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지 않는 아이
펄 벅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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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떨쳐 버릴 수 없는 슬픔을 인내하는 법은 혼자서 배워 나갈 수밖에 없다. 또한 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억눌린 슬픔은 씁쓰름한 뿌리처럼 삶에 박혀서 사람을 병들고 우울하게 하는 열매를 맺어 다른 사람의 삶까지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내는 시작일 뿐이다. 슬픔을 받아들여야 하고, 슬픔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그에 따르는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슬픔에는 어떤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지혜로 모양을 바꿀 수 있고, 지혜는 기쁨을 가져다 줄 수는 없을지 몰라도 행복은 줄 수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달랠 수 있는 슬픔과 달래지지 않는 슬픔이다. 달랠 수 있는 슬픔은 살면서 마음 속에  묻고 있을 수 있는 슬픔이지만, 달랠 수 없는 슬픔은 삶을 바꾸어 놓으며 슬픔 그 자체가 삶이 되기도 한다. 사라지는 슬픔은 달랠 수 있지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은 영원히 달래지지 않는다.”


“나는 행복이 아이의 환경이 되게 해주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에 대한 기대, 긍지도 모두 버리고,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다만 흐릿한 아이의 정신에 어떤 빛이 반짝일 때 감사하기만 하겠다고 결심했다. 아이가 가장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에 아이의 집을 마련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당신의 아이가 당신이 바란 대로 건강하고 멀쩡하게 태어나지 못했더라도, 몸이나 정신이, 아니면 둘 다 부족하고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더라도, 이 아이는 그래도 당신의 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아이에게도 그것이 어떤 삶이든지 간에 삶의 권리가 있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서 부모가 그 행복을 찾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나 시선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이 아이는 당신 자신과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다. 아이를 위해, 아이와 함께 아이의 삶을 완성해 주는 데에서 틀림없이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당당히 들고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인간으로 대한 것 뿐이죠”

“행복이 있으면 다른 것은 저절로 따른다. - 아이의 정신과 마음에서 불행이 사라지지 않으면 아이에게 아무 것도 가르칠 수 없다. 행복하지 않은 아이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감정은 지능과는 무관하다.”


펄 벅 여사가 노벨상 수상자이며, ‘대지’를 지었다는 것은 간단한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캐롤이라는 딸이 정신지체라는 장애를 가진 아이였고, 그래서 그의 삶이 상당 부분 일그러졌으며,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은 전쟁으로 발생한 미국-아시아의 ‘기대하지 않은 아이’로 태어난 혼혈들의 <입양>에 할애되었다는 것은 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어머니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란 걸 느끼게 된다. 자식의 아픔은 부모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장애를 가진 아동을 기르면서 당면하게 되는 부모의 심리적, 사회적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장애 아동의 부모들이 빠지기 쉬운 수렁에 이런 객관적인 경험담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책은 그런 역할을 오랜 동안 해 왔다.


한국 전쟁 이후, 우리 나라의 많은 아이들이 혼혈로 태어났고 이 땅에서 버림받은 이야기는 숱하게 있었지만, 그들의 입양에 펄 벅이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다시금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슬픔을 문학과 사회에 대한 봉사로 ‘승화’시킨 펄 벅의 인간상이 불굴의 어머니, 사랑과 자비의 어머니의 모습을 잘 구현하고 있다.


아픈 사람들은 도처에 흔하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을 존중하고, 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인격적인 사회는 아직도 우리에겐 요원한 듯 하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장애 교육과 특수 교육이 일반 교육과 통합되는 과정에 녹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영문 제목에서 차일드를 대문자로 적은 어머니의 마음을 상상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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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2005-02-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부끄러워지는 글이네요... 그래두 전 모든 사람이 칭기즈칸은 될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칭기즈칸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래두 작은것마저도 너무 쉽게 불평하는것에 익숙해진 저에 대해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글샘 2005-02-0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하나 하나가 부처라고 하지 않아요? 칭기스칸이 싫다면 부처는 어때요? 나를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사라져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
이용한 지음, 심병우 외 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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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김준호・손심심 부부의 프로그램을 보다가 ‘그렇지, 그렇지...’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동감했던 적이 있다. ‘우리 문화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김준호의 구수한 입담에 얹힌 우리 문화 이야기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작년에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용인 한국민속촌에 간 적이 있다. 초가집 곳곳에 걸린 농기구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너무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고, ‘이런 곳을 왜 구경 왔지?’하는 아이들도 상당수였다. 그나마 나은 애들은 “저게 뭐예요?”하고 묻곤 했는데, 사실 문제점은 나도 모르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이 모든 것을 물어왔다는 데 있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댓돌이나 다듬이 방망이를 모르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화로, 아궁이, 부뚜막 같은 기본적인 단어들도 생소해하는 아이들에게서 역시 치즈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폭소 클럽>이란 개그 프로에, ‘서기 2222년 지구는 우리 비만인들이 지배하게 됩니다...’하는 ‘마른 인간들에 대한 엑스 파일’이란 코너가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점심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한창 성장기 아이들에게 점심시간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요?’ 같은, 현재에는 당연한 것들이, 미래에는 너무나도 낯선 것일 수 있다는 신선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마치 <강철 군화>에서 ‘인류 평화애 시대 이전, 평화롭지 못하던 예전에는 ‘도둑’이란 것이 있었다.’고 표현했듯이 말이다.


