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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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중학교 가면, 비유법이란 게 있다고 배운다. 초등학교에서도 배우기도 한다.

그런데, 비유법이 뭐지?(이 글 읽으시는 분, 뭐죠?)

하고 물어 보면, 막상 답하기가 막막할 것이다. 비유법의 뜻을 말하지 못하고 ...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 이렇게 비유법의 종류를 나열하는 분도 계실 것이고... ㅎㅎㅎ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다."고 한다.
곧,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는 것을 은유라고 한다.

이 글에서 쓰인 은유는 비유라고 넓게 생각해서 썼다고 생각해도 좋다.

은유로서의 질병, 이 책은 수전 손택의 이름을 보고 선택한 책이다. 그의 글을 읽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 수전 손택의 책을 읽고 쓴 리뷰들을 보고, 꽤 괜찮은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은 <그 여자 정말 괜찮은 여자군>이다. 책이 좋다는 이야기다. 글쓰는 방식이 내 맘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이름에 일요일(Sontag은 독일어로 일요일)을 단 여자.
그러나 그의 삶은 일요일처럼 평화롭지 않았다.

표지에 그가 누워서 생각에 잠긴(ㅋㅋ 포즈를 취한) 사진이 실려 있다.
왜 이런 사진을 실었나.. 했는데, 그에겐 유방이 없었다. 그저 평평한 가슴을 보여주려고 찍은 사진일 따름이다. 그것이 이 글을 쓴 의도에 직접적으로 닿아 있다.

그는 암에 걸렸다. 그랬는데, 암에 걸리고 나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암>이란 소리가 크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들어 보니깐, 암을 아주 몹쓸 병으로 취급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암>을 온갖 몹쓸 상황에 비유해 대고 있었던 것이다. 암종같은, 암적인 존재... 등으로. 그래서 글을 읽으며 암과 관련된 글들을 찾았다.

암이라고 하면, 세포가 굳어가는 병, 더러워지는 병이라고 인식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유일하게 깨끗하게 생각하는 암이 <혈액암>인 백혈병이다. 그래서 청순한 이미지의 소녀들은 백혈병으로 죽어 가게 그려지는 것이다.

마치 수십 년 전, 결핵이 낭만적인 질병으로 오인되었던 것처럼. 그는 결핵에 담긴 오해를 푸는 데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암에 걸려 보니, 암을 치료하는 용어들도 너무도 전투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암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의 체질과 같은 근거 없는 믿음들이 너무도 일반적이었다는 것도... 스트레스가 암을 유발한다는 것은 지금도 널리 퍼진 믿음인데, 스트레스가 결핵을 가져온다는 웃음거리와 비슷하다고 그는 느낀다.

암에 걸린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로 가감없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암에 걸릴 만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암에 걸린 <우울한 사람들>로 바라보는 세상의 눈을 그는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우린 이렇게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책>이라는 간접 경험을 통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실감케 하는 책이었다.
유치한 첫사랑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는 세상에 어디 가나 널려 있다.
그러나, 병원 24시가 우리에게 찡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한 번 뿐이라고 여기는 이 삶을 소모시키는 과정을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현대에 암은 정복 대상이 아니라, 미래엔 치료 가능한 하나의 <질병 disease>으로, 그야말로 ease 편안하지 dis 않은 상태로 이해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친구가 AIDS에 감염되었다.

그리고 에이즈는 또다른 오염으로, 그 질병에 낙인찍으며, 나아가 그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까지 낙인을 찍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책을 쓰게 된다.

나는 암 환자임을 당당하게 밝히는 수전 손택의 책을 읽으면서,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에 다가가는 법을 공부해 보아야겠단 생각이 든다.
죽음을 소모라고 생각함에서 비롯된 인류의 숱한 오해들을, 착각들을 바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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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1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수잔 손택의 글이 마음에 드셨군요. 유방암에 걸렸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네요. 아직 접해본 적은 없지만, 글샘께서 인정하신 걸 보니 왠지 더 신뢰가 갑니다. 헷^^

글샘 2005-11-1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해를 이해로 바꿔 주려는 그의 글이 충분히 설득적이었다고 봐야죠.
 

타인에게 손가락질 할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에게 향한다.
검지는 상대를 가리키지만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킨다.
나머지 엄지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며
신의 심판을 청구하고 있다.
이것은 질책이 1이라면
자책은 그보다 3배나 중요하다는 뜻이다.
- 아타라시 마사미, ‘리더십 키우는 법’에서
뛰어난 리더는 질책이 아닌, 자책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질책이란 어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조건 반사적으로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을 말하는 반면,
자책은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인 다음,
그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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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5-11-1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책이 저런 의미로 쓰이는군요. 전 자책이란 단어가 싫어요. 그냥 자기 반성쯤으로 고쳐서 봐야 겠어요.^^

글샘 2005-11-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책을 많이 하시는 분이시군요. 저는 요즘 자책을 너무 안하고 사는 듯 합니다.
자기 반성도 안하긴 마찬가지고...
저도 빨리 겨울 방학을 기다립니다. 동안거에 들어가기 위해서...
 
작은 씨앗을 심는 사람들
폴 플라이쉬만 지음, 김희정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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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강낭콩 씨앗을 심고,
그것을 본 할머니는 이웃집 사람에게 물을 주라고 하고,
동네 주민들은 쓰레기를 치우고,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다.

