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1
김남희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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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는 이런 여행 절대로 못 떠난다.

과감하고 겁 없고 앞뒤 별로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야 이런 여행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읽으면서, 야, 한비야 여행이랑 판박이다. 판박이...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차이점이라면 한비야가 좀더 수다스럽고 김남희는 조용하다는 차이 정도.

<로마의 휴일>에 보면 앤 공주를 보고 <앤 공주>와 판박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판박이의 뜻을 모르자 <멋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한비야나 김남희나 멋진 사람들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 나도 막 걷고 싶고, 혼자서 나를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 그러다가다... 쉽게 '달'나라로 떠나지 못한다. '6펜스'도 6펜스고, 그 6펜스에 매달려 알콩달콩 살아가는 가족과 함께 사는 삶이 소중하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 느슨하게 줄을 놓치기 어렵다.

그리고 걷는데도 자신이 없다.

올 여름에는 좀 걸어볼까 생각은 하게 만드는 책. 뒷부분의 산책 코스는 가본 데도 있고, 안가본 데도 있지만, 사진만 봐도 시원하고 멋지다. 책을 사서 보기는 조금 아깝고, 빌려 보든지, 서점에 한 시간 정도 잡아서 서서 본다면 충분히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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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남는 것은 오직 사랑뿐, 이아무개

웃음으로 넘기지 말고 대답해 주시게. 내가 그냥 한번 물오보느라고 묻는 게 아닐세. 정말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고맙네. 신랑도 신부도 여기 식장에 가득 찬 증인들 앞에서 각각 "그렇다" "사랑한다"고 대답해 주었네. 역시 기대했던 대답을 해주는군. 아무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오늘 이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나란히 서 있을 까닭이 없겠지. 그러면 내가 쓸데없이 공연한 질문을 한 것일까? 아닐세. 나도 그냥 한번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자,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한다니 이제 내가 달리 묻겠네. 대답해 주시게.

두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서로 사랑한다고 했는데 과연 시방 사랑이 어떤 건지 알고서 하는 건가?
대답을 망설이는군. 그럼 그럴테지. 내 보기에 자네들은 아직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네. 그걸 알 턱이 없지. 大學이라는 책을 보면, 처녀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법을 터득한 뒤에 시집가는 법이 없다는 말씀이 있네. 자네 두 사람은 지금 서로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게 아닐세. 두 삶은 이제 겨우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을 배우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라네.
가정(家庭)이란, 남녀가 만나 짝을 짓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러다가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면서 세월과 함께 적당히 늙어가는 그런 게 아닐세. 가정이 그런 것이라면 세상에 누가 이른바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신체 건강한 남녀라면 크게 애쓸 것도 없이 그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아닐세. 가정이란 그렇게 통속적이고 만만한 물건이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 가치로 보자는 것도 아닐세. 우리에게 서로 만나 결혼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면 경우에 따라 헤어질 권리와 자유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흔히 말하는 대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든 아내든 그 인생이 파멸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세. 나는 그런 논리에, 그런 억지 주장에 찬성할 수가 없네. 오늘같이 좋은 날, 헤어진다는 말을 입에 올려서 미안하네만, 내 생각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일세. 자네 두 사람 살다가 문제가 생기거든 망설일 것 없이 갈라서라는 이야기가 아닌 줄은 알고 있겠지? 다만 가정은 인간이 기필코 지켜야 하는 절대 가치가 아니라는 얘길세.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얼마든지 뜻 깊고 고상한 삶을 창조하지 않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가정이란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사랑인지를 배우는 학교라고. 물론 사랑을 학습할 만한 곳이 어찌 가정 한 군데 뿐이겠는가만, 운명처럼 만난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살을 섞으며 살아야 하는 가정이야말로 과연 인간이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 아니겠는가? 가정이야말로 "사랑 있으면 천국, 사랑 없으면 지옥"이라는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일세.
그런데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알려면 천국에서만 살아서는 안 되겠지? 지옥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살면서도 천국이 어떤 덴지 모르는 법이니까. 그것은 빛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둠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일세. 어찌 생각하는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눈먼 상태로 태어난 사람이 과연 어둠이 어떤 것인지를 알까? 밤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그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번뇌가 없으면 열반도 없다네. 그래서 번뇌 곧 열반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랑 있는 천국을 알고자 한다면 사랑 없는 지옥을 겪어 보아야 하네. 부부간의 갈등과 다툼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네. 그것 자체가 소중하다기 보다 그것을 통해 화해와 일치의 진가를 알게 되니까 그래서 소중하다는 얘기지.
부디 진지하시게. 헤르만 헤세가 말하기를, 신은 인간의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지만 진지하지 않는 자에게만은 등을 돌린다고 했네. 두 사람이 사랑을 배우고 익히는 학교에 입학한 것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하네. 물론, 그대 둘이  왜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그것도 사랑은 사랑이겠지. 아무렴! 왜 아니겠나.