이 책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새쫓는 파대 치기, 종자 보존용 뒤웅박, 염전용 수차 무자위, 해녀들의 숨비 소리, 안방의 난방 겸 등불인 고콜, 씨앗불 보관처 화티 처럼 낯선 것들은 제쳐 놓고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짚신, 검정고무신, 메주, 부뚜막, 초가, 앵두, 가마솥 같은 것들도 아이들에게 사진을 보여 주고, 박물관에서나 만나게 될 날이 벌써 이렇게 가까이 도래한 것인가 싶으니 새삼 아쉬움과 서운함이 진하게 배어난다.


수업 시간에 도롱이, 코뚜레, 쟁기, 서낭당, 인두, 맷돌, 디딜방아 같은 용어들도 낯설어 하는 아이들에게서 농촌과 농업이란 신석기시대 이후로 전해지던 문화는 석탄과 석유로 인한 산업혁명에 떠밀려 글로벌 지구가 하나 되는 문화 시대로 이행되면서, 컴퓨터로 통일되고 패스트 푸드로 획일화된 문화랄 것도 없는 문화로 다양성을 잃고 있어 아쉽기 짝이 없었는데, 이 책을 만나고 나니 반가운 마음에 그림을 찾는 눈이 글을 이기고 먼저 달려 나간다.


자료 사진이 좀 작은 것이 흠이라면 흠일까, 나처럼 시골서 제법 살아보고, 친가와 외가가 시골이어서 초가집 등잔불 어둔 뒤에서 까무룩 잠든 기억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보겠지만, 교육용으로 쓸 수 있도록 좀 큰 도판으로 찍어내더라도, 학교 도서관에서는 귀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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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내가 책을 얼마나 읽어 왔는지를 헤아려 보았다. 오늘처럼 날씨가 꽁꽁 얼어붙은 날에는 동굴 속에서 옛날이나 추억할 수 있다는 걸 행복하게 생각하면서...

알라딘에 처음 글을 올린 것이 2000년 겨울이었다. 2001년은 전국단위 연구로 정말 바빴기 때문에 책을 읽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연말에 일본어 능력시험 책 읽은 거 빼면... 주로 보고서 읽고, 자료 읽느라 한 해를 보냈던 것 같다. 2002년에는 3학년 담임에 연구학교까지 겹쳐 더 바빴다. 대학원도 휴학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2003년, 2학년 담임을 맡으면서부터 책을 부지런히 읽자고 생각했다. 이 해가 내 독서의 시발점이 된 듯하다. 연구학교 마치고 여유있게 대학원도 다니면서, 부지런히 읽었던... 2004년에도 열심히 읽기는 했지만 역시 3학년 담임을 하고, 대학원 논문을 마무리하다 보니 한계가 있다. 올해는 200권을 읽으리라 작정하고 있지만, 지나 봐야 알 일이다.

역시 방학이 책 읽기 좋은 시간이다. 밤을 새워 읽기도 하고, 하루에 두세권 씩 일기도 한다. 주로 학교 도서관에서 댓권씩 빌려다 놓고 쉬운 책부터 읽기도 하고, 어려운 책은 옆에 두고 한 달을 두고 조금씩 읽기도 한다.(지금 한시 미학 산책을 한 달째 읽고 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조금씩 읽는 맛은 유별나다. 또 정신세계사의 마음닦기도 읽고 있는데, 이 두 권 모두 두껍지만, 하나는 한시에 대해서, 하나는 불교 이론에 대해서 너무 쉽고 재미있게 쓴 책들이다. 이 두 권을 다 읽고 나면 허전해서 어쩌나 걱정중이다.) 작년에는 남구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려다 보았다. 한 번에 세 권씩 빌려 주니 좀 아쉽지만, 나머지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이도 저도 없는데, 너무 좋은 책은 알라딘 보관함에 몇 달 넣어 두었다가 정말 사고 싶은 책만 산다. 알라딘 처음 이용할 땐, 책을 너무 마구잡이로 사들였는데, 나중에 보니 학교 도서관에도 있고 해서 아까웠던 책들이 많다. 알라딘 이용 6년차로 접어드니 이제 노하우가 생기는 듯...

