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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처음 그를 읽었던 '삼미... 팬클럽'에서 그는 유창한 이야기꾼이었다. 그 다음 읽었던 '우주영웅전설'에서 그는 독설가이며 세상을 날카롭게 읽는 풍자가였다. 드디어, 그는 이야기꾼에서 풍자를 거쳐, <이 시대의 지배적인 작가>로 발돋움을 시작한 듯 하다.
그를 읽으면서 이상을 생각했다. 본명 김해경. 예명이라 하더라도 성(姓)은 그대로 쓰던 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고유한 특성일 것이다. 이름은 이름에 불과할 뿐, 이름에 묶이면 창조란 없다는 의미였을까, 이상은 본래의 성을 버리고, 무의미한 '상자 상' 자를 자기 이름자로 삼는다. 하하. 원래 이름이란 무엇이냐. 아무 것도 아니지 않던가. 내 이름이 나는 아니지 않은가... 뭐, 이런 거 아니었을까? 이상의 시를 읽으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소리를 들으면 이상은 '미친 놈들, 웃기고 있네.'하는 비아냥을 던질지도 모른다.
카스테라는 분명,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요즘 다른 작가들의 차가운 작품들과는 다른, 세계의 흐름을 담은, 소설의 변화를 담은 새로운 담론을 그에게서 읽는다.
이제 소설의 시대는 저물어 가는 듯 하다. 80년대, 정의가 있고 우리는 날마다 아홉시 뉴스를 보면서 이를 갈던 불의가 있던 <서사의 시대>는 냉전의 종식,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건너면서 인기를 잃고 만다. 현대 노조가 투쟁을 해도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고, 정치권에서 아무리 첨예한 사안을 들고 나와도 시민들은 관심이 없다. 새파란 젊은이들이 광화문 앞에 모여 붉은 악마(레드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이런 기찬 방식은 감히 이십 년 전 나로서는 꿈꿀 수 없었다.)의 함성과, 미군 탱크에 짓밟힌 한국의 혼에 대한 촛불 시위, 최근 고교생 집회 까지 시대의 삶을 포스트 모던하게 바꿔간다.
요즘 가수들의 성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비'가 성이 무엇이든, '쥬얼리'가 무엇이든 알 바 없다. 벌써 80년 전에 이상은 자기 성을 버렸던 것과 같이...
냉전이 종식되고, 의미가 해체되는 시대에 소설의 양식도 많이 바뀌고 있다. 최근엔 인터넷 소설 내지 환타지 소설이란 새로운 장르가 상업시대의 불량 상업 정신을 바탕으로 청소년을 감염시키고 있다. 젊은 작가들은 마치 김승옥이 <서울, 1964년 겨울>에서 그 익명성과 비정성을 갈파했듯이, 현대의 냉정함을 적고 있다.
그런데, 다른 형식 속에 녹아나는 그것들이, 난 무언가가 2%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 시대의 정신이 살아서 팔딱거리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대를 아파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그 속에 너무 단편적으로 포함되었던 것이 내심 불만이었다. 그들은 끝없이 패배하고 있었으며, 지독한 삶의 비린내를 너무도 쉽게 팽개치고 있었던 것도 불만 요소 중 하나였고...
박민규는 냉혹하지 않다. 그는 따스하다. 그의 소설 속에는 냉장고가 탄생하여 숨을 쉬고, 개복치가 우주를 평정하며, 기린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사람의 눈물을 이해하는 너무도 인간적인 존재들인 것이다.
시대의 정신을 담아 내면서도, 그의 작품은 충분히 <인터넷 세대>의 발랄함 - 디시 인사이드 행자들의 신랄한 그 패러디와 풍자 정신 - 을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나라고 해서 그가 쓴 소설의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하려는 이야기가 어떤 방향인지는 충분히 공감이 가고도 남았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땅땅거리고 땅을 많이가지고 잘 사는 나라, 고위층 자식들은 외국 영주권 가지고 우리나라 국적 따위 포기하며 잘 날라다니는 나라. 그런 나라에 살면서, 이런 작가를 만난 것은 통쾌한 일이고 상쾌한 일이고, 정말 유쾌한 일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새 시대를 여는 소설로서의 이런 작품들보다, 더 넓은 독자층이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을 박민규에게서 기대하고 싶다는 점이다. 그의 말발과 재치가 단편집이든 장편이든, 치열하게 얽힌다면 분명 새 시대의 새 작가의 큰 탄생을 축하라도 할 작품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