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산책
이현주 지음 / 다산글방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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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자의 곳곳에 우리가 알고 있는 비유들이 숨어있다. 곤이라는 물고기, 붕이라는 새, 마지막의 혼돈이라는 카오스까지...

전에 장자의 우화들을 묶어 놓거나 나름의 철학으로 풀어 본 책들을 읽은 적은 있었으나, 이번 방학에 노자에 집중했었기 때문에, 새삼스레 읽은 장자는 지혜의 보고와도 같다.

이 책은 십년 전에 나온 책이어서 조판이 조악하다. 틀린 한자도 간혹 내 눈에 띈다.

그러나, 이아무개님의 혜안을 빌려서, 장자의 비유를 맛보는 즐거움이란...

노자가 한 삶의 철학의 뼈대를 오천 자의 씨앗으로 남기고 가버린 데 대한 아쉬움을 금할 길 없어, 장자는 그것을 비유의 꽃밭으로 발전시킨 것일까... 노자는 비로소 장자라는 지음을 만나,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夷(이)와 들으려 해도 듣기 어려운 希(희)와 만져 보기만이라도 하려도 만지기 어려운 微(미)의 희미한 깨우침을 웅변하고 있는 듯 하다.

장자 속에서 노자는 봄날 터져나오는 꽃망울처럼, 죽은듯이 숨죽였던 나무가 뽑아올리는 수액처럼 새 삶을 찾는 듯 하다.

한자 문맥을 곱씹으며 읽기에는 어려운 자들이 너무 많아서, 일단은 내 방식의 학습법(어려운 걸 만나면 일단은 나는 초보가 아니라는 착각을 머릿속에 심어 두고, 건방지게 접근해서 속독을 한다.)으로 빨리 읽고 말았다. 때가 되면 다시 만날 일이 있으려니 하고...

주마간산 격의 독서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무기, 무공, 무명의 낯선 경지였다.

무기는 무슨 일을 하는 주체가 없다기 보다 그 주체의 <나>가 없음이요,
무공은 공이 없다기 보다 공의 <임자>로 나서지 않음이요,
무명은 이름이 없다기 보다 스스로 제 <이름>을 내지 않음이다.
선행은 무철적이라,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하면 그 자취가 남지 않는다.
혹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예수가 자신의 비석을 깎아 세울 수 있을까?

며칠 전 꿈자리에서 내 오른 팔을 서늘하게 쓰다듬으셔 나를 깨우치신 그분의 가르침을 놓치지 않으리라...

사람의 마음으로 도를 죽이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하늘을 돕지 않는 것이 참 사람의 길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20세기 인간이 문화유산에게 할 일은 손대지 않는 것이라던 유홍준 교수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장자는 너무도 넓어서 허황되다 볼 수도 있는 비유의 바다이다. 마치 성경이 그러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지 못하면서 천국갈거라고 착각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장자를 읽고도 그 한 꼬투리만 보고마는 나는, 그래도, 내가 무식함을... 다음에 다시 장자를 곰곰 읽어야 함을 잘 알고 있는 어두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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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8-2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명이라...저도 그런사람이 되고 싶어서 안달하지만 결국엔 양아치로 산답니다.
저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군요.
그나저나 개학인데, 다시 바뻐지시겠군요.

글샘 2005-08-2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은 다음 주에 개학이랍니다. 아직 가족끼리 여행도 못 가봐서... 다음 주쯤 여행으로 방학을 마치려고 합니다. 파란여우님을 위한 책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요... 제가 권해드릴 주제는 못 되고, 다만 이렇게 제 글이라도 읽고 댓글을 남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소박한 기적 - 마더 테레사의 삶과 믿음
T. T. 문다켈 지음, 황애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마태복음 6:26>

군대에 있을 때, 행정병이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시간이 나면 책을 읽기는 뭐하고 해서 성경을 자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교회에 다니거나 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성벽이 있는 나로서는 성경을 꼼꼼하게 읽을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테레사 수녀님의 전기나, 이즈음 읽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이 아무개 목사의 대담으로 된 노자 이야기에서 성경을 인용한 부분들을 읽다 보면, 성경을 조만간 독파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내가 교회를 싫어하는 것은,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우리의 성도>로 편입하려하는 끈적거림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경전의 고귀한 사상까지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니, 오히려 그 경전보다는 많은 신자들의 성스러운 행동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 믿고 천당갑시다~~~, 교회를 다녀서 천국으로 갑시다~~~하고 지하철에서 외치는 기독교 환자들때문에 우리나라 기독교는 욕을 먹고 있다. 그 외에도 소박함과는 거리가 먼 높아만 가는 예배당 십자가는 없는 이들에게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교회는 내 적성이 아니라고 고정관념을 갖게 되고 말았다.

