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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ㅣ 이산의 책 1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평점 :
지금도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중화, 세상의 중심으로 느낀단다. 정말 오랜동안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앞으로 이십 년 뒤면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이 나올 정도로 아직도 중국은 힘있는 나라다.
우리가 무식하게, 아직도 사대주의에 휩싸인 시각으로,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문화는 대중화의 혈액 속에 녹아 버렸다고 발언한 것을 숱하게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만주족이 세웠던 청나라의 황제들의 이야기를 곰곰이 읽다보면, 소중화에 물든 무식하기 짝이없는 작자들이 지껄인 말들이 마치 근거있는 학설처럼 회자되었단 걸 쉽게 알 수 있다.
청나라의 문화를 꽃피운 기틀을 만든 강희제, 건강과 장수를 바탕으로 청나라의 기둥을 탄탄히 한 황제의 글을 찬찬히 읽어 가노라면, 그가 남긴 이름의 뒤안에는 숱한 회한과 허무가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훌륭한 정치란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하는 것이다. 정치를 잘한다는 것은 백성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할 정도로 의욕적이었던 그의 젊은 시절은 개혁적 정치가를 가진 청나라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서양 선교사와 교황의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주장, 곧, 중국에 선교사를 관할할 파견관을 보내겠다는 협박에,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대상이 저마다 다르듯이 나라마다 발음과 문자도 다르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내세우면서, "자기들만 남아 있기를 원하는 존재는 하늘의 하느님이 아니라 악마이다. 악마는 인간을 악에 빠뜨리는 일밖에 하지 않는다고 서양인한테 들었다."고 함으로써, 균형잡히고 넓은 시각의 황제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황태자 인렁에 대한 사랑과 애증, 파탄지경은 그의 황제 생활의 가장 큰 회한이었고, 그래서일까, 그의 임종시 발표된 상유, 유조는 그림자로서의 황제, 회의하고 나약해진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를 증오했던 조선의 사가들의 사관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명을 망하게 한 폭동을 진정시키고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진 청의 역사는 만주족의 준비된 통치력으로 일관된 국가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의 시각이 생기듯이, 좁은 시각으로 역사를 본다면, 역사에서 배울 점이 없거나 잘못된 점을 배우기 십상일 것이다. 중화의 황제의 좌대 뒤에 걸린, 정대광명의 의미를 새기며, 이 책에서 그려진 황제의 모습도 서양인 조나선 스펜스(U.K.)의 하나의 시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료가 그대로 실린 부분도 많아 61년을 통치하고, 주접제도의 확립을 통한 황권 강화, 위엄과 권위 그리고 겸허함을 갖춘 노황제의 모습을 접하는 것은 새로운 성찬이라 아니할 수 없다.