면서 수도원이었던, 이제는 관광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가람에 대해 알고 보게 되니 또 다른 눈의 트이는 듯 하다. 역시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유홍준 님의 말씀은 만고의 진리인 듯 하다.

大成若缺 大直若掘 大巧若拙...

크게 이루는 것은 뭔가 빠진 듯하고,
쭉 곧은 것은 굽은 듯하고
정말 정교한 것은 졸스런 듯 하다.

아, 한국 절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노자의 이 구절이 아닐까?

깎은 듯한 비례미를 보여주는 서양의 정원처럼 삭막하지 않은 그 이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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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7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해콩 > 다시 우리의 외침은 필승도, 애국도 아닌 인권이 되어야 한다.

공은 공공의 폭력을 싣고…

인권운동가가 본 월드컵…
승리의 환호 속에 ‘불편한’ 소식은 외면당하는 6월 …
애국의 열기가 치솟는 틈을 타 국가는 약자들의 시위현장에 폭력을 행사한다

▣ 배경내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야, 6월은 안 돼. 뭔 일을 해도 안 된다고.” “개막 전후 며칠간이 제일 위험해. 그때 칠지 몰라.” 월드컵의 계절이 왔다. 한민족의 저력을 과시한 월드컵의 신화여, 어게인(Again)! 한몫 챙기려는 언론과 자본이 다시금 월드컵의 열광을 부추기는 요즘, 운동단체들은 6월을 피해 행사 일정을 조정하고, 6월을 기해 휘몰아칠 국가폭력에 대비하느라 그야말로 똥줄이 탄다. 월드컵은 탈정치화와 정치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세련된 정치의 장이다. ‘현실의 전쟁’을 비가시화하는 대신,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국민 총단결의 기치로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는 시간이다. 그래서 월드컵은 인권의 무덤이다. 월드컵 기간 동안 사람들은 둥근 축구공이 빚어내는 극적 드라마와 묘기대행진, 자국의 순위에 넋을 빼앗긴다.

월드컵의 암운은 오래간다

그사이 월드컵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불편한’ 소식들은 참담한 외면을 당해야 한다. 지난 2002년에도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두 여중생의 사망 소식은 변방에서 소리소문 없이 잊혀졌다.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노점상과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공(公)폭력’이 들이닥쳐도 그 현장에 따라붙는 언론은 없었다. 외국의 경우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난 1998년 월드컵에서 멕시코가 한국을 3 대 1로 격파하자 거리로 쏟아져나온 인파는 “멕시코! 멕시코!”를 외치며 한바탕 축제를 벌였다. 며칠 전 치아파스주 사파티스타를 상대로 멕시코 정부가 벌인 폭압적 진압작전은 승리의 환호 속에 ‘잠겨버렸다’. 올해라고 다를까. 가히 인권과 동북아 평화에 대한 총공격이라 부를 만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실무협상, 평택의 고통은 ‘온 국민이 하나’라는 강요된 신화 속에 묻힐 것이다.


△ 평택 대추초등학교에서 경찰의 진압작전에 저항하는 시위대. 월드컵에 평택의 고통은 묻힐 것이다. (사진/ 류우종 기자)

더 큰 문제는 월드컵 동안 치솟을 애국의 물결이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이 사회에 깊은 암운을 드리울 것이라는 점이다. 월드컵은 국가별 대항전으로서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요소를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상업적 이익에 눈먼 언론은 기꺼이 애국의 열기를 주조해낸다. ‘전사’와 ‘정복’이라는 군사주의 용어가 판치는 이유도, 국가의 자존심을 연거푸 읊어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필승에 집착하는 광적 열기는 자연스레 국가주의와 파시즘적 몰이성에 가속 페달을 달아준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 수비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귀국 뒤 12발의 총알세례를 받고 숨진 사건을 보자. 문제의 경기가 국가 대항전이 아니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응원의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축구였다고? 글쎄…. 월드컵은 순수한 축구팬들이 빚어낸 신명나는 축제였을 뿐이라던, K리그에서 다시 보자던 붉은 악마의 공언은 어디로 증발해버렸나.

‘국가 대 사람’의 전쟁을 외치라

‘온 국민의 하나됨’을 강조하며 하나의 구호를 외치고 하나의 열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때, 노동자와 노점상, 장애인들의 정당한 생존에 대한 요구는 어느새 국가 통합을 해치는 이기적인 목소리로 치부되고 만다. “평택 주민들은 사익(私益)을 버리고 국익을 위해 백기 투항하라!” 땅에서 농사짓는 일이 곧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는 신념 하나로 보수언론의 뭇매와 군경의 공포를 견뎌내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더 휘몰아칠 ‘국익’ 공세는 여론의 차가운 외면 속에 평택 주민과 지킴이들의 숨통을 아예 끊어놓을지도 모른다. 국익의 신화 속에, 애국의 물결 속에 소수자의 목소리, 다른 목소리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지금 평택에서,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대 사람’의 전쟁을 말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외칠 수는 없다. 다시 우리의 외침은 필승도, 애국도 아닌 인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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