전에도 한번 테레사 수녀님 이야기를 읽은 적 있는데, 이런 평전으로는 처음 만난다. 그 이야기나 이 이야기나 그게 그것이지만, 몇 번을 읽는대도 수녀님의 하느님에 대한, 진리에 대한 믿음, 그 소박한 믿음이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들은 나를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오늘 하루를 만나는 데도 행복하게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주변의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친다고 뭔가를 알고 있어서 남을 지도한다고 잰체하는 무지렁이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가르치시는 그 분을 보면, 소박한 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분의 어머니께서 남기신 말씀도 새길만 하다.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이...

이런 가르침에서 성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그 어머니께서 말씀으로만 좋은 일을 하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녀님도 <행동이 말보다 큰 소리를 낸다>고 하신 것이다.

인생은 누구나 너무나 값지고 고귀한 것이므로, 그것이 방기되는 것을, 소외되다 못해 시궁창에 버려지고 짓밟히는 것을 그분은 모두 그 작은 두 손으로 껴안으셨다. 마치 상선약수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가셔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그분이 일으킨 이 기적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잔잔하게 회자될 것이다.

인도의 가장 천한 사람들이 입는 사리를 변형시켜 만든 수녀복의 가난과 사랑은 가장 더럽고 가장 낮은 곳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가르치는 시대의 등불이다. 어리석은 나를 일깨우시는 하느님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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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7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5-08-2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성경을 독파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제 오만의 발언이었답니다. 그렇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저로서는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배타적인 유일신이 아닌, 그야말로 유일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 절절히 적힌 책이니까요. 우리가 하느님을 못 믿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어, 비유로써 말할지니,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하신 그 책 아닙니까?

혜덕화 2005-08-29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저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글샘 2005-09-0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좋은 책이라서 얼마든지 권하고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6-09-2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에 너무도 공감합니다. 저 또한 20대초까지 열심히 다닌 교회를 접고 모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될것 같습니다. 참 좋은 글을 써주셨네요. 정말 모든 종교인들이 진정 무엇을 위해 기도하며 무엇을 바라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요. 주일성수를 해야 하고 전도를 해야 하고 십일조를 내야만 천국에 가는양.. 설명하는 목사님들이 하루 빨리 사라졌으면 싶습니다. 성경을 중심에 두지 않고 목사님이 마치 신인양 생각하는 성도들 또한 사라졌음 좋겠습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고 바라는 세상은 무엇입니까? 제 자신에게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글샘 2006-09-2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진정 원하고 바라는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가득한 세상이겠지요. 부처님의 자비가 천 개의 강에 비치고, 노자의 말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나쁜 일도 하나 일어나지 않고, 미담도 하나 없는 완전한 무산 無産의 세상. 아니 이런 말도 필요없는 하느님이 흐뭇해하실 세상이겠지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침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떠올리는 하루와, 그저 잠에서 깨어 눈 비비고 하루를 시작하는 하루는 몹시 다를 것이다.

여행을 떠난 날, 아침은 유난히 눈이 일찍 뜨인다. 어젯밤 늦게까지 떠들던 동료들은 아직도 코를 골아대는데, 조용한 산새소리가 잠을 깨우고, 멀리서 계곡 물소리가 시원스럽다. 이런 아침, 일찍 나가서 대기를 호흡하는 일은 자못 상쾌함이 색다르다. 이런 날, 자연에 도취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매일 자는 잠자리에서 매일 울리는 알람 소리에 깨는 삶은 얼마나 단조로운가.

하루를 사는 것이 어차피 인생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하면 <나의 하루>로 오롯이 만들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가 종교거나, 명상이고, 이 책, 코엘료의 접근법이라고 하겠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연금술사>, <오 자히르>보다는 사색적인 소설이다. 앞의 두 권은 내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한 대신, 이 책의 주제는 자못 가슴 찡한 구석이 있다.

