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고갯마루에서는...

힘든 고갯마루를 넘을 때 다리가 부러지는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넓은 대로에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리가 부러진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니체의 숲으로 가다》중에서 -

*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재인용된 글귀입니다. 방심과 타성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잘 되어 갈 때, 잘 끝났다 싶을 때 한번 더 살펴보고 더욱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방심과 타성의 불티 하나가 천년 공든 탑을 불태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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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무슨 일에나 최선의 노력을 쏟아 부으면
성공못할 일이 없다는 교훈을 내가 빈대에서 배웠다면
과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열아홉살 때 네번째 가출을 해
인천에서 막노동을 할 때였다.
그때 묶었던 노동자 합숙소는 밤이면
들끓는 빈대로 잠을 잘수 없을 지경이었다.
몇사람이 빈대를 피하는 방법을 연구해
밥상위로 올라가 잤는데 빈대는
밥상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와 사람을 물었다.

우리는 다시 머리를 짜내 밥상 네다리에
물을 담은 양재기를 하나씩 고여놓고 잤다.
그런데 편안한 잠은 하루인가 이틀만에 끝나고
빈대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혔다.
사다리를 차고 기어오르다가는 몽땅
양재기물에 빠져 죽었어야 하는 빈대들이었다.
그런 빈대들이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살아서
우리를 다시 뜯어먹나 불을 켜고 살펴보다가
우리는 다같이 아연해 질수 밖에 없었다.

밥상다리를 타고 올라가는게 불가능해진 빈대들이
벽을 타고 까맣게 천장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천장에서 사람 몸을 향해
툭 툭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 느꼈던 소름끼치는 놀라움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하물며 빈대도 목적을 위해 저토록 머리를 쓰고,
저토록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서 성공하지 않는가.
나는 빈대가 아닌 사람이다.
빈대에게서도 배울건 배우자."

인간도 무슨 일이든 절대 중도포기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 고 정주영 현대 회장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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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읽고 느끼는 감상은 두 부류일 것이다.

하나는 소설인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도중에 하차하는 경우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살이의 구도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는 반응.

그런데, 특이하게 나는 두 가지 인상의 중간에 놓이게 되었다.

전체적인 구도에서 볼 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주제는 우리 인생에 던지는 의미가 무겁다. 내가 마흔이 되어버린 지금, 그 기나긴 시간들은 어디로 흘러갔단 말인가. 그 많던 싱아들은 누가 먹어버리고, 이젠 씨앗만이 남아버렸단 말인가. 이런 누구나 하게 마련인 생각들을 복잡하지만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다 읽지 못했다. 여느 소설과 달리 이 소설은 하나의 일관된 줄거리의 맥락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순간 순간 그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그려내고 생각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의식의 흐름>을 좇다 보면, 어느 새 내 과거들이 중첩되고, 내일의 할 일이 떠오르고, 엉켜버린 관계들을 풀 생각에 골몰하게 되어 버리는 책인 것이다. 결국 이 책에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책을 읽다가 도중하차 하게 되어버렸지만, 이 책을 읽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가치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의도했던 것, 스완네 집 쪽으로 가는 길과 다른 길이 있지만, 그 길들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더라는 인생의 은유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그 유명한 시, ‘가지 못한 길’과는 다른 의미를 보여 준다. 로버트의 시에서는 인생의 결정 하나하나로 인해 달라지는 결과에 대한 탐구가 드러났다면, 마르셀의 이 소설에서는 인생의 궤적이 더 큰 규모로 읽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그래서 줄거리가 파악되는 것이 중요한 소설이 아니고, 마치 성경처럼 어디를 읽든 나름대로의 읽을 거리가 제공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나의 우주가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의 수효만큼 아주 다른 우주가 있다. 그것을 잃어 버리지 않으려는 작업으로써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마치 시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종탑의 모습처럼, 현실에 충실하려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나의 삶 역시 ‘그때 그때 달라요.’ 그런 거다. 그렇게 이해하고 만족하기로 했다. 이 책을 마저 다 읽는다는 것이 나의 독서 행위에 보탬을 계속 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에.


다양한 교양과 지식, 직관력과 풍부한 문체가 이 소설을 지탱하고 있지만, 처음 이 책이 프랑스에서 발간이 거부되었듯이, 인정받기엔 쉬운 책일 수 없다. 나도 누구에게도 이 책을 권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한권으로 읽는>이란 제목으로 역자는 편집을 시도했지만, 이 책은 모두 읽는 것 보다는, 전체적인 구도를 읽어 내거나, 부분부분 읽으면서 우리 삶의 부분성과 총체성을 생각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읽기일 수 있기 때문에, 성공적인 저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책은 결코 다이제스트(소화하기 쉬운 책)는 아니다. 열 한 권 분량을 칠백 페이지의 한 권으로 묶었다고는 해도, 객관적 질량은 가벼워졌을지 몰라도, 소설의 비중은 무거워지지도 가벼워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 내 속에 부처가 들어앉아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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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르치는 은자들
피터 프랜스 지음, 정진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일곱의 은자들 이야기다.

나를 만나기 위하여, 동굴에서 사막에서 아니면 조용한 움막에서 칩거하며, 금욕과 빈곤을 낙으로 삼아 절제와 소박한 청빈을 도구로 하여 절대 고독과 소명에 대한 명상을 행하며, 고행을 서슴지 않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

번역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생생하게 은자들의 의도들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책이다. 생생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침묵을 통한 은둔 생활은 절대로 <허위>를 참아주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은둔이 나를 찾는 작업임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토머스 머튼은 은둔 생활 중의 독서 행위는 다른 그 어느 곳에서 겪은 경험과도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침묵과 사방의 벽, 이 속에서 인간일나 존재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경계하는 상태가 아니라 완벽하게 마음을 풀어 놓고, 감수성을 열어 놓은 상태가 된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더없이 고요하다는 것은 온 몸의 살갗으로 진리를 듣고 존재의 모든 부분으로 진리를 흡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은둔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비우라는 부름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나의 독서도 일종의 은둔 과정으로서의 수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놀기, 자신을 비우기, 그리고 자신과 대면하기... 나와의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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