그러나 아직은 아닐세. 아직 두 사람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야 정직한 고백이 될 걸세. 그래야 이제부터 전개될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희망과 기대를 걸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미 종점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희망도 기대도 있을 수 없다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로 깨달은 사람이라면(자신이 '사랑' 그 자체인 사람이라면)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는 나라"(예수가 말한 천국)에서 살고 있을 터인즉 그런 사람에게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워보겠다는 희망 따위가 있을 리 없잖겠나?

지금 자네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일는지 모르겠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축하받을 일이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이제 시작일세. 거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네. 두 사람은 우선 '빠져 있는 사랑'에서 나와 '존재하는 사랑'으로 들어가야 하네. 여기, 완전한 사랑으로 가는 오솔길에 대하여 대팩 초프라(Deepak Chopra)가 쓴 글(The Path to Love)에서 한 구절 읽어보기로 하세.

다음 단계는 로맨스(연애)는 흔히 결혼이라는 이름의 위탁된 관계로 들어간다. 여기서 오솔길이 바뀐다. 사랑에 빠져 있음(falling in love)은 끝나고 사랑에 존재함(being in love)이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 부부는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자기를 양육하는 법을 배운다. '자기를 내어줌'(surrender)은 모든 영적 관계의 열쇠가 되는 말이다.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이기적이고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에고(ego)의 욕구들이 영(靈)의 욕구로, 성숙하려는 욕구로 바뀐다. 당신이 성숙한 그만큼 얕고 거짓된 (사랑의) 감정(feeling)이 깊고 참된 (사랑의) 정서(emotion)로 바뀐다. 그리하여 자비, 신뢰, 헌신, 섬김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될 때 결혼은 신성하다. 그와 같은 결혼 생활은 거룩한 바탕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결코 비틀거리거나 넘어지지 않는다. 그 결혼은 또한 순진무구하여 흠이 없다. 결혼 생활을 하는 유일한 동기가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었네. 그날의 화제가 부부 사이에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어떻게 '틀어잡고 사는가'였는데, 한 신부가 첫날밤 자기 신랑 틀어잡은 사연을 자랑인 양 털어놓더군. 그 내용을 재구성하면 대충 이와 같았지.
첫날 밤 제주도 한 호텔에 들었는데 신랑이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신부에게 자기 양말을 벗기라고 한다.
"양말 좀 벗겨줘."
신부가 입술을 걀쭉하게 실그러뜨리며 내려다본다.
"양말 좀 벗기라니까!"
이윽고 신부의 앙칼진 목소리.
"자기는 손 없나?"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고 신랑은 신랑대로 신부는 신부대로 새삼 전의를 돋운다.
"정말 못 벗기겠어?"
"못 벗겨."
두 사람은 각자, 첫날밤 기선을 제압하지 못하면 평생 고달프니까 절대 밀려서는 안 된다는, 선배 고참들의 충고를 되새긴다.
"안 벗기면 나 이대로 가버린다."
"맘대로!"
이윽고 성난 신랑,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데 신부는 오히려 딸깍 소리도 요란하게 문을 잠근다. 공방전은 자정 넘어 백기를 들고 돌아온 신랑이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그 뒤로 "아직까지는 남편을 확 틀어잡고 산다"는 이야기.

