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새벽
마해송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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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린 시절, 유신의 칼바람이 불던 시절에 <고전 읽기>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의 독서조차 획일화시키려 했던 적이 있었다. 초록색 짙은 표지에 아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싼 값으로 도서를 보급하였다.

그 책의 면면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내가 3학년이던 때, 우리 학년의 도서는 이솝이야기, 한국 창작 동화집, 고전 동화집, 그리스 로마 신화 이런 것이었다. 누나의 6학년은 이율곡, 이순신, 이런 전기류였던 것 같다.

의무적으로 책을 다 샀기 때문에 집집마다 짙은 초록색의 이 책은 넘쳐났다.

독재 정권의 의도는 여러 가지였겠지만, 그중 정권의 유지가 가장 큰 목적이라 군인들의 전기가 불필요할 정도로 많이 교과서에 수록되고 팔렸겠지만, 내가 읽은 많은 이야기들은 이 시절의 이야기 밭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모든 일에는 이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 듯 하다. 고전읽기 사업이란 획일적 독서 사업이 평생의 독서에 지침을 줄 수도 있고, 평생의 세계관을 삐뚤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그 한국 창작 동화집 가운데 내가 가장 감명 깊에 읽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 마해송 선생님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이었다.

마해송 선생님의 이야기는 참 솔직하다. 어찌 보면 자서전인 이 글은,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 일지가 비장한 투쟁의 일대기였던 것과는 달리, 꿈과 같이 아련한 어린 시절부터 잦았던 연애 사건, 일본에서의 출판 사업, 전쟁의 체험까지를 가감없는 문체로 담백하게 서술하신다. 이런 것이 글의 힘이라 할 만하다.

그분의 삶은 특별한 그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샤먼에 세계에 가까이 살면서 성장한 여느 어른의 삶이었고, 동경으로 유학가서 신여성과 만나게 되는 것 들도 당시 지식인들의 삶의 한 면이었다.

객지에서 폐병을 얻더 사나토리움(sanatorium, 결핵 요양원)에서 있었던 일화는 마치 꽁트를 읽는 듯한 유쾌함마저 묻어나는 글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밥 짓는 아이들이 권세를 얻은 홍위병 마냥 인민 재판에 참여하는 과정은 생동감이 넘치다 못해 내가 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사실 그 시대의 모습을 이렇게 간명하게 증언하는 책들은 흔하지 않다.

자욱한 안개에 덮인 거리를 엷은 햇살은 걷어 헤치는 것같이 차츰 지붕들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새벽... 그는 천주교로 귀의하면서 책을 마친다.

삶에서 첫 경험은 중요하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어린 시절 동화집에서 각인된 마해송 선생의 이름은 나를 그분의 글의 흐름에 마치 잘 알던 어른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친근하게 여기게 했던 것이고, 그래서 부드럽게 그분의 비굴하지 않으려던 곧은 선비 정신을 새삼 느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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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편지
권오분 지음, 오병훈 그림 / 도솔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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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황대권 선생의 야생초 편지를 감명깊게 읽었던 적이 있는데, 이 책은 그 아류라고 치부하고 넘기다가, 그림이 하도 고와서 읽게 된다.

감옥에서 귀하고 힘겹게 키워내는 야생초 편지의 절절함에 비하면, 천방지축 꽃사랑 아줌마의 발걸음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추억과 함께,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꽃들이 예쁜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삶은 죽음이 있어 소중하다지만, 지고 안지고를 떠나서 작더라도 꽃은 꽃임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달개비에서부터, 토끼풀, 원추리, 진달래 같은 예사 꽃과 금꿩의 다리, 해오라비 난초, 자주꽃 방망이, 고마리 들은 꽃에 맺혀서 사는 저자 덕에 만나 보기만이라도 하는 꽃들이다.

사람을 만나면 세 사람에 한 사람은 내 스승이 계시다고 공자님이 그러셨던가.

