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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ㅣ 문지 푸른 문학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퇴근하고 아파트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소줏집을 향하다 보면, 뜨악한 풍경을 만난다.
아파트마다 멋드러지게 만들어 놓은 예쁘기만 한 놀이터엔 저녁 햇살만 가득 내려앉아 있을 뿐, 아이들은 없고, 아이들을 저녁 밥상으로 부르는 정겨운 어머니의 목소리도 없다.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냐는 질문에 많은 학부모가 학원에 안 보내면 친구가 없어서라고 한다. 초등 시절엔 그렇다가 중학생이 되면, 교과서를 들춰봤자 부모가 알 수 없으니 학원을 보낸단다. 하긴, 중학교 수준이면 교과서가 어렵기도 어렵다.
햇살 눈부신 이땅에, 모두 아름다웠던 그 어이들은 어디로 간 걸까?
골목길에서 줄넘기를 하던 계집애들과, 전쟁놀이 숨바꼭질로 온 동네를 쏘다니던 머시매들은 어디로 간 걸까?
학교 공부만 공부가 아니다. 애들은 자라는 나무 같아서, 가만 놔둬도 제가 알아서 뿌리와 가지를 벋을 대로 벋는 것이다.
이런 똥배짱으로 과연 아이들을 믿어볼 수 있는 것일까?
수능을 잘 봐야 한다고, 모두들 촛불을 들고 결전의 날 행사를 치르는 엄숙한 마당에서,
각자의 촛불을 끄면 아무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절규를 남긴 아쉬운 대목은, 우리 학교의 질식할만한 모습을 그대로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이 나온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교실 안의 경쟁과 삭막함, 비인간적 행태는 심해지면 심해졌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에게, 악만 남은 아이들에게, 머리를 깎으라고 한다면 아이들이 과연 수긍할 수 있을까?
최시한의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수업 시간에도 여러 번 우려먹은 소설이다.
이 책은 연작 소설로, 한 편만 읽으면 단편 소설같고, 이어서 읽으면 장편 소설 같은 이야기다.
한국 교육의 가족 이기주의, 물신 숭배와 경쟁의 극대화, 사교육 시장의 비대화는 결국 <각자의 촛불>을 꺼야 한다. 나 하나만, 우리 아들만 시험을 잘 치고 대학을 잘 간다고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모순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기본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 정책 변화는 신발을 신고 가려운 데를 긁는다는 <격화소양>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강물에 칼을 빠뜨렸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야 칼을 구할 수 있다. 지금은 일단 배에다가 엑스표를 해 두고, 항구에 정박해서 배 밑을 뒤지는 어리석은 태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각주구검>이란 속담이다.
어리석은 자들을 나타내는 한자 성어들이나 속담들을 한국 교육에 들이대면 어떻게든 어울린다. 얼마나 진흙탕같은 뻘밭인지... 이 아이들을 질서라는 틀 안에서 옭아매는 교사라는 직업이 간혹 갑갑하기도 하다.
십년 전쯤, 문제 의식 만땅인 고교생들을 학교에서 감당이 불감당이던 시절이 있었다. 시쳇말로 대략 난감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교사들의 의식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아이들도 훨씬 개별화되었고, 이제 그런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녀석들도 그만큼 줄어 들어서 학교에서 집단 행동 등으로 처벌을 받는 아이들은 거의 없지만, 아직도 아이들이 <인권> 운운하는 일은 힘겹기만 하다.
자율과 방종을 구별하기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무작정 자율을 던져주는 것은 기성세대에게 두려운 일이다.
어쩌면 어른들이 자율과 방종을 구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아이들이 자기처럼 되어 버릴까 두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죄가 없는 어른이여, 돌을 주워 저 못된 청소년들을 내리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