어떤가? 하기는 그렇게 살면서도 나름대로 인생의 '재미'를 느낀다면 뭐라고 시비를 걸 것까지야 없겠지. 그러나 결혼 생활의 맛을 어찌 상대방을 틀어잡고 사는 데서 찾으려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부디 오늘 입학한 사랑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우등생들이 되기 바라네. 그리하여 다른 것에는 몰라도 '사랑'에 관해서만큼은 깊고 진실한 일가견을 이루시고, 그렇게 배운 사랑의 기술로 아무쪼록 기울어진 세상 바로 세우고 병든 사회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한몫 거드는 내외가 되시기를 바라네.

앞으로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 일을 통하여 사랑을 배우고 익히는 것에 목표를 세운다면, 그렇게만 한다면 자네들 하는 일마다 옳고 바르고 아름답고 유익하고 기특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부디, 주례자의 상투적인 잔소리라 여기지 말고 명심해 두시게. 사랑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요, 사랑이 없으면 인생사 제아무리 시끄럽고 거창해 보여도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끝으로, 두 사람의 앞날이 오직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며 <베다 Veda>의 한 구절을 함께 읽어 보겠네.

생명 곧 사랑이요, 사랑 곧 생명이다. 사랑 아니면 무엇이 사람 몸을 하나로 통일·유지시키는가? 인간의 욕망이란, 자기 사랑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의 지식이란, 진리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방법과 모양은 잘못될 수 있겠지만 그것들 뒤에 숨은 동기는 언제나 사랑,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사랑이다. 나와 나의 것은 작을 수도 있지만, 혹은 우주를 깨뜨리고 껴안을 만큼 클 수도 있지마, 그래도 남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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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월든의 작가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 Civil Disobedience 의 원제목은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 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 이었다고 한다.

소로우의 글을 읽을 때, 월든에서는 고요한 월든 호수의 자연에 깃든 맑은 영혼을 읽고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소로우가 조금 맘에 안 든다. 물론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도 많다. 특히 이 책의 <시민의 불복종> 부분은 국가, 민족의 개념이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애국은 미덕이라고 강요되어온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공부해야할 교과서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이며, 정부는 공정하지도, 정의에 입각하지도 않고 늘 가장 힘이 센 존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시대적 배경이 미국이란 나라가 생겨서 한창 서부 개척을 이룰 시대였고, 노예의 문제와 멕시코 전쟁으로 미국 내의 두 세력이 치고 받는 시대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국가나 정부라는 개념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역시 청교도의 결벽증 같은 것이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는 그의 명제는 당시의 국가가 얼마나 어정쩡한 것이었던지를 보여주는 역설적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우리는 <인간>이기 이전에 <국민>이기를 강요당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해야 하는 유교적 수직 질서가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직도 학교에서는 <인간>이기 이전에 <학생>일것을 강요하고 있기도 하다. 국가 인권 위원회란 웃기는 기구에서는 초등 일기장과 두발 단속을 인권 침해라고 규정하였다. 좀 웃기는 나라 아닐까? 초등학생이 일기 쓰는 것, 학교에서 머리 자르는 것을 <인권 위원회>에서 판결내려야 하는...

그만큼 우리는 경직된 사회에서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살아왔던 것이다. 아직도 학교에는 아이들 머리 자르는 것이 <인권 침해가 아니다>고 침튀기며 떠드는 교사가 수두룩하다. 이유는 단 하나. 학생들은 복종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들은 불복종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직도 삼강 오륜의 수직적 유교 질서를 학교들은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토론 문화>니 <자율적 교칙 제정>이니 하는 것은 결과가 뻔한 눈가림에 불과하다.