굼뱅이도 궁굴 재주는 있다고 했는데... 잘나고 똑똑한 사람 많은 세상에서, 생뚱맞게 얼굴 벌겋게 탄 신부가 고운 제비꽃 부케를 들고 시집을 가는 이야기도 나름대로 풋풋한 푸성귀 맛이 난다.

식물도 꽃을 피우고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서는 <시련>을 주어야 한다는 말처럼, 세상의 시련들은 우리에게 꽃을 피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예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한다.

계수나무의 달착지근한 향과 매혹적인 노랑 잎도 만날 수 있고, 여기까지 향기가 물씬 전해 오는 산국화의 뭉치를 코에 달고서 가볍고도 상쾌한 이 책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보통 이런 책의 작가들이 무슨무슨 교수 아니면, 무슨 협회장이란 명함을 떡하니 박고 사는데 비해, 이 글의 작가 소개는 ~~회 회원으로 만족한다. 그러면서 법정 스님이 발간하는 <맑고 향기롭게>에 꽃 이야기를 5년 연재했다니, 그 꽃에 대한 지극 정성과 유별난 사랑 이야기가 어찌 읽을 것이 없을쏘냐...

한국식물연구회장이자 한국 수생식물 연구소장으로 계시다는 오병훈 선생님의 그림이 참 정감있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식물 도감 한 권을 만났다. 여느 도감의 사진보다 훨씬 정겨운 느낌이랄까...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에 버금가는 친환경 도서를 만나 행복한 하루였다.

각 글의 처음에 박힌 연두, 주황, 자주, 쪽빛의 글자들도 어찌 그리 정겨워 보이던지... 비가 내려서 내가 좀 젖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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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려 주었다.  아이들이 잠시 숙연해진 듯...

그러나, 공기처럼, 가족처럼...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는... 나라라는 것.

이런 글을 가르치는 일은 괴로움이다.

애국의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를...

삶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유관순 열사께서 남기신 말씀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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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7-0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잠깐 수업시간에 한일합방 이야기가 나와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진정한 애국심이 무엇이며 국민에게 애국심을 강제하는 국가에 생각이 미쳐서.. 혼자 잠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애국'이라는 단어가 아주 낯설게 다가왔어요. 골고루 가난한 작은 공동체.. 그런 행복한 공동체가 가능하다면 굳이 나라, 국가, 민족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런지.. 뭐 그런 비현실적인 생각의 가지들..

글샘 2005-07-0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도 일종의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나치즘이 그 표본이니까요. 어느 집단을 <통일>시키는 기능은 반드시 다른 집단과 <분리>시키는 기능을 하니깐 말이죠... 존 레논의 이매진이 생각나네요. 이매진 노 칸츄리스, 이매진 노 릴리젼... 저놈의 국가니 종교니 하는 잡것들 때문에 인류의 세계사 책은 얼마나 피범벅이 되었던지를 생각한다면... 정말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면서도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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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들을 읽노라면, 갑자기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자신이 번역가 출신이어서인지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번역자 김화영씨에 대한 좋은 느낌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다비드 르브르통의 <걷기 예찬> 조차도 그의 책이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그의 책은 <예찬> 이었는데 말이다.

올해로 여든 하나가 된 미셸 투르니외는 건조한 할아버지일 것이다. 파리 근교에서 평생을 혼자서 살아오신 성품이 얼마전 읽은 권정생 할아버지, 그리고 그보다는 전우익 할아버지에 좀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남자 혼자 사는 삶. 가볍고 텅빈 이미지의 삶.

텅비어 있다고는 했지만, 투르니에의 시선은 집요하게 이미지에 집착한다. 그의 뒷모습에서도 사진에 매달리는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젊은 시절 사진도 찍던 그는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만나는 것이리라.

아마 나이가 더 들어, 그의 시각이 기능을 다 하고, 후각이나 청각의 이미지로 세상을 만나게 된다면 색다른 글을 또 만날 수 있으리라.