2000년 : 리뷰 1권

2001년 : 리뷰 9권

2002년 : 리뷰 34권

2003년 : 리뷰 161권

2004년 : 리뷰 119권

2005년 : 리뷰 27권(1월), 목표 200권

이리하여 총 350권의 리뷰가 올라 있다.

리뷰 편수로 본다면 다소 발전한 것도 같지만, 간혹 내가 내 글을 읽어 봐도, 감정에 치우친 것도 있고, 아주 가끔은 괜찮은 구도로 분석한 글도 뵌다. 내 머릿속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 반성도 한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 나는 읽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음으로써 생각하고, 가끔은 행동도 바꾸고,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운명까지야 바꾸지 못하더라도, 책을 읽음으로써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지금 내가 읽는 이유는 하나는 자기 만족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책을 통해서 좋은 쪽으로 바뀐다는 착각 때문이다.

책 읽기 참 어렵다. 올해는 3학년 담임같은 거 안 하고 좀 쉬면서 혈압도 낮추고(선천적인 이유도 있지만, 혈압이 높아진 건 연구학교랑 3학년 담임한 탓이라 생각한다.) 도서관 담당이나 하면서 책이나 부지런히 읽고싶다는 대망을 가졌는데, 이뤄질는지는 살아봐야 알 일이다. 올해 목표를 세웠으니 새로운 각오로 독서의 바다에 푹 빠져들고 싶다. 이제 컴퓨터같은 기계류는 지긋지긋하다. 책은 정감이 있는 유정물같다. 나와 교감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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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2005-02-0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 2000년에두 있었나요? 왜 전 이렇게 늦게 알라딘을 알게 되었는지 안타깝네요.
3학년 담임하면 담배 끊었던 샘님들은 담배 다시 피시잖아요. 샘님들은 진짜 건강 조심하셔야 해요. 남의 애들땜에 건강 해치면 너무 억울하시잖아요.^^

글샘 2005-02-0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부터 있었는진 저도 모르지만, 2000년에 저는 처음 왔거든요. 3학년 담임은 정말 하고 싶지 않지요. 보람보다는 고생이 너무 많은... 그래서 요즘은 건강 해치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답니다.
 
내 마음의 팜파스
윌리엄 헨리 허드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그린비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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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헨리 허드슨(1841-1922).

아르헨티나 팜파스에서 소로우와 비슷한 시기에 초원의 기억을 가진 어린이가 있었다. 소로우처럼 의도적으로 자연으로 스며든 삶은 아니었고, 스페인어가 범람하던 그 넓은 팜파스에서 그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 남았다.

그의 글에서는 자연스럽게 새들, 말, 양, 독수리, 타조 들이 숱하게 스치고 지나가고, 깊은 각인을 남긴다. 어린 시절 시멘트 블록 안에 갇혀 자랐지만, 그나마 골목길은 우리 차지였던 초라한 우리의 어린 시절을 회고해 보면, 팜파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저자에게 이 책은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소설가이며 박물학자가 된 그의 삶에 유년기처럼 풍부한 글의 원천은 없었으리라.


"사람들이 이 세상과 인생이란 행복하게 살 수 있을만큼 그렇게 즐겁거나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고, 마지막까지 평정을 유지하면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고, 그들이 그렇게 부족하다고 보는 세상이나 그 속의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풀잎조차도 말이다. 내가 아는 것은 내 자신이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며,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흥미롭다는 것뿐이다. 자연을 벗삼으면서 경험했던 기쁨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행복한 추억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 행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내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왔고 다시 내 것이 된 그 재능 덕분에, 나는 런던에서 오랫동안 자연과 단절된 채 병들고 비참하게 친구도 없이 지내야 했던 그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도 항상 느낄 수 있었다.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이다."


이처럼 그가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그의 삶의 원천이 되어 주고 있다. Far away and long ago가 이 책의 제목인데, 머나먼 곳, 그 오래전... 뭐, 이 정도의 제목이랄 수 있지만, 파이프 담배를 흐붓이 흔들리우며 어스름진 창가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손녀랄까, 옆자리 앉은 소녀에게 초점없는 눈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노인이 되면 가까운 기억은 사라지고, 먼 기억만 또렷이 남는다는데, 그 그림 속의 아르마딜로와, 뿔이 얽혀 죽어간 사슴들, 가우쵸들의 이야기들이 눈이 시리게 푸르른 팜파스를 배경으로 다시 살아오른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열 번도 더 들었건만, 왠지 할아버지가 서운해 할 것 같아 듣고 있는 팜파스 이야기... 할아버지의 초점없는 눈이 떨리고... 과거는 현재가 된다.


삶의 원천을 잃어버린 아스팔트 위의 아이들을 기르는 우리는, 아이들을 팜파스의 초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은 영원한 우리의 고향임을 가르치고 잊지 않게 전달할 사명을 띠고 있지 않은가. 지율 스님의 몸짓이 가르치는 바로 그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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