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역사 추악한 진실 1
마크 필립스.캐시 오브라이언 지음, 이지현 옮김 / 일송북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원제목은 Trance formation of America이다.

마치 썬데이서울에나 등장할 법한 지저분한 이야기가 적혀있는데, 구역질나는 이야기 투성이다.

그런데 그 등장인물들이 심상치 않다. FBI, CIA, President, 주지사, 고위급 정치인과 군인들...

트랜스란 것은 다중 인격을 가진 사람이 한 인격에서 다른 인격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빠져드는 <혼수 상태>를 뜻한단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은 <미국의 트랜스 조직> 정도가 되겠다.

어려서부터 다중 인격을 형성하도록 만들고, 각종 동물적인 조작을 통하여 각 상황에 맞도록 코드화하는 장면들은 <이 책은 혹시 정신병자가 만든 상상물이 아닐까? 차라리 그렇다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미국이란 짐승같은 나라에서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진실이 끊임없이 은폐되어 왔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다.

전쟁이나 식민지 상황, 노예제 사회가 아닌 멀쩡한 국가에서, 자국민을 성노예화하여 이용한다는 사실은 정말 거짓이었으면 좋겠지만, 책 제목을 추악한 진실로 붙인 바에야... 믿을 수밖에 없다.

프레지던트 클린턴이 르윈스키의 치맛폭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그 배경에는 이런 추악한 역사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에 아칸소 주지사 클린턴도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The road less traveled. 아직도 가야할 길에 비해서 영어 제목이 더 마음을 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스 트래블드'에서 울리는 파동은, 우리가 고통의 바다라고 하는 이 <생>을 잘 나타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고해라고 한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삶의 고통을 이기는 법을 <--의 기술>이란 제목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 고통스런 삶을 우리는 더 여행해야 한다고 바라본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좀 덜 고통스럽게 여행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삶을 고통스럽게 느낄까? 왜 꽃이 피어 있으면 피어 있는대로 지면 지는대로 사람은 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일까?

그는 <인간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한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는 원인도 <게으름>에서 찾는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려면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에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 우리는 알고는 있다. 그렇지만, 게을러서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고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다는 말씀.

지당하신 말씀같지만, 실천은 어렵잖은가.

스캇 펙의 글을 읽는데 탄력이 잘 붙는다. 에리히 프롬의 글이 장애물 경주에 가까운데 비해, 스캇 펙의 글은 여행지에서 거니는 산책과 같단 생각이 든다. 천천히 소요하며 대기를 한껏 호흡하는 발걸음...

그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위한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성장을 위한 확대. 여기는 결코 끝없이 나태해지려는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게으름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연마, 수련, 마음 챙김이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성장에 관심을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게을러서는 안 되고, 영적인 깨어있음과 함께 가는 것이란 말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잘못하면 자식이 자라지 못하고,

교사가 무관심하면 학생은 소외된다.

사랑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게으른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다 보면, 상처를 입기도 한다. 저자는 성숙한 삶의 조건으로 <균형>을 말한다. 균형 훈련에서 배워야할 <포기>까지. 포기하는 행동은 괴로운 일이지만, 누구나 일부를 포기해야 함을 인정해야하고, 적절한 포기가 성숙한 인격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그에게 사랑은 단순히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지각 있게 주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지각있게 안 주는 것이다.

그것은 지각있게 칭찬하고, 지각있게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평안하게 해주는 것에 덧붙여 지각있게 논쟁하고, 투쟁하고, 맞서며 몰아대고 밀고 당기고 하는 것이다.

‘지각있는’이라는 말은 판단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판단은 심사숙고할 것을 요구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요구한다.

 

삶이 힘들다고 생각할 때,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막막하기 그지없을 때,

정신과 의사와 대면하는 것이 두렵기 짝이 없을 때,

그렇지만 나는 충분히 우울하고 신경정신과적 환자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할 때,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원 제목은 People of the lie <거짓의 사람들>이고, 부제가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으로 붙어 있다.

심리상담가인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할 길>은 정말 유명한 책이다. (여기 저기서 많이 들어 봤는데 아직 읽진 못했다. 도서관 갔을 때마다 대출중인 책.)

스캇 펙 박사의 상담 사례를 읽는 일은 여느 추리소설을 읽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간혹 이렇게 글쓰는 사람들을 보면 샘이 난다. 글샘이... 난 글샘은 많은데, 게을러서 쓰길 싫어한다.(핫, 게으름은 악의 한 표현인디...)