그는 독서의 과정조차도 이렇게 쓴다.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며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단어들을 손으로 만져 보고, 은유들을 쓰다듬어 보고, 구두점들을 문질러 보고, 동사들의 맥을 짚어 보고, 형용사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들어 보고, 한 문장 전체를 애무해 본다는 것은... 얼마나 공감이 가는 행동인가!>하고...

정말 좋은 책은 휘리릭 넘겨지지 않는다. 미셸의 말마따나 손으로 찬찬히 더듬어 가며 눈에 좀더 가까이 들이 대고,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좀더 밝은 쪽으로 들이밀게 마련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특징인 책을 대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 이것은 얼마만한 기쁨인가...

사진을 좋아하던 그의 <조리개>에 대한 통찰은 정말 경이로웠다. <조리개를 닫으면 암실에 들어가는 빛의 양이 감소하지만 반면에 화상의 깊이는 깊어진다. 반대로 조리개의 직경이 커지면 밝기는 커지지만 깊이는 줄어든다. 깊이와 밝기가 반비례하고, 한쪽을 가지려면 다른 한쪽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 딜레마보다 더 보편적인 진리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 나는 이제까지 이보다 더 적절한 인생의 비유를 만난 적이 없다. 아니, 이 글을 읽는 순간은 그렇게 느꼈다. 인생을 밝게 살 것인가, 깊게 살 것인가... 이것은 딜레마와도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하나를 희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에게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난 오늘도 딜레마 앞에서 쩔쩔매는 속인일 따름이다.

늙어가면서, 그는 <좋게 늙기는 지극히 어렵다. 나이가 드는 것은 절대로 늙지 않는것과 좋게 늙는 것, 그리고 좋지 않게 늙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절대로 늙지 않는 쪽에는 가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좋지 않게 늙는 것은 싫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그쪽으로 자꾸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똑같은 환경에 둔 사과라도 어떤 사과는 부풀어 오르다가 썩어 버리고, 어떤 사과는 그대로 가벼이 말라간다고 한다. 그런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 나는 삶이 그대로 가벼이 말라가는 것. 그렇게 늙음을 맞고 싶다. 그게 밝은 것 보다는 깊이있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조리개를 닫고 암실에 들어가는 빛의 양을 줄이면서...

그래서 그는 심연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컴컴하고... 어둡고... 깊고... 바닥없는 구멍난 이미지의 심연... 이미지 없음이... 바닥 없음이 그 이미지인 심연을... 심연같은 생을 꿈꾸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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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가 2006-03-30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외면일기보다 더 괜찮나요? 사서 볼만한지??// 참고로 전 아껴 읽을만한 책, 매력적인 글귀가 많은 책은 사서 볼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

글샘 2006-03-3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깐... 외면일기는 사서보기 영 아까웠는데, 이 책은 괜찮을 것입니다.^^
 

BCG에서는 팀내 창조성을 향상시키는
자유로운 분위기 조성을 위해
PNI 규칙을 가르친다.
모든 논의는 반드시 긍정적 (P),
부정적(N), 흥미롭게(I)의 순서로 실시하라는 의미이다.
그룹의 경우 감정이 중요하다.
먼저 공격적 언사가 나가면
대부분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내놓지 못한다.
이 방법만으로도 팀 분위기는 180도 바뀐다.
- 미타치 다카시, ‘BCG 전략 인사이트’에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도 잘 못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좋아’, ‘대단해’, ‘역시’등은
사기를 올리는 말이고,
‘틀렸어’, ‘설마’, ‘거짓말’ 같은 부정어는
의견을 제시코자 하는 의욕을 감퇴시키는 말입니다.
자유로운 의견 교환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냐,
무거운 침묵이 흐르게 할 것이냐는
바로 여러분의 첫 말투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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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7-0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글 저도 메일로 받고 있어요. 하루에 한편씩...좋은 글이 많더군요.

글샘 2005-07-05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어떤 글은 지나치게 성과 위주의 팍팍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저는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따끈한 훈화가 늘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모아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