세익스피어의 <존 왕>에 이런 구절이 나온단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 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의 어느 왕국의 쓸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소로우가 살아온 19세기 초반이 비록 미국이란 신생국이 어메리컨 인디언들의 고귀한 핏물 위에 국가를 세우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현대의 시각에서도 <국가와 나>의 관계, <애국과 반정부 투쟁>의 관계에서 헷갈리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귀감이 될만도 하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나는 조용히, 내 고유의 방식으로 정부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는 바이다.

아마, 80년대에 우리가 소로우를 알았다면, 대학생들의 운동의 모토가 되지 않았을까? 그만큼 우리는 글을 전체 맥락에서 읽지 못하고, 자기 취향에 맞고, 의도에 맞는 부분만을 오려서 써먹어 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200페이지가 모두 이런 이야기라면 딱딱하고 지루했겠지만, 60페이지가 시민의 불복종이고, 나머지 140페이지는 소로우의 본령인 자연과 동화된 삶의 모습들이 빛나는 잉크로 기록되어 있다. 마치 가을날 수직으로 낙하하는 낙엽들의 붉은 빛과 성게처럼 빛나는 밝은 태양 사이로 높게 솟아오른 전나무의 교목들이 '너희 그렇게 살고 있냐? 그렇게밖에 살 수 없겠냐?'며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그의 <가을의 빛깔들>을 읽으면서는, 나는 나무의 종류나 나무의 단풍드는 특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니 거의 문외한이지만, 가을 단풍의 달착지근한 향기와 낙엽 타는 냄새라도 금세 달려들 듯한 낭만이 뇌수 가득히 퍼지는 맛을 본다.

역시 감옥에 하루 있다가 친척이 돈내서 나오는 어설픈 불복종 신세보다는 자연에 대한 예찬이 그의 격에 어울리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에게서 간디가 <불복종>이란 말을 배웠다고 해서, 그가 철저한 사상가라고 보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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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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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초등학교 육학년 아들이 역사를 좋아한다. 글쎄. 역사 과목이 재미있다는 건지, 문제 푸는 게 체질에 맞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는 암기과목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암기 과목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국사와 세계사는 별로였다. 반도 못 맞춘 적도 있었고... 국사와 세계사는 참 어려웠던 과목인데, 대학 시절 사회과학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세계사, 한국사를 여러 방면으로 읽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시험을 치라면 모르겠지만, 국사를 싫어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내가 살아온 80년대 덕분인지 탓인지 그렇다.

츠바이크의 이 책은 역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저 서사의 시대, 80년대에 역사는 진보한다고 자신있게 말하던 선배들에게 난 늘 회의적이었다. 과연 역사가 진보하는 것인지... 역사가 진보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우리가 맡은 피의 냄새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을 증거해 주지는 못했다.

늘 매캐한 최루탄 냄새로 울면서 등교를 하고, 신문의 하단 1단 기사로 늘 작은 시위를 접하면서 역사의 흐름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나는 그래서 역사 책을 자꾸 읽으려 했던지도 모르겠다. 특히 88년 해금이 되면서 북한의 역사 서술도 출판된 책을 통하여 만날 수 있었다. 이적지 배우던 것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이었던 기억은 나지만, 그것 역시 역사는 한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기술되어 있어서 실망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얼마 전, 마이리뷰 당선 이벤트를 할 때, 어느 분이 이 책을 소개해 주셨는데, 이 제목을 보고, 내가 그토록 믿지 못하던 역사의 정체에 대해서 이제 조금이나마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에는 미친 놈과 우연의 점들이 끝도없이 이어지면서 마치 하나의 흐름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단 거다.

나는 늘 좀 삐딱한 편이어서 하나의 교조적인 지침을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학문적으로 캐들어가는 걸 좋아하느냐면, 그것은 또 적성에 안 맞다. 그냥 '저치가 저렇게 떠들어 대도 결국은 모르는 거잖아?'하는 냉소와 독설이 내 주특기라고 할 수 있다. 살아오다 보니 내 성격이 그런 걸 이제 알겠다.