박사는 <악>을 기존의 종교적, 도덕적 잣대에서 과학적 판단으로 차원을 바꿔 보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 데 힘을 행사하는 것>>

박사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온전한 정신의 탈을 쓰고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속으로는 악한들'이다. 자식을 우울증에 빠지게 하면서도, 자신들은 교묘하게 최선을 다한다고 믿게 만드는 교활한 사람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우리 주변에는 <<  >>에 정의한 사람의 예를 들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 공부하지 못한 것, 출세하지 못한 것을 보상받겠다는 듯이 자식에게 목매다는 엄마들이 그렇고,
자기네 학교에서 서울대를 몇 명 갔는지가 교육 성공의 지표라도 되는 듯한 신앙을 가진 숱한 교육 관료들이 그렇고,
국립대 수준 진학하지 못할 놈들은 인간 쓰레기 취급하는, 폭력적이고 야비한, 그러면서도 <金봉투>는 잘도 챙기는, 그래서 국민들이 교원 평가를 적극 환영하도록 만드는 많은 교사들이 그렇고,
정부의 정책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자 힘으로 민중을 압살해 왔던 이 땅의 독재자들이 그렇고,
우리 영화를 싹쓸이하고 있는 것처럼, 이 땅의 조폭 문화가 그런 악의 증거들이 아니겠는가.

지금 당장 내가 우리 아들에게, 아내에게 가부장적인 가장일 수 있고,
우리 반 학생들에게 폭력적이며 편향된 교사일 수 있고,
가족의 안일을 위하여 사회적 관심엔 고개 돌리는 <악한>이 바로 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악을 <과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질병'은 치료할 수 있어야 하며, 과학적인 치료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일반적인 통념 때문이다. 그래서 악을 가장 궁극적인 질병으로 정의하여, 혐오스럽고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을 가질 것이 아니라, 연민을 가지고 치료하고 싶은 마음을 갖도록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그 길은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살핀대로, 일상적으로 숨어있는 개인적인 악의 문제도 그 해결이 평탄하지 않은데, 사탄(마귀)을 쫓아내는 축사 의식이나, 집단 의식 속에 숨어있는 <악>의 문제는 그 해결이 훨씬 어렵게 보인다.

인간은 나르시시즘의 자기 기만 기제를 통하여 집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예비군 훈련에 가 본 사람이라면 군복의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것이다. 집단에 의하여 예비군은 금세 야비군이 되지 않던가. 인류 역사상 파렴치했던 전쟁들도 그 실례가 되고 있다. 군인에 의한 민간인 집단 살상, 나치의 학살 말이다.

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면, 큰 문제를 저지른 학생이라 하더라도 쉽게 감응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정말 정나미가 똑 떨어지는 학생도 있다. 심지어 그 부모까지 가세해서 학교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인간은 모두 부처>라는 논리에 따라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이성적으론 사형 제도를 반대하면서도, 인간 안될 놈들 앞에 맞닥뜨리면 감성적으로 찬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가 실제론 많지 않은가.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 류의 만화를 보면, 법의 권한을 뛰어넘는 교활한 악에 대항하여 개인적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우린 훨씬 동정심을 갖게 되지 않는가.

삶 live 의 반대편에 악 evil 이 존재한다는 통찰과 같이, 삶과 함께 생길 수밖에 없는 <악>을 과학적으로 고찰하고 치료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과학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클리오 님 덕분에 구해서 읽게 된 책인 만큼, 도서관 가는 길에 기증해야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악>에 대항할 수 있도록... (클리오 님,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팽이 2005-11-21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두고서도 아직 못 읽은 아직도 가야할 길을 들어보아야겠군요..

글샘 2005-11-2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 오늘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갔다가, 드디어 그 책을 빌렸습니다.
오늘 밤새워 보고 나면, 내일 수능 감독에 좀 차질이 빚어질 듯...ㅋㅋㅋ
 
침팬지를 사랑한 동물학자 제인 구달 만나보고 싶어요 5
서경석 지음, 김형배 그림 / 사회평론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제인 구달은 침팬지의 영역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 사람이다.

침팬지의 삶을 보면서 이름을 붙여 주고, 그들의 사랑, 갈등, 다툼을 인간의 경지에서 관찰하였고,
실험용으로 사용되는 침팬지들에게 조금 나은 환경을 줄 것을 요구한 과학자다.

어린이들에게 보여줄 만화가 많은 요즘이지만, 특히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만화가 드물기도 하다. 학습 만화라는 이름으로 나온 많은 책들은 그림으로 주입하는 교육에 불과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 평론에서 나온 만화들은 빌게이츠, 체 게바라, 비틀즈 등 인물의 스펙트럼이 단순하지 않다.

제인 구달을 어린 아이들이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토요일 최홍만의 K-1 경기를 지켜보는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 경기들을 <스포츠>라고 하기엔 너무 잔인했다.