'죽음에 대한 자극은 우리를 더 치열하게 살게 한다'는 가설은, 현대에는 <상술>이 되어 <장례 체험장>을 운영하는 사업도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도 수업 시간에 <묘비명 쓰기>, <유서 작성해 보기>를 해 보거나, 인생 곡선 그리기로 미래를 그리는 활동을 해 보면, 아이들이 상당히 고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작품 속의 베로니카는 삶을 치열하게 사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작품 속에서 형상화된 인물은 나름의 생을 살아나가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베로니카는 <현재에 충실하게...> 사는 삶의 중요함을 깨닫을 따름이지, 치열하게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우리를 <치열>로 내모는 구호들이 많은가... <아침형 인간> <바보들은 날마다 결심만 한다> <1억 모으기> <... 다이어트 성공기> <외국어, 한 달이면 된다>... 이런 책들을 보면, 얼마나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강권한다. 그래도 이런 책들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서점에서 아예 넓찍한 코너를 차지한 초, 중등 학습법, 문제집 등을 보면 <이런 것을 알아야 자식을 올바로 기를 수 있다!!>는 책들이 정말 많다. 정말 뭔가를 알고, 실천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자식을 기를 수 있는 것일까? 예전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여러 식구 사는 데 떠들지 말 것과, 가난해도 도둑질하지 말 것과, 형제들끼리 생기는 알력에서 다투지 말 것을 가르치셨는데, 사실 그런 것들은 동물의 왕국에도 엄연히 등장하는 것들이다. 동물들도 자기 구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자기 음식에 손대지 못하게 하므로...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온 거라고 볼 수 있다.

토요일 저녁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란 코너를 재미있게 본다. 몇 회를 보면 볼 수록 이런 생각이 든다. <문제 아이에게는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다.>는 생각. 교직에 십칠 년 있다 보니, 골치 아픈 아이들을 만나도 그 아이를 고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더군다나 부모 호출은 특별히 변상할 일이 있는 경우 아니면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이 문제아면, 그 부모는 더욱 골치아픈 경우임을 숱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에게 생긴 문제는 대개 부모가 어느 시점에선가 잘못 대응한 것이 습성화 되어 고착화 된 것이란 것이 대부분의 경우 드러났다.

미쳤다는 게 뭐지? 아마 미친사람에게 물어보면 알까? 정신병은 오랜 동안 소설의 소재가 되어 왔다. 그만큼 독특한 정신 세계를 다루는 재미가 있고, 다양한 사건들이 마치 동물원처럼 격리된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코엘료처럼 자기의 경험을 적는 소설을 만나기는 어렵다. 그만큼, 코엘료의 소설 중에서 이 소설이 가진 <현실감> 내지는 <탁월함>이 여기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만의 것>을 쓰는 것보다 좋은 글은 없기 때문이다. 사막의 아내찾기, 오 자히르의 막연함과, 삶에 대한 우화 연금술사는 어쩐지 자기 이야기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스스로 자신이 미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곳, 남에게 호의를 베출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자신들이 하던 재미있는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 곳, 정신 병원>에 대한 그의 경험이 이 작품에 현실감을 불러 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살 날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본 적도 없고 얼마 안 있으면 두번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의 이러쿵 저러쿵 소리에 매달릴 필요가 뭐람?> 하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베로니카에게 삶의 <마지막 며칠>을 주는 것도 자아를 해방시킬 수 있는 기제로 작용한 것이다.

베로니카가 에뒤아르에게 자기의 모습을 가림없이 보여주었던 밤, 베로니카의 말은 <달마야 놀자>의 박신양과 주지스님의 대화를 떠오르게 했다.

   ..... 피아노에도 나 자신을 내 던졌어요... 하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온전한 나 자신이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곳에서 그의 경험은 좋은 작품들로 녹아날 가능성이 보이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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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8-1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선생님 글을 읽으니 <거짓의 사람들>이 생각나요.
문제아에게는 "악한" 부모가 있더군요. 아이는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드러나지만,
그 아이의 부모들은 자기를 끊임 없이 합리화 시키며 사회에서는 정상인으로 살아가더라구요. 섬뜩했어요. 그 책 읽고....

아침에 자명종 소리를 듣고 기계적으로 일어나기...그렇게 살고 있네요.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기분 좋게 일어나면 다른 하루를 보낼 수 있겠죠?
알면서도 못하는 일들이랍니다.^^

글샘 2005-08-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산다는 건, 기분 좋지만은 않은 일들과 만나서 투쟁하는 것같이 보인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물러서서 보게 되면, 조금만 떨어져서 보게 되면, 그 투쟁이 한없이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만해 지면, 병이라는 천사를 보내시어 나의 어리석음을 가르치시는 것인지도 모른답니다.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감산의 중용 풀이
감산 지음, 오진탁 옮김 / 서광사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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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일은 인류의 문화 유산을 읽는 일이다.

그런데 고전에 대한 편견이 먼저 박혀 버린 것은, 수천 년간 고전읽는 방식의 문제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국사 시간에 배웠을 <훈고>적 자세. 고전을 캐고 또 캐는 자세가 현대인이 고전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근원이 된 듯 하다.

저 유명한 돌 선생이 쓴 '돌 논어'와 '노자와 21세기'에서 보여준 다양한 해석들에 대한 훈구적 자세는 저자 나름의 현대적 해석을 바라는 일반 독자에게 염증을 심어주기에 적합한 책들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올 여름에 내가 만난 책들이 참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경숙의 도덕경 두 권이라든지, 장일순 선생님과 이아무개의 대화로 된 노자 이야기 같은 책은 구절의 풀이나 해석에 치우치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 주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무식을 통감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온고지신이란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옛것을 오늘날 사람들이 쉽게 느끼도록 풀어주는 것.