이 책은 재미난 역사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소한 역사적 사건들과 중대한 역사적 분수령들이 어떻게 얽히는 것이며, 개인이란 얼마나 그 사이에서 우연하게 얽혀 드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책으로서는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한 달이 넘었는데, 중간에 한 이주 이상은 내 손을 떠나 있기도 했고... 이제야 절반 정도를 마저 읽었다. 이 책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지만, 역사에 대해 나처럼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반가운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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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과외수업을 받지 않는다
김종철·이현주·장회익 지음, 류연복 그림 / 샨티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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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골라든 이유는 단 하나. 김종철, 이현주, 장회익 이 세 사람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 이름 값을 얻을 수 있었다.

김종철 선생은 녹색 평론의 수장이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간디의 물레라는 글이 실려 있다. 그 글의 요지는 역시 <선진국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루는 진정한 삶>의 구현이다. 이 책의 김종철 부분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아우르고 있으나, 결국 요즈는 하나다. 간디가 물레를 돌린 그 정신을 생각하라!... 는 그것.

지금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악마적인 과정을 중단시키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로 가는 것. 그것이 공산주의로 이룰 수 없음을 우리는 과거에 경험했다. 공산주의 이상을 공산주의 국가로 이룰 수 없는 것. 그 딜레마를 그는 <국가>를 부정하고 <공동체>에서 찾는다.

요즘 어느 매체에나 등장하는 서울대 황모 교수의 줄기 세포는 나를 경악하게 한다. 내가 암이 걸렸을 때 황교수의 줄기 세포가 나의 생명을 조금, 아주 조금 연장시켜줄 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줄기 세포가 무섭다. 드래곤 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영생을 준다면 그가 좋겠지만, 그의 연구는 드래곤 볼이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눈부신 기술이 아니라, 인간 생존의 근원적인 바탕을 늘 잊지 않게 해주는 인문적 지혜와 종교적 감수성이라고 김종철 선생은 역설한다.

장일순 선생의 나락 한 알, 그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이야기나, 시간은 무한한데 바삐 서둘러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인용들도 모두 하나로 녹아 든다. 간디가 왜 물레를 돌렸는가를 생각하자는 것.

이 아무개 선생의 글, 그 중에서 깜짝 놀라게 한 글이, 바로 그의 주례사다. 결혼은 사랑해서 하지만, 사랑의 완성이 아니다. 결혼은 바로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거추장스러워서 목사직도 던져버린, 그러나 단 하나의 스승, 예수를 모신 그의 생각은 바로 하늘을 섬기고 사람을 살리자... 이다. 이건 뭐 말이랄 것도 없고, 종교랄 것도 없다. 그의 하늘은 자연이고 우주이며, 바로 작은 우주 사람이다. 사람을 살리는 길은 우주를 살리는 길이고, 환경과 후손을 생각하는 것만이 인간의 살길이다. 어려운 것이 전혀 필요없는 인간의 버러지 같은 삶에,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공론들을 그는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얼마나 간명하고 정확한 글인지...

장회익 선생은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직을 버리고 온생명 이론을 이야기하며 녹색대학 총장일을 하고 있다. 서울대, 그것도 최고의 물리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 재미를 버릴 만큼 그에게 절박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녹색의 씨앗, 그 속에 모든 것의 주인이 들었는데, 그것을 멸망시키는 현실이 그에게는 숨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류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퍼뜨린 <암세포>로서의 기능을 소리 높여 알리는 것이 당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우리의 몸이 온 생명이며, 우리 인간이 곧 온생명의 의식 주체 노릇을 하는 존재인 동시에, 이 온생명을 병들게 하는 암세포적 기능을 하는 두려운 현실을 보며 말이다.

출발은 달랐지만 자연이라는 하나의 길에서 만났다는 표지글이 잘 어울리는 수필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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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0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닭은요, 파란여우 털옷을 짜 주려고 했다는 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