무릎으로 안면을 가격해서 이빨이 부러져 나가는 것을 <스포츠>의 이름으로 가리다니... 정말 자본은 잔인한 것이었다. 그 땅이 일본이어서 그들의 잔인성이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을까?

오늘 다시 제인 구달의 연구를 조금 읽으면서, 침팬지의 사회성과 K-1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덩치 큰 놈이 최고라는 것. 힘이 센 놈이 집단의 우위에 선다는 것.

사람은 머리를 써서 살아간다는 것.
지혜를 써서, 평화를 갈구한다는 것.

이런 것이 유인원과의 차별성이었는데, 그 피의 경기들은 사람의 원시성을 보여주려는 게임이었다.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을 끌어들여 자행하는 폭력 들여다보기(일본의 노조미)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아이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 책. 권해주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팽이 2005-11-2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구달의 책 중 아이들이 보기 좋은 책이로군요..
보관함으로..
 
생각을 헹구어주는 세탁소
SETAKSO 글.그림 / 이레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www.setakso.net를 운영하는 저자의 글들을 책으로 만들었단다.

기다리고, 만나고, 가까워지고, 사랑하고, 토닥거리고, 깊어지고, 싸우고, 멀어지고, 이별하는... 젊음의 마음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누군가를 기다림에서부터, 이별에까지 다다른 젊은이들이 읽게 된다면 공감할 부분이 많을 듯 하다.(난 역시 늙어서 이미 지나가버린 날들을 떠올릴 따름이었다.)

어렸을 때, 빨래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내가 겨우 걸을 때 쯤, 어머니께서 개울가에 가서 빨래를 하셨다.

빨랫돌에서 빨랫거리를 치대고, 방망이질하고,
물에 헹구어 짜고, 빨랫바구니에 담아 오신 뒤,
기다란 바지랑대 낮추어 빨랫줄에 너신 뒤,
바지랑대 높이 올리면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너울너울 춤을 추던 빨래들.
따가운 햇살에 뽀송뽀송 말린 빨래를 갤 때,
햇살만큼이나 따가울 정도로 부풀어진 수건의 내음새.
겨울이라도 될라치면, 꽝꽝 얼어붙은 빨래 사이로 뛰어다니고,
이불 홑청이라도 널어 놓으면, 그 사이에 숨어 다니며 숨바꼭질하던 기억들.
비가 내려 빨래가 쉬는 날, 빨래 집게로 노는 재미도 유별난 것이었는데,
빨래가 쉬던 날, 어머니도 하루 쉬시던 날이 아니었을까?

요즘은 세탁기가 빨래를 대신하고, 세제를 풀어 빨래를 휘젓게 된다.
아파트 베란다에 걸쳐진 빨래는 예전처럼 자외선, 적외선이 소독하는 느낌이 없어진 듯하다.

수고가 줄어든 만큼, 추억도 줄어드는 빨래의 기억들.

세탁소에 옷을 맡기면,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정리해 주지만, 뭔가 인간적인 것 같지 않기도 하고...

세탁소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빨래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 제목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연애 편지에 제법 옮길 법한 이야기들도 있다.

운이란 녀석이 자꾸 따라와요

운이란 녀석이 자꾸 따라오네요.
언제는 싫다고 싫다고 도망가더니...
한참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이제는 좋다고 자꾸자꾸 따라오네요.
시도 때도 없이 나만 졸졸 따라다니네요.
그래서 제가 이 녀석한테 물었지요.
"왜 요즘 자꾸 날 졸졸 따라다니는 거지?"
녀석은 간단하게 대답하더군요.
"요즘 너의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

당신이 기다리는 그 사람은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몰라요.

당신이 오랫동안 혼자서 헤매었다면
당신이 찾는 그 사람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특별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당신을
그 사람은 당신이 있었던 그 곳에서 오래도록
기다려온 것일지 모릅니다.
새로운 것이 사랑이 아니고 편안한 것이 사랑입니다.
만드는 게 사랑이 아니고 발견하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줄다리기가 아닙니다.

한때는 그녀와의 줄다리기가 너무 힘들어
먼저 사랑을 포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줄을 조금이라도 내주면 내 자존심이 상처받는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 뒤늦게서야 알았습니다.
줄을 뺏기는 순간 그만큼 더 그녀에게 다가간다는 사실
왜   그   땐   미   처   몰   랐   을   까   요   .

난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해가 바뀔 때마다 계절이 변하는 길목에서
또는 다달이. 매주 드는 의문...
그런데 난 왜 몰랐을까?
그 돛단배의 돛이 나라는 사실을...
난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