감산 스님의 중용 풀이를 읽고 그런 느낌을 얻는다. 명나라의 스님이었지만, 감산 스님은 노장에서 공자까지 선승의 입장에서 풀이를 하는데, 마치 그 느낌이 무위당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감산 스님의 글을 더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상식적으로 중용이란 치우치지 않는 덕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중도에 있으면 회색 분자 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본질을 꿰고 있으면 치우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렇게 성인들의 말씀은 한 군데로 치중하고 있을까... 공부하면서 새삼 놀랄 따름이다. 중이란 그 본질이고, 용이란 본질의 작용인 '체용'의 관계인 듯하다. 감산 스님을 만난 것을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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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성일권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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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 제목은  the crisis of Orientalism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위기...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름은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란 만화를 읽으면서였던가. 아니면 그 전에 어디서 들어봤던가...

그의 역작 오리엔탈리즘을 도서관에서 아무리 찾아도 찾기가 어렵다. 있기는 있다는데, 계속 대출중이고... 인기가 좋은 건지, 아님 누가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읽고 싶었던 오리엔탈리즘은 아직 못 읽고, 이 책을 먼저 읽어 버렸다.

9.11 테러 이후로, 미국이란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게 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적극적이다. 그가 재생이 불가능한 백혈병에 걸렸기 때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어렸을 때, 우리의 새마을 운동과 유사한 이스라엘의 공동생산체제에 대하여 배우면서, 사막을 초원으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경외의 염을 주입받은 세대다. 요즘 아이들은 아예 그런 것도 배우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임을 세뇌받은 내 두뇌는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하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존경의 염을 느꼈을는지도 모르는 그런 멍청한 세대였다. 우리도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기에, 조상의 얼을 오늘에 되살리는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새역사를 창조하라고 배웠던 거다.

그런데, 살다 보니깐, 미국이란 나라가 그렇게 아름다운 나라美國가 아니었고, 정말 흉악한 나라였으며, 내가 아는 최근의 모든 전쟁(이라크 전쟁, 십년 전의 걸프전, 이십오년 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동 전쟁, 사십년 전의 베트남 전쟁, 55년 전의 한국 전쟁, 60년 전의 2차 대전)에 교집합으로 참여한 유일한 나라. 바로 그 악의 축이었던 것이다.

그 미국이 만들어준 나라, 이스라엘. 그들에 대해 우리 교과서는 무조건적으로 우방으로 치부했고, 그들과 싸우는 세력은 빨갱이로 여기게 해 주었으리라.

그러나, 진실은 감출 수가 없는 법.

이스라엘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뿌리가 끊어진 나무는 비가 와도 말라 죽고, 줄 끊어진 연은 바람이 불어도 떨어진다는... 언젠가는 뿌리 잘린 나무, 줄 끊어진 연의 신세가 되리라는 생각이...

이스라엘 문제는 여러 모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강점 국가 이스라엘은 미국의 강력한 후원으로 든든하기만 하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평범한 지역에 총들고 쳐들어가 국가 세운지 50여 년 된 깡패 나라인 줄은 전혀 모른다.

세계 최대 규모의 최장 기간의 난민이 되어버린 팔레스타인 난민은, 힐러리에게 보석이나 바치는 썩어빠진 지도부를 가지고 있으며, 오랜 기간 지속되는 난민 생활에 지쳐 이스라엘의 하급 일꾼으로 일하기 시작하고 있고,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지속적인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중에, 일부 과격한 단체에서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끊임없는 테러를 일삼고 있다.

미국의 강력한 시오니즘은 그 부조리를 얼버무리고, 무시하려 하며, 강력한 물리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지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들은 학술적인 논문이라기 보다는, 투쟁의 전선이 형성되어야 할 지점을 짚어 주는 전략집으로 기능할 법한 글들이다.

평화는 누구나 원하는 바이지만, 테러를 통하여 <의義>를 실현하려 하는 의지를 가진 이들을 진정시키고 종국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그 배를 부르게 하고,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튼튼하게 하는 무위의 정치가 필요할 때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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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5-08-10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이 책은,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일으키게 한 책입니다.
어제 영화를 보고 나니까, 친절한 금자씨와 비슷한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글샘 2005-08-1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천 년 전의 자기 땅이라고 우기면서 남들을 학살하는 현실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는지요... 결자해지라고 맺은 자가 풀어야 하는 법인데...
방학 잘 지내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