나의 의도하지 않은 선행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

그런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중학교 11년 근무, 일반계 고교 5년 근무하고 나서 처음 근무하는 실업계 고교 1년.
여긴 정말 묵정밭이고, 폐기장이며, 삭막한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교사들은 무관심하고(나도 물론 그렇다), 아이들은 맥이 빠져 있다.
여기다 강낭콩을 심어도 될까?

과연 강낭콩을 심으면, 싹이 나고, 그것들을 옆에서 지켜보고 섰다가, 자기도 밭을 갈고 싹을 틔우려고 노력하게 될까?

클리블랜드의 이주민들 사이에서 싹틔운 토마토, 양상치가 척박한 우리 학교에서 싹을 틔울 수 있을까...

순수하지 못해서일까?
겁없이 계절도 돌보지 않고 콩을 심은 소녀처럼
씨앗을 뿌리고 돌볼 생각을 선뜻 하기 어려운 것은...

모두들 고개를 돌리고 앉아, 존재하지 않는 <그들>을 탓한다.
변해야 하는 것은 <ME 나>인데...
어깨겯고자 하는 <WE 우리>는 그림자에 불과할 따름인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외면한다. 그 사이 관심받지 못한 아이들은 더 무관심해지고, 더 소홀해 진다.

일반계 아이들은 없는 시간 쪼개어서 축제를 준비하는데,
이 아이들은 남아 도는 시간을 어쩔 줄 몰라한다. 축제도 없다. 가엾다.
모두 가엾다. 아이들고 가엾고, 어쩔 줄 몰라하는 교사들도 가엾다.

숨은 아이님이 붙인 리뷰 제목처럼 정말 콩심은 데 콩난다는 사실을 <믿어도 좋을까?>

회의 懷疑가 무서운 오후, 비스듬한 햇살은 게으르기 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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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 개정판
베티 스미스 지음, 김옥수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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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어디에서든 자란다. 흙이 있으면, 거기에 풀씨가 떨어지고, 빗물이 고이면 싹이 트고 나무가 된다. 나무는 그렇게 자란다. 약간의 먼지에서도 나무는 자란다.

그래서 성장 소설은 아름답다.

어린 아이가 화자로 나오는 소설들이 가지는 아련한 향수,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못배우고 가난하지만 아이들에게 꿋꿋한 어머니 아래서 발랄하게 자라는 프랜시의 성장기를 담담하게 적는다. 가난도 견딜만큼 고통스럽다. 프랜시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

여자 아이가 자란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딸 가진 아빠가 읽으면 좋지 않을까? 아니면 여자 중고등학교의 총각 선생님이 읽어도 좋을 것 같고...

산다는 것은 늘 화사한 한 다발 장미처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기가 모자라서 시들고 흙투성이인 잎사귀처럼 보일 날도 있는 것이며, 시궁창에 버려지는 국화송이처럼 초라해 보일 날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이 아름다운 것은, 어느날 문득 꼿꼿이 고개들고 화안한 꽃을 피울 날 그 꽃송이의 존재가 하염없이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하지만 도서관엘 매주 가서 책을 빌려보는 소녀 프랜시. 그런 아이를 가르치면서도 D를 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조금은 두렵다. 역시 가르치는 일은 조금 조심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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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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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관광지가 되어 버려 사라져 버린 제주의 평화와 고요가 그의 사진 안에 있다. 스틸 컷 속에 미라가 되어...

그의 사진에는 제목이 없다. 제목을 거부하는 사진 작가. 그렇지만 작품이 말을 한다. 그의 사진 모두의 주제는 제주이고, 제목도 제주다.

제주의 들, 오름, 바다, 파도, 풀과 꽃들, 구름과 햇살, 안개와 비... 이 모든 제주의 자연이 그의 사진에 오롯이 담겨있다. 이것들의 이미지가 분위기로 기억되어 저장되어 있다.

아름다움은 발견하는 자의 것이라던가. 제주에 사는 사람들도 느끼지 못하는 지순한 아름다움을 뭍것인 그가 이렇게 담아내게 된 배경에는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숨었다.

삽시간의 황홀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 비내리고 태풍 불고 안개 자욱한 제주 섬의 풍광 속에 한 점이 되어서 그는 참고 기다린다.

그 몰입의 황홀함을 다 누렸음일까... 그에겐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루게릭)이란 병이 찾아와 이제 카메라조차 들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한라산의 옛이름이라는 <두모악> 전시실을 꾸몄건만, 거기 전시된 파노라마 사진의 제주만이 말을할 뿐, 그는 이제 아무 말이 없다. 한 겨울에 숨어있는 제주의 봄을 미리 찾아 찍어 두었던 김영갑. 제주섬 전체를 명상 센터로 만들고 싶었던 그의 꿈은 두모악에 살아 있건만, 그의 숨은 매일 잦아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난한 삶을 제멋에 사는 사람들의 예술혼은 늘 고달프다지만, 그의 경우엔 한없이 안타깝다. 그러나, 그 파노라마의 제주 사진들을 대하고 있노라면, 한반도와 뭔가 어울리지 않는, 뭔가 다른 구석이 많은 유전자를 가진 섬, 제주를 오롯이 남겨 두었음에 감사해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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