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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요정 이야기
바바라 G.워커 지음, 박혜란 옮김 / 뜨인돌 / 199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원 제목은 Feminist Fairy Tales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요정 이야기...
그리스 신화에서 아더 왕의 전설까지, 유럽을 풍미하는 신화, 설화들은 남성 우월주의 사고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바바라 워커는 발칙하게도, 아름다운 여성의 신화를 창조한다. 그것이 페미니스트 페어리 테일즈다.
얼마 전, 다빈치 코드라는 추리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은 결과가 아니었다. 과연 성경 속에서 남성 화자들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은폐를 기도했거나 은폐에 성공해서 지금까지 내려운 구절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는 것이 정말 의문이었다.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서 세계를 뒤지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린 영화, 소설은 수도 없이 많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비롯해서 다빈치 코드까지 그 성배의 원형을 재구하려는 노력들은 숱하게 논의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특이한 <과열>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신봉하는 국가이기에, 그런 논의에서 벗어나 있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특성은 나약하고, 의존적이며, 왕자만을 눈빠지게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되어 왔고, 이러한 역할 배분에 따라 남성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반(半)인간'의 지위를 지켜 왔다. 특히 우리 조선사에서 여성의 지위는 3從之道에 따르는 정절의 미학을 국가에서 장려해 온 것도 사실이다.
아직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약하고, 구조조정의 1순위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21세기에, 이런 책들은 유치원 선생님들부터 읽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을 기르는 부모라면 심각한 의도를 가지고 이런 책들을 읽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여성들도 자기 운명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고, 능동적인 사람이 결코 싸가지 없는 사람이 아님을 깨달아야 함을 가르치기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학교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장래 희망이 <현모양처>인 아이들이 있다. 미래의 자기 모습을 말하랬더니, 아이의 어머니고 남편의 아내로서 만족하다니... 잘못 가르쳐도 한참 잘못 가르친 거다. 그래서 난 여자 아이들에게 <못된 여자>가 되라고 한다. <착한 여자>는 결코 멋진 인생을 살 수 없다고... 동풍에 나부끼다가 짓밟히고, 고개 숙이지만 다시 일어나고 다시 웃는 김수영의 <풀>처럼, 그런 여성으로 살라고 한다.
난 딸이 없는데, 간혹 딸 하나 키우면 얼마나 재미난지 아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난 내심 진심을 담아 손사래를 친다. 이 땅의 어미들에게 물어보라. 정말 딸 키우는 것이 재미나기만 했더냐고. 어린 아이들일 때는 어떤 아이라도 예쁘게 마련이다. 특히 정신적으로 성장이 빠른 여자 아이들의 경우 귀염성을 더 부릴만도 하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세상은 백마탄 왕자가 기다리는 캔디네 집이 아님을,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울다 보면, 들장미를 알아주는 테리우스 님이 계실거라는 환상 속의 그대가 될 수 없음을 딸 기른 부모들은 잘 알지 않던가.
그리하여 남아 선호, 태아 감별, 특히 그 보수성이 심한 경북 지역에서는 남아:여아의 성비가 130이 넘었다는 황당한 자료도 만날 수 있지 않은가.
여자를 강하게 기를 일이다. 싸가지 없고 못돼먹었단 소리 듣는 것이, 착한 여자로 평생 눈물 흘리며 사는 것보담은 천배 만배 낫지 않으냐.
직장에서 강한 여성들은 여성적으로 매력이 없다. 당연한 것이다. 직장에서 동료직원에게서 요구할 것은 파트너십이고, 경영 마인드지, 성적 매력을 느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결혼 상대자를 구하는 여성들이 매력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결혼하고 나서 여성으로서 멋진 사람은 얼굴에 화장품으로 코팅해서 가면을 쓰고 찹쌀떡처럼 뽀얀 얼굴로 주름을 가리는 멋이 아니라, 인품의 깊이에서 우러나는 당당함이 아니겠는가.
여자를 성적 노리개로(우리 나라에서 이 점은 IMF 이후 너무도 만연한 풍조다. 오죽하면 국가에서 여성의 신체를 통한 부업, 일명 성매매를 관리하겠다고 나섰겠는가.) 여기는 남자들, 여자는 저능하고 일시키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남자들, 여자는 얼굴이 예쁘고 봐야 땡이라는 남자들...
여자이기 때문에 현모 양처(말로는 그렇고, 속된 말로 하면 신데렐라, 백설공주, 콩쥐 처럼 의사 마누라나 되고 싶은 속마음을 감춘 속물들)를 꿈꾸는 여자들, 여자이기 때문에 비행사, CEO, 앵커(앵커 우먼은 부록 아닌가? 우리 나라에 언제나 앵커가 등장할는지...), 정치가(박공주는 정치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장비 운전 기사 같은 남성스런 직업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여자들, 여자는 시집 잘 가면 땡이라는(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 이데올로기는 봉건 사회 여성들의 의식을 잠재운 마약이었다.) 멍청한 여자들...
이 남성, 여성 모두가 이제까지 집요하고 교묘하게 가르쳐온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들이다. 김기덕은 <사마리아>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 주지 않았던가. 자기 딸같은 계집 아이를 돈주고 샀던 중년 남자가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식은 몸이 되며 흘러가는 피의 강을 만들었던 장면을.
정말 <풀>처럼 나약해 보이지만, 마침내 일어서고, 웃는 양성 평등의 시대를 바라며...
김수영,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