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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표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1학년 때, 청춘 예찬이란 글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국어 교과서가 얼마나 안바뀌었는지, 국어 샘들이 국어책을 줄줄 외우고 있었다. 선생들은 명문이라던 그 글이 나는 별로 맘에 내키지 않았고, 수능이 도입된 요즘, 그런 글이 교재에 나오면 나부터가 별로 가르칠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고교 시절 국어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상춘곡과 관동별곡, 청춘 예찬을 명문이라고 가르쳤는데,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 글들이 명문인 이유를... 오히려 난 정비석의 산정무한이 훨씬 마음에 와 닿았는데... 따뜻한 석탑 같은 글들...
뭐, 그런 거야 세대 차이라 치고, 난 청춘 예찬에서 지은이 민태원씨가 말한, 청춘의 시기는 무조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춘에는 이상이 있고, 애정이 있어서 좋은 시대라고 그이는 말했지만, 그가 살았던 식민지 시대에 정말 청춘이어서 좋았을까? 청춘을 불사르고 애정을 쏟고 마음을 부을 무엇 하나가 그에게 있었던지... 난 회의적이다.
내 청춘을 돌이켜 보면, 정말 청춘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회색빛 기억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발적이겠지만, 난 마흔이 된 아직도 나를 중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내 청춘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 결혼도 해 버렸고, 아이도 내년이면 중학교에 갈 정도로 생활의 기틀이 잡혔고, 교직에 들어온 지 만 16년 하고도 7개월을 보낸 지금, 나는 아직도 내 청춘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여긴다.
일본이나 우리 나라나 육신은 젊지만 영혼은 늙어 버린 <청춘 아닌 청춘>들로 고민이다. 그래서 일본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다치바나 씨가 <공부를 하지 않고 성공한 청춘을 11명 만난 글>이 이 책이다. 여기서 성공이라 함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거나, 사회적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 분야에서 일인자가 된 사람들과 인터뷰한 것들이다.
그 직업은 예사롭지 않다. 칠기 장인, 나이프 제작자, 원숭이 조련사, 정육 기술자, 사진 작가, 자전거 프레임 빌더, 매 사육사(수할치), 소믈리에(와인 전문가), 요리사, 염직가, 레코딩 엔지니어 이런 것들이 직업이다.
직업의 세계가 독특한 만큼 그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순탄하지 않은 과정들이 당연히 개입한다. 외국어를 모르면서 외국에서 생활하고, 의사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동물들과 생활하며 동물의 언어를 익히게 되고, 쇠나 천, 음의 세계에 <나>를 녹여 넣기 까지는 상상을 불허하는 시행착오와 열정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당당하게 한 사람의 전문인이 된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변변한 학력이 없이 이런 일들을 이룬 것이다. 학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 직업을 완성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들이고.
자, 그러면, 이런 몇 사람의 청춘을 들려 준 뒤에, 공식을 만들 수 있을까?
변변한 학력 없고, 학교 다닐 때 탁월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성공했다. 그렇지 못한 당신은 <인생의 낙오자다?>, 내지는 <왜 당신은 이렇게 노력하지 않는가?>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충분히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청춘>을 논하기엔 제목과 내용사이에 뭔가 미끄덩거리는 이물감이 든다.
표류하는 청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도 좋지만, 작가는 표류하는 청춘들을, 노인보다 활력이 없는 청춘들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청춘은 청춘만으로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내 나이 불혹에 들어서야 비로소 청춘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청춘은 물리적인 기간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열정이 불타오르는 기간이라는 작가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모든 청춘이 그런 경험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청춘은 정말 자기가 청춘인지도 모르고, 아니 청춘인 것이 너무도 비참하고 싫어서 빨리 노인이 되어 버리고 싶은 그것도 있기 때문이다. 제목과 내용간의 불일치는 작가가 놓친,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일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