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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쓸쓸한 당신
박완서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평점 :
며칠 전에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박완서의 장편 소설을 읽고, 생뚱맞다는 둥 디립다 깐 적이 있다. 그 소설을 정말 맘에 안 들었다. 그러면서, 박완서는 역시 단편 작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빌려 본 책이 그미의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읽고 난 느낌은 역시 그미는 훌륭한 단편 작가였다는 거다.
장편과 단편의 가장 큰 차이는, 장편 소설은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궤적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들면서 인생의 복잡 미묘함을 드러내는 만화 영화와도 같은 소설이고, 단편 소설은 단일 구성으로 인생의 단면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정물화 같은 그것이다.
박완서의 순간을 포착하는 눈은 정말 존경할 만 하다. 농촌이 해체되면서, 도시의 핵가족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 <노인>의 문제를 <노인>으로서 정말 시니컬하게 포착하고 있다.
환갑이 된 나이에도 소녀와 같은 감성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마른 꽃>, 그러나 그미는 결국 스스로 소녀가 아님을 인정한다. 허긴, 늙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일이다. 겉모습은 늙었대도, 속마음은 다섯 살 어리석은 아이 그대로임을...
딸네서 사는 친정 어머니가 아들네 가서 구박 받다가, 치매에 걸린 후 무당 집에서 살게 된다는 <환각의 나비>. 환상과 서사 사이에서 현대의 노인의 위치를 좌표로 보여준다.
중년 여자의 과거 이야기를 멜랑콜리하게 적은, <참을 수 없는 비밀>
병 수발에 지친 자식들의 이야기,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정말 무서운 비유 아닌가.
평생을 어리석은 교사로, 권위적인 교장으로, 멋대가리 없는 남편으로 고생에 고생을 하며 살지만, 남은 것이라곤 삐적 마른 다리에 숱하게 생긴 모기 물린 자리를 쓰다듬으며 느끼게 되는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이 작품집의 수작, <그 여자네 집> 지금은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좋은 작품, 낭만적인 젊은 시절의 꿈과 정신대 문제를 엮은 탁월한 작품. 그 중에도 만득이와 곱단이의 이야기는 박완서가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문화의 차이와 이민 동포들의 머릿속의 조국을 그린, <꽃잎 속의 가시>
갑자기 생긴 돈으로 수직상승을 꿈꾸는 <공놀이하는 여자>
소설가로 미국에 강연회를 꿈꾸다, J-1비자 발급 문제로 감추어졌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J-1비자>, 그리고 맨 끝의 컴퓨터로부터 소외된 이야기, 꽁트 <나의 웬수 덩어리>
착착 달라붙는 어휘들과, 적절한 묘사와 비유, 그리고 적절한 <여성들의 어투로 이루어진 대화>는 단편 소설의 멋, 인생의 날카로운 단면들을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는, 마치 다큐멘터리 작가의 흑백사진과도 같은 감동, 죄책감, 연대의식, 위기감을 공감하게 하는 소설집이라 칭찬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