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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내가 고친다
김홍경 지음 / 책만드는식물추장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4,5년 전에 이비에스에서 김홍경이 강의를 했다.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동양의 사상이 참으로 심오한 면이 있구나... 그런데, 대학을 나왔다는 나는 그 강의에 나오는 기본 개념들(음양 오행과 주역의 괘들...) 조차 모르는 문외한이었다니...
우리는 얼마나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서 살고 있는 것인지...
우리 나라가 독립하고 나서는 양의만 의사 대우를 받았다. 한의사는 불법 시술로 취급했고... 중국에서는 부족한 양의를 전통 의술의 계승이란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는데, 우리는 그 훌륭한 전통들을 지금의 의사들의 선배들인 미국물 먹은 의사들에 의해서 제한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우리 의사들이 모두 자기 배 불리려 살아온 것은 아니다. 짧은 시간에 이룬 의학적 성과도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모두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작금의 사태를 볼 때, 이건 아니다.
나이 마흔이 되어, 새삼스럽게 지금 로또가 걸려서 공부를 할 수 있다면 해 보고 싶은 공부가 한의학이다. 한의학은 동양 사상과 인체를 우주와 하나로 보는 관점들이 꽤나 마음에 든다.
그래서 김홍경의 강의를 모두 들을 수 없었기에, 이 책을 사 두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 절반 읽었다가 이번에 완전히 읽었다. 물론 주역에 나오는 말들은 모르는 것들도 있지만, 이젠 더이상 맛없는 비스킷이라고 외면할 만큼 내 삶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이런 책을 통해 깨닫는다.
어린 시절, 치기어린 놀이로 친구들 손금을 본다며 까불던 친구들이 있었다. 간혹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것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다. 나도 미팅 나가면 손금 봐준다며 여자애들 손 깨나 잡았더랬다. 희한하게도 철학, 역사, 종교, 문학... 그 고매한 사상적 토대를 논할 때면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수동적 여학생들이 손금을 봐준다고 하면 적극적인 질문 공세를 퍼붓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내 대답은 오히려 오리무중의 단답형으로 멎었고, 여학생들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맡긴 손바닥은 아랑곳 않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한다. 그러면 그 여학생에게서 들은 이야기 한 두개로 또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 하나 하고... 놀던 기억이 나지만, 주역은 몇 번 들척거리다가 괘와 효를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린 책이었다.
그렇지만, 요즘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불경을 접하며 한의학 서적을 뒤적거릴 때 이젠 더 도망가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역을 배우려는 것은 여학생 손바닥을 잡아 보기 위한 것도 아니고, 내 사주 팔자를 읽어서 출세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세상의 이치를 연구한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는데, 그것은 외면하고 재미로 읽는 책, 얕은 마음을 즐기는 책, 맛있는 비스킷으로서의 책들만 읽어서는 이제는 안되겠다는 야릇한 위기감이랄까...
이 책은 절판되었단다. 그럴만도 하다. 한의대 생이라면 너무 개략적이어서 불필요할 것이고, 우리처럼 문외한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내용들도 나오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1/3 정도는 세상사에 대한 잡문들이 너무 많다. 한의사가 너무 재치를 부리려 하면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 과유불급.
이 책을 읽으면서 익힌 한 가지. 우리 몸에는 지적인 것을 강화하는 심포 경락이 있는데, 암기나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 수궐음심포경락을 강화해야 한단다. 지식욕을 촉진하기 위해 이 경락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궐음의 신맛과 심포의 쓴맛이 어우러진 레몬, 오미자, 모과 등이 좋은 음식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지식의 배설과 망각을 주관하는 삼초 경락은 공부할 때 약화시켜야 하는데, 머리를 차게 하는 것이 한 방법이고, 휘발성 냄새와 담배처럼 흩어지는 성향을 기피해야 공부에 도움이 된다. 공부할 때 담배가 해로운 이유가 이것이다.
옛부터, 삼상사(三上思)라 하여 마음이 이완되어 아이디어 뱅크 역할을 하는 곳으로, 베갯머리, 마차, 화장실을 논하였다 한다. 마음을 놓아 버리는 꿈의 고갯길을 넘나드는 자리에서, 가슴 가득히 초록을 담고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는 여행의 길목에서, 그리고 아래위가 통하는 화장실의 쾌변에서 우리는 신선한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한의의 기본인 망문문절, 기색을 살피고(望),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듣고(聞), 의심나는 것들을 물으며(問), 진맥하고 촉진하는(切) 단계는 학생들을 면담할 때에도 필요한 절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늘 관심을 가지고 살피며, 사건사고와 행사들을 듣고, 간혹 상담으로 물어보며, 필요한 경우 긴한 접촉을 하는...
부처님께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시는데 왜 나는 손가락만 보고 있었던지(見指忘月), 한나라의 강아지는 고깃덩이만 좇을 뿐이지만 사자는 그 고기를 던진 사람을 문다는데(한로축괴 사자교인 韓擄逐塊 獅子咬人), 이 한 권의 책을 읽고도 내가 얻은 것은 부처님 손가락이고 한 점 고깃덩이일 뿐이구나.
그렇지만, 김용옥이 예전에 동양학을 왜 해야했던가를 외쳤듯이, 왜 우리 것을 읽어야 하는지를 조금은 생각하게 해준 책이라 고맙다.
나처럼 몸이 차고 살집이 잘 잡히는 사람은 매운 것을 먹어야 기가 흩어지고, 산모처럼 응집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신 것이 모으는 기운을 돋운다는 음양의 효과를 공부하기에 내 나이는 너무 늦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