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랑은 왜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아랑을 가지고 시비인가... 를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결국 김영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시비걸 대목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이란 것이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구성>하며, 그 <배경>을 창조해야했던 과거의 소설가들에 비해, 요즘의 소설가들... 과연 소설가들이라 이름붙일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들은 주제를 함축하기 위한 구성과 배경에는 관심이 적다. 유기적인 하나의 작품에서 '창조적 예술성 추구의 장인 정신'을 드러내기는커녕, 기존의 자료들 중 몇 가지의 정보들을 끌어모아서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고, 그 빈 틈들에 자기의 독창성이라 착각하는 기교를 몇 가지 양념처럼 뿌린다. 마치 기존의 음식들을 몇 가지 짬뽕해 놓고 <퓨전>이란 새로운 듯한 이름을 붙이는 요리들이 유행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퓨전>은 유행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본질>은 아닌 것이다. 퓨전이 본질인 척 하는 시대가 포스트 모던의 시대지만, 결국 노래방에서 10년 뒤까지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요즘 유행하는 가수들의 랩은 아닐 것이다.
아랑의 전설... 왜 아랑인가. 몇 가지 설이 있다. 그런데 구전 문학이 다 그렇듯, 그 설들에는 무수한 빈틈이 있다. 김영하는 그 빈틈을 노려서 소설 한 권을 구성한 것이다. 그나마 난 이 책이 장편이기 때문에 읽었던 것 같다. 그의 단편 <호출>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더 시간이 나면 읽어볼까 한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차세대 작가'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인데, 글쎄다. 그 판단은 <호출>과 <검은 꽃>을 읽고 나서 내릴까 한다. <엘리베이터...>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 그리고 <아랑은 왜>까지 읽은 내 생각으로, 아직은 차세대 작가라고할 만한 어떤 것도 그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다.
조용필의 노래가 십 년을 풍미했고, 아직도 그의 콘서트는 표를 구하기 힘들다. 그 시대의 소설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다가, 서태지가 음악에 대한 편견을 박살낸 후, 알아듣지도 못하는, 심하게는 우리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이 씨부렁거리는 영어 찌꺼기들을 노래라고 하는 곳까지 이르른 지금, 나는 그것들을 <이 시대의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기존 음악의 <해체>로서만 기능할 뿐, 새로운 무엇이 되진 못하는 것이다. 조용필 시대의 음악은 라디오의 음악이고 TV의 음악이었다. 기껏해야 삼천원짜리 테이프의 음악이었던 시대에는 음악이 상업적으로 변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서태지 이후로, 90년대 이후로 나라가 먹고살만 해지면서 청소년들이 음악을 유통하는 계층이 되고, 그러다 보니 학교 제도 비판, 영어 랩의 유포, 꽃미남(녀) 가수들의 유행, 생각있는 척하는 노래들의 상업화 등의 추세를 보여 준다. 그것 역시 <이 시대의 음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상업성을 위해 이합집산이 반복될 뿐, 음악은 해체된 지 오래 아닌가?
핑클이 부서지고 이효리는 더이상 음악을 하지 않는다(아, 간혹 10분간 같은 노래를 하지만, 그걸 음악이라 보긴 어려운 수준이다). H.O.T가 부서지고 문희준은 '롹'을 하면서 욕을 먹고 있다. <해체>에 일조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소설도 그런 시대를 맞은 것 같다. 포스트 모던의 시대. 방향성 상실의 시대. 그 이전에는 이렇게 살자, 저렇게 하는 것이 멋지지 않은가... 등의 주제를, 모던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던 문학이, 특히 소설이, 이 시대에 와선, 한 때의 기호에 맞기만을 구하고 있다.
이규보의 <論詩(논시)> 중 이런 구절이 있다.
<한 때의 기호에 맞기만을 구하고 있다. 인하여 화려함만 일삼는구나. 이로써 여러 사람 현혹하여서, 뜻의 궁핍한 바를 가리려 한다. 이런 버릇이 이미 습성이 되어, 문학의 정신은 땅에 떨어졌도다.>
어찌 이 시대의 한계리오, 이미 천년 전에도 이런 일들은, 떠오르고 가라 앉는 지표들은 선각자들에게 포착되었나니..... 새 시대의 문학은 어떤 것일까... 그의 경쾌함, 자유분방한 상상력 만인 소설에 몹시 불만인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