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깃발
홍희담 지음 / 창비 / 2003년 5월
평점 :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남자인 아들과 착한 며느리,
손녀들이 오면 마냥 웃는다. 딸내미는 또 얼마나 고운가.
적적해지면 편하게 앉아 눈을 감는다.
온갖 상념들이 들끓지만 문득 정적이 찾아올 때도 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가을날의 잠자리처럼 투명해지지 않을까.
늙어가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다.
내가 읽었던 작가 후기 중, 가장 깔끔하고 담백한 글인 듯 하다.
이렇게 담담한 심경을 가진 듯 하지만, 이 소설집은 지난 20년 한반도를 달구었던 그 5월을 이야기한다.
88년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상당히 도식적인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광주에서 지식인들의 모습은 용기없었고, 기층민중들의 살아 번득이는 눈동자는 아름다웠다고 그린 이 책에서, 그래도 잠수함타고 찾아온 강학에게 삼천 원의 돈을 나눠줄 줄 아는 사랑은 왠지 작가의 구도가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십 년이 거의 지난 지금, 다시 읽은 이 글은 도식적이긴 하지만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박지원이 허생전에서
'글을 아는 자들'을 배에 태우면서 '이 섬에 화근을 없애야 되지'라고 한 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결국 문제는 계급의 문제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개혁이 계급의 문제를 혁파하지 않고는, 계급을 불문한 인재 등용, 명분을 생각하지 않는 실리주의... 이런 것만이 올바른 미래의 방향이란 것이다.
아아... 아니다. 결국 사람은 계급 없이 생겨난 것이었고, 모든 사람이 인재이며, 서로 이익을 따지지 않는 존재여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계급에 따라 차별과 차이가 생겼고, 다시 나라를 갈라서 이익을 따지고 있다.
올바른 미래는 잘못이 잉태된 순간, 애시당초 가능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지는 싸움일텐데... 사태를 관망하며 각자 소신껏 행동한다."는 지도부의 결정은 얼마나 비겁하냐.
다시 광주를 생각하면 마음이 싸아--해 진다. 광주를 형상화 한 <박하 사탕>으로 장관이 된 사람도 있고, 무명에서 최고 스타가 된 두 배우도 있다. 그러나, 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최루탄 냄새 가득한 대학 시절로도 아니고, 가난해서 버스비 20원을 아껴 걸어오면서 과자를 사 먹던 어린 시절로도 아니다. 오천 년 전 인간이 문명이란 걸 만들기 그 이전,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 먹기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문민 정부 들어서도 부조리는 끊이지 않았다. 참여 정부에 들어서도 국민의 참여보다는 정부의 참여가 강하다. 찢어죽이자던 전모씨는 아직도 건재하며, 총맞아 죽은 박통의 딸은 아비의 기일을 맞아 전국 보선에서 4군데 모두 승리했다.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 실감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너무 늦게 자란다.
우리가 잊고 사는 동안에, 날마다 옥바라지 해야하는 가족들이 있고, 광주민주화 항쟁의 <국가 유공자>라는 미명의 뒤안길에는 날마다 우울하고, 날마다 아직도 80년 5월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퀭한 눈으로 살아 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학살 치고는 너무도 잔인했다.
광주의 십자가는 아직도 망월동의 골고다에서 부활을 기다린다. 그 깃발은 이제 내릴 수 없는 깃발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