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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동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 우리 구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은 건물은 번듯하니 훌륭하다. 그런데, 실제로 몇 번 가 본 나로서는 아쉬움이 많다. 우선 책이 다양하지 못하고, 너무 낡았다.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은 도서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 지 몰라도, 책 없는 도서관을 누가 올까?
소설도 막상 내가 찾는 소설은 별로 없고, 허접한 것들 - 보수동 헌 책방 가면 죽 꽂혀있을 법 한 -로 가득하다. 책 읽는 사람들도 대부분 청년 실업자들이 공부하러 온 듯 하다. 잠시 머리 식히러 와서 책을 보고 있는 듯. 뭔가 아쉬운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십 년 전에 읽었던 책이지만, 지난 번에 '팔레스타인'을 읽으면서 다시 읽고 싶었던 책이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나와 눈이 맞은 '쥐'.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객관적으로 적나라하게 잘 그린 책이다.
유태인, 나치, 아우슈비츠... 우월주의, 소각로, 600만명의 살해... 이 모든 것들을 쥐(유태인), 고양이(독일인), 돼지(폴란드인), 개(미국인), 곰(소련인), 사슴(핀란드인) 등으로 의인화시킨 훌륭한 작품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두 개의 플롯을 마치 기차 철길처럼 나란히 놓는다. 그 철길들은 서로 그만큼의 거리를 두기 때문에 실용적인 것처럼, 두 방향의 이야기가 나선형으로 얽혀 DNA 염기처럼 자연스럽게 조직되어 있다.
우선 아트 슈피겔만과 아버지의 대화가 그 하나이고, 아버지의 수용소 생활이 다른 하나다. 아트의 아버지는 정리하는 습벽이 지나치고, 아끼는 것에 병적이다. 옆에 있는 사람을 들들 볶아서 아주 같이 살기는 지긋지긋한 인물이다. 새 어머니와 살고 있지만, 새 어머니는 매일 을근들근 하며 다투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피곤한 성격은 대화가 전개되면서, 진한 감동으로 이해의 선물을 전한다. 수용소 생활에서 온 이런 습벽들은 지긋지긋하다기 보다, 오히려 눈물겨운 습관들이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매일매일을 견뎌온 아버지, 나 하나라도 우선은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헤쳐나온 동토의 수용소. 그리고 이 모든 어려움을 같이 이겨낸 아내의 자살로 인한 충격, 심장질환과 당뇨. 이만하면 어떤 습관이라해도 이해해 줄 만 하지 않던가.
인간이 잔인해 지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를 쥐들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서 정말 미묘한 감정까지도 그려내는 작가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볼수록 어쩜 이렇게 쥐를 가지고도 표정, 동작, 가면을 통한 상황 표현이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이러기 위해서 얼마나 숱한 불면의 밤을 보냈을지... 자기 이야기로는 한계가 뻔하므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자연스러움이란...
만화란 여유있는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오락이란 편견을 일거에 격퇴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 도서관에 이 책이 없었던 것 같다. 학교에도 꼭 사 두고, 인권이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전쟁은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가. 상대주의적 관점은 왜 필요한가